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우주의 자비와 사랑, 지혜

장백산-1 2015. 6. 24. 03:13

 

 

 

 


[일요법회 녹취]  지혜와 자비의 삶을 실천하는 방법|영상법문 녹취록


법우 | 2015.06.23. 22:14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258   

 

 

 

이제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고 나니까 이제 아마 빗방울들에 낙엽들도

가을 단풍들이 함께 또 쓸려 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가만히 계절을 보면 이렇게 가을 단풍이 막 한참 단풍이 막 물들 때 있잖아요.

그럴 때 항상 이렇게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아시는가요?

단풍이 확 물들 때 단풍이 낙엽이 떨어질 때 있잖아요.

그 때 항상 비가 옵니다..제가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이 단풍이 떨어질 때 혼자 미처 못 떨어진 것을 도와주기 위한 것으로

宇宙法界의 助力인 거 같은데 그렇게 단풍이 떨어질 만 하니까 비가 와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계절적인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것 하나도 그냥 이렇게 쉽게 쉽게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아닌 거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 이 계절에서도 그렇듯이 계절에서 그때 그때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하는 모든 것들이 조금 더 겉에 드러난 표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서

보게 되면 모든 것이 우주에서의 조화로운 관계들을 항상 아주 본질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그런 것들을

끼게되거든요. 宇宙大自然이 풍요롭게 만들어 내는 곡식들이나 과일이나 이런 것들도 自然의 아주

무궁무진한 도움을 받기 때문에 정확히 필요한 때에 필요한 걸 만들어 내잖습니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도 자연에서는 정확히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만들어서 인간에게 줌으로써

우리를 항상 무한하게 살려주고 있고 우리를 항상 도와주고 있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써 우리를 항상 무궁무진하게 살려주고 있는 겁니다.도와주고 있다.

우리가 겉에 들어난 표면에서 본다면 우리 삶이 고통 받고 있을 때도 많고 또 두려울 때도 많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좌절스러운 순간도 많고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살펴본다면

이 우주는요 항상 우리를 돕고만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우리를 돕지 않은 순간이 없다.

 

왜냐하면, 佛敎에서 가장 重要한 核心思想이 慈悲잖아요.

불교의 가장 중요한 어떤 사상적인 바탕을 하나 꼽으라면 깨달음 이런 게 아닙니다.

깨닫는 게 불교의 목적이 아닙니다. 慈悲가 佛敎의 目的이고 이 宇宙의 本質的인 根源입니다.

存在라는 것 自體는 그 사람의 慈悲를 의미하고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宇宙에 있는 一切 모든 存在는 完全한 사랑으로 품어지고  完全한 자비로써 품어져 있는 존재다.

그래서 그 자비를 보다 완전한 자비를 보다 완전한 우주적인 자비와 내가 '하나' 되기 위해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되는 겁니다.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이 먼저다

그래서 불교에서 불교가 진리니까 불교가 깨달은 사람의 깨달음의 진리니까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을 막 함부로 해서라도 믿게 해야 한다거나

전쟁으로 저 나라를 정복해서라도 저 사람들을 우리 종교로 만들게 해야 한다거나 이런 게 없어요.

 

왜냐하면 진리가 먼저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이 먼저니까 진리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다거나

진리라는 이름으로써 폭력을 가한다거나 나는 진리인데 너희는 진리가 아니니까 나에게 와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진리를 엄청나게 모르는

‘진리에 대한 완전히 무지몽매한 어리석은 解釋일 뿐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 宇宙의 根源的인 生成 原理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根幹을 이루고 있는 本質的인 原理

그게 바로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라고 제가 말씀 드렸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뭐에요? 사랑입니다. 어떤 목사님이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基督敎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딴 거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사랑’ 한 단어로 끝난단 말이에요. 무한한 사랑 그거 하납니다.

이 우주 역사 속에 살아갔던 수많은 현자 성인 이런 어떤 수많은 분들의 가르침을 한번 찾아 보란 말이죠.

아무리 찾아보고 아무리 뒤져봐도 ‘사랑을 베풀 필요 없다.’ ‘자비를 베풀 필요 없다.’

‘그냥 막 함부로 해도 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眞理를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은 사랑과 자비, 무한한 이타심, 상대방과 내가 둘이 아닌

어떤 無分別의 觀點에서의 완전한 사랑 이것을 이야기 하지 않은 성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불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근원을 어떤 자비 동체대비라고 하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라는 나눔이 있는 차별이 없는 완전한 자비를 이야기 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는 자비심이 부족하다고 하잖아요.

조금 더 자비심을 키워야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저 사람이 자비심이 너무 결핍 돼 있어

너무 사랑이 없어. 이렇게 냉정하고 무자비하지?’ 이렇게 이야기를 쉽게 쉽게 하잖아요.

그런데 事實은  이 세상에 사랑의 결핍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사랑이 결핍된 그런 사람 없어요.

자비가 부족한 사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存在라는 것 自體, 그 本質이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의 결핍이란 건 도저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 표면에서 봤을 때는 부족한 거 같고

자비와 사랑이 부족한 거 같고 너무 利己的인 마음으로 가득한 거 같이 보일지라도

그 사람의 根本에서는 결코 그런 마음이 다가 아니다. 그것은 겉에 드러난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지

本質로 들어가서 본다면 누구나 자비와 사랑으로 한껏 充滿해 있고  항상 풍요롭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完全한 慈悲와 사랑 이런 것이 本來 具足 되어 있는 우리를 내 생각 내 판단과 해석을

갖고 막지만 않으면 되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면서 지금까지 해 왔던 일 계속 막는 거였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자비를 완전한 동체대비를 깨닫기 위해서

막 그냥 자비와 사랑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수행을 통해서 없는 자비를 만들어야지 생각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다만 불교는 뭐냐 하면 새로운 자비와 사랑을 깨달음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항상 충만해 있는 사랑 자비를 生覺과 分別 판단 해석으로 덮어놓고 있었단 말이에요. 잠시.

생각 분별 판단 해석 그것만 치우면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과 자비와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덮어 놓고 있었던 아상(我相)과 이기와 두려움 이런 것들만 걷어내면 된단 말입니다.

잘못 된걸 걷어내면 되는 것이지 좋은 것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이미 만들어져 있고 이미 구족 되어

있으니까 불교에서는 破邪顯正 이럽니다. 바른 것을 드러내기 이해서 삿된 것을 파하면 되는 것이지

바른 것을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온전한 지혜 온전한 사랑 온전한 자비가 완전히 원만하게 구족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소리에요. 완전한 자비와 완전한 사랑이 우리의 本質인데 우리가 그 사랑을 왜 걷어찼을까요?

어떤 구조를 가지고 그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게 됐을까요? 그게 바로 아상(我相)입니다. 아상(我相).

에고(ego). 사랑이라는 게 나와 너라는 분별이 있겠습니까? 사랑은요 항상 넘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꽉 차 있고 가득 차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서는요 딴 게 할게 없습니다.사랑을 채울 게 없어요.

사랑을 채우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필요치 않습니다. 사라이 항상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항상 가득 차 있는 사랑에서는 뭐가 필요할까요? 뭘 하게 될까요?

