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십이연기 각 지분의 의미 - 십이연기(1)

장백산-1 2015. 5. 10. 21:08

 

십이연기 각 지분의 의미 - 십이연기(1) |불교기본 교리강좌

 

 

 

 

5장. 십이연기

     

 

  

1. 십이연기의 의미

 

緣起法의 章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으신 眞理는 곧 緣起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經典에서

緣起法은 具體的으로 十二緣起임을 밝히고 있다. [잡아함경] 299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연기법은 소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無明이 있으므로 行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이 있으며, 無明이 滅하기 때문에 行이 滅하고 내지 괴로움이

滅한다는 것이다.”卽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은 곧 십이연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십이연기는 구체적으로

생노병사우비고뇌라(生老病死 憂悲苦惱)는 인간 고(苦)의 문제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으며, 또한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연기적으로 밝혀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 십이연기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며 고통 받고

있는 모든 괴로움의 문제가 도대체 어떤 원인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를 보다 근원적인 통찰로써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십이연기란 具體的으로 무엇인지 [잡아함경] 299경을 통해 살펴보자.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을 인연하여 촉(觸)이 있고,

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를 인연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인연하여 취(取)가 있고,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고, 유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노병사와 우비고뇌

(늙음·병·죽음과 근심·걱정·고통·번민)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즉 십이연기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에 의해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있고,

행이 있으므로 식이 있고, 식이 있으므로 명색이 있으며, 명색이 있으므로 육입이, 육입이 있으므로 촉이,

촉이 있으므로 수가, 수가 있으므로 애가, 애가 있으므로 취가, 취가 있으므로 유가, 유가 있으므로 생이,

생이 있으므로 노병사라는 모든 괴로움이 연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십이연기의 각 지에 대한 해석은 경전에서마다 차이가 있고, 일관되거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며, 각 지분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서 또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거나 경전마다 차이가 난다.

그런 까닭에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은 부파불교에서도 서로 다른 해석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수

많은 불교교리 해설서마다 서로 다르거나,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경전에 입각해

십이연기의 각 지분에 대한 설명을 나름대로 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일반인들이 보아서 도대체 어떻게 각

지분의 관계를 이해해야 할지 막연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이 책에서는 먼저 무명에서부터 노사까지의 12가지 지분에 대해 경전에 입각한 일반적인 이해를 먼저

살펴보고, 그 뒤에 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노병사라는 구체적인 괴로움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거꾸로 하나

하나 살펴보는 방식으로 우리의 괴로움의 원인을 12연기로써 탐구해 보고자 한다. 즉 노병사라는 괴로움의

원인이 생에 있다면 생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또 그 원인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를 12가지 지분을 하나

하나 탐구해 나가다 보면 왜 이러한 노병사라는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십이연기 각 지분의 이해

  

십이연기는 괴로움의 原因을 밝혀내는 順次的인 작업이기도 하지만, 사실 하나하나의 支分 모두가 結局

獨立的으로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십이연기의 어느 한 지분을

소멸하게 된다면, 연이어 다음 지분이 소멸되고, 결국 노병사의 근원적인 괴로움은 소멸되게 될 것이다.

 

[숫타니파타]에서는 “모든 괴로움은 무명으로 인해 생겨난다. 무명을 남김없이 소멸하면 괴로움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 모든 괴로움은 행으로 인해 생겨난다. 행을 남김없이 소멸하면 괴로움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식, 촉, 수, 애, 취에 대해서도 설하고 있다. 모든 괴로움은 십이연기의

순환적인 관계성 속에서 생겨나기에 그 원인의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는 방법으로 십이연기가 설해지기도

하지만, 이처럼 십이연기는 각각의 지분 하나하나가 독자적으로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숫타니파타는 가장 초기의 경전에 속하기 때문에 더욱 신뢰가 가는 설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불교의 십이연기의 가르침에 의하면,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에는 한 가지 방법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십이연기의 모든 지분이 제각기 독립적으로 괴로움을 소멸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다양한 수행의 방편과 가르침들이 설해지는 것이다. 먼저 십이연기

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다보면 불교에서 왜 그토록 다양한 방법으로 괴로움을 소멸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십이연기의 첫 번째 지분인 무명의 타파가 곧 괴로움의 타파이기에 불교에서는 어리석음 즉 무명을

타파하는 수행, 반야의 지혜를 밝히는 수행을 중요시 여긴다. 또한 행의 지분의 타파가 곧 고의 타파이기에

불교에서는 삼업청정과 업장소멸의 가르침, 그리고 유위행이 아닌 무위행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식의 소멸을 위해 분별심을 버리는 수행을 설하고, 명색의 소멸을 위해 명색에 집착하지

말 것을 설하며, 육입의 소멸을 위해 육근청정을 설하고, 나아가 수의 소멸을 위해 느낌관찰의 사념처 수행을,

애의 소멸을 위해 애욕을 버릴 것을, 취의 소멸을 위해 무집착과 방하착의 수행을, 유의 소멸을 위해 삼계라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십이연기의 각각의 지분은 모두가 괴로움의 원인이면서, 그렇기에 모두가 소멸시켜야 할 것들이다.

십이연기의 지분을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결국에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중요한 수행이 된다. 이 장에서는

십이연기의 의미와 함께 왜 각 지분을 소멸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아직 이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하나 십이연기의 지분을 살펴보면서 더욱 분명해 지게

될 것이다. 각각의 지분을 살펴봄에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경전의 내용에 입각하여 살펴보겠지만, 부파불교

이래로 다양한 발전을 거치면서 완성된 십이연기의 해석인 삼세양중인과설, 업감연기설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혀 보도록 하겠다.

 

십이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順觀과 逆觀이 있다. 順觀은 무명에서 노사까지 순서대로 사유하는 방법이고,

逆觀은 반대로 노사에서 무명까지 거꾸로 관찰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는 무명에서부터 노사에 이르는

십이연기의 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무명(無明)

 

無明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이 없다’는 말로, 그 의미는 각 경전마다의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眞理에 대한 無知를 가리키며, [잡아함경] 490경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사성제에 대한 무지로

이해되고 있다.眞理에 대한 無知란 緣起法을 모르는 無知로써, 이 世上 모든 것들은 다 緣起되어진 存在이며,

그 모든 것들은 無常하고 無我이므로 固定된 自性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因緣 따라 緣起的

으로 만들어졌을 뿐 實在하지 않는 無常한 一時的 存在에 대해 實在한다고 여기고 계속될 것으로 여겨 거기에

얽매여 執着하는 상태가 바로 無知요 無明이다.

