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온으로 행복만들기 - 五蘊(11) 불교기본 교리강좌
(2) 오온으로 행복 만들기
오온으로 행복한 삶을 창조하다
五蘊은 곧 ‘나’이며 世上이다. 이 世上은 곧 五蘊으로 構成되어 있다. 이 世上은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어 텅~비어 空하지만 어쨌든 五蘊이라는 텅~비어 空한 것이 假合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 世上, 宇宙 森羅萬象이다. 그러면 이 신기루 같고 텅~비어 空한 非實體的인 影畵 같은 世上을 어떻게 하면 의미있게 잘 살 수 있을까? 佛敎의 가르침은 이 世上은 텅~비어 空하고 幻影같다고 하면서 固定된 實體가 없다는 것만 强調해 오다 보니, 佛敎를 工夫하는 사람은 현실감각이 없다거나, 당장 눈앞의 막막한 現實的 고민을 타파하는 직접적인 방법을 설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우리가 苦痛받고 있지만 그 苦通이란 것도 다 幻想이니 그 幻想 속에서 괴로워할 것이 무엇인가? 물론 맞다. 그러나 중생들은 답답하다. 이 虛妄하고 實體도 없는 괴로움 또한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實在感 있게 다가오는 苦痛이며,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 가짜 苦痛을 없애 주기 위해 法을 說하신 것이 아닌가.
이 世上이 五蘊이라고 이름 붙인 다섯 가지 要素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五蘊을 五聚蘊이라 한다. 그러면 거꾸로 方便을 써서 五聚蘊을 어떻게 다루고 使用하면 이 世上과 나라는 存在를 아름답게 가꾸고 바꾸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答이 나온다. 卽, 虛妄한 꿈과 같은 世上에서 어떻게 하면 그 꿈을 아름답게 꾸고, 신기루 같은 假想의 現實이지만 그 現象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겠는가에 대한 解答을 求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불교가 無常, 無我, 空의 가르침이니 꿈 같은 現實은 대충대충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들이 태어난 理由는 삶을 아름답고도 最善으로써, 每 瞬間瞬間 온전한 精神集中으로써 살아냄으로써 비록 幻影이지만 아름답게 허깨비 같은 신기루라는 現實을 펼쳐내고, 그 假想 現實을 通해 깨달음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다. 佛敎를 虛無主義的인 것으로만 알고 世上과 따로 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어리석음이다. 돈도 벌고, 성공도 하고, 할 것은 다 하되 그것이 虛妄한 것임을 分明하게 認識해서 돈 성공 일에 거기에 執着하지 말라는 것이지, 現實이 다 虛妄한 것이니 成功도 名譽도 돈도 다 버리고 떠나버리라고 하는 것만을 固執하는 宗敎는 아닌 것이다.
여기 五蘊, 五聚蘊이 들려주는 어떻게 삶, 인생을, 현실을 아름답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가르침이 있다. 五聚蘊의 하나 하나 支分은 ‘나’의 精神的, 身體的인 要素들이다. 卽 내가 平生동안 이 다섯 가지 要素를 가지고 꿈 같은 現實世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卽 하나 하나의 지분들에 의해서 無意識的으로 이끌려 가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깨어있는 精神으로 몸(色), 느낌(受), 생각(想), 意圖(行), 마음(識)을 分明하게 觀察하고 바라보면서 삶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스스로 選擇할 수 있는 것이다.
經典에서는 業과 報라고 하여 業, 즉 三業, 생각 말 행동으로 짓는 대로 果報를 받는다고 말한다. 三業의 결과인 果報란 바로 우리의 생생한 現實이다. 지금 우리가 今生에서 받고 있는 모든 條件들, 果報, 現實은 바로 내 생각 말 행동으로 스스로 지은 業에 대한 結果 卽, 果報인 것이다. 卽 現實로 創造되고 있는 것이 바로 身口意 三業에 의한 果報다. 그러면 이 果報는 누가 만들었는가? 바로 생각 말 행동인 業이다. 業이 果報를 가져온다. 즉 부처님께서는 業, 卽 身口意 세 가지 行爲(三業)이 삶, 人生, 果報, 現實, 現上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즉 나의 삶, 내 現實의 條件을 創造해 내는 것은 바로 身口意 三業인 것이다.
三業 卽, 肉身으로 한 行動, 입으로 내뱉은 말들, 그리고 생각마음으로 지은 意圖的 行爲를 뜻한다. 이 三業이 바로 삶을 創造하는 道具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重要한 것이 생각마음 意業이다. 五蘊인 ‘나’, 그 나는 세 가지 삶의 창조 도구, 생각마음 말 행동을 통해 삶, 인생, 현실을 만들어낸다. 五蘊이라는 것이 말과 행동과 생각마음이라는 세 가지 창조도구를 사용해서 삶을 창조해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身業 즉 몸으로 짓는 行動은 五蘊 가운데 色蘊이 짓는 것이며, 意業 즉 생각마음의 행위는 五蘊 중에 受想行識이 綜合的으로 行爲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心-意-識은 거의 同意語처럼 쓰이며, 通常 마음으로 통칭하고 있음을 볼 때, 受想行이라는 마음부수 즉 心所法 즉, 受想行의 作用을 바탕으로 識蘊이 綜合的으로 對相을 識別하고 分別하는데, 이것이 三業 가운데 意業의 作用을 일으키는 것이다. 卽 受想行 중에도 特히 行蘊의 作用을 바탕으로 識別하여 意業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身口意 三業을 身口意 三行이라고 한다. 身行, 口行, 意行이라는 말은 受想行識 이라는 作用 중에 主된 業을 짓는 作用은 주로 行蘊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最終的으로 對相을 識別하여 아는 마음인 識과 意를 모두 心과 同意語로 보는 것을 보았을 때, 意는 곧 受想行識과 連結지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意業 卽, 마음으로 짓는 業을 좀더 具體的으로 분류해 보면 受想行이라는 마음의 作用의 도움을 통해 意業을 짓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對相을 느끼고 認識하고 意圖하는 등 다양한 心理作用을 通해 最終的으로 對相을 識別하고 알아냄으로써 그 結果를 가지고 意業을 짓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受想行識은 同時的으로 發生하여 意業을 짓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교리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러면 受想行識의 作用을 잘 사용한다면, 卽 意業을 잘 사용한다면, 마음이 어떻게 現實, 삶, 인생을 만들어내고, 삶을 아름답게 창조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마음이라는 受想行識 의 要素가 어떻게 現實, 삶, 인생, 현상, 세상을 만들어내는지, 어떻게 受想行識이라는 마음을 다루어야 願하는 삶, 現實, 人生, 世上, 現象, 果報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受蘊, ‘느낌’으로 행복한 삶을 만들어 낸다
受想行識의 첫 번째는 수온(受蘊)이다. 다시 말해 삶을 창조하는 마음의 첫 번째 作用은 受蘊이다. 느낌 感情이라는 것이 마음의 첫 번째 構成要素로써, 感情으로써 느끼는 것이 나의 삶을 창조해낸다. 무엇을 ‘느끼느냐’ 하는 것은 곧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 와 같은 말이다. 지금 여기 每 瞬間 現在에 무엇을 느끼고 사느냐 하는 마음이 바로 어떤 未來를 창조할 것이냐를 결정짓는다.