항상 충만해 있는 사랑에서는 자비와 사랑이 가득 차 있으니까 '나눠주는 것' 외에 할 게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나누는 것 밖에 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고 나누기는커녕 내 것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것만이 우리들의 삶의

어떤 목적이 돼 버렸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다.사실은 이 말도 잘 못 된 말이다.

누가 누군가를 사랑할 순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나와 너라는 틀이 완전히 없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동일하게 내가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거는 사랑하기로 한번 마음 내 줄게. 그 말 자체는 뭐냐 하면 벌써 分離 돼 있단 소리에요

너와 내가 分離 分別돼 있다. 分離돼 있는데 내가 너를 사랑해 주겠다.

네가 아주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그러기 때문에 난 넓은 사람이고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기에 너를 한번 내가 사랑해 주겠다.

이건 ‘사랑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하는 얘깁니다.

나라는 것을 만들면서부터 우리는 사랑이라는 거 자비라는 것을 걷어차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을 만든다는 그 자체가 사랑과 자비와는 거꾸로 가는 거에요

내가 만들어지면 나와 반대되는 相對가 만들어지고

내가 만들어 졌을 때 나를 위해 내가 만든 虛象 그것을 구축하기 위해서 애를 쓴단 말입니다.

아상(我相)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만 끌어 들인단 말이에요.

 

사랑하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 사실은 우리가 깨닫기 前에

우리 중생들이 사랑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면 眞正한 사랑이 아닙니다.

조금 냉정하게 말하고 좀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지만 조금 냉정하게 본다면요.

우리가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利己的인 사랑, 計算된 사랑, 내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사랑일 뿐입니다. 그 사랑이 아무리 부모자식 지간이 됐을 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 됐을지라도

부부지간이 됐을지라도 우리가 중생의 어떤 관점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라고 했을 때

그 사랑의 배후에 무엇이 깔려 있는가를 보란 말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필요,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相對方을 끌어들이는 거에요. 좀 냉정하게 말한다면...

본래는 원래는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자비인데 나라는 아상(我相)이란 것을 만들면서부터

에고(ego)라는 것을 만들면서부터 나다라는 생각을 구축해 놨습니다.

나라는 견고한 아상(我相)의 틀을 만들어놨단 말입니다.

그 틀을 만들었다는 거 자체가 본질적인 사랑 본질적인 자비를 걷어차 버렸다 이 소리입니다.

本來의 사랑과 자비가 늘 아상(我相) 때문에 아상 뒤에 감춰져 있단 말입니다.

감춰지니까 우리는 또 다른 사랑과 또 다른 자비를 갈구할 수 밖에 없어요.

우리는 사랑과 자비가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랑과 자비를 갈구한 단 말이에요.

뭔가 공허한, 사랑이 없는 空虛感 이것을 채우려고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관계 거짓된 자비를

쫓아가고 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에서 외롭지 않습니까? 좀 고독하지 않습니까? 홀로 있을 때

그러다 보니까 어때요?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 결핍된 사랑과 자비를 채우려고 합니다.

결핍된 줄 錯覺하니까 이것을 채우려 한단 말이에요. 어떤 방식으로 채우려 하냐 하면

特別한 사랑 特別한 관계를 만듦으로써 그것으로써 내 부족한 공허함을 채우려 합니다.

나와 특별한 관계다. 특별한 관계라면 가족도 특별한 관계죠. 사랑하는 사람도 특별한 관계고

친구나 친척이나 나와 因緣을 맺고 있는 사람은 모두 특별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하는 特別한 관계는 어떻습니까? 나의 이기심이 개입된 관계입니다.

나의 필요가 개입된 관계고 나의 아상(我相)이 개입된 관계입니다. 조금 거꾸로 생각해서요.

우리가 만나는 일체 모든 사람을 完全히 平等하게 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랑은 아상(我相)이 개입되지 않은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한 관계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되는가?’ 도움이 되는 사람과는 조금 더 친분을 유지하고

싶어하고 도음이 되지 않고 심지어 나한테 와서 계속 시비만 걸던가 너무 말이 많아서 정신이

복잡하던가 뭔가 이기적으로 나한테 와서 뜯어내려고 한다던가 이런 사람에게조차 마음을

동등하게 열 수 있어야 되는데 우린 그렇지 못하거든요. 선택적으로 받아 들인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을. 관계를 맺을 때 선택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특별한 사람과만 관계를 맺어요.

그런데 그 특별한 사람이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충족된 관계입니다.

 

그러니까..에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건 이거는 이기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중에 가서 자식에게 바란단 말이에요.대학교 좋은 데 가주기를 바라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를 바라고 내 뜻대로 해 주길 바란단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종류의 사람을 이성을 아내로

맞기로 바라고 남편으로 맞기를 바란단 말입니다. 부모님 마음속에.

둘이 아무리 사랑한다 할 지라도. 경제력을 항상 보게 되고 뭔가 바라는 맘이 개입이 되는 사랑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찌 보면 기형적인 관계이고 기형적인 인연이죠.

기형적인 사랑이고. 온전한 것이 아니다. 하는 소리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의 공허함을 메우려 하고 그런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기형적인 사랑, 온전한 사랑이 아닌 사랑을 통해 나의 공허함이 메워집니까?

결코 메워질 수가 없다. 사랑을 한참 할 때는 그냥 잠깐 그 사랑의 감정에 지배가 되어서

잠시 나의 외로움이 극복된 거 같습니다. 나의 공허함이 채워진 거 같단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슴을 달구던 뜨겁던 사랑은 사라진단 말이에요.

또다른 로맨스를 꿈꾸고 또 다른 사랑을 꿈꾸고 또 다른 나의 공허함을 메워 줄 사람을 꿈 꿉니다.

사실 정말 우리가 외로운 것은 홀로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있는데도 외롭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있어도 외롭거든요. 가족과 함께 있어도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관계 자체가 완전히 순수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아상(我相)이 개입된 관계 아상이 개입된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상(我相)과 에고(ego)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은 우리의 사랑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아상(我相)에 입각한 어떤 세속적인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 법계, 나의 좀더 깊은 본질적인 자아에서는 본질적인 참나에서는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자비로  항상 우리를 적시고 있습니다.

이 우주는 항상 완전한 자비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가 이 우주 법계의 진리를 외면할지라도

진리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는 법이 없다. 진리는 항상 완전하게 백퍼센트 우리 편으로써

우리를 항상 돕고 있고 항상 도와주고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누구다?

나죠. 나!. 아상, 에고...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나일 뿐이지 내 바깥이 아닙니다.

이 우주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 힘들고 괴롭잖아요. 답답하잖아요. 삶이 고되잖습니까?

나는 가만히 있는데 신종플루라는 게 갑자기 나타나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자나요. 그런데 이게 엄청난 錯覺입니다. 우리 중생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錯覺입니다.

