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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장백산-1 2015. 6. 21. 02:39

 

 

 

 

 그래서 예부터 수행을 잘 하는 사람보다 본래부터 ‘일 없는 사람’ 무위한도인(無爲閑道人)이 한 수

위라고 하여 『證道歌』에서는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은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이라, 공부를 다해 마친 할일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 번뇌 분별심을 없애지도, 참됨을 구하지도 않는다.


 

 이는 바로 마조 스님께서 말씀하신 ‘平常心이 道’라는 말과도 상통(相通)한다. 곧 '佛法은 애써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상심을 유지하여 특별한 일이 없게 함이니, 추우면 옷을 입고 더우면 옷을 벗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면 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깨달으려고 애쓰고, 돈 벌려고 애쓰고,

잘 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작위(作爲) 없이 그냥 물 흐르듯 평화롭게 사는 삶, 그것이 佛法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사는 듯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추우면 옷을 입으면 되는데 '더 좋은 옷'을

입으려 하고, 더위에는 옷을 벗으면 되는데 아까워 벗지 못하고는 더워죽겠다고 한다. 춥고 더운 狀況은

因緣을 말하는 것이다. 因緣 따라 마땅히 應해주면 될 일을 거기에 執着하면서 입지도 벗지도 못하는 꼴이

된다.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또 사랑하다 헤어지게 될 때 자연스레 離別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因緣이란 것이 그렇게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딱 定해진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런데도 대개는 이 사람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執着하고, 어떻게든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만 사랑이 이루어진 것으로 錯覺하는

것이 문제다. 삶을 그냥 간단하게 살면 되는데 공연히 문제를 만들어서 스스로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執着과 分別을 놓고 살면 언뜻 못 살 것 같고, 또 時代에 뒤떨어질 것 같고, 이래저래 안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욕심 집착 분별을 다 놓고 비우고 살 때 참된 平和가 찾아온다. 다 놓고 因緣 따라 그냥 살면,

애써 求하지 않고 平常心으로 살면, '지금 여기 이 자리'가 幸福의 자리, 깨달음의 자리, 眞理의 자리다.

 

이러한 平常心을 馬祖禪師는 무조작(無造作), 무시비(無是非), 무취사(無取捨), 무단상(無斷常), 무범

무성(無凡無聖)이라고 하여 人爲的이고 意圖的인 造作이 없는 마음, 옳고 그름에 執着하지 않는 마음,

좋으면 取하고 싫은 것은 버리는 일이 없는 마음, 존재하는 모든 것이 斷滅하거나 永遠하다는 견해를

떠난 마음, 범부나 성인이라는 차별과 집착이 없는 마음이라고 했다.
 

이렇듯 如如不動한 平常心만 잘 지키면 괴로울 일도 그렇다고 즐거울 일도 없이 마음은 항상 中道의

平和를 지키게 된다. 그러나 아무 일이 없던 平常心에 한 生覺을 일으켜서 執着과 愛欲을 일으키는 瞬間

平常心은 깨어지고 온갖 괴로움이 몰려오는 것이다. 平常心이 한번 깨어지고 나니 회복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지, 그저 잘 지키고 있었다면 다시금 마음을 일으켜 회복할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平常心

이야말로 큰 道다. 이처럼 本來 이 世上에는 아무 일도 없다. 다만 이 世上에 이처럼 수많은 일들이 생겨

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공연히 스스로 일을 붙잡아 문제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스스로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된다. 스스로 執着을 만들어 내지만 않으면 애초의 처음 그 자리, 寂滅의

자리, 平常心의 자리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얼마 이상은 벌어야 한다’거나, ‘내가 어떤 위치 이상은 올라야 한다’는 등의 生覺의

틀을 딱 定해 놓고 거기에 執着한 채 그리 되지 못해서 괴롭다고 하소연한다. 애써 구하려 하지 않아도 그

執着의 틀만 벗어나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온전한 幸福과 平和를 얻을 수 있다는 事實을 놓치고

있다. 그 執着을 내려놓아야 한다. 아니, 아예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을 비롯한 많은 聖人들도

스스로 執着을 만들어 내지 않으셨던 분들이다. 스스로 ‘나다’하는 아상(我相, 에고)을 만들지 않았으며,

‘내 것’이라는 所有의 我執을 일으키지 않았고, ‘내 生覺의 틀’에 갇혀있지도 않았다. 我相과 我執을 위해서

스스로 執着과 利己, 欲心과 煩惱를 만들지 않았는데 다시 놓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미 처음부터

텅~비었고, 고요했으며, 열반(涅槃)의 즐거움에 머물렀음이다.
 

공연히 執着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그것을 없애기 위해 수행을 하느라 애쓰고, 겨우

그것을 없애고서는 수행으로 이겨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어리석은 일들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애초부터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本來 아무 일 없던 그 적적(寂寂)한 자리일 뿐이다. 그러니 수행 잘 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다만 아무 일 없도록 하면 된다. 일을 잘 하는 사람보다 本來 일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간 살아

오며 마음에 만들어 낸 모든 執着과 利己를 가만히 돌이켜 보자. 어린 시절의 천진불(天眞佛)의 마음이

공연한 執着과 煩惱로 인해 얼마나 어두워지고 혼탁해졌는가. 다만 비추어 보되 공연히 마음에 일을 만들어

내지만 않으면 그 平常心의 자리가 불성(佛性)의 자리, 신성(神性)의 자리인 것이다. 
 
- 법상스님,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