 

四聖諦에 대한 無知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의 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근원적인 괴로움과 모든 근심, 걱정, 고통, 번민들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것은 소멸될 수 있는 것인지, 그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잡아함경』298경에서는 이러한 苦集滅道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포함해서 무명이 무엇인가를 좀 더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무명이란 무엇인가? 만약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고, 세상을 알지 못하고, 나와 세상을 알지 못하고, 업(業)을 알지 못하고, 보(報)를 알지 못하고, 果報를

알지 못하고, 불법승(佛法僧)을 알지 못하고,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알지 못하고, 원인을 알지 못하고,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착함과 착하지 않음, 죄와 죄 없음, 익힘과 익히지 않음, 열등함과 뛰어남,

더러움과 깨끗함을 알지 못하고, 연기를 분별하여 알지 못하고, 육입처의 진실을 알지 못하며, 이것 저것

모두에 대해 알지 못하며, 빈틈없고 한결같음이 없어 어리석고 어두워 밝음이 없는 커다란 어둠을

무명이라 한다.”

 

이처럼 모든 괴로움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무명이다. 우리는 과거에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미래에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르고 산다. 나는 누구인지, 세상은 누구인지, 타인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며,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해서도, 내 안에 부처가 있는지, 진리가 내 안에 있는지도 모르며, 수행자의 삶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괴로움의 원인도 소멸 방법도, 소멸에 이르는 길도 모르며, 어떤 원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무엇이 착한 것인지 무엇이 착하지 않은 것인지도 잘 모르며, 어떤 것이 죄인지 죄가 아닌

지도 잘 모른다. 六入處를 나라고 錯覺하는데서 我相이 생긴다는 진실도 알지 못하고, 그야말로 이것저것 모두

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사실 아는 것이 없이 모르는 채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살며, 내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산다면 어떻게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처럼 삶에 대해, 우주에 대해, 나에 대해, 과거와

미래에 대해 모르고 살기 때문에 어리석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명의 타파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무명을 타파하여 명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다. 그러한 지혜가 바로 대승불교의 반야지혜다. 이처럼 무명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며, 소멸시켜야 할

것이다. 무명이 소멸될 때 결국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보통 어리석은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 가장 큰 죄업은 어리석음에서 생겨난다.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고, 모르기 때문에 악행을 악행인 줄 모르고 하며,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진짜인 것으로 착각

하여 끊임없이 돈이며 명예, 권력, 지위, 재산 등을 끌어 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 당신이 모르기

때문에 짓는 죄업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다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이치를 분명하게

안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짓는 죄업, 그것이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행이다. 무위행이 아닌 유위행은 모두가 모르기

때문에 짓는 업행이며, 선행도 악행도 근원에서는 모두가 유위행으로써 업을 늘리는 무지의 행이 아닐 수 없다.

 

 

 

 

(2) 행(行)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다. 행이란 행위, 즉 업(業)을 가리키는 것으로, 삶을 향한 맹목적인 동기와 욕구를

형성한다. 쉽게 말하면 무명에 의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의지작용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은 ‘유위(有爲)로 조작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해 무명으로 인해 무상과 무아를 모른 채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라는 동일시를 일으켜 실체시

함으로써 유위로 조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무명이 조건 되지 않았다면 유위로 조작하지 않았을 것이나 무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유위로 조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위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함이 있다는 의미로 조작, 작의를

일으킴으로써 본래의 무위적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벗어났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어리석은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억지로 조작하는 유위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무명에 의해 ‘나’와

 ‘세상’을 실체시 하여 집착하고, 그 집착하는 대상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의지, 의도를 일으켜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행위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행동과 말과 생각을 3가지 종류의 행, 이른바 신행(身行)과 구행(口行)과 의행(意行)이라고 한다.

경전에서는 “뿐나여, 무엇이 어두운 업으로서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가? 어떤 사람이 해로운 신행(身行)과,

구행(口行)과, 의행(意行)을 이룬다고 해 보자. 그럴 때 그는 해로운 세계에 태어난다. 해로운 세계에 태어난 자는

해로움과 접촉한다. 예를 들어 지옥의 존재들처럼 괴로움만을 느낀다. 뿐나여, 이것을 어두운 업으로써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부른다.”

 

해로운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면 그 결과로 해로운 세계에 태어나 지옥과 같은 해로운 존재들과 접촉하며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바로 무명 때문이다.

 

무명으로 인해 나와 세상을 실체화하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을 실재화하기 위해 의지작용을 일으켜 신구의 삼행으로

유위를 조작하는 것이다. 즉 어리석음 때문에 세상이 진짜인지 착각하고 그 착각으로 인해 그러한 세상을 내 것으로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신구의 삼행의 행위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괴로운 현실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행은 업행 즉, 유위행이다. 어리석은 마음, 무명에서 일어난 행위는 모두가 유위행이다. 반면에

밝음, 명, 지혜에서 일어난 행위는 해도 한 바가 없어 흔적이 남지 않는 무위행이다. 우리는 무명, 즉 어리석기 때문에

유위행을 일으킨다. 사랑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실체인 줄 아는 어리석음 때문에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려는

집착의 행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유위행이다. 행위에 집착이 개입되어 있는 행위가 바로 유위행이다. 해도 한 바가

없이, 집착하지 않고 하는 행이 아닌 무언가를 조작해 내려 하고, 만들어내려 하고, 함이 있는 행인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여자로, 내 남자로 만들어내려는 마음, 말, 행동이 바로 유위행이며, 삼행이고 삼업인 것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음이 있으면 우리는 어리석은 행을 하게 된다.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행을 소멸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소멸됨을 설하고 있다. 이 말이 모든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행위를 하되 함이 없이 한다, 집착 없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을 소멸하게 되면, 모든 유위행이

무위행으로 바뀌기 때문에 해도 한 바가 없고, 흔적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행이다.