예를 들면 최근 일주일간을 돌이켜 보라. 내 마음 속에서 어떤 느낌이 나의 삶에 가장 크게 작용했는가? 행복했는지, 기뻤는지, 즐거웠는지, 불안했는지, 답답했는지, 괴로웠는지를 살펴보라. 내가 어떤 감정을 많이 느꼈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삶에 어떤 감정을 더욱 더 많이 느끼게 될 것인지가 결정된다. 무언가를 느끼고 있음과 同時에 그 느낌 감정은 삶, 인생, 현실, 세상, 현상을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다. “狀況이 좋으면 좋은 걸 느끼고, 狀況이 나빠지면 나쁜 感貞을 느끼는 것이지 그 느낌 감정을 우리 의식 마음이 어찌할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과연 그럴까? 좋은 狀況이라고 좋은 걸 느끼고, 나쁜 狀況이라고 나쁜 걸 느낄까? 그렇지 않다. 보통 우리 마음 의식은 外部的인 좋거나 나쁜 狀況이 생기면 그에 따라 나의 느낌은 수동적으로 결정된다고 배웠고 지금껏 그렇게 알아왔다. 즉 우리 마음 의식이 느낌 감정을 決定짓는 것이 아니라, 外部的인 狀況이 나의 느낌을 결정짓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眞實은 그렇지 않다. 同一한 外的 狀況에서 무엇을 느낄 것이냐는 전적으로 내 마음 의식에게 달려 있다. 내 의식 마음 스스로 나의 느낌과 감정을 選擇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살펴 보았으니 여기서는 쉬운 비유를 한 번 들어보자. 밥과 김치를 먹고 있다. 그것은 나쁜 느낌인가 좋은 느낌인가? 사실 김치를 반찬으로 밥을 먹고 있다는 그 상황 속에는 좋거나 나쁜 그 무엇도 없다. 그저 中立적인 狀況일 뿐이다. 그러나 狀況 따라 그것은 괴로운 느낌을 가져오기도 하고, 즐거운 느낌을 가져오기도 한다. 한 달씩 굶은 아프리카 아이들은 김치와 밥만을 가지고도 꿀맛 처럼 느낄 수 있는 反面, 갑자기 사업 부도로 몰락한 가정에서는 그 狀況을 비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어떤 狀況 自體가 그것에 대한 느낌을 左右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特定한 狀況이 거기에 대한 느낌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느낄 것이냐에 대한 결정권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내 인생의 감정에 대한 統制權과 決定權은 전적으로 나 自身의 마음 의식에게 달려 있다.
지난해 설악산에 단풍을 구경하러 갔었다. 어찌나 차가 많이 막히는지 입구에서부터 도통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가 막히는 것은 좀 불편했지만, 단풍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꽉 막힌 도로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만 했다. 그것보다는 놀라운 설악의 단풍을 감상하는 것이 더없는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꽉 막힌 도로와 아름다운 단풍처럼 우리 주변에는 항상 나쁜 일과 좋은 일이 同時에 있다. 거기에서 무엇을 選擇하고 어느 쪽에 마음을 기울여 어떤 感情을 選擇할 것인지는 언제나 나의 選擇일 뿐이다.
뒷 산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고 가을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더라도 그것에는 關心도 없이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일과 지지고 볶으면서 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바쁜 일과 중에서도 잠깐 잠깐이나마 틈나는 대로 단풍을 바라보면서 감탄을 할 줄 아는 사람도 있다.
따뜻한 아침 햇살이 내리쬘 때 두 팔을 벌리고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창틈 사이로 비스듬히 비춰오는 햇살을 받아 끓여 놓은 차 한 잔에서 그윽한 향이 피어오를 때 그 차향의 연주를 듣는 것은 참으로 축복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행복한 감정, 작지만 따뜻하고도 깊은 고요와 평화를 느끼는 것이 바로 내 삶을 창조해내는 원동력이라는 걸 우리는 모르고 살아왔다. 내 삶을 創造할 수 있는 可能性이 내 앞에 이렇게 펼쳐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쌓인 업무에만 일상적으로 집중을 한다.
물론 일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을 하면서 즐겁고 기쁘며 沒入되는 바로 그 느낌이야말로 우리의 일에 대한 未來를 創造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며 즐겁다면 머지않아 그 일로 인해 당신은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내며, 온갖 스트레스 속에서 일하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일 속에서 느끼던 것과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계속 생 겨날 것이고,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들을 직장상사는 계속해서 던져 줄 것이다.
느낀대로 더 많이 느낄 기회가 부여된다
일을 할 때 스트레스 받으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틈틈이 잠시 라도 호흡을 가다듬고,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變化無常한 아름다운 自然을 감탄할 때 평화로움과 고요함과 같은 근원적인 행복이 넘치게 된다. 바로 그렇게 행복과 평화, 고요와 같은 감정을 더 많이 느낄 때 우리의 인생은 더욱 더 많은 행복과 평화, 더 많은 행복을 느낄만한 상황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행복을 얼마나 많이 느끼고 사느냐에 따라 얼마나 더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지가 結定된다는 점이다. 내가 느끼는 것을 더욱더 느낄 수 있도록 宇宙法界가 狀況을 조성해 주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감동받기를 좋아하면 감동스러운 상황이 인생에 자꾸 등장하게 된다. 자연을 보고 더 많이 감탄하고 감동하게 된다면 어쩌면 직장에서 특별한 인연이 생겨 생각지 못했던 휴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직접 자연 속으로 뛰어들어 더 많이 자연을 느끼고 감동하고 오라는 宇宙法界의 피드백인 것이다.
