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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공부는 왜 어려운가? 선 입문을 위한 마음자세

장백산-1 2015. 6. 25. 01:34

 

 

 

선 공부는 왜 어려운가? 선 입문을 위한 마음자세 |선수행과 마음공부 
 

법상 | 2015.06.24. 20:18 http://cafe.daum.net/truenature/SArJ/2   
 

 

 우리가 보통 불교를 공부할 때 불교대학도 다니고, 교리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하면서 불교를 이해한다.

연기법은 어떤 거고, 중도는 어떤 거고, 사성제와 삼법인은 어떤 건지를 공부해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공부가 어느 정도 된 사람들은 이제 그 어떤 불교교리를 이야기 하더라도 自己式대로 다 설명할 수

있게 되고, 어떤 경전을 가져와서 묻더라도 다 나름대로 이해를 하게 된다. 이렇게 불교를 잘 이해한 사람

들은 이제 이 불법을 자기 혼자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온갖 方便으로 쉽게 타인들에게 설명해 주기도 하고,

전법 포교에 임하곤 한다.

 

소위 法師란 自己 式대로 이해한 불법을 온갖 다양한 비유와 자신의 경험과 경전의 내용 혹은 과학적 지식

이며, 최신의 트렌드며 온갖 중생들이 좋아하고 쉽게 이해할 만한 것들을 비유로 들어가면서 알기 쉽게 설명

해 주느라 애를 쓴다.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어야 사람들은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사람들

에게 인기가 있는 법사는 너무 어려운 불법을 현대적인 온갖 비유를 들어가면서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이해

시켜 주는 사람이다. 또한 나아가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 고민, 고통 등에 대해서 불법에 입각

해 알기 쉽게 설명해 줌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가? 이렇게 스스로도 佛法을 잘 이해했고, 타인을 잘 이해시킬 수 있는 온갖 方便도 갖추었다.

물론 자신 또한 불법을 잘 이해했더니 온갖 현실적인 어려움이 오더라도 어지간히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갖추었다. 그러면 모든 苦痛은 完全히 없어진 것일까? 보통 이런 경우 어떤 현실적 어려움이 닥쳐

올 때면 스스로 苦痛 받으면서도 이 苦痛을 佛法을 通해 잘 解決해 내야지만 훌륭한 수행자인 것 같고,

佛法을 공부한 보람이 있을 것 같아서 佛法을 잘 대입시켜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무진 애를 쓰게 된다.

이런 교리, 저런 교리도 대입 시켜 보고, 스님들의 이 책 저 책도 찾아 보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간다.

 

그러나 結局은 이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불법을 이해해서 안 것으로는 결코 根源的인

苦痛의 問題가 解決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불교를 잘 알고, 이해하고, 타인에게 설명해

주는 능력도 뛰어나고, 수행도 잘 하고, 삼매며 신비체험도 있었고, 그런다고 할지라도 根源的으로 모든

苦痛의 問題가 解決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 좌절을 겪는다. 佛法을 이렇게 잘 理解했는데도 나는 왜 괴로운거지? 나의 根源的 괴로움은

왜 없어지지 않는거지? 당장 큰 疾病 앞에서 우리의 불법공부와 수행은 무너져 내린다. 남들이 내게

是非를 걸어올 때도 그렇고, 늙고 죽는 實存的 問題 앞에서도 그렇다. 佛法은 生死를 뛰어넘는 공부라고

하는데 여전히 나는 죽는 것이 두렵다.

 

그런 좌절 속에서 지금까지 해 온 나의 불교 공부가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 혹은 잘못된 것은 아닐지라도

무언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根本에서부터 苦痛을 온전히 해결 할 수 있는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 하고 궁금해 한다. 그러다가 나름대로 결론을 본다. ‘그래 불교를 머리로만 알아서는 해결

이 안 되는 거구나’ ‘오직 修行만이 살 길이구나’, ‘修行을 통해 깨달아야만 끝나는 것이겠구나’ 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 때부터는 修行에 매진하게 된다. 念佛, 다라니, 절, 寫經, 讀經, 冥想, 위빠사나, 看話禪 등 이것을 해 보고

안 되면 저것을 하고, 수행법을 다양하게 바꾸어 가면서 나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 나선다. 때로는 수행 중

에 신비체험을 하기도 하고, 삼매 같은 어떤 현상을 느끼기도 하면서 ‘무언가 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

도 한다. 조금만 더 하면 무언가 깨달음이 올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렇게 熱心히 修行하지만 그래도 역시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미칠 것 같다. 뭐가 문제지?