 

쉽게 말해 부처님의 행에는 뒤끝이 없다. 제자가 잘못해 질책을 했을지라도 부처님은 전혀 한 바가 없이 행하기

때문에, 무위행으로써 행하기 때문에, 그런 질책 뒤에는 질책했다는 상이 전혀 남지 않는다. 그 제자는 다음 순간에 ‘질책 받았던 제자’가 아닌, 그저 순수하고 텅 빈 ‘한 제자’로 부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이미 지은 업은 소멸시키기 위해 업장소멸을 설하며, 짓지 않은 현재의 행위는 집착

없고 머무름이 없는 무위행이 되도록 설하고 있다. 금강경의 핵심 사구게인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물러 집착

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 또한 행의 소멸에서 오는 무위행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업장소멸을 이룬다면 그것이 곧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며, 모든 행위가 머무는 바 없는 무위행이 된다면, 그 사람은

바로 깨달은 존재일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업장소멸과 무위행의 중요성을 설하는 이유가 바로, 행의 소멸이 곧 모든 괴로움의 소멸로

이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십이연기는 각각의 지분이 독립적으로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원인

이기 때문에, 하나의 지분만이라도 완전히 소멸된다면 연이어 모든 지분이 차례로 소멸되어 근본적으로 모든

괴로움이 소멸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업행이 업장소멸되어 현재에 완전히 업이 소멸되게 되거나, 매 순간의

현재의 행위가 무위행이 된다면 그것은 곧 깨달음을 얻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파불교에서는, 이 연기설에 업(業) 사상을 결합하여, 삼세양중인과설을 제시하고,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을

전개하였다. 다시 말해, 이는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를 거치며, 십이연기 각각의 지분이 어떻게 연결

되어 있는가를 윤회, 업 사상을 통해 설명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업감연기설에 의해서 보면, 무명(無明)과 행(行

)은 과거세의 원인이라고 한다. 즉, 과거에 어리석은 마음[無明]으로 인해 행(行)을 지어, 그 행위, 업력에 의해

이번 생에 윤회를 하여 몸을 받아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무명, 행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을 받았

다면, 몸을 받은 뒤에는 업력으로 인해 무엇이 생기게 될까? 아래에서 십이연기의 지분을 자세히 살펴보자.

 

 

 

 

(3) 식(識)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 識은 認識作用으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여섯 가지 식(六識)이 있다. 눈귀코혀몸뜻으로 제각각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경험, 행위(行)로 인해 지금 그 음식을 보면 그 음식에 대한 각종의 분별과

인식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푹 삭힌 홍어를 어릴 적에 처음 먹어 본 사람이 아주 안 좋은 인식을 가졌고, 삭힌 홍어에

대한 좋지 않은 분별심을 일으킨 경험이 있었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삭힌 홍어를 보면 자동적으로 그 음식에 대한

나쁜 분별심이 생겨날 것이다. 즉 어릴 적에 보고, 먹고, 냄새 맡고, 그에 대해 생각했던 각각의 안식, 비식, 설식,

의식들이 잠재의식으로 남았다가 인연 따라 다시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만약 먹기 싫은 분별심이 일어났지만 꾹

참고 먹었더니 신기하게도 맛이 있었다면, 이 사람에게는 식의 증장이 일어난 것이다. 의식이 새로운 경험과 행위를 통해 증장하고 변화된 것이다. 이처럼 행을 조건으로 식이 일어나고, 그 식은 다시 새로운 행에 의해 증장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식은 왜 소멸되어야 하는 것일까? 분명 십이연기는 각각의 지분을 소멸시킴으로써 괴로움을 소멸하는

가르침이다. 식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여 자기 식대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인식이다. 말 그대로 분별심인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방식대로 분별해서

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식의 소멸은 곧 분별심을 무분별심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대상을 우리는 늘 분별해서 인식하지만, 분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과거의 행을 떠올림으로써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거나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곤 하지만, 깨어있는 지혜로운 이라면 과거의 행위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므로 내려놓은 채 지금 이 순간에는 좋거나 나쁜 사람이 아닌 그저 텅 빈 한 사람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분별심이다. 즉 식을 소멸하면 대상을 전혀 알아보지도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분별하던 습관적인 차별심을 넘어서 무분별심으로 인식하게 된다. 무분별심은 곧 대평등심이다. 훌륭하고 못난

대상도 없고, 좋고 나쁠 것도 없으며, 옳고 그를 것도 없고, 착하고 착하지 않은 것도 없고, 더럽거나 깨끗한 것도

없는 대평등심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텅 비어 맑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무분별

의 인식이 있게 될 때 모든 괴로움은 소멸될 수 있다.

 

그래서 중국 선의 3조 승찬대사는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至道無難)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되니

(唯嫌揀擇), 미워하고 좋아하지만 않으면(但莫憎愛) 통연히 명백해지리라(洞然明白)’라고 했던 것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곧 간택함 즉 분별하고 차별하는 마음, 즉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만 내려놓으면 통연히 명백해진다는

것이다. 무분별심이야말로, 즉 식의 소멸이야말로 밝은 깨달음의 방법이라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식의 소멸, 즉

분별심에서 무분별심으로의 전환이야말로 중생의 의식에서 붓다의 의식으로 변하는 의식의 대전환이다.

 

이를, 부파불교의 업감연기의 해석으로 살펴보자. 앞에서, 과거세의 무명과 행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렇듯, 우리의 행위에 의해 몸이 형성되면, 그곳에 식(識)이 발생한다. 몸이 형성되자, 거기에 ‘나다’ 하는

아상(我相)을 짓고, 따라서 ‘나다’ 라는 생각으로 인해 거기에 분별하는 인식작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부파불교 업감연기의 설에서 보면, 인간이 이 생에서 몸을 받자마자, 그 업력으로 인하여 인간의 몸에 여섯 가지

기관[六根]이 생기고, 그 기관에서 제각각의 식별[六識]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안, 이, 비, 설, 신, 의식의

여섯 가지 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섯 가지 식이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 몸에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과,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겠다. 그것이 바로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의 육근(六根)과,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경(六境)이며, 이것을 표현한 것이, 십이연기의 네 번째인 명색[육경]과, 다섯 번째의

육입[육근]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식, 명색, 육입은 따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 항목은 시간적으로 선후 관계가 아닌 동시적인 것이다.