어떤 신종플루라는 바이러스나 무슨 전염병 같은 것이 나를 공격한다. 이거 우리네들의 엄청난

착각입니다. 적이 나를 괴롭힌다. 저 사람 직장동료 저 아주 성격 나쁜 직장동료 내지 직장상사가

나를 괴롭힌다. 이건 우리들의 착각입니다. 결코 우리 외부의 외부적인 것은요 우리를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의 本質的인 意味를 아셔야 되거든요.내 바깥에 있는 어떤 것도 나를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신종플루가 아니라 신종플루의 할아버지가 와도 우리를 신종플루에 감염 돼서 죽게 만들

수 없단 말이에요. 그 어떤 바이러스도 우리를 죽게 만들 수 없다. 그것 자체만을 가지고는

바깥에 그것을 가지고는 그 모든 것은 누가 만든거냐면 내가 만든 겁니다.

 

같이 비행기 안에 탔던 사람이 15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그 비행기 탄 사람들은 전부 다

신종플루에 감염됐다 어떻습니까?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삽니다. 아무리 별의 별 짓을 해도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삽니다. 쓰나미가 확 그냥 덮친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 죽는 사람 있고

사는 사람 있습니다. 정면으로 덮쳤던 사람들조차 비행기에서 뚝 떨어져 비행기가 추락을 해도

사는 사람은 살고 죽는 사람은 죽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내 안에 신종플루가 감염될 原因

因子가 없다면 그것이 아무리 우리 법당을 그냥 막 뒤집어 논다 해도 내가 거기 감열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 씨앗은 나에게서 시작한다는 얘기입니다. 그 씨앗은 나에게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물론 겉에 드러난 이치를 봤을 때는 표면에서 봤을 때는 바이러스가 날 죽인 거에요.

바이러스가 날 감염시킨 거에요. 그러나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간다면

내가 그것을 끌어들인 겁니다. 어떤 것들? 이를테면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

부정적인 말 부정적인 행동 부정적인 생각 두려움 혹은 어떤 내 감정 불안한 감정 두려운 감정

혹은 나의 생각 관념들 ‘야 이거 잘못되면 어쩌지?’ ‘내가 금방 어떻게 잘못되면 어쩌지?’

‘죽으면 어쩌지?’ 온갖 生覺 生覺 生覺들 그리고 나의 意圖나 欲求나 反應들.. 모두가

나의 마음에서 먼저 시작되는 겁니다. 항상 문제는 내 마음에서 먼저 시작이 돼야지만

그것이 바깥으로 투영될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은요

이 세상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펼쳐내는 여러분의 세상 여러분의 세상이라는 것은요.

여기 지금 한 250분이 앉아 계신다. 250명에게 있어서 지금 동일한 세상을 살고 있고 지금 동일한

법당에 앉아 있잖아요. 절대 이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250명이 바라보는 250가지 세상이 있습니다.

250가지 세상은 전혀 다른 차원이에요.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지옥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지옥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동일한 걸 하면서도

극락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 안에서 어떤 생각을 만들었느냐? 내 마음 안에서 내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 냈느냐

하는 것이 내 내면에서 내가 먼저 만들어 낸 것 그것이 外部로 投影되고 投射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여러분이 만들어 낸 세상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어요?

이 수많은 56억 인구가 만들었을까요? 인류 역사가 만들었을까요?‘아니다. 내가 만들었다.’는 소리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는 세상은 여러분이 만들었지 결코 이 우주가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만든 것도 아니고.

 

무슨 과학자 한 사람이 핵폭탄을 만들어 가지고 그 사람 때문에 세상의 위기가 처했거나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그 세상에 산다는 것 자체는 우리가 동조했다 일조했다는 얘기입니다.

신종플루가 나타났다. 온갖 기상이변이 일어났다 세상이 재앙으로 치닫고 있다

이것에 우리가 전격적으로 개입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 그 공포에서 거기에 놓여나지가 않는다

그냥 그 세상을 산다는 것 자체는 우리도 일단 거기 개입이 되어 있단 얘기입니다.

이게 여러분 그냥 제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이건 직접적인 얘기입니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전적으로, 전적으로 내가 만든 겁니다.

내 안에서 시작되는 거다. 내 안에 그것이 없으면 현실에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없는 것은 바깥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소리에요.신종플루를 걱정해야 되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의 자세를 걱정해야 합니다. 내 안의 業을 걱정해야 되고 이 세상이 지금 말세로 치닫고 있다.

이런 게 걱정해야 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내 내면의 내 마음이다.

모든 것은 내가 내 마음에 있는 것이 투영돼서 바깥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내면의 본질은 완전한 자비와 사랑이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완전한 자비와 사랑을 투영하기는

커녕 우리 마음속에 하루 종일 24시간 사랑과 자비가 가득 차 있습니까? 아니란 말이에요.

24시간 우리 마음은 이기와 아상(我相)과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잘될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성공할까

좀 더 남들에게 인정 받아볼까 나를 드러내볼까 바램과 욕망과 집착을 채워볼까

이런 거에 관심 있단 말입니다.우리가 關心 있는 부분이 우리 삶에 펼쳐져 나갈 수 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이 世上의 本質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과 고통과 괴로움을 창조해 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本質은 무한한 사랑이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무한한 사랑을 구현하기 위하여 항상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제가 그 말씀 드렸죠? 여러분 앞에 펼쳐 치는 모든 일 여러분 인생에 벌어지는 우리 삶에

벌어지는 모든 일은 어떤 일이냐면 나를 돕기 위한 이 우주법계의 자비로우신 행이다.

‘부처님의 자비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다’ 말입니다. 우리한테 벌어지는 모든 일은 우리를 돕기 위한

우주의 전방위적인 도움이다. 우리가 표면에서 봤을 때는 우리를 돕는 게 아닌 거 같아도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돕기 위해서 이 우주법계로부터 계획된 거란 말입니다.

진리의 세계에서 계획된 일들만이 나에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그런데 그것은 자비로운 계획이란 말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계획이란 말입니다.나를 완전하게 돕기 위한 계획이다.

 

그런데 이게 눈으로 봤을 때는 나를 괴롭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나는 대학교를 좋은데 가고 싶은데

대학교 좋은데 갈 성적이 안 나왔단 말입니다.이게 우주가 나를 괴롭히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그것이 아니다.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자꾸 직장에 갔는데 그 직장에서 직장상사가 나를 미워하고 직장에

있는 사람이 자꾸 나를 미워한단 말입니다. 결혼했더니 아내가 나를 미워하고 남편이 나를 미워하고 주변의

친구들도 나를 자꾸 헐뜯으려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겉으로 봤을 때는

‘야 이 세상이 그냥 나를 온 세상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도대체 내 편이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뭐냐 하면 이 우주 전체가 내편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마련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한 단계 진보할 수 있고 성숙할 수 있고 한 단계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 일을 나에게 만들어 준 것이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우주는 완전환 지혜와 완전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지혜와 사랑이 가득한 곳이 이 우주법계 아니겠어요?

부처님은 뭐를 깨달은 분이다? 지혜와 사랑을 깨달은 분입니다.

본래 우주의 본질이 지혜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분이란 거에요.

지금 여러분 앞에 펼쳐진 모든 일들 아까 절에 오다가 갑자기 옆에 차가 웅덩이에 휙 지나가면서

흙탕물이 나에게 확 튀었다.지금도 찝찝하다. 그것도 우주가 나를 절묘하게 나를 돕고 있는 일환이다.