언제나 나에게서 나간 것은 宇宙法界를 波動쳐서 스친 뒤에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나쁜 감정을 내보냈다면 그 나쁜 감정은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 自體의 生命力을 가지고 宇宙法界를 떠돌다가 因緣이 맞아지는 때가 되면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不幸함을 느끼는 사람은 점점 더 많은 不幸할 일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행복한 감정, 평화로운 느낌,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느낌과 감정이 고스란히 나 自身에게로 되돌아 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감정과 느낌은 그 자체로써 본질적 으로 空하지만 하나의 生命力을 지닌 에너지이기 때문에, 나에게서 나간대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自然을 보고 감동받아 보기 전에는 아름다운 자연이 地天에 널려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大自然이 주는 평화와 경이로움을 깨닫게 된 뒤에는 무한한 자연의 신비로운 모습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발밑에 있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여러분이 잡초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풀들이 너도나도 진기한 꽃들을 피워낸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이 감동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우리가 직접 느끼고 감동받기 전에는 아무리 무한한 신비의 자연이 있었어도 우리에게 그것은 없는 것과 같다. 내가 비로소 그것에 감동하고 감탄하며 찬탄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로 와서 創造의 靈感으로 바뀐다. 내가 감동하고 감탄하며 찬탄하는 것은 그대로 내 人生에 創造되게 된다. 더 많이 감탄할수록 더 많이 눈에 뜨이고, 더 많이 찬탄할수록 더 빛나는 순간이 내 인생에 드러난다.
나 또한 스스로 자연의 아름다움이 주는 귀한 인연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자연과 접촉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다가, 언젠가부터 大自然의 아름다움과 풍요, 조화와 경이에 눈을 뜨고 난 뒤부터는 자연스럽게 宇宙法界 로부터 대자연을 경탄할 기회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느낀다. 설악으로 지리산으로, 울릉도와 제주도로, 또 안나푸르나와 쿰부 설산 히말라야, 라다크와 인도, 미얀마, 중국의 황산과 계림으로 철마다 갈 수 있는 기회들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 것이다. 더 많이 自然에 감탄할 때 宇宙法界는 더 많이 自然과 接觸할 機會와 狀況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本來 完全하며 풍요로움을 깨닫기
많은 사람들이 富者가 되길 원하지만 왜 부자가 될 수 없는지 아는가? 무엇을 느끼고 사느냐가 우리 삶을 만들어내는데, 스스로 무엇을 느끼는 지에는 關心이 없고 富者가 되는 것에만 關心이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느낄 법한 풍요로움의 느낌과 감각을 먼저 느껴야 부자가 될 것인데, 現實 삶에서 느끼는 것은 가난과 결핍과 부족을 느끼면서 마음에서만 富者를 원한다면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자의 느낌, 풍요로움의 느낌을 느낄 수 있을까? 完了形, 完成形으로 느껴야 한다. 느끼려면 이미 完成이 되어 있어야 느껴지지 않는가? 보통 행복해야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이미 원하는 것을 이룬 것처럼 느끼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스님. 이루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룬 것처럼 거짓말로 느껴요? 그건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 거짓말로 느끼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分明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感情과 現實을 속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속아왔던 것을 되돌려 놓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錯覺 속에 빠져 살았다.
지금까지 나는 不幸하다고 錯覺했고, 결핍되어 있다고 錯覺했으며, 언제나 부족하다고 錯覺했던 것이다. 宇宙의 根源은 完全性에 있다. 그래서 宇宙法界는 언제나 完成되어 있고, 無限하게 豊饒롭다. 무엇하나 不足한 것 없이 가득 차 있다. 풍요로움, 사랑, 지혜 모든 것이 完全히 꽉 차있는 것이 바로 이 宇宙法界다.
내가 그동안 작고 여린 행복을 느끼고 감동하는 감각을 喪失하고, 바깥으로 더 크고 많고 대단한 것들만을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그런 삶만을 살아오다 보니 괴롭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밖으로 구하고 구걸하는 삶은 언제나 가난과 결핍된 삶을 창조하게 마련이다. 宇宙法界의 理致가 점점 더 많은 것을 얻고자 구할수록, 부자가 되기를 원할수록 더욱 더 우리는 가난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내가 不足하다고 가난하다고 느낄 때는 比較에 依해서다. 남보다, 부자들 보다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가난과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과 比較해 본다면 어떤가? 무한히 풍요롭다. 지금까지 우리는 比較 劣等에 시달리며 남보다 가난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比較라는 잣대를 놓아보라. 그 자리에는 부자도 없고, 가난함도 없다. 그저 中立的인 하나의 現象만 있을 뿐이다. 그저 中立的인 狀況에 대해 그동안 우리가 比較라는 差別心을 만들어서 내 스스로 가난하고 부자라고 하며 分別해 왔던 것일 뿐이다. 바로 그 分別만 놓아버린다면 우리는 언제나 고요하다.
부자가 좋다고 하겠지만, 사실 부자보다 더 根源的인 幸福은 고요한 中立에 있다. 中道의 그 자리에 있으면 모든 比較가 사라지기 때문에 괴로움도 행복도 없이 그저 如如하고 平和롭고 豊饒로우며 고요한 것이다. 이처럼 내가 原來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그동안 어리석었기 때문에, 내가 가슴을 활짝 열지 못했기 때문에 宇宙 本然의 完全性과 豊饒性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認知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그 完全性과 豊饒性을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모든 것은 이미 내 것이다.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믿고 그것을 느껴보라. 이미 내가 願하는 根源的인 것을 다 이루었다고 生覺하고 完了形으로 느껴 보라. 이 말은 肯定 心理學이나, 시크릿에서 말하는 것처럼 돈이 없지만 돈이 많다고 느끼라는 말이 아니다. 부자가 아니지만 부자가 된 것처럼 가짜로 느끼라는 말도 아니다. 根源的인 次元에서 우리의 內面은 本來부터 空하며, 텅~비어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不足한 적이 없고, 언제나 꽉 차 充滿해 있다는 事實을 아는 바탕 위에서, 내가 누리고 느낄 수 있는 작고 여린, 당장에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것부터 感動하고 感謝하면서 살아 나아가라는 의미다.