 

 

 

 

 

 

(4) 명색(名色)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있다. 명색은 명과 색을 말하는 것으로 명(名)은 정신적인 작용을 색(色)은

물질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명은 ‘이름’이고, 색은 ‘모양’인데, 정신적인 것들은 형체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이름으로 보통 불리우고, 물질적인 것들은 모양과 형태가 있기 때문에 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명색은 식의 대상이다. 인식과 분별의 대상이 바로 명색이다. 우리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정신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이름을 붙여 인식하고, 물질적인

것들은 모양과 형태로 인식을 한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명색은 이름과 모양을 지닌 단순한 의식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모든 대상을 이름과 모양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는 의식상태를 말한다는 점이다. 즉 명색을

단순한 의식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실체적으로 식이 있고, 식의 대상인 명색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식도 인연 따라 만들어진 비실체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소멸되어야 할 것이고, 그 식의

대상인 명색 또한 실체적인 이름과 실체적인 모양을 지난 어떤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런

이름과 모양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게 된 의식상태인 것이다.

 

만약에 명색이 인식의 대상이라면, 명색은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므로 이름과 모양을 가진 모든 것을 소멸시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목적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모든 존재들을 다 소멸시켜 없애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상대방으로 인해 괴롭다고 해서 상대방을 없애 버리거나,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은 괴로움을 소멸

시키는 근원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혼하려는 부부나, 직장을 그만두려는 이들에게 성급

하게 이혼하거나 퇴사하는 것만이 올바른 방법은 아님을 설하고 있다.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대상, 즉 명색이

있다고 그 대상 자체를 없애거나 소멸시키는 것은 근원적인 방법이 아닌 까닭이다.

 

여기에서 명색은 대상을 이름과 모양을 부여해 인식하는 나의 의식상태라고 말했다. 명색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이 나에게 와서 인식되어진 모습일 뿐이다. 나의 의식 속에서 이름과 대상을 부여하여 그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이 나에게 와서 인식되려면 어떤 특정한 이름으로 기억되거나, 특정한 모양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처럼 명색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나의 의식 속에 자리잡혀 있는

이름과 모양일 뿐이다. 바로 그 명색을 소멸시켜야 한다. 그것은 그저 잠시 이름과 모양으로 인식된 것들일

뿐이지, 실체적인 어떤 존재인 것은 아니다. 대상 그 자체는 고정된 실체도 없고, 항상하지 않으며, 자아가

없다. 무상하고 무아이며 공하다.

 

그렇기에 명색을 멸해야 한다. 내 안에 명색으로 자리 잡고 있는 모든 대상들이 실체가 아닌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실체라고 생각하면, 그러한 실체적인 대상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이나 아파트나 자동차

라는 명색을 실체라고 생각하면, 더 많은 돈, 더 좋은 아파트, 더 좋은 자동차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친구에 대해서 ‘나’도 ‘사랑’이라는 감정도, ‘여자 친구’라는 대상도 모두가 실체한다고 여기게

되면 집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색)과 그녀의 이름(명)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그녀와

결혼할 생각만 하면 행복하다. 그 이름과 모습을 통해 집착하게 되면 언젠가 헤어지게 될 때 괴롭다. 결국

결혼을 할지라도 그 아름다운 모습에 집착했었다면 그 모습을 잃게 될 때 괴롭다. 임신하고 살이 찌고 나면,

혹은 얼굴에 화상이라도 크게 입고 난다면 사랑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명색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색이 비실체적이며 무상하고 무아인줄 안다면,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실체화시키지 않으면 저절로 집착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잡아함경] 298경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명은 수·상·행·식을 말하며, 색은 지·수·화·풍의 사대와 사대로 이루어진

물질을 말한다. 즉, 오온을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음에 나올 육입이라는 주관적

감각기관의 객관적 대상인 육경을 지목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오온을 명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육경

또한 명색이기 때문이다.

 

식의 대상이 명색인데, 이 말은 식이 인식하는 모든 것을 명색이라고 부른다는 뜻이다. 식은 오온을 나로 인식하고,

마찬가지로 육근을 나의 감각으로 인식하며, 육경을 감각의 대상이라고 인식한다. 식은 오온도 인식하고 육경도

인식하는 것이다.

 

명색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면, 오온과 육경에도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명색을 멸하게 된다면, 즉 대상을 실재

이름과 모양을 지닌 존재로 착각하는 마음이 소멸하게 된다면, 오온과 육경에 대한 집착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는 말은, 식이 있기 때문에 명색을 명색으로 인식함을 의미한다. 내 바깥에 이름과

모양을 가진 정신적, 물질적인 대상이 있을지라도 내 안에서 인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뒷 산에 눈이 내려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났지만 그 소리를 인식한 사람이 없었다면 그 소리는 일어난 것이

아니다. 훗날 유식사상이 대두되는데, 만법유식이라고 하여, 일체 모든 존재는 오직 식 뿐이라는 것을 연구하는

사상이다. 이처럼 만법유식의 관점에서 인식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옆에 앉아 있는 여자

친구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 여자 친구는 이어폰을 한 채 큰 소리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듣느라

고백을 듣지 못했다면 그 고백은 여자 친구에게는 없는 것이다.

 

앞의 예를 다시 들어 보면, 삭힌 홍어를 어릴 적에 먹어 본 사람의 의식 속에 홍어에 대한 나쁜 인식과 분별심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어른이 되어 다시 홍어가 한정식 상에 올라왔을 때 깜짝 놀라고 절대 안 먹겠다고 마음을 낸

것이다. 홍어라는 명색, 즉 인식의 대상은 과거의 업행에 따라 만들어진 식이 있었기 때문에 선명하게 인식된 것이다.

