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장백산-1 2015. 5. 6. 23:32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준비는 필요 없다. 그 어떤 준비과정도 진리와 멀어지게 할 뿐이고, 수행과 멀어지게

할 뿐이다. 모든 일은 낱낱이 '바로 그것'이 되어야지 그것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선 안 된다.

 

참선·염불·독경·진언·절 등의 수행을 通해 깨달음을 向해 나아가려고 하지 말라. 參禪하는 바로 그 瞬間,

初發心이 이미 本來마음의 性稟을 드러내는 瞬間이고, 깨달음의 瞬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선수행을

하기 위해 선방에 가는 순간도 그것이 절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로 가는 그 걸음 걸음의 瞬間 또한 그대로 本來 性稟을 드러내는 瞬間이고, 깨달음을 위한 過程이 아닌

이미 바로 깨달아 있는  그 瞬間임을 알아야 한다.

 

주말에 있을 참선모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무엇하러 그 긴 시간을 기다리느라 소모해야 하는가.

기다림을 버렸을 때 모든 瞬間이 온전한 參禪의 瞬間이 된다. 독경 수행을 하기 위해 경전을 꺼내어 들고,

펴고, 준비하는 그 모든 過程이 독경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선 안 된다. 수행을 위한 준비는 필요 없다.

바로 그것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行爲가 準備를 위한 過程이 되었을 때, 그 때부터 괴로움은 始作된다. 절에 가서 1시간 수행하겠다

生覺했을 때, 시간이 늦으면 괴롭고, 절에 가는 동안 차가 막히면 답답하고, 어쩌다가 절에 못 가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해 괴롭게 마련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每 瞬間瞬間 우리의 삶에서 準備 過程을 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準備過程이 그대로

完成의 瞬間이요 目的 達成의 瞬間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왜? 未來의 어느 瞬間을 위해 지금 여기 이

瞬間이라는 所重한 瞬間을 虛費해야 하는가. 왜 오지도 않는 未來의 어떤 目的을 達成하기 위해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이라는 참나의 瞬間을 準備 過程으로 전락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오직 지금 여기

이 瞬間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 여기 여기 이 瞬間만이 完成된 瞬間이요 가장 重要한 瞬間인 것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모든 수행의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지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아니다. 사람들은

수행을 通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중생'이 수행이라는 '마음' 닦는 過程을 通해 깨달은

 '부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수해을 통해 깨닫는 다는 이 말은 方便일

뿐이다. 衆生이나 마음(心)이나 부처(佛)가 그대로 하나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 부처 중생,

이 세 가지는 아무런 差異가 없다'고 했다.

 

오직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대로 그대로 깨달음의 瞬間이다. 그랬을 때 우리 삶의 그 어떤 瞬間도

우리를 괴롭게 만들지 못한다. 모든 瞬間이 다 完全한 瞬間이고, 그렇게 바라던 깨달음의 瞬間이라면

온전한 滿足만이 있다.

 

절에 가는 순간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그대로 경행하는

수행이 된다. 그랬을 때 절에 가는 과정도 참선이며, 절에 가서 앉아 있는 것도 참선이다.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경전을 꺼내어들고 방석을 펴는 순간, 매 순간순간을 놓치지 말고 깨어있으면 수행과 생활이 따로

없고, 과정과 목적이 따로 나뉘지 않는다.

 

내가 살아있는는 매 순간순간이 그대로 目的이 되도록 하라. 내가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이 그대로 수행이

되도록,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이 되도록 하라.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精神이 깨어있을 수 있다면

모든 순간순간이 낱낱이 絶對며, 모든 行爲가 그대로 參禪이다. 깨달음을 위한 準備 過程은 없다. 오직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현존, '그것'만이 있을 뿐이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