돈이 1만원 밖에 없다면 1만원이 주는 느낌을 ‘없다’ ‘가난하다’는 결핍으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1만원이 있기 때문에 感謝하고, 그것으로 무언가를 사 먹고 쓸 수 있기 때문에 感謝하며, 感動할 수 있는 그것으로 느낄 수 있는 점에 초점을 맞춰 보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本來 이루어진 것을, 本來 이루어진 感覺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꼭 큰 것이 생겨야지만 豊饒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現在 주어진 작은 것 속에서도 充分히 豊饒롭다는 事實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마음가짐이 옮겨 가게 됐을 때 이 宇宙法界는 나를 도와주는 作業을 始作한다. 더 많이 바라기보다, 더 많이 느끼고 누리고 感動하며 讚歎하고 感謝할 때 이 宇宙法界는 내가 느끼고 누리고 感動하고 感謝하던 것들을 더욱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내 삶에 보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음의 한 部分인 受蘊, 즉 느낌과 感情은 우리의 삶을 創造하는 原動力이 된다. 느끼는 대로 느끼는 것이 創造되는 것이다. 本來 감정과 느낌이 空하다는 事實을 自覺함으로써, 먼저 感情的으로 느낄 수 있다는 事實을 自覺할 수 있다. 그렇게 먼저 느끼고 감동함으로써 더 많은 現實, 삶, 인생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受蘊이 우리에게 주는 一切唯心造의 가르침이다.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未來는 바뀐다. 가만히 내 過去를 짚어보면 내 삶이 왜 안 좋아졌는지, 좋아졌는지가 나온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삶이 괴로웠던 사람, 부정적이었던 사람은 日常 속에서 먼저 幸福을 찾고 느껴야 한다. 내가 먼저 幸福을 느껴야 幸福한 삶이 現實로 펼쳐진다.
想蘊, 생각이라는 창조에너지
앞서 受蘊에서는 매 순간 현재에 어떤 느낌으로 사느냐에 따라 느끼는 대로 자신의 삶이 창조된다고 하였다. 想蘊에 의하면 자신의 평소 생각, 사고, 판단, 이성, 개념 등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창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소에 무엇을 주로 生覺하고 사는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判斷하고 해석하며 사는지, 思考와 理性을 어느 쪽으로 기울이며 사는지에 따라 生覺하고 思惟하는 대로 삶이 創造된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긍정적 인 생각을 많이 하고 살면 긍정적인 삶을 창조하게 되며,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고 살면 부정적인 삶을 창조하게 된다.
그 어떤 生覺이나 思考, 思惟와 判斷, 思考方式과 價値觀일지라도 내 안에서 일어난 生覺의 에너지는 特定한 에너지를 가지고 宇宙로 퍼져나간다. 어떻게 生覺하면 하나의 特定한 生覺 에너지는 그것을 生覺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特定한 創造에너지가 되어 이 世上을 일정부분 만들어내는데 一助를 하게 된다. 그러니 어떤 同一한 生覺이 몇 번이고 반복되며, 심지어 그것이 내 안에 삶의 價値觀이나 思考方式, 혹은 偏見이나 先入見으로 자리 잡고 있다면 그것은 分明한 獨者的인 生命力을 가지고 당신의 삶을 창조해 내게 될 것이다. 말 그대로 生覺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깊게 生覺하고 여러 번 想像하였는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그렸던 일들이 똑같이 이루어지는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일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거나,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았다면 스스로 마음의 에너지를 制限하고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卽 내 스스로 마음속에서 ‘生覺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말도 안 되, 어떻게 내가 生覺했다고 그것이 그대로 現實이 되겠어?’라고 스스로의 마음의 能力을 疑心하며 制限했기 때문에 이 宇宙는 ‘내 스스로 制限한’ 自身의 能力을 그대로 고스란히 現實로 創造해 낸 것이다. 즉 100% 온전히 生覺한 대로 現實이 된 것이다. 生覺 속에서 ‘生覺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라고 生覺했기 때문에 그렇게 生覺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누구나 自身의 能力은 定해져 있지 않다. 언제나 能力을 定하는 쪽은 나 自身이다. 내 스스로 나 自身을 規定하고, 結定지을 뿐이다. 아무리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일지라도, ‘난 공부는 안 되’라고 선언하지는 말라. 그 선언은 더욱 더 자신을 공부 못 하는 사람으로 結定짓게 될 것이다.
생각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만약 무언가를 願한다면 먼저 이미 꿈이 이루어졌다 생각하고 충분히 그 기쁨, 행복, 만족감을 느껴보는 특별한 창조행법을 써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우리가 창조하길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재료가 충분히 있다. 아니 조금 더 나아간다면, 생각함과 同時에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일 수 있다. 언제나 原因 속에 이미 結果는 內包되어 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物質世界에서는 생각하고 나서 그것이 實際 物質現實로 벌어지는데 까지는 ‘時間’이 걸린다. 그러나 時空을 超越한 더 깊은 次元에서는 時間은 無意味해진다. 실제 천상세계에서는 어떤 것을 생각함과 동시에 곧장 현실이 된다고 한다. 음식도, 집도, 차도, 사랑도, 주변 환경도 모든 것이 생각과 동시에 현실로 창조를 끝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실은 우리 人間界, 卽 物質로 이루어진 世界에서도 그 原則은 適用이 되고 있다. 다만 거기에 幻想의 ‘時間’이 必要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을 원한다면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또 다른 精神의 차원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時空에 갇혀 있는 制限된 觀點 에서만 時間과 空間이 있는 것이지, 本然의 宇宙法界에서는 時間空間의 槪念이 없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이루는데 時間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우리 制限된 觀點의 人間에게 해당되는 말일 뿐, 本然의 자리에는 時間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규정짓는 것이고, 완성형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 진 것 처럼 느끼고, 이루어 진 것 처럼 想像하게 된다면, 그것을 이루는데 드는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想像하는 視角化와 心想化는 창조행법의 아주 중요한 방법이다.