만약 홍어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라면 그 많은 한정식 밥상에서 전혀 홍어를 인지하지 못한 채 다른 반찬만 먹었을 수도 있다. 인식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있는데, 여행 뒤에 각자 본 것을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산과 계곡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이 수영하는 모습 등만 기억에 남아 있던 나와는 다르게, 아버님께서는 토건업을 하시는 분이시라 계곡의 흙들이 너무 좋아 몇 차만 퍼서 가져다 썼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전혀 보지 못한 계곡의 흙이 아버님에게는 유난히 눈에 뜨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버님의 인식에서는 과거의 경험(행업)과 직업으로 인해, 즉 행으로 인해 식이 생겼고, 그 식이 있으므로 명색(흙)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게는 흙에 대한 그런 인식이 없었으니 당연히 흙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식을 업식(業識)이라고 한다. 업에 따라 생겨난 식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어떤 식이 있느냐에 따라 어떤 대상을 볼 것인가가 결정된다. 식에 따라 명색이 결정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어떤 업식이 있느냐에 따라 똑같은 여행지를 가더라도, 똑같은 곳에 살더라도 자신에게 보이는 것은 저

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육입(六入)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육입이 있다. 육입은 육내입처를 뜻한다. 육내입처는 인연 따라 생겨난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을

보고 ‘나’라고 여기는 잘못된 착각을 말한다. 육입에는 안입(眼入), 이입(耳入), 비입(鼻入), 설입(舌入), 신입(身入),

의입(意入)이 있다. 즉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여섯 가지 주관적 감각기관, 감각기능, 감각활동을 보고 ‘나’라고 여기는 허망한 의식이다.

 

명색이 생기고 나면 명색이라는 대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뜻으로 생각하면서 그러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곧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색을 감각하는 존재를 ‘나’라고 착각하는 의식이 바로 육입이다.

 

허망하게 인연 따라 존재하는 명색을 실제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 대상을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다 보니 그

감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착각하는 육입이 생기는 것이다.

 

당연히 이 육입은 멸해야 할 것이다. 육입은 안이비설신의라는 감각기관과 감각활동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육입을 멸한다는 것은 곧 ‘나’라는 허망한 착각을 멸하는 것으로, 이는 곧 무아를 깨닫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이는 육입이 사실은 인연 따라 생겨난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비실체적인 것임을 아는

것이다. 텅 비어 공하지만 공한데 치우치지 않고, 육입이 실제 있다는데에도 치우치지 않음으로써, 육근이라는 감각기능을 활용하여 잘 쓰면서도 그것이 텅 비어 실체가 없음을 알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육입이라는 허망한 착각, 아상을 소멸시킨다는 것이 곧 여섯 가지 감각기능이 마비되어 쓰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여서 가지 감각기능과 활동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지만 않을 뿐, 우리는 여전히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잘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육근청정이다. 육입처는 소멸하였지만, 육근은 청정하게 수호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깨달았기 때문에 육입은 소멸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근은 청정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육근이 청정해지면, 눈으로 무엇을 보든, 귀로 무엇을 듣든, 코로 어떤 냄새를 맡든, 혀로 어떤 것을 맛보든 그 대상에 휘둘리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는다.

 

위의 식, 명색, 육입은 이상에서와 같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시간적인 선후관계가 아닌 동시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십팔계에서처럼 주관적인 감각기능을 나로 아는 육입과 객관적인 대상으로 인식되는 명색,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인식작용은 세 가지가 함께 작용을 했을 때 일어나는 것인 까닭이다.

 

  

(6) 촉(觸)

 

육입을 조건으로 해서 촉이 있다. 촉이란 육입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나에 의해 접촉되면서 지각되고 감각되는 것들이 외부에 실제로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잡아함경] 298경에서는 촉이란 여섯가지로 눈의 접촉, 귀의 접촉, 코의 접촉, 혀의 접촉, 몸의 접촉, 뜻의 접촉이 있다고 설하고 있다. 즉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나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냄새 맡을 때나 맛볼 때, 감촉을 느낄 때나 생각할 때 의식이 함께 접촉하면서 ‘무언가가 있다는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촉’이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감촉을 느낌으로써 비로소 ‘무언가가 있다’는, ‘존재한다’는 의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촉이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의식’이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촉을 ‘촉입처’라고 부르기도 한다. 입처란 십이입처에서처럼 결국에 우리가 소멸시켜야 할 허망한 의식상태를 의미한다.

 

이 촉입처 또한 멸해야할 허망한 의식이다. 촉을 멸한다는 것은 눈으로 대상을 보지도 않고, 의식하지도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접촉을 하지만 접촉하면서 접촉하는 무언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허망한 착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접촉한 것은, 접촉했기 때문에 실재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확신하는 것들은 주로,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혹은 귀로 똑똑히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로써 존재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눈귀코혀몸뜻이 접촉하는 경험을 통해 그것이 실재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두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정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지라도 자신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고, 환영을 본 것일 수도 있다.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할지라도 잘못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했다고 해서, 육입인 내가 명색인 대상을 분별하여 인식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실재로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전날 밤에 길을 걷다가 뱀을 보고 놀라 먼 길로 돌아갔는데, 그 다음 날 보니 그것이 뱀이 아니고 새끼줄이었다면,

그 뱀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저 허망한 의식 속에서만 있다고 여겼던 것일 뿐이다. 눈이라는 육입으로 뱀이라는 명색을 분명히 보고 접촉했으며, 무서운 뱀이라고 분별심을 내 두려움에 빠져 먼 길을 돌아 집으로 왔지만, 단지 그렇게 내가 실제로 보고 접촉했다고 해서 실제로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처럼 촉 또한 허망한 의식일 뿐이며, 소멸해야 할 의식이다. 촉입처가 소멸하면 우리는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다

있다고 착각하지 않을 것이며, 들었다고 해서 함부로 결론짓지 않을 것이다. 단지 눈으로 보았을 뿐이라고 말할 뿐

보았기 때문에 실재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사건을 모두 함께 목격하고서도 제각기 다른 것을 보았다고

말하곤 한다. 똑같이 같은 장소로 여행을 떠났지만 본 것은 전혀 다르다. 어떤 사람이 본 것을 다른 사람은 못 보았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다 본 것을 나만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았다고 들었다고 맛 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적으로 존재한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촉입처를 멸하게 되면, 이와 같이 다만 보고 듣고 맛보고 경험할 뿐, 그것 때문에 실재론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된다.