아주 사소한 것 조차. 아주 사소한 것 조차 나를 돕는 일환이다. 그 생각을 못하거든요 우리는

왜 그렇게 생각을 못하냐 하면 내 생각으로 봤을 땐 그게 아니거든요.

내가 내 생각 판단으로 봤을 때는 그게 아닙니다. 세상이 날 죽이는 거 같아요.

뭔가 하는 대로 승승장구 해야 하는데 안 된단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펼쳐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돕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여러 분을 돕는 것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뭡니까? 富者 되는 거 아니겠어요?  億萬長者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는 것은 나를 도와줄까요? 어마어마한 무지막지한 돈이 나에게 왔다.

그것이 나를 도울까요? 결코 돕지 못합니다. 우리는 돈이 이나마 적으니까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欲心은요 이건 공룡같이 돼 버려서 우리는 더 무지막지한 罪를 지을 지 모릅니다.

많으면 문제가 된다 말이에요. 항상.우린 항상 보면 뭔가 많이 所有하고 있을 때 항상 問題를 일으키는데

우리는 끊임 없이 많이 소유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이 진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유하면 행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거 안다고 생각하죠?

여러분은 人生을 안다고 生覺합니다. 내가 이제 나이가 사십 육십이 됐는데 인생을 모르겠느냐?

人生을 잘 안다고 生覺합니다. 工夫 많이 한 사람은 더욱 더 인생을 많이 안다고 生覺하고

과학자나 삶에 대한 어떤 많은 洞察 있는 사람들은 더욱 더 그렇다고 生覺하겠죠.

 

여러분 안다고 생각하는 게 진짜 아는 걸까요?

우리는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안다고 생각할 뿐이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아주 단순한 사실조차 아주 간단한 사실조차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 먹는 사과가 몸에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대답 (좋습니다)

 

좋다고 일각에서는 보약이라고 말하잖아요. 그럼 일률적으로 아침에 먹는 사과가 다 좋을까요?

사과가 안 맞는 사람도 있어요.그러면 이 세상 수 많은 인구 같은데 어떤 몇 사람에게는 사과가 좋고

몇 사람에게는 안 좋을까요?

 

인삼, 인삼이 몸에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산삼이 몸에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대답 (좋습니다)


산삼이 아주 치명적인 사람도 있죠. 산삼이나 인삼이 그거 먹으면 끝장나는 치명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체질에 따라 다르다. 어떻게 무엇이 나에게 좋은지 안 좋은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습니다. 아주 단순한 그 어떤 거 하나 음식 녹차가 몸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精神이 먹는 음식이다. 녹차는 정말 아무리 먹어도 좋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다.

無條件적으로 좋다 無條件적으로 나쁘다 이렇게 이런 知識으로 나눠 놓을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 知識의 構造는 어때요? 이건 좋은 거 이건 나쁜 거 이건 도움이 되는 거 이건 안 되는 거

음식 중에도 어떻습니까? 우리가 공부해 보면 어때요? 좋은 음식 나쁜 음식으로 나누지

어떤 사람에게는 좋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쁘고 이런 구조가 잘 없습니다.

물론 東洋에서는 그나마 그것이 補完이 되어서그나마도 太陰人에는 어떤 게 좋고 少陰人에는 어떤 게

좋고 이런 식으로 나눠 놨지만 조금 근접하긴 했으나 사람을 네 가지로만 무조건 탁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제각각 다 다르거든요. 사실은 만 명 있다면 만 명 전부다가 획일적으로 좋고

획일적으로 나쁜 건 없겠죠.

 

제가 전에 보니까 韓國産 가시오가피가 세계적으로 알아준대요. 그런데 그게 알고 봤더니

한국에서 가시오가피에 투자를 해가지고 어떤 투자를 하냐면 가시오가피를 만들기 위해 투자를 하는 게

아니라 硏究를 하는 겁니다. 연구. 우리가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이 實相은 뭔 줄 압니까?

제가 學者들에게 얘기를 들은 거에요. 그 분 강의를 하는데 그 당시에 들었을 때는 되게 충격적이었는데

우리가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의 그 實體가 뭐냐 하면 그분 얘기가 그래요.

가시오가피에 대해서 어떤 식물에 대해서 硏究費를 投資를 하지 않습니까?

몇 億을 투자해 가지고 학자들에게 이것에 대해서 효능을 연구해라 딱 준단 말이에요.

그럼 돈을 많이 줘서 많은 학자들에게 거기에 많은 연구를 하도록 투자하잖아요.

 

그  植物은 어마어마한 效能이 있는 걸로 둔갑을 합니다. 모든 식물은 엄청난 효능이 있어요.

좋은 효능이 분명히 있습니다. 모든 것들은. 커피가 몸에 안 좋다 했잖아요.

그런데 요즘에 와서 어떻습니까? 커피가 몸에 좋다는 연구결과가 엄청나게 나오고 있어요.

어떻게 커피가 몸에 좋기만 하고 나쁘기만 하겠습니까?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겠죠.

연구비를 투자해서 좋은 점 쪽으로 투자를 하게 되면요. 그것은 엄청난 좋은 것으로 둔갑을 합니다.

가시오가피 막 엄청난 연구비를 투자 했더니 엄청난 데이터가 나와서 이게 막 홍보가 되고 나니까

값이 막 급등을 한답니다. 하다못해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민들레조차 연구비를 어마어마하게 투자해

가지고 연구비를 줘서 효능을 밝혀 내라고 하면 민들레의 어마어마한 효능을 밝혀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민들레가 안좋은 쪽으로 연구해라 하면 안 좋은 쪽으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실적으로 실제 알고 보면 황당한 일인데요. 연구논문이라고 하는 거 과학적으로 증명된 연구논문이라고

하는 거 意圖한 바대로 충분히 바꿀 수 있습니다. 自己가 意圖한 바대로 연구논문의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意圖한 바대로 충분히 낼 수가 있어요. 통계라는 것의 엄청난 맹점이 많습니다.

똑 같은 것이 어떤 논문에서는 아주 좋은 것이고 어떤 논문에서는 아주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단순한 사실조차 아직까지 결론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과학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계란이 몸에 좋습니까? 이거 답을 낼 수가 없습니다.

우유가 몸에 좋으냐 안 좋으냐? 답을 낼 수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아주 사소한 의문조차도 결코 답을

낼 수가 없다. 감기 걸리면 감기약 먹죠? 약국 가면 다 감기약 주잖아요.

제가 아는 의사분 아는 약사분 감기약 절대 안 먹는 답니다.감기약 자체가 얼마나 안 좋은 성분인지 모른다.

예전에 제가 하도 코감기 훌쩍거릴 때 누가 코감기 약을 줘가지고 아는 분이 계셔서 이거 뭔지 좀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제가 약을 잘 안 먹거든요. 놔뒀더니 왜 이렇게 나뒀냐고 그냥 뭐 한번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엄청 안 좋은 性分이랍니다.강제적으로 콧물 나고 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일시적으로 확 틀어막는 그런

거라서 아주 안 좋은 그런 것들이 있다는 거죠.