물론 이러한 創造行法은 모두가 하나의 方便일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 또한 하나의 空한 것이고, 신기루, 幻影과 같을 뿐임을 안다면, 想蘊을 통해 삶을 창조할지라도 삶 거기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根源에서는 이런 창조를 위해 어떤 방법을 쓰는 것보다, 창조 자체를 놓아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現實을 받아들이며, 내 삶에 주어지는 모든 프로그램을 受容한 채, 이렇게 살아도 좋고 저렇게 살아도 좋은 걸림 없는 大自由의 삶을 내맡긴 채 살아가는 것이 더욱 아름다운 일이지만, 때때로 執着 없는 創造의 經驗을 體驗해 보고 싶거나 方便으로 필요할 때가 있다면 이런 方法을 記憶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단 이 창조행법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을 때 그 결과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부분은 다음의 행온 부분에서 조금 더 다루어보도록 하자.
행온, 執着 없이 원할 때 이루어진다
‘행(行)’은 受, 想, 識 이외의 모든 마음의 作用을 總稱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特히 意志, 欲求, 바람, 潛在的 形成力을 의미한다고 했다. 쉽게 말해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 欲求이자, 어떤 行爲의 原動力이 되는 意志의 作用이 行蘊이다. 즉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랄 때 그것은 이루어진다. 行蘊이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行蘊은 아주 微妙한 것이다. 한 때 유행처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번져나갔다. 연금술사라는 책이 유행하면서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말에는 한 가지 빠진 수식어가 있다. ‘執着 없이’라는 수식이 빠졌다. 즉 ‘執着 없이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가 맞는 말이다. 만약 그냥 ‘간절히 원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기 쉽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통 간절히 원할 때는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執着과 欲望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執着이 介入되면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 ‘진급 되기를’ 하고 간절히 원한다고 해 보자. 간절히 진급되기를 소망하고 열망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진급 안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급에 執着하는 마음이 너무 强해지면 질수록 ‘진급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不安과 두려움이 함께 생겨나게 된다.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서 진급을 演習하는 것이 아니라, 진급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演習하게 된다. 그러니 진급에 대해 크게 執着하면 할수록 ‘진급 떨어지는데 대한 두려움’이 마음에서 演習되어 結果的으로 진급에서 떨어지는 것을 마음 연습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두려워하는 것은 언제나 持續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執着 없이 단순히 진급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힘을 받을 것이다. 執着 없이 원한다는 말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진급이 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다는 마음의 여유로운 態度를 의미한다. 이런 마음은 結果로부터 自由롭다. 그렇기에 두려움과 不安이 없게 되고, 自然스럽게 그런 마음에는 진급 낙방에 대한 마음보다는 진급 그 自體를 演習하게 되는 것이다.
집착을 놓았는지 확인하는 방법
물론 이렇게 되려면 分明히 執着이 놓여져 있어야 한다. 卽 結果로부터 自由로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執着 없이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執着을 하지 말고 다만 이루기 위해 願하자 라고 마음 먹는 瞬間 벌써 執着은 微細하게 달라붙게 된다. 執着이 정말 놓여 졌는지 아닌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진급에 진짜 떨어지게 되더라도 괜찮은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진급에 붙으면 좋겠지만 떨어져도 相關없을 정도가 되어야 진짜 執着을 놓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 삶을 宇宙法界에 完全한 내맡김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내맡김이며, 根源에서 宇宙法界는 늘 말 그대로 法界, 卽 眞理의 世界로써 眞理다운 삶을 나에게 보내주고 있으리라는 굳은 믿음이며 내맡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계 거의 모든 종단의 소의경전인 金剛經의 核心 사구게인 ‘應無所住 而生其心’ 卽, 執着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는 가르침이고, 바가바드 기타의 카르마 요가에서 설명한 執着 없이 行하라는 가르침이며, 老子의 無爲自然, 無爲行(본질적인 실행)이기도 한 것이다. ‘執着 없이 願 하라’는 가르침이야말로 인류의 수많은 聖人들이 말한 眞理를 實踐하는 核心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마음을 낼 수는 있다. “남들을 돕기 위해 부자가 되고 싶다.”, “전역하고 나서 공무원 준비를 하겠다.” 의도를 일으켜야지 평생 안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執着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지 돈도 벌지 말고, 취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當然히 마음을 다 내야한다. 그러나 執着하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한다. 欲望과 執着을 배제하고 願하고 意圖하면 거기에는 힘이 붙는다. 反對로 欲望과 執着이 介入되면 힘이 실리지 않는다.
남을 돕기 위해 부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내었지만, 행여 부자가 되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공무원 준비를 해서 시험을 보겠다고 했지만,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지더라도 상관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 자체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에는 얽매이지 않게 되었을 때, 사실은 열정이 식는 것이 아니라, 편법이나 조급함이 사라진 자리에 깊은 現存이 드러나게 된다. 卽 未來에 集中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현재에 더욱 充實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行蘊을 잘 쓰게 된다면, 卽 意圖를 일으키되 머물러 執着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게 된다면 그것은 强力한 힘으로 現實을 創造하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一切唯心造를 實現하는 方法이 될 것이다.
식온, 分別 認識하는 대로 경험한다 다음으로는 식온(識薀)이다. 識이란 區別, 分別, 認識, 識別하는 마음의 作用으로 어떤 對相에 대해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의 作用을 의미한다고 했다. 受想行이라는 세 가지 마음의 作用을 土臺로 하여 對相을 綜合的으로 分析하고 分別하고 認識하는 것이기도 하다. 느낌 感情과 生覺, 槪念 作用과 意志, 意圖라는 마음의 作用을 土臺로 綜合的으로 對相을 識別하고 分別하는 것이다. 識蘊에 의하면 對相을 어떻게 分別하고 認識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창조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識蘊은 虛妄한 分別心이기 때문에 이러한 分別識에 依해 認識되고 理解된 對相을 有爲法, 卽, 現象世界라고 하며, 識의 分別이 사라진 本質 狀態에서 보여지는 있는 그대로의 對相을 無爲法, 즉, 本質世界라고 한다. 卽 識에 依해 걸러 對相을 보면 現象世界는 人爲的인 有爲의 生死苦惱가 反復 되는 衆生世間이 되며, 虛妄하게 分別하는分別識을 놓아버린 채 對相 世上을 보게되면 不生不滅하는 無爲의 世界 즉, 本質世界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衆生은 受想行과 함께 作用하는 이 허망한 分別識 때문에 自身의 삶 世界를 어리석은 衆生의 現實, 現象, 삶, 世間으로 創造하는 것이다.