다시 答을 내린다. ‘그래! 내 修行이 不足한 걸꺼야’ ‘성철스님은 10년간 장자불와를 하셨다잖아?’, ‘목숨을

걸고 눕지도 않고 철저하게 수행을 해도 될까 말깐데 적당히 수행하면 안 되지’, ‘더 열심히 수행해야겠다’

 

이런 반복을 끊임없이 하고 또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하다가 10년, 20년, 그 이상을 보내기도 하고,

혹은 한 平生을 이렇게 살다 가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수행이라도 열심히

하다가 결국에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를 한 채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면서, 또 다른 달콤한 세속적 즐거움에

도취되는 나락의 길을 걷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무엇이 문제이기에 佛法의 길, 수행의 길은 이리도 멀고도 험난한

것인가? 결국 깨달음이란 부처님과 같은 뛰어난 영적 천재들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일 뿐, 우리 같은 일반

인들에게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는다. 그러다보니 이번 生에는 열심

히 福이나 지으면서, 혹은 적당히 受行도 하고 佛法工夫도 하다보면 다음 生, 그 다음 生 어느 生엔가 부처님

처럼 높은 根機가 될 날이 있을 것이고, 善根을 쌓고 쌓다보면 어느 때엔간 부처님처럼 깨달을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면서 슬그머니 포기를 하게도 된다.

 

여기서 방향을 돌려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주 쉬운 첫 단추부터, 初發心으로 텅~빈 바탕 위에서

다시 經典이며 祖師 語錄들을 보자. 어쩌면 問題는 아주 單純한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그러나 核心이 되는 한 가지 첫 단추를 잘못 꾀는 바람에 그 다음 단추들이 전부 잘못 채워진 것은 아닐까?

 

바로 그렇다!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럼 잘못 채워진 그 첫 단추는 무엇일까?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처음 불교를 공부하기 始作한 그 初期 段階로 다시 되돌아가 보자. 우리는 처음 불교를 공부할 때

알기 쉽게 불법을 잘 이해시켜주는 훌륭한 법사스님께 배우면서 ‘아 불교가 이런거구나’ 하는 기쁨도 알게

되고, 때로는 환희심도 느껴가면서 불법을 하나 하나 알아갔다. 교리를 배우고, 경전을 이해하면서 점점 더

眞理를 알아간다는 기쁨은 더해만 갔다. 바로 이 단계에서 첫 단추가 잘못 꾀어지고 있었다면, 과연 어느

부분일까? 感이 오시는가?

 

바로 그거다. 우리는 佛法을 머리로만 理解해 왔던 것이다! 佛法을 머리로 理解하고, 납득하려고 애쓰고,

알음알이 識으로만 헤아려 왔던 것이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五蘊에서 말하는 色-受-想-行-識 할 때 바로

그 ‘識’, 즉 알음알이로 理解하고 헤아려서 佛法을 공부한 것이다. 識, 알음알이, 分別心, 生覺이라고 불리는

것은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이다. 卽 佛法을 對相으로 설정해 놓고 識이 佛法을 알려고, 理解

하려고 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五蘊皆空, 五蘊無我라는 敎理에서도 말하듯이 五蘊은 모두 無我이며 空한

것이다. 固定 不變하는 獨者的인 實體가 아니다. 진짜가 아니다. 識으로 알음알이를 짓고 理解하고 알아들어

왔던 그 모든 認識 作用은 마음이라는 虛妄한 分別心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가짜인 識을 가지고 佛法을

제아무리 잘 理解하고 헤아려서 分別한들 結論은 識을 더 늘린 것일 뿐이다. 알음알이를 키운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알음알이, 識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佛法을 훌륭하게 理解하고 남들에게도 잘

설명해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識의 對相으로써의 佛法을 이해한 것, 卽 識을 더욱 늘린 것일

뿐 佛法 그 自體, 眞理 그 自體, 깨달음 그 自體와는 전혀 相關이 없는 일이다.

 

佛法, 眞理, 깨달음은 識, 알음알이의 對相이 아니기 때문이다. 眞理는 分別心을 아무리 풀로 가동하여

정교하게 理解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眞理에 對한 하나의 分別心일 뿐 진짜 眞理를 아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니, 眞理는 알아지는 對相이 결코 아니다. 헤아려지는 對相이 아니고 理解되는 對相이

아니다. 眞理는 그저 體驗되고, 契合되고, 確認되는 일일 뿐이지, 알음알이(識)로 헤아려지고 理解되는

對相 境界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眞理 佛法 깨달음을 말로 설명해야 하다보니 부득이하게 體驗이니

契合이니 確認이라는 표현을 했을 뿐, 이 또한 말의 뜻을 따라가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理解한다는 것은 理解하는 내가 있고, 理解되는 對相이 分離되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眞理를 理解

