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05. 07 - 중도, 고집 피울 건 하나도 없다
중도, 고집 피울 건 하나도 없다
中道的인 삶을 사는 사람은 그 사람 옆에 가면 마음이 便安합니다. 내가 失手를 해도 나를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보아 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과도하게 한 쪽으로
치우친 삶을 사는 사람 옆에 갔을 때는 뭔지 모르게 마음이 不便합니다. 선뜻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가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도 조심하게 되고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를 살피게 됩니다.
中道的으로 산다는 것은 내 生覺이 絶對的으로 옳다는 生覺을 내려놓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것이
옳다고 生覺되면 옳다고 할 뿐 거기에 과도하게 執着하지 않습니다. 自己 生覺을 絶對적으로 옳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他人들의 다양한 삶의 方式과 生覺들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고 理解해 줄 수 있는
넓은 慈悲心이 저절로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中道의 실천은 곧 慈悲의 실천과 連結되는 것입니다.
또한 中道的인 視角에서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과도하게 所有하려 한다거나, 과도하게 執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남들이 다 갖고 있는 것을 나는 갖고 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根源에서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렇듯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물 흐르듯 自然스럽게
사니까 크게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이처럼 中道的인 삶은 自然스러운 삶이며, 人爲的이거나 억지스러운
삶이 아닙니다. 물 흐르듯이 根源에 自然스럽게 내맡기고 사는 삶이 바로 修行者의 中道的인 삶입니다.
初期經典에서는 中道를 實踐하는 構體的인 方法을 八正道라 말하고 있습니다. 八正道의 첫 째인 正見은
‘바르게 보라’는 것으로 어느 한 쪽으로 過度하게 치우쳐서 보지 말고 中道的으로 보라는 말입니다.
예를들면, 자신이 봤을 때 어떤 사람의 行動이 옳지 않다는 生覺이 들어도 한두 번 얘기해서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 때는 억지로 고치게 하려고 執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 삶의 方式이고 그는
그것을 通해 삶의 智慧를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의 方式 自體가 絶對的으로 틀린 것이
아니므로 과도하게 執着하지 않는 것입니다.
外向的인 사람이 봤을 때 너무 內向的인 사람은 답답해 보일 수가 있겠지요. 그래서 좀 바깥으로 나가서
사람들도 좀 만나라고 助言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助言을 해 줄 수 있을지언정 이 助言
만이 전적으로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되겠지요. 그 사람은 自己다운 自然스러운 삶의 길을 아름답게 걸어
가고 있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한 가지 生覺은 내가 生覺하기에 옳은 生覺일 뿐이지,
그 生覺이 絶對的으로 옳은 生覺이란 있지 않습니다.
자식이 게임에 빠져 重毒이 될 地境이라 해도 無條件 잘못됐다고 生覺해서 게임을 할 때마다 화를 내고
윽박지르면서 못 하게 하면 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남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하게되면 오히려
그것이 非定常的인 것이지요. 어쩌면 게임을 못 하는 아이는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하는 왕따가 될
지도 모릅니다. 無條件 못하게 하면 反發心이 생겨 아이는 게임에 더 執着하게 됩니다.
아이가 과도하게 게임을 하는 것도, 부모가 아이를 과도하게 나무라는 것도 모두 中道的인 行動은
아닙니다. 아이가 게임하는 것에 대한 나의 見解가 ‘絶對 안 된다’고 치우쳐 있지는 않은지를 中道的으로
살펴보게 된다면, 화만 내고 못하게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게임하는 것을 認定하게 됨으로써 對話를
통해 게임하는 시간을 스스로 정하게 한다거나 하는 방식의 中道的인 調律을 해 나가기가 훨씬 쉬워 질
수도 있습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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