저마다 自身이 보고 느끼고 生覺하고 意圖하며 認識하는 世界는 각각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自身이 만들어내는 世上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同一한 對相을 어떻게 分別하고 認識해 아는가에 따라 自身이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대로 各者의 世上, 現實, 現象界, 삶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同一한 한 직장에 취직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직장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며 인식하는 것이 그 직장은 아주 좋은 직장이고, 사장님과 직원들도 매우 진실 되고 서로 아껴 주는 행복한 직장으로 認識하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그와는 반대로 그 직장은 나쁜 직장이고 사장님과 직원들도 형편없다고 認識했다. 전자의 인식, 식별작용에 따라 전자의 사람은 그 직장에서 점점 더 행복 과 평안과 진실 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후자의 방식대로 인식한 사람은 그 직장 속에서 내가 認識한 것을 계속해서 더 많이 인식할 수밖에 없는 現實이 계속해서 벌어지게 될 것이다. 점점 더 직장이 싫어지고, 형편없어 지며, 사람들도 비뚫어진 시선으로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보는 사람에게 직원들은 마음을 열고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자신이 인식한 대로 더 많이 인식되도록 경험이 창조된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와서 “스님께서는 사람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발등 찍힙니다. 모든 사람들은 착한 것 같다가도 자기 이익과 관련되면 상대에게 어떤 짓도 합니다. 그게 사람들 심리에요. 스님이라고 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사람을 너무 믿지 마세요.” 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사람을 못 믿게 되면,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날지라도 그 사람이 그 마음을 읽고는 우리 앞에서 못 믿을 짓을 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당신이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가 상대방을 진실 되게 믿어주면 그 사람이 설사 나쁜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당신 앞에서만은 진실 된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이 어떤 존재로 되며 내게 인식될지가 결정되는 것이지 상대방에 따라 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닫으면 나에게로 오는 모든 이가 마음을 닫지만, 내가 먼저 열면 나에게로 오는 모든 이가 마음을 열게 된다.
만약 여러분이 상대방을, 사람을 믿지 못하고 疑心하게 된다면, 점점 더 내 삶에는 疑心할 만한 사람이 登場하게 될 것이다. 믿지 못할 사람, 진실 되지 못한 사람들이 자꾸만 내 삶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더 내 안에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고 하는 認識은 증명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나의 認識과 分別이 肯定的이고 眞實 되다면 그 사람 앞에는 점점 더 좋은 사람, 긍정적이며, 믿을 만 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내가 먼저 타인을 긍정적이고 진실 되게 認識하니 나를 좋게 봐 주는 사람 앞에서 타인도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와 같다. 내가 마음을 열고 세상 사람들을 아름답고 眞實된 한 사람의 부처님으로써 認識하게 된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진실 되고 아름다운 존재로 경험되게 될 것이다. 내가 認識 한 것과 같은 것이 내 人生에서 점점 더 經驗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世上을 바라보는 필터가 어떠냐에 따라 자신의 필터대로 세상은 내게 와 規定되는 것이다. 내가 世上을 規定하는 대로 世上은 規定되고, 그 認識과 規定을 점점 더 뒷받침하고 증명해 주는 방식으로 우리 삶이 創造가 되는 것이다.
受想行識으로 삶을 만들어 낸다
배운 것을 종합해 보자. 앞에서 배운 受想行識이라는 마음의 作用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未來가 어떻게 만들어질지 結定된다. ‘一切唯心造’라는 말처럼 마음을 일으킨 대로 現實, 삶, 人生, 世上, 現象世界 가 創造된다. 마음에서 일으키지 않은 生覺은 現實에서 創造되지 않는다. 다른 말로 內面에 있지 않은 것은 外部로 드러날 수가 없다.
‘누가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복수했다?’ 라고 하겠지만 그 또한 相對方의 잘못이 아니다. 내 마음 속에 그 사람을 끌어당긴 어떤 要素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내게 온 것이다. ‘어떤 괴로운 狀況이 벌어졌다’ 라고 할 때에도 그 또한 내 마음이 受想行識이라는 어떤 潛在的인 要素로 그 狀況을 끌어당겼기 때문에 생긴 狀況일 뿐이다. 내가 業을 짓지 않고서는 돌아오는 果報가 있을 수 없다.
現實, 삶, 現象世界는 언제나 내 마음의 投影일 뿐이다. 아무리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할지라도, 혹은 아무리 외부적인 문제가 나를 뒤덮어 괴롭혔다고 할지라도 事實은 그것은 外部에서 온 것이 아니다. 內部와 外部라는 것 自體가 하나의 分別心일 뿐이다. 그것은 둘이 아니다. 언제나 마음 속에 있는 느낌 感情 生覺 意圖 意識이 마음 밖으로 投影되어 外部의 現實, 現象世界, 삶, 人生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 속에 있는 마음의 種類가 受想行識 네 가지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느끼는 대로 現實, 삶, 現象世界가 만들어지고, 마음 속에서 生覺하는대로, 意圖하는 대로, 分別하고 意識하는 대로 現實, 삶, 現象世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受想行識 中에서 어느 한 가지 마음만 現實, 現象世界,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綜合的으로 受想行識, 네 가지 마음의 要素 모두가 어우러 졌을 때 더욱 强力하게 現實, 삶, 現象世界를 創造해 내는 것이다.