 

 

 

 

 

(7) 수(受)

 

촉을 조건으로 해서 수(受)가 있다. 즉, 육입과 명색 그리고 식의 삼자가 촉함으로써 수가 있게 된다. 내가 대상을

접촉하여 있는 것으로 의식할 때 느낌,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외부에 무언가가 ‘있다’, ‘존재한다’고 느끼는 촉으로

인해 그 대상에 대해 좋거나 싫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외부의 대상은 좋거나 나쁜 실질적인 성질을 띠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을 좋거나 나쁘게 느낀다고 여기는 것이다. 만약에 내(육입)가 대상(명색)을 인식(식)하였지만 ‘있다’(촉)고 느끼지 않았다면 좋거나 싫은 느낌(수)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른한 오후, 의자에 앉아 깜빡 졸다가 꿈결인지 현실인지 눈앞에 어떤 환영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해 보자. 내가 대상을 인식한 것이다. 육입이 명색을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이 환영임을 안다. 깜빡 졸면서 일어난 꿈같은 환영일 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 좋거나 싫은 고락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가짜이기 때문이다. 식과 명색과 육입은 있었지만, 촉이 없었기 때문에 수로 넘어오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촉이란 식과 명색과 육입의 접촉을 통해 대상을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의식인 것이다. 대상이 실재로 ‘있다’고 여길 때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좋거나 싫은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같은 수에는 즐거운 감정인 낙수(樂受), 괴로운 감정인 고수(苦受),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정인 사수(捨受) 혹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있다.즉, 안근(眼根)인 눈으로 색경(色境)인 대상을 접촉하여 있다고 인식(識)함에 따라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 혹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안이비설신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색성향미촉법 여섯 가지 대상을 인식하고 접촉하면 좋거나 싫거나 그저 그런 3가지 느낌이 일어난다. 여기에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자의 접촉은 있을지언정 좋거나 싫은 느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다음에 살펴볼 애욕이나 취착으로 이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촉을 조건으로 해서 좋거나 싫은 느낌이 있기 때문에 좋은 느낌은 더욱 취하려고 하고, 싫은 느낌에서는 멀어지려고 하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 등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수는 멸해야 할 것이다. 수를 멸한다는 말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느끼되 느끼는 그 대상에 속지 않는 것이다. 느낌이 진짜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그 느낌은 ‘촉’에서 나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한 좋거나 싫은 느낌은 그 대상이 실재로 ‘있다’고 여겨지는 ‘촉’에서 나왔기에 일어

난 감정일 뿐이다. 그것이 다만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일 뿐,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닌 환영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좋거나 싫은 감정을 깊이 개입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즉 꿈과 같고 환영과 같으며 신기루와 같은, 無常하고 無我이며 비실체인 공한 대상에 대해 좋거나 싫은 감정을 과도하게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느낌을 느끼더라도, 그 느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사유하게 된다면, 그 느낌에 속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수를 멸하는 것이다. 수를 멸하게 되면, 그 다음 지분인 애와 취로 번뇌의 여세를 더욱 키워가며 몰아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중요한 수행법인 사념처에서는 수념처라고 하여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

’을 중요하게 설하고 있다. 좋은 느낌에서 애욕이 생기고 취착, 집착이 생기고 그 집착으로 인해 업을 지으며 괴로운 삶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함으로써 그것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게 되며, 그것은 다만 식,

명색, 육입, 촉에서부터 기인한 인연 따라 만들어진 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보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십이연기에서는 수(受)만 언급되어 있지만,

⟪잡아함경⟫306경에서는 “촉에서 수상사가 함께 생겨난다”라고 함으로써 수 뿐 아니라, 상(想)과 사(思)가

함께 생겨남을 설명하고 있다. 수상사는 곧 오온의 수상행이다. 결국 촉에서는 수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과

행도 함께 생긴다.

 

이쯤에서, 부파불교의 삼세양중 업감연기를 살펴보자. 앞에서, 무명과 행이 과거세의 두 가지 원인이 되었음을

말했는데, 그러면, 그 과거세의 두 가지 인의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현재세의 결과로, 식, 명색, 육입, 촉, 수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세에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해 업[行]을 지었고, 그로 인해 현세에 인간의 감각기관이

생기고[六入], 그에 따른 대상이 생기며[名色], 그 두 가지가 만나 인식작용[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합쳐져 있다고 여겨지는 의식을 촉(觸)이라고 하며, 촉이 있으면 느낌, 감정인 수(受)가 생겨나게 된다.

 

이렇듯, 다섯 가지는 현재세의 결과라고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식(識)이란, 처음으로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가는 단계이며, 명색(名色)은 아이가 어머니 태속에 있을 때 심신(心身)이 점차로 발육하기는

해도 아직 오관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와 같은 것이고, 육입(六入)은 심신이 완전해서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여섯 가지가 모두 갖추진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다. 촉(觸)은 어린 아기가 출생한 후 대략 2~3세 때 외계에 접촉함을

 말한다고 한다. 수(受)는 대략 6~7세 이후에 즐겁다거나 괴롭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현세의

5과다.

  

(8) 애(愛)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愛)가 있다. 애란 갈애(渴愛)로서 욕망, 애욕, 탐욕을 말하는 것으로, 앞서 수(受)에서의

좋고 싫다는 느낌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 좋은 것은 더욱 갈망, 욕망하려 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목마른 자가 음료수를 구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을 욕구하여 만족을

얻고자 하는 본능적 욕심을 말하는 것이다. 수를 조건으로 애가 있다고 한 바와 같이, 낙수(樂受)인 좋은 느낌의

대상을 만나면 자연히 애착과 갈애가 생겨나고, 고수(苦受)인 싫은 느낌의 대상을 만나면 미움과 증오를 일으키게

된다. 미움과 증오 역시 애의 일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수와 낙수 등의 감수작용이 심해질수록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 애착심과 증오심 등의 갈애 또한 커지는 것이다.