한다는 것, 佛法을 이해한다는 것, 깨달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佛法, 진리, 깨달음과 나를 둘로 分離시켜서

하나의 對相으로 나누어 놓고 그 對相을 理解한다는 것이 아닌가. 佛法은 이렇게 分離되거나 쪼개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다. 나와 佛法이 分離되어서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理解하는 者와 理解되는 對相이

分離되어서 따로 나뉘어진다면 그것은 佛法, 진리,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조혜능스님은 이것을 일러 ‘佛法은 不二法이다’라고 설명했고, 초기경전에서는 五蘊無我, 六識과 十八界

가 全部 固定된 實體가 아니라고 했고, 唯識에서는 轉識得智라고 하여 모든 識을 넘어서는 참된 智慧를 얻어

야 함을 설했다. 佛法은 不二法이다. 卽 佛法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둘로 나누면 안 된다. 초기경전의 表現

대로 말하면 感覺器管인 六根이 따로 있고, 感覺의 對相인 六境이 따로 있으며, 六根이 六境이라는 對相境界

를 認識하는 六識이 따로 있다고 믿고 여기는 것이 衆生의 虛妄한 生覺 妄想 分別心이라는 것이다. 十八界가

전부 空하다는 말은 이렇게 나라는 主體와 對相, 그리고 認識이 따로 따로 分離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

라는 것을 의미한다.

 

眞理와 하나된다거나, 體驗하고 契合하고 깨닫는다는 表現은 깨달을 나와 깨달을 對相인 佛法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나와 眞理는 本來부터 이미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分別心으로 因한 妄想

生覺으로 헤아리느라고 이미 이렇게 하나로 드러나 있는 眞理를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새롭게 깨달으려고 애쓰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眞理, 佛法, 깨달음을 그저 確認만 하면 되는 것이다. 本來 내가

바로 부처(佛)와 둘이 아닌 하나라는 眞實에 그저 繼合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설명하다보니 다시 또 어려워졌는데, 쉽게 말하면, 眞理를 머리로 理解해서 알려고 하는 방법으로는 眞理를

깨달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眞理는 理解되는 對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佛法을

머리로 알음알이 識으로만 理解하려고 노력해 왔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을

알아왔던 方式이 바로 이런 方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識, 알은알이, 머리를 굴려서, 卽 分別心을 굴려가지고  새로운 境界對相을 理解함으로써 對相이 무엇인지를

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佛法, 眞理, 깨달음은 결코 그런 方式으로는 接近할 수 있는 對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方式으로만 어떤 對相을 理解해 오면서 사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佛法을 배울 때도

習慣的 自動的으로 그런 方法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佛法을 처음 공부하면서 누구나 佛法을 그런 方式

으로 잘 알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佛法은 지금까지 우리가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왔던 그런

方式으로는 接近이 不可하다. 그러니 각오를 해야 한다. 佛法을 참으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해온 方式으로 佛法을 理解의 對相으로 하는 그런 方式을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불법을 공부하면서 ‘이제 좀 알겠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불법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불법을 알겠다

는 것은 佛法을 나와 分離시켜서 對相化하여 알음알이라는 分別心으로 對相을 헤아려 이해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佛法을 여법하게 설하는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도저히 모르겠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이게 뭔

소리지’라는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禪師 스님들의 법문이 일반인들에게 도저히

理解가 안 되는 理由다. 선사 스님들은 지금 法門을 듣는 이로 하여금 머리로는 도저히 理解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알음알이, 識, 分別心으로 理解하지 못하게 하려는 意圖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선사스님들은 자기들만 아는 말로 설법한다며, 중생들이 도저히 못 알아듣는 저런 법문을 하면 안 된다거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佛法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법문을 들을 때 ‘모르겠다’가 되어야 한다. 법문을 아무리 들어도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야 한다. 즉, 識, 알음알이, 分別心으로 알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꽉 막힌다고 한다. 말 그대로 生覺이 콱 막혀서 어떻게도 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제자가 물으면 스승은 緣起法, 四聖諦, 中道, 空이 어쩌고 하면서 현대과학의

비유를 들면서 어쩌고 저쩌고, 사랑과 애착이 어쩌고 하면서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하면 그것은 알음알이를

굴려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은 方便의 설법일 뿐, 本質을 바로 관통하는 直指人心의 법문이 아닌 것이다.