 

우리가 안다고 生覺하는 아주 사소한 것조차 사실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것조차 알 수가 없다니까요. 대학교를 A라는 대학을 가는 게 좋은 지 B라는 대학을 가는 게

좋은 지 알 수 없습니다. 하루에 밥을 한끼 먹는 게 좋습니까? 두끼 먹는 게 좋습니까? 세끼 먹는 게 좋

습니까? 우리나라는 세끼를 먹죠. 어떤 나라는 두끼를 먹습니다. 부처님은 한끼를 드셨습니다.

몇 끼 먹는 게 좋아요?

 

잠을 5시간 자는 게 좋을까요?  7시간 자는 게 좋을까요?  8시간 자는 게 좋을까요? 답이 없단 말이에요.

우리 인생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게 좋을지 내가 사업을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그냥 취직 하는 게 좋을지

어떻게 이게 답이 있습니까? 자식을 유학을 보내는 게 좋을지 안 보내는 게 좋을지 답을 낼 수가 없어요.

어떤 한가지가 절대적인 답이라고 한다면 그런 답은 도저히 낼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눈으로 봤을 때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쁜 것 일수도 있고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아주 큰 고통을 당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더 잘되려고 그랬던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주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봤더니 그것 때문에 인생 망쳤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군대 안 갈라고 막 뒷돈 들여서 돈도 들이고 일부러 아픈 것처럼 하고

오히려 막 부러뜨리고 해서 군대 안간 사람이 있다잖아요. 그때는 성공했다 생각하지만 뒤늦게 잡혀

가지고 군대 또 가는 사람도 있고 감옥 가는 사람도 있고 그러지 않겠어요.

내가 했던 어떤 판단도 우리가 완전히 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완전히 아는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 인생에서 ‘나는 이것만은 분명히 백퍼센트 안다.‘

이런 게 있을까요? 어떤 박사라도 그 박사님께서 그 분야에 대해서 완전히 알까요?

절대 완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개미를 연구하는 박사가 개미에 대해서 젤 궁금한 게 많습니다.

젤 의문이 많고 풀어야 할 개미에 대한 숙제가 많아요.

 

안다고 생각하는 말 자체가 얼마나 큰 虛構인지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된다.

우리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내가 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오직 모를 뿐입니다.

‘이 뭐꼬?’ 이것 밖에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내가 안다’ 라고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오직 모를 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직 모를 뿐!’. ‘이 뭐꼬?’ 하는 화두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알 수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안다 나는 옳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대는 모른다 상대는 틀렸다 하는 것을 반증합니다. 우리는 宇宙를 相對로 宇宙 法界를 相對로

眞理의 世界를 相對로 ‘나는 안다’ 이렇게 함으로써 眞理의 世界에서 내려 온 解答을 막고 있다.

眞理의 內容이 틀렸다고 손가락질 하는 겁니다 ‘내가 맞다’는 얘기는 진리는 틀렸다

상대방이 틀렸다 ‘내가 옳다 내가 맞다’는 너는 틀렸다 이 얼마나 교만한 거에요.

 

‘내가 안다’ 라고 生覺하는 게 얼마나 교만한 겁니까? 우리가 살다가 보면 답이 안 나오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은 답이 안 나오는 게 많은 게 아니라 답 나오는 게 잘 없죠

論理的으로 答을 내려고 했을 때 어떻게 낼 수가 있습니까?

부모님들은 생각하거든요. 자식은 나이가 어리니까 자식의 판단보다 부모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부모도 알 수 없고 자식도 알 수 없습니다. 인생에 대해서는 부모도 백프로 알 수가 없어요.

논리로는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부모님은 논리적으로 자식보다 더 많이 배웠고 지식이 더

뛰어납니다.

 

그러나 宇宙法界의 全方位적이고 全 宇宙的인 도움 全 宇宙的인 智慧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알 수 없습니다 진리의 세계가 하는 일을. 우리는 여기나 거기에서 오십보 백보입니다.

부모님도 모르고 자식도 몰라요.그런데도 공부 많이 한 사람이나 부모님은 혹은 권위가 있는 사람은

내가 더 많이 안다고 生覺함으로써 相對方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眞正한 慈悲와 진정한 사랑이 本來 우리에게 完全하게 具足 돼 있습니다.

그런데 ‘안다’고 生覺함으로써 ‘안다’라고 分別하고 解釋함으로써 이 세상을 내 식대로 해석함으로써

그런 것들이 無限한 자비와 無限한 지혜를 덮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지혜 지혜와 자비를 완전히 구족한 우리가 살아면서

그 자비와 지혜를 원만하게 쓸 수 있을까요? 내가 안다는 생각을 놓아버려야 됩니다.

그야말로 ‘오직 모를 뿐!’ 하고 갈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生覺 分別 比校 解釋 判斷을  탁 놔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해석, 판단중지!

이 세상은요. 이세상은. 여러분 이거 중요한 얘기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즐거운 일도 생기고 괴로운 일도 생기죠?

사실은 그것은 虛想입니다. 幻想입니다. 가짜 거짓입니다.

우리 삶은 즐거운 일도 생기고 괴로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사실은 뭐가 생기는지 아세요?

‘즐겁다’ 라는 解釋이 있고  ‘괴롭다’ 라는 解釋이 있을 뿐입니다. 모두 다 幻想일 뿐입니다

 

여러분들 저 스님들 먹는 고수 있잖아요, 고수 고수 맛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그거 못 먹겠다고 손사래 치거든요. 외국인 분들한테 우리나라 제대로 만들어진 청국장

찌게 한번 먹으라고 해보세요. 더구나 둥그렇게 한 몇 사람 둘러 앉아서 숟가락 내 입에도 들어가고 지

입에도 들어가고 몇 사람 입에 들어갔다 나왔다 한 숟가락이 전부 다 조그만 된장찌개 넣었다 뺏다

넣었다 뺏다 수십 번 한 청국장 찌게를 외국인들한테 먹으라 해보세요. 한국 사람 이런 더러운 사람들이

다 있나 하고 이렇게 똥 냄새 나는 것을 저 더러운 숟가락으로 지네 입에 들어간 걸로 침 다 튀긴 걸로

먹는다고 정말 황당해 한단 말입니다. 외국 사람 입장에서는. 그 사람들한테 그거 먹으라고 하면 올릴

지도 몰라요. 그냥 먹고 나서 욱하고 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맛있게 먹거든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먹고 욱하고 올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먹고 아주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그 飮食 自體가 괴로움이고 즐거움입니까? 그 음식은 中立입니다. 어떤 判斷도 할 수가

없어요. 그 음식 가지고는 그 음식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 음식은 맛있는 것도

아니고 맛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옛날에는 맛 없었던 게 지금은 맛 있는 게 있잖아요.

저도 어렸을 때는 파를 싫어했던 거 같은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파가 맛있잖아요.

파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파에 대한 解釋이 좋거나 나쁠 뿐인 겁니다.

 

그래서 실제 그런답니다.우유를 못 먹는 사람이 있어요.우유만 먹음 올리는 막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최면을 걸어놓고 우유를 주면 아주 맛있게 먹어요.

그 사람은 우유를 먹으면 무조건 백프로 올린답니다. 그리고 설사를 한답니다.

최면을 걸어놓고 우유를 먹였어요. 그리고서 주스를 줬다고 합니다.

그러고 최면을 깨웠는데도 불구하고 절대 안 올리고 설사도 안 한다는 거에요.