受想識과 行蘊의 창조, 그 교리적 이해
조금 더 受想行識의 過程을 敎理的으로 살펴보자. 수온과 상온, 즉 느낌과 생각이 마음 작용의 두 가지 중요한 土臺가 된다. 觸에서 受想行이 發生한다고 말한 것처럼 수온과 상온이 일어남과 함께 行蘊이 發生한다. 行蘊은 有爲를 造作하는 것(만들어내는 것)을 말하는데, 行은 의지를 가지고 유위를 조작하는 것이고, 유위는 행에 의해 조작되어진 것을 뜻한다. 유위란 만들어내는 것, 조작하는 것이며, 有爲法은 만들어진 모든 것, 卽 現象世界를 의미한다. 有爲를 만들어내는 精神 作用이 바로 行蘊이다. 卽 行蘊이야 말로 수온과 상온의 도움을 받아 이 世上, 有爲法, 現象世界를 만드는, 有爲를 造作하는, 삶을 創造하는 核心 마음의 作用이다. 그렇기에 行蘊을 業이라고도 하며, 業을 짓는데 따라 果報가 생겨나는 것이, 業行이 삶, 現實, 現象世界를 만들어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行蘊이 有爲를 만들어내면 그 有爲(만들어진 것)를 識蘊이 認識한다. 識蘊이 認識할 때는 이름과 形態, 卽 名色를 가진 것으로 認識하게 된다. 卽 名色으로 認識하는 것이다. 그래서 行이 有爲를 만들어 낸다는 말은, 行이 名色을 만들어 낸다는 말과 같다. 行이 名色을 만들어내면 識蘊은 名色을 認識한다.
有爲法, 名色이 바로 우리가 認識하는 對相, 곧 現象世界, 現實, 삶인 것이다. 수온과 상온, 즉 느낌과 생각을 土臺로 行蘊은 名色이라는 有爲의 世界 卽, 現象世界, 現實, 삶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有爲法, 現象世界, 現實, 삶이라는 名色을 識蘊이 認識한다. 이와 같이 行蘊이 意志 作用, 즉 業行으로써 有爲法, 現實世上, 現象世界, 삶인 名色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卽 世上(有爲法, 名色)을 만들어내는 가장 直接的인 마음의 요소는 수상행식 중에서도 行蘊이다. 行蘊이 有爲를 造作해 내기 때문이다. 즉 행온이 의도적인 業으로써 世上, 유위법, 현상세계, 삶을 만들어낸다. 이 世上, 現象世界, 삶이 바로 果報다. 行과 業은 거의 同意語처럼 쓰이는데, 行蘊 즉 意圖的인 業을 行하면 그에 따른 結果, 果報로써 現實, 삶, 現象世界, 世上, 有爲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現實, 삶, 현상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業이라고 말한다. 즉 行蘊인 것이다. 그런데 이 行蘊이 作用하기 위한 基礎資料가 바로 느낌과 생각이라는 受蘊과 想蘊이다. 이렇듯 수온과 상온을 자료로 行蘊 이 意圖를 일으켜 이 世上, 有爲法, 現象世界, 現實, 삶을 만들어내면, 그렇게 만들어진 名色이라는 世上을 最終的으로 綜合해서 識蘊이 分別하고 認識하고 識別해서 아는 것이다.
名色은 이름과 形態를 지닌 모든 것을 의미하니, 結局 五蘊도 名色이다. 結論的으로 行蘊이 이 世上, 삶, 現實, 現象世界, 有爲法을 만들어내고, 行蘊이 만들어낸 이 世上을 名色으로 認識하게 되며, 그렇게 認識된 名色이 結局 五蘊이기 때문에 識蘊이 五蘊을 認識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느끼는대로 또 생각하는대로 이 世上은 만들어진다.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의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수온과 상온의 기초자료를 가지고 행온이 의도를 일으켜 이 世上을 만들어낸다. 즉 業을 짓는 기초자료가 바로 느낌과 생각이다. 그렇기에 느낌과 생각의 기초 마음을 바꾸면 의도를 바꾸 게 되고, 意圖를 바꿈으로써 世上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 만들어진 有爲의 世上, 有爲法, 現實, 삶, 現象世界는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受想行識으로 規定되어지고, 내 意識 속에서 受想行識이라는 마음의 作用으로 造作되어진 有爲法, 現象世界, 삶, 現實인 텅~빈 空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바로 생각마음을 바꾸면 世上이 바뀌는 理由다. 世上이란 내 바깥에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 로써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行蘊에 의해 造作되고 假像으로 만들어진 꿈, 신기루 헛깨비 거품 그림자 같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行蘊이 이 世上이라는 虛妄한 有爲의 世上, 卽 有爲法, 現象世界, 삶, 現實을 名色이라는 이름과 形態로써 만들어 놓으면 識蘊은 名色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것이다.
[상윳다 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무엇이 행인가? 有爲를 만들어내는 것을 行이라 한다. 어떤 有爲를 만들어내는가? 物質的인 性質로 色이라는 有爲를 만들어내고, 느끼는 性質로 受라는 有爲 를 만들어내며, 생각하는 性質로 想이라는 有爲를 만들며, 有爲를 만들어내는 性質로 行을 만들어내며, 分別해 認識하는 性質로 識이라는 有爲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有爲를 만들어낼 때 그것을 行이라 한다.”
이 世上을 만들어 내는 것을 有爲行이라 하는데, 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五蘊으로써 有爲의 世上,有爲法 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五蘊으로 有爲의 世上, 有爲法, 現象世界, 現實, 삶을 만들어내는 作用 을 行蘊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色受想行識 五蘊 중에서, 特別히 行蘊을 業이라고 부르며, 業이 世上, 現實, 有爲의 世上, 有爲法, 現象世界, 삶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業이 世上, 現實, 有爲의 世上, 有爲法, 現象世界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身口意 三業을 淸淨히 하면 그에 따른 結果로 좋은 果報를 받을 수 있다고 배웠다. 그래서 몸으로 말로 생각마음으로 선한 행동, 선한 말, 선한 생각을 하면 선의 果報를 받는 것만을 배웠다.