 

이처럼 좋거나 싫은 대상에 대한 갈애가 커지게 됨으로써 좋은 대상은 더욱 더 갈망하고[貪心], 싫은 대상은 더욱 더

증오[嗔心]하는 등의 중도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치우침의 어리석은 마음[癡心]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 번뇌야말로

인간이 끊어 없애야 할 근본적인 번뇌의 독인 탐진치 삼독(三毒)심이다. 그래서 12연기의 모든 지분이 괴로움의 원인을 해명해 주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탐진치 삼독 가운데 탐심과 진심의 원인인 ‘갈애’와 치심인 ‘무명’, 이 두 가지를 가장 큰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마음은 12연기의 앞선 지분에서 보듯이 그 근원적인 원인은 무명이라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무명이 근본 원인이 되어 행·식·명색·육입·촉·수라는 과정을 거쳐 좋거나 싫은 대상에 대한 애착과 증오의 분별이 커감으로써 애욕을 키운다.

 

이처럼 갈애는 무명과 더불어 12연기 순관에서 밝히고 있는 괴로움의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잡아함경』913경에서도 ‘중생에게 일어나는 모든 괴로움은 모두 다 애욕이 근본이 된다. 그것은 애욕에서 생기고, 모이며, 일어나고, 애욕이 원인이며, 애욕을 인연하여 생긴다.’고 하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성제를 설명할 때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를 ‘욕망’이라고 설하고 있다. 또 사고팔고(四苦八苦)의 여덟 가지 괴로움이 생기는 직접적인 원인을 갈애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욕망이 무명과 함께 인간 괴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애에는 욕계의 욕망인 욕애, 색계의 욕망인 색애, 무색계의 욕망인 무색애가 있다고 한다.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를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누는데 욕계가 가장 의식이 낮은 존재가 사는 곳으로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의 감각적 욕망을 가진 중생들의 세계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를 비롯해 천상세계 중에는 욕계6천(사천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이라고 하는 낮은 하늘세계의 신들까지를 포함하는 세계다. 색계는 욕계 위의 천인들의 세계로 거친 욕망은 떠나 있으나 청정하고 미세한 색법에는 여전히 묶여 있기 때문에 색계라고 한다. 색계는 남녀의 구분이 없고 음욕도 없는 화생의 세계이며 빛을 먹고 빛을 언어로 삼는다. 무색계는 중생들의 낮은 욕망 뿐 아니라 물질 또한 초월한 세계로 물질적인 존재나 처소가 없는 선정의 세계이며, 순수 정신의 세계다.

 

애를 욕애, 색애, 무색애로 나누는 것은 아무리 높은 천상세계에 있다고 할지라고 근본적으로는 미세한 애욕이 남아

있음을 뜻하며, 그러한 애욕이 남아 있는 이상 삼계를 윤회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애는 윤회에 있어서 그

원동력이 되며, 애욕이 남아 있는 이상 윤회는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당연히 애 또한 소멸되어야 할 십이연기의 지분이다. 애욕이 소멸되면 곧 괴로움이 소멸된다. 수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끊임없이 애욕과 욕망을 버리라고 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욕과 욕망을 소멸할 때

비로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 중에는, 죽을 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애착심이 있다. 첫째는, 자체애(自體愛)라 해서,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로, 경계애(境界愛)라 하여, 사랑하는 사람, 자식, 부모, 재산, 명예 등

내 주위 경계에 대해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며, 셋째로, 당생애(當生愛)라 하여, 다음 생에 좋은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애착심이다. 죽기 직전에 이러한 애욕을 끊어내지 못함으로써 끊임없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9) 취(取)

 

愛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 취는 취착, 집착, 혹은 아집(我執)을 의미한다. 애욕, 욕망에 의해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화하려는 것으로, ‘내 것’으로 만들려고 붙잡아 집착하는 것이다. 애욕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 취착심이다.

 

이러한 취착에는 다시 사취(四取)가 있으니, 그것은 욕취(欲取), 견취(見取), 계취(戒取), 아취(我取)이다. 욕취는

애욕의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취착이다. 끊임없이 애욕의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집으로

인해 더 많이 소유하려 하고, 더 많이 축적하려 하는 것이다. 애욕의 대상에는 색성향미촉의 다섯 가지 대상과

다섯 가지 욕망인 재물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 등이 있다. 이러한 욕망의 대상들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집착심인 것이다. 다음은 견취로 이는 갖가지 잘못된 견해를 진실로 알고 자기화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하는 자기 생각에 대한 집착심으로, 그릇된 의견, 사상, 학설에 사로잡혀 집착하는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경우도 이에 속한다. 계취는 계금취(戒禁取)라고도 하며 그러한 잘못

된 견해나 사상을 바탕으로 행하는 잘못된 삶의 방식 내지는 계율 등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은 아취인데,

아취는 아어취(我語取)라고도 하며 오온의 화합을 참다운 나라고 집착하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다. 즉, ‘나’라는

것은 다만 사대인 색온과 정신인 수온·상온·행온·식온 다섯 가지의 요소가 인연화합 함으로써 잠시 비실체적인

나를 이루었음을 알지 못하고 ‘나’를 실체화하여 집착하여 아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사실 모든 인간고의

뿌리는 앞서 사고 팔고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오취온에 대한 잘못된 집착, 즉 아취에 있다.

 

비실체적인 오온의 집합인 ‘나’를 실체화하는 무명을 일으킴으로써 나를 내세우고자 하고, 욕취와 견취, 계취를

일으키는 것이다. 당연히 이 취 또한 소멸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불교는 무집착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을 중요시 여긴다. 방하착, 모든 집착을 내려 놓으라는 가르침이야말로 불법

수행의 핵심이다. 이러한 무집착, 방하착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착을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12연기를 실천하여 고를 소멸하는 핵심 방법이기 때문이다.