우유만 먹으면 무조건 백프로 설사를 하는 사람이 설사를 안 한답니다

양파를 줘도 맛있게 먹잖아요. 사과라고 하면 사과라고 먹잖아요.

 

우리가 느끼는 우리 삶에서의 모든 괴로움들은요 나의 解釋이 괴로운 거지 삶이 괴로운 게 아닙니다.

결코 解釋이 괴로운 것이지 삶이 괴로운 게 아닙니다. 우리가 괴롭다고 했던 그 순간조차 어느 순간에는

너무나 행복한 순간일 수가 있거든요. 제가 인도에서 그 더운 곳에서 나름대로 있다가 한국에 오니까

여름에 땀 나고 그러면 찝찝하잖아요. 인도 갔다 오고 나서는 어지간히 땀 나도 찝찝하지가 않아요.

땀 범벅이 되어 있어도 찝찝하지가 않아요. 막 땀 나고 나면 샤워해야 할 거 같잖아요.

땀나고 나면 냄새 날 거 같고 그런데 이 화장품 바르는 거보다 훨씬 좋은 게

땀으로 촉촉한 게 이게 제일 좋은 화장품이랍니다. 겨울에 특히나 겨울에는 때가 많잖아요.

겨울엔 때가 좀 있어야 한답니다 땀이 좀 있어 가지고 촉촉하고 자주 샤워하고 할 필요가 없다.

막  자식들의 때를 박박 벗겨주잖아요. 자식들. 때도 좀 있어야 하고 땀도 좀 있어야 한다.

그게 천연보호막을 형성해 준다는 겁니다.그것을 알고 나면 어떻습니까? 땀 나면 기분 좋습니다.

땀 좀 있어도 괴롭지 않단 말이에요. 이렇듯이 生覺이 現實을 바꿔 놓습니다.

찝찝했던 現實이 찝찝하지 않은 現實로 바뀌어요 生覺하기에 따라서....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모든 괴로움들은 나의 解釋이 괴로운 거지 삶이 괴로운 게 아닙니다.

결코 解釋이 괴로운 것이지 삶이 괴로운 게 아닙니다. 우리가 괴롭다고 했던 그 순간조차 어느

순간에는 너무나 행복한 순간일 수가 있거든요.

인도 사람들 45도 50도 어떻게 사나 싶죠? 그 사람들은 그걸 덥다고 생각 못해요.

항상 거기서 살았으니까 40도란 온도가 한국 사람한테는 어마어마한 더위인데

인도 사람들에게는 더위가 아닙니다. 인도 사람들은 18도 20도만 되잖아요. 얼어 죽습니다.

우리는 쾌적하게 다니는 온도에서 그 사람들은 얼어 죽는다. 溫度라는 게 實體가 없다는 말입니다.

괴로운 狀況 즐거운 狀況은 固定 不變하는 독립적인 實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를 테면 어떤 시험 무슨 임용고시를 봤다 대학 수능 시험을 봤다.

아니면 무슨 뭐를 봤다. 시험에서 떨어졌다 하는 事實은 그것이 괴로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닌 또 다른 것을 둘 중에 다른 것을 選擇할 수 있는 機會 인거지 실패한 게 아니에요.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지 새로운 기회지.

失敗는 뭐가 失敗냐면 내 마음이 失敗이지 내 마음이 失敗라고 生覺하고 解釋하고 判斷하니까

그것이 괴로움으로 낙인 찍히는 거죠. 제가 그 생각을 해 봤습니다..불교를 공부한 다음부터는

그렇게 괴로운 일들도 별로 안 생기고 좋은 일들만 자꾸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아 불교를 공부하니까 야 역시 부처님의 加被에 의해서 좋은 일만 생기는구나 하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되돌아 보니까 좋은 일들만 생겼던 게 아닙니다.

좋은 일만 생겼던 게 아니에요.

 

그전에는 이를 테면 내가 어디를 가야 될까? 예를 들어 직장을 옮긴다 하면 어디를 가고 싶다 하는

執着이 있고 固執이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만났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은 만나면 싫다.

같이 지내는 사람 중에 야 이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랑 같이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나름대로의 生覺의 틀, 굴레, 프레임(frame)이 있는 겁니다.내가 좋은데 가면 좋고 싫은데 가면

싫다 좋은 사람 만나면 좋은데 아주 성격 안 좋은 사람 만나면 괴로운 겁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맘이 바뀐 거에요.

 

제가 군법당에 있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평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엔 군종병이 정말 진짜 말도 안되게 말썽을 피우면서 아무것도 안하면서 너무나도 황당하게

일을 벌려 놓고 그럴 때도 있었고 , 신도회장님께서 모든 것에 막 그야말로 막 딴지를 걸고 이런 사람

들도 있었어요. 군이다 보니까 지휘관도 정말 황당한 사람도 만나 보기도 했었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주변의 상황 내가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되야 한다 하는그 마음만 生覺만 버리면 사실은 괴로운

狀況이 괴로운 상황이 아닌 겁니다.

 

군대에 있다 보니까 그런 게 있어요 군에 있는 스님들 목사님 신부님들한텐 군에서도 특별히 그냥

알아서 하시도록 내버려 둡니다. 어떤 부대에 갔었을 때 그 지휘관 분께서는 스님들 목사님 신부님들도

아침 구보를 나와라 ‘아침 구보를 해야 되나.. 내가..’ 목사님 신부님이랑 앉아 가지고 이걸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참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생각해 보니까가 아니라 정말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고민할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다.과거 같으면 스님한테 구보를 하라고

해. 이러면서 기분 나쁜 마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때쯤이 언제냐면

뭔지 모르게 내 맘이 내 몸이 운동부족으로 운동을 좀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을 땐데

별로 운동을 못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매일 매일 아침에 구보를 했더니요. 몸이 얼마나 경쾌하고 개운하고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너무나도 몸이 가볍고 너무 좋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같이 있었던 모 성직자 분께서는

정말 너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이런 경우도 봤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同一한 狀況을 우리가 어떻게 生覺하고 解釋하느냐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삶이 바뀌는 겁니다.

이 宇宙法界에서 저에게 運動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機會를 마련해 준 걸 수 있거든요.

우리 解釋이 괴로움이라고 判斷하는거지 우리 삶에는 괴로움이 없습니다.

삶에는 괴로움도 없고 또 즐거움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요.

나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따지고 計算하고 判斷하면 안 됩니다.

이게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計算하고 따지면 이게 識(알음알이), 分別한다 이거죠.

‘쟨 槪念이 없냐? 이러면서 計算을 좀 해봐라. 겉으로만 드러나서 좋다고 좋은 게 아니고 가만히

生覺해서 따져보면 나쁜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많은 生覺으로 두 가지 세가지 네가지 건너건너 건너까지 제이 제삼 제사까지 모든걸 判斷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냥 순수하게 순간순간 살면 되지 않겠어요? 순수하게 그렇게 살면 다 바보라고

생각해요. 그게 한편으로는 그렇게 계산적으로 사는 거 이게 그렇게 좋은 거 아닙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면요. 여러분들이 이 世上을 바꾸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도 하고,

또한 이 세상에 나쁜 일을 만들어 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정치가라고 생각할 수 있고 때로는 아주 그 대재벌들 중에 아주 착취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구요. 또는 수많은 사람들 이 세상에는 항상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안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제도적으로 문제 되는 게 많을 수 있어요. 심지어 그 모든 것들 있잖아요.