그러나 바로 行蘊이 五蘊 중 受想識을 土臺로 世上, 現實, 有爲의 世上, 有爲法, 現象世界, 삶을 만드는 全切的 綜合的인 過程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構體的으로 수상행식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어떻게 써야만 행온이 現實世界를 願하는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행온, 즉 業이 世上을 만든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단순히 어떤 業을 지을 것이냐에만 焦點을 맞춰왔지만, 이제 수상행식이라는 마음의 作用을 전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수상행식이라는 마음 전체를 어떻게 써야 하는 지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지금 여기’라는 每 瞬間의 現實世上, 삶, 有爲의 世界, 有爲法, 現象世界에서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의도하는지’, ‘어떻게 인식하는지’의 네 가지 마음의 作用 들이 合쳐져서 現實, 世上, 有爲의 世界, 有爲法, 現象世界라는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有爲를 造作해 내는 것이다. 그렇게 造作해 낸 有爲의 世上을 有爲法 즉, 現象世界라고 하고, 그러한 有爲法 現象世界를 이름과 形態를 부여하여 識蘊이 認識하기 때문에 名色이라고 부른다.
十二緣起에서 ‘無明-行-識-名色-六入-觸’의 과정이 나오는데, 이 또한 無明으로 因해 受想行이 함께 行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行이 만든 有爲를 識이 認識하며, 그렇게 認識된 對相이 名色이고, 그러한 名色을 六入이라는 눈귀코혀몸뜻으로 接觸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무명으로 인해 느낌과 생각을 바탕으로 業작용인 행이 일어나면, 그 行이 造作한 有爲를 識이 認識하고 그렇게 認識된 對相이 名色이며 그 名色을 다시 六入이 接觸함으로써 ‘觸-受-愛-取-有-生-老死’로 이어진다. 즉 눈귀코혀몸뜻이 名色을 接觸함으로써 다시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에서 愛欲이, 愛欲에서 執着이, 執着에서 業行인 業障, 業有가 일어나서 結局 태어남과 늙고 죽음이라는 生이 始作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十二緣起는 뒤에 다시 배우겠지만, 結局 五蘊의 發生 過程을 보다 構體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한 책임감과 깨어있음
受想行識이라는 마음의 要素들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우리는 낱낱이 다 살펴보고 살지 않기 때문에 생각지 못한 現實世界를 보고 당황스러워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만들지 않은 現實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지’라고 하겠지만, 事實 그 모든 것을 내가 만들었지만, 그 過程을 우리가 지켜보지 못하고 다 놓치고 살았던 것이다.
想蘊이라는 생각의 작용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 머릿 속에서는 하루에 6萬 가지 정도의 生覺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중에 몇 가지의 생각을 뚜렷이 觀察하고 있을까? 우리는 生覺의 대부분을 놓치고 살아 간다. 느낌도 놓치고, 意圖와 欲求도 놓치며, 對相들이 내게 와서 어떻게 認識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一切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었다는 事實을 받아들여 보라. 그 누구도 怨望할 必要가 없다. 이 世上 그 모든 것은 내 안의 色受想行識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그 事實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 現實, 有爲의 世界, 有爲法, 現象世界 그 自體를 결코 怨望하거나, 누구도 탓하지 않고 온전히 自身의 삶, 現實, 世上, 有爲의 世界, 有爲法, 現象世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완전히 책임감을 지난 사람이 될 것이다. 根源에서는 남들의 탓도 아니고, 이 世上의 탓도 아니며, 條件이나 環境이 問題인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내 스스로가 만든 것일 뿐이지만, 다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色受想行識이 만들어내고 있는 現象世界를 낱낱이 관찰하지 못해 놓친 것이거나, 혹은 前生에 지은 잊혀진 業識일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生에서 그 누구도 怨望할 수 없다는 事實이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완전한 책임감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變化의 可能性 또한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상대방, 모순된 사회 구조, 내 바깥에 있는 조건들 때문에 이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그것은 더 이상 내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내 根源에서는 온전히 내 책임임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때, 내 안에는 삶을 完全히 뒤바꿀 수 있는 無限한 能力과 可能性을 스스로에게 부여해 주는 것과 같다. 그랬을 때 모든 힘의 源泉은 내 바깥이 아닌 내 안에 있게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五蘊이 내 삶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내 스스로 깨어있지 못함으로써 어떤 삶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놓쳤음을 안다면, 이제부터는 보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色受想行識이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關心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위빠사나, 觀察, 깨어있음의 觀 修行이 필요한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창조된 이 세상 모든 것은 허망하다
사실 색수상행식으로 삶을 창조한다고 했지만, 그렇게 창조된 세상 또한 虛妄한 것일 뿐이다. 般若心經에서는 色受想行識이라는 五蘊이 모두 공(空)하다고 말하고 있다. 五蘊은 實在的인 어떤 것이 아니라 虛妄하고 空虛한 것이다. 다만 受想行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因緣生起하는 것들이다. 因緣 따라 생겨난 것은 因緣이 다하면 흩어질 뿐이다. 因緣은 固定不變 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아닌 虛忘한 波動하는 에너지들이다.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識蘊이 世上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하지만 그 分別하는 마음의 作用 自體가 虛妄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언제나 分別을 놓아라, 分別하지 말라고 설법하고 있다.
受想行識이라는 마음으로 世上을 창조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虛妄한 것이고 實體가 없는 것이라면, 왜 애써 執着해 願하는 대로 삶을 創造해야 하겠는가? 주어진 삶의 條件이라는 宇宙法界의 뜻에 따라, 나의 根源的인 次元에서 보내준 삶, 세상이라는 最適化된 歸依의 旅程, 배움과 깨달음의 旅程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고 살아가는 편이 더욱 根源的인 삶이다.
물론 필요할 때는 受想行識으로 삶을 창조하되 그 창조물과 창조의 작업 또한 모두가 空한 것이라는 自覺이 있다면, 무엇이든 창조하면서도 창조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自由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되어도 좋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좋은, 삶 自體가 하나의 흥미롭고도 놀라운 하나의 演劇처럼 가벼워 질 것이다. 삶에 심각함과 무게감이 사라지고, 平安하면서도 고요하며, 경쾌하면서도 自由로운 삶이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必要하다면 受想行識을 利用해 무엇이든 創造하여, 이 宇宙法界를 위해, 이웃과 수많은 衆生을 위해 使用하라. 그러나 그 모든 創造의 作業이 空하다는 事實을 깨닫게 된다면, 그 모든 창조작업에 執着 하지 않을 것이고, 창조가 되면 되는대로 좋고 안 되면 안 되는대로 좋을 수 있는 참된 自由로움이 삶에 드러날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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