 

 

(10) 유(有)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다. 유(有)란 존재 혹은 생존이다. 혹은 업(業)으로 이해되거나, 존재양식, 생활방식

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욕애, 색애, 무색애 등 다양한 방향의 애욕을 가지고 사는 중생들이 자신이 욕망하는

바의 애욕을 취하여 집착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러한 애욕과 집착을 중심으로 하는 존재방식으로 계속해서

업을 짓게 된다. 그러한 업이 하나의 생존의 존재방식이 되어 다음 생에 어떤 업을 가지고 어떤 곳에서 태어

날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유는 욕계, 색계, 무색계 가운데 어느 곳에 태어날 만한 업을 지으며 살아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유를 업이라고도 하고, 생존, 존재방식 등으로도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유에도 욕유, 색유, 무색유의 세 가지 존재가 있다. 애(愛)에서 욕애, 색애, 무색애가 있었던 것처럼 유에도

욕유, 색유, 무색유가 있는 것이다. 욕애는 욕유, 욕계와 대응하고, 색애는 색유, 색계와 대응하며, 무색애는

무색유, 무색계와 대응한다. 즉, 욕계의 애욕인 욕애가 있으면 욕계에 대응하는 감각적 욕망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욕계의 애를 취착하려는 집착심을 일으키며 그로인해 결국 욕계에 태어날 수 밖에 없는 욕계의 업인

욕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색계와 대응하는 애욕인 색애가 있으면 색애를 취착하는 삶을 살게 되고 결국 색계

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 색계의 업, 색계의 존재 방식인 색유가 연기하는 것이다. 무색유 또한 마찬가지다. 즉

욕계를 초래하는 욕유의 생존방식이 있고, 색계를 초래하는 색유의 생존방식이 있으며, 무색계를 초래하는 무

색유의 생존방식이 있음을 의미한다.

 

쉽게 설명하면, 식욕이나 성욕, 명예욕 등의 욕계의 욕망을 지니며 살아가게 되면 욕계의 감각적 욕망을

집착하고 취하는 삶을 이어가게 되고, 그렇게 애와 취가 계속되면, 결국 욕계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 업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욕유다. 욕계의 애욕을 취함으로써 욕계와 대응하는 삶의 방식으로 굳어지고,

그러한 삶의 방식이 곧 욕계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 업들로 모임으로써 욕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욕유는 욕계의

업들이 생겨나는 것, ‘있는 것(有)’ 정도로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욕계의 업이 있게 되면 그 욕유를 조건으로

다음 지분인 욕계의 세상에 태어나는 생(生)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 색, 무색이라는 나름대로의 욕망의 수준에 따라 각기 집착하는 것이 다르고, 짓는 업이 다름으로써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욕, 색, 무색의 유가 생기면, 그에 따라 생이 생겨난다.

 

부파불교의 삼세양중 업감연기에서는, 앞의 세 가지 애(愛), 취(取), 유(有)가 현재생의 세 가지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 결과로 미래의 두 가지 결과인 생(生), 노사(老死)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현재 살아가면서 애착하고

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에 따른 업(有)을 낳고, 그 업력으로 인해 다음 생(生)을 받게 되며, 자연히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11) 생(生)

  

유(有)를 조건으로 해서 생이 있다. 생이란 업에 의해 태어남으로써 정신적 육체적 기관인 오온과 여섯 감각기관인

육근을 받는 것을 말한다. 유 즉, 업이야말로 태어남이 있게 한 원인이다. 태어남이란 이상에서와 같은 12가지 조건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듯 무명과 갈애 등의 지분을 원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태어남 또한 완전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불완전한 인간의 무명은 또다시 생명에 집착을 가져오고 되풀이 되는 무명과 행위, 애욕, 집착 등을 가져옴으로써 끊임없는 괴로움의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생이란 오온이 생겨나는 태어남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태어나도 태어난 바 없는 불생불멸을 깨닫지 못한 채, 어리석은 무명에 갇혀 이렇게 오온이 허망하게 생겨난 것을 가지고 실제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허망한 마음이 바로 ‘생’이다. 부처님의 지혜에서 본다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은 그저 허망하게 일어나고 사라진 하룻밤 꿈과 같은 일일 뿐이다. 거기에 실체적인 어떤 것은 없다. 본래 생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불생불멸인 것이다. 우리는 그저 매 순간 존재할 뿐이지, 그 존재하는 놈을 상정해 놓고 그 존재하는 ‘나’가 태어나고 죽어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온무아에 무지한 어리석은 중생들의 허망한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는 생사가 나뉘어져 있지만, 12연기를 깨달은 각자에게는 더 이상 생사가 따로 없다.

생이라는 것 또한 이와 같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몸과 마음이라는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태어났다고 개념 짓고, 상을 낼 뿐이지, 본래 생이란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상에서와 같은 12연기를 깨달으심으로써 반열반에 들어 더 이상 생을 받지 않는다. 업이 다하게

되면 업으로 인해 태어나는 업생 또한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지분에서 이야기 되겠지만, 업으로 인해 태어

나면 반드시 업의 과보를 받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과보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노사 우비고뇌의 괴로움이

연기하는 것이다.

 

 

(12) 노사(老死)

 

생을 조건으로 해서 노사가 있다. [증일아함경] 46권에서는 노사를 “늙음이란 중생의 몸에서 이가 빠지고,

머리털이 세며, 기력이 쇠하고, 감관이 녹으며, 수명이 줄어들어 본래의 정신이 없는 것이고, 죽음이란 중생들이

받은 몸의 온기가 없어지면서 덧없고 변하여 오온을 버리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노사란 늙음과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병사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병사 우비고뇌 즉, 늙음과 병듦, 죽음과 근심, 걱정, 고통 번민 등 인간의 모든 괴로움을 의미한다.

 

당연히 앞의 12연기의 각각의 지분이 소멸하게 된다면, 그로인해 연기한 노사로 대표되는 괴로움 또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짐승들의 발자국이 코끼리 발자국에 포섭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에 포섭된다. 그런 점에서 바로 이 노사라는 괴로움과 노사라는 괴로움의 소멸이야말로

십이연기의 핵심이며,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해서 유위의 행(行)이 일어나고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이 일어나며 이 세 가지가 접촉[觸]함에 따라 좋고 나쁜 느낌이 수(受)가 일어나고 연이어 애욕[愛]과

집착[取]을 일으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존재[有]와 태어남[生], 그리고 노사(老死) 등의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 12연기의 순관이다. 즉, 인간의 어리석음이 바탕이 되어 유위의 업인 행이 생기고 그에 따라 인간의

몸과 마음인 육입이 나와 세계라는 대상인 명색을 인식하고 그 세 가지가 접촉함으로써 느낌이 생겨 애욕과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어리석은 업을 계속 짓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과 노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