그 모든 것을 여러분이 바꿀 수 있습니까? 내가 그것에 대하여 괴로워 한다고 해서 그것을 바꿀 수

있습니까? 100%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最大限은 해야 됩니다.

해야 되는데 내가 ‘이것이 안되면 절대 안 된다’ 라는 執着을 가지고 하면 그 일을 해서는 안된다.

社會를 바꾸기 위한 일을 하는 거 하면 좋습니다. 해야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저 사람은 社會를 아주 괴롭게 만드니까 정말 없어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憎惡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차라리 社會活動 안 하는 편이 낫습니다.

내 마음 속에 憎惡의 씨앗을 품고 활동을 하지말고 사랑의 마음으로써 그 일을 해야 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을 때 우리가 사회를 돕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를 죽이는 일을 하는 겁니다. 내 안에 憎惡와 화의 씨앗을 자꾸 키우는 일을 자꾸 하는 겁니다.

그러면 ‘正義가 살아나야돼’  社會正義 사회정의 하는데 사회정의를 강력하게 원하는 사람일수록

어때요? 사회정의가 깨져 있다는데 에너지가 集中돼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접하는 사회는요

사회정의가 깨져 있는 사회를 자꾸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냐 하면 사회를 바꾸기

위해 먼저는 내 마음이 먼저 淨化 돼야 한다는 말이에요. 相對를 바꾸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먼저

淸淨해야 된다. 그것이 社會運動 하는 사람들의 가장 첫 번째 重要한 德目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뭔가 잘 못 됐기 때문에 바꿔야 된다면 내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 된다.

절에 오면 보살님들 주로 절에는 보살님들이 많잖아요. 보살님들이 스님한테 와서 내 남편이 문제라고

相談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항상 남편 탓 하지말고 남편이 잘 못 했어도 보살님이 먼저 마음을

바꾸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보살님들이 스님들은 자기가 南子라고 남편들 편만 든다고 이런단

말입니다. 거사님들이 와서 물어보면 똑같이 거사님들 본인이 바뀌어야 된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本人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本人이 먼저 바뀌면 世上이 바뀝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부처님 당시 印度의 四性階級 그것조차 부처님 完全히 打破하지 못했어요.

사성계급 때문에 인도 사람들 얼마나 시름시름 알고 고통스러웠습니까?

그것을 고통스러워한다고 부처님께서 괴로움에 허덕이면서 너희들이 괴로우니까 나도 미칠 거 같이

괴롭다 하고 불행한 삶을 사셨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할 수 있는 모든 존재를 사랑으로

자비로써 이끌었던 겁니다. 社會가 安定됐기 때문에 부처님이 幸福했던 게 아닙니다.

社會는 언제든 不安定 할 수가 있어요. 사람들이 말하는 괴로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問題라고 生覺할 必要가 없다. 내 마음을 內面을 먼저 淸淨하게 가꾸면서

아 우리는 뭐를 중요하게 해야 하느냐 내가 宇宙法界가 하는 일에 是非分別만 놓아버린다면

이 宇宙法界는 언제 어디서나 恒常  永圓히 智慧와 사랑 자비로 나를 돕고 있구나.

나를 돕고 있는데 그냥 단편적인 도움이 아니라 全宇宙的인 도움이고 全方位的인 도움이고 全切性에

입각한 도움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삶이 前生 그 前生 數百 劫 前生부터 다음 生까지 이어지는

온갖 業을 다 꿰뚫어보고 전우주적인 관계를 다 꿰뚫어보고 우주와의 모든 관계를 다 꿰뚫어 보는 狀況

속에서 宇宙 全切를 꿰뚫어 보는 상황 속에서 우리를 돕고 있는 겁니다.

 

우리 생각으로 봤을 땐 宇宙가 돕지 않는 거 일 수도 있어요. 안 돕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그러나 사실적으로는 우리를 돕기 위한 거다 그것을 분명하게 믿는 게 중요하다.

분명하게 믿고 들어가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 이 宇宙 法界의 本質은 사랑과 慈悲와 智慧

자비와 사랑 지혜이고  恒常 그 자비와 지혜로써 우리를 돕는 일만 내 삶에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宇宙가 그렇게 지혜와 자비로써 날 항상 돕고 있으니까

宇宙의 자비와 사랑 지혜의 도움, 그것에 恒常 感謝하고 찬탄하고 幸福도 누리는 겁니다.

感謝하는 삶 나에게 주어진 모든 存在를 사랑하는 삶, 감사하는 삶과 宇宙의 사랑과 자비와

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거부하지 않고 맞서지 않고.

 

아 이런 일이 있어났구나 딴 사람이 나를 욕하는구나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는 거겠지

더 큰 의미에서는 宇宙가 나를 돕는 것이겠지 宇宙의 더 큰 사랑과 자비가 있는 것이겠지

더 큰 지혜로써 나를 돕는 것이겠지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感謝 冥想法 말씀 드렸었죠?

아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이 이럴 수 있겠지 저럴 수 있겠지 더 큰 의미가 있겠지 하고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하는것.그러고 살면서 삶과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삶을 통째로 받아 들이니까 삶과 다툴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찬탄하는 것 고맙다고

찬탄하는 것 감사하게 사는 것 사랑을 나눠주는 것 또 뭡니까? 용서하는 것 참회하는 것

무엇을 容恕하고 무엇을 懺悔합니까?  我相을 키웠던 것을 참회하고 내 스스로 我相에 빠져 있던 자신을

나 자신을 용서해 주는 거에요. 나는 자비로우니까 넌 나쁜 놈이니까 네가 나에게 나쁜 짓을 했지만 나는

용서할게 이건 용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내가 남을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眞正한 容恕는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는 거에요. 상대방이 나한테 욕을 했습니다.

그건 내 문제지 상대방 문제가 아닙니다.상대방이 나쁜 놈이라서 나한테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남들에게 시비를 받을 만한 業을 지었기 때문에 시비를 받는 겁니다.

내가 前生에 남들에게 시비를 많이 걸었으니까 내 業을 녹여주기 위하여 시비를 걸어주는 겁니다.

그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네가 나에게 시비 걸었지만 내가 너를 용서해 줄게가 아닙니다. 

 

아 내가 나와 너를 나누고 분리 분별해서 용서해 준단 말은 뭐에요.

자비로운 내가 있고 무자비한 자비롭지 못한 네가 있어서 나쁜 네가 있고 착한 내가 있어서

착한 내가 나쁜 너를 용서해 줄게 잘난 내가 못난 너를 용서해 줄게 이거 아니겠어요?

너와 나를 나누는 것이고 좋고 나쁨을 나누는 것이고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겁니다.

그것은 책임회피 하는 겁니다. 내 문제를 내 문제라 생각 안하고 상대방의 문제라고 책임회피

하는 겁니다 모든 문제가 생겼다면 내 문제지 결코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용서해야 하는 건 상대방이 아니고 나 자신입니다. 이 문제가 너의 문제라고 投影했던 거

그것에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용서해 줘야 된다. 상대방을 탓했던 것을 참회해야 한단

말입니다. 상대방을 탓해 왔던 지금까지의 삶 남을 원망했던 삶 그것을 참회해야 된다.

그래서 아 모든 것이 내 안의 문제이고 내 안에서 참회해야 될 것이고 내 안에서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할 것이고 내가 여태까지 키워왔던 아상(我相) 에고(ego) 이것을 놓아줘야 된단 말입니다.

 

아상 에고를 그것을 놓아줬을 때 내가 비로서 世上과 다투지 않게 되고

世上에 모든 내 앞에 펼쳐진 모든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인생에서 미치듯이 괴로운 일이 생겨나 봐야 기껏해야 뭡니까?

내가 죽는 거 아니겠어요? 정말 정말 죽도록 괴로운 일 생겼다 해봐야 기껏 괴로운 일 생겼다 해봐야

내가 죽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죽는 일 그 程度 境界를 넘어설 수 있다면 이 世上에 그렇게 괴로운

일 없잖아요. 돈을 좀 못 버는 거 별 상관 있습니까? 죽음 앞에서야?

죽는 거만 극복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생에 한번 죽지 않을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차피 한번 죽어야 해요. 어차피 우리는 각오하고 살아야 됩니다.

人生은 한번 왔다 한번 가는 것이구나 하고 각오하고 살아야 돼요.

 

그런데 예상 못했던 것이 아니라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 벌어진 겁니다.

당연히 예상하던 일이 벌어진 거에요. 물론 저에게도 죽음은 괴롭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나는 죽음을 超越했다 이 얘기가 아닙니다.

世上의 理致가 그렇단 이야기에요 그렇게 生覺하면 사실 이 世上에 괴로울 게 없어요.

世上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姿勢가 갖춰지기 시작합니다. 그럼 이 세상에 얼마나 정말 누릴 것이 많고

행복을 만끽할 것이 많은지를 가슴 절절이 느끼게 되면서 너무나도 幸福한 平和로운 즐겁고 감사할

일들을 누리게 되고 누리면서 뭔 일이 벌어지냐면 더 많은 행복한 일들이 만들어 집니다.

 

내가 마음 속에서 누려야지만 그것이 現實로 投影되어서 創造가 되니까 그건 다음 生의 삶까지 창조를

하는 거에요. 마음 속에서 누리면 그 누리는 것이 現實, 삶, 現象世界로 투영되어서 創造가 됩니다.

마음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누리냐가 다음 生의 座標다.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고 나

자신을 참회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삶을 완전히 받아 들이는 것, 주어진 삶에 감사하는 것,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내가 내 生覺으로 解釋 판단하지 않고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 어떻게 받아들이냐면 아 이것이 나를 돕기 위한 宇宙의 慈悲구나

나를 돕기 위한 전방위적인 우주법계의 우주전체가 나를 위해서 이 일을 벌였구나

이렇게 받아 들이는 겁니다. 우주전체, 부처님, 하나님,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모든 진리

모든 지혜가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지금 이 일, 이분들을 보냈단 말이에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사건 사고를 보내고 있고, 이 남편을 보냈고 이 아내를 보냈고 이 자식을

보냈단 말입니다. 설사 나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내 生覺으로 解釋하고 判斷해서 나쁘다고

生覺할 것이 아니라 나를 돕기 위한 宇宙法界가 사랑 자비 지혜로 하는 일이구나하고

‘지혜와 자비의 몫이구나’ 하고 分明하게 우주법계에 귀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요 우리 人生에 엄청난 轉換이 일어납니다. 어마어마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修行은요. 이러한 어떤 精神的인 覺性, 精神的인 轉換 그 意識의 轉換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宇宙法界가 사랑 자비 지혜로 하는 일에 順應하는 이러한 마음으로써 삶을 살면서

삶에 대해서 特別히 細部的으로 計劃 세우지 마세요. 삶의 計劃 세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불교에서 뭐라고 합니까? 發願을 세우라고 하잖아요. 發願은 뭡니까?

利他的인 굵직굵직한 발원입니다. 四弘誓願이 뭐에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불법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법륜을 다 굴리오리다. 그러잖아요. 다 이타적인 것이고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런 굵직한 願을 하나 세워 논단 말이에요. 세부적인 願은 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서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야지 해서 세부적인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그 계획대로 됩니까? 계획대로 안 됩니다. 머리만 아파요. 그런데 그게 自然의 順理에 맞고 宇宙的인

理致에 맞는다면 내가 정말 그것을 해야 할 몫이라면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서 모든 준비를 해 놓습니다

신기하게도 착착 들어 맞으면서 내 삶의 기가 막힌 계획이 우주 법계가 나를 위해 계획을 착착 마련해요.

나는 단지 그냥 宇宙法界의 그 흐름을 올라타고 함께 흘러가기만 하면 됩니다. 신기하게도 내가 계획해서

갈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우주법계의 큰 지혜와 자비에 맞는 큰 發願만 세우면 됩니다. 세부적인 계획

가지고 머리 싸맬 필요 없단 말이에요 시비분별밖에 될 수 없다. 세부적인 계획을 세운다는 건 사실은

執着을 하나하나 붙잡는 것이고 생각 解釋과 判斷과 分別을 자꾸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事業에 成功해서 남을 도와주고 싶다. 많은 돈을 벌어서 남들과 나누고 싶다.

이런단 말이에요. 그렇게 큰 願을 세우고 그리고 構體的인 계획은 세우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몇살 때에는 직원 몇 명 둔 사장이 돼야지 내가 몇살 때에는 몇억 정도 되는 사장이 돼야지

몇살 때에는 코스닥에 상장을 하고 몇살 때는 어떻게 해야지 어떤 직원을 뽑아야지 이런 세부적인

계획은 세울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宇宙法界가 計劃을 알아서 이끌어 가도록

宇宙法界가 큰 사랑 자비 지혜로 계획을 세우도록 내맡기라는 말입니다. 내가 계획을 세우지 말고.

그럼 우주 법계가 큰 자비 사랑 지혜로 계획을 세워준다.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아주 自然스럽고. 그렇게 됐을 때 우리가 想像도 할 수 없는 宇宙的인 計劃에 同參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개인이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벌이게 돼요.

 

淨土會 法輪 스님께서 개인의 힘이 얼마나 대단해서 얼마나 어마어마하기에 그런 엄청난 일을

하시겠습니까. 옛날에 내가 몇살에 뭐하고 몇살에 막사이사이 상을 받고 어떤 단체를 만들어야지

고민했겠어요? 순간순간 주어진 일을 할 뿐입니다. 衆生을 救濟하겠다는 큰 願을 가지고

순간순간 주어진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한 개인이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이

우리 앞에 언젠가 우리가 하고 있단 사실을 나중에 가서 깨닫게 된다.

宇宙法界의 慈悲로운 理致, 無限한 智慧로써 우리를 이끌어 주는 이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우주법계의 큰 그 흐름을 타고 아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아무 고민 두려움 근심 없이 행복을

누리면서 자유를 누리며 만끽하면서 당당하게 거칠 것 없이 삶을 사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