 

제자가 물을 때 참된 스승이라면 제자의 알음알이를 꼼짝 못하게 해 버린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떨어진다”

 
“마른 똥막대기다”   “차나 한 잔 해라”   “이거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건 뭐야?’ 싶을 것이다. ‘뭘 어쩌라는 거야?’ 싶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시 分別心인 生覺을 따라가고, 말의 뜻을 헤아려 理解하려는 習性이 튀어나와 저 말들을

生覺, 識, 알음알이, 머리로만 理解하려고 애쓸 것이다. 뜰 앞에 있는 잣나무 속에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眞理가 숨겨져 있다는 말인가? 차를 한 잔 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라는 말인가?

지금 이 순간 바람이 부는 그 현존을 느껴보라는 말인가? 하면서 계속해서 머리로 헤아리려 들 것이다.

선어록과 화두를 해설한다는 책들이 하는 짓이 딱 이런 수준의 識놀음에 불과한 것이다.

 

저런 대답을 들으면 그냥 콱 막히면 된다. 그저 ‘모르겠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냥 뭔 소린지 모르겠으니까 그저 모르겠다는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 모르면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쉬운가. 알려고 하면 머리를 굴려야 하고, 解釋해야 하니까 사실은 어려운 작업이다. 수학문제나

과학의 원리를 설명해 줄 때는 그 이해도 안 되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하다보니 얼마나 머리가 아프고

힘이 드는가? 그런데 이 工夫는 전혀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냥 모르는 것을 모르겠다고 正直하게 受容

한 채 모를 뿐이면 되는 것이다. 머리 굴릴 일이 없으니 아주 쉽지 않은가.

 

이 공부는 因果法이 아니다. 世上 工副는 全部가 다 因果法이다. 공부를 열심히한다는 原因이 있으면

시험을 잘 본다는 結果가 나온다. 열심히 일하면 결과가 나온다. 原因과 結果를 둘로 나누어 놓는

世上事에서는 原因을 열심히 지어 놓으면 結果인 果가 因果法에 의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부는 인과법이 아니기에 얼마만큼의 原因을 지어야만 結果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原因과 結果가 둘로 分離되어 서로 나뉘어져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卽 衆生이 있고 부처가 있어서

중생이 수행이라는 原因을 지으면 부처라는 結果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이런

공부만 줄곧 해 왔다. 修行이라는 原因을 끊임없이, 무진 노력을 해 가면서, 상상도 못할 수행력과 정진력

으로 장자불와며 기도정진을 해가면서 부처라는 結果에 도달하기 위해 애써 왔다. 그러나 이런 수행의

노력은 ‘지금 이 깨닫지 못한 나’와 ‘깨달은 뒤의 부처’를 둘로 分離하고 나누어 놓고  原因을 짓는 因果法

인 世俗的 方式인 것이다. 그것은 眞理의 方式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우리가 해 왔던 受行이 헛된 애너지의 낭비일 뿐 참된 공부가 되지 못한 것이다.

론 受行이 하나의 方便이라는 측면에서,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고, 根機가 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佛法에 가까이 오게 하려고 方便으로 해 온 수행이라면 어느정도의 효과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지금의 수행 문화는 그런 정도의 方便이 아닌, 修行 그 自體가 곧 깨달음을 결정짓는 것처럼

잘못 이해되고 있어 안타깝다.

 

참된 수행은 無爲法이며, 不二法이다. 애써서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둘로 나누는 것도 아니다. 이 공부는

原因과 結果가 둘이 아닌 하나다. 卽 이미 우리는 衆生인 이대로 事實은 부처(佛)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

이지만 이미 이대로가 여지없이 깨달음, 진리, 부처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房 안에 있는 사람이 房을 찾

아 나서는 것과 같다고도 하고, 머리를 달고 머리를 찾는 사람이라고도 하며, 소 위에 앉아 소를 찾는 사람

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진리, 깨달음, 부처에 到着해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 頂上에 앉아 있는 사람이 히말라야 정상에 到着하기 위해 무슨 수행을 해야 하고, 무슨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미 정상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노력도 수행도 방법도 필요가 없다.

수행이라는 原因을 통해 깨달음이라는 結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진리, 깨달음, 부처 이 자리에 이미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각오를 단단히 하라.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다. 지금까지 하던 공부에 비해 더 어려워

지는 것이 아니라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정진하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단순해

지기 때문이다. 할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바로 아무 것도 안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하되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일까? 머리로 알음알이로 識으로 分別心으로 理解하지 않을 각오를 해야 한다.

머리로 이해하지 않겠노라는 단단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 모르겠음의 답답한

마음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으니 알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무언가가 理解되고 알아져야 공부의 진도가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알아들어야만

잘 工副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修行도 마찬가지였다. ‘수행이 잘 된다’거나, ‘수행을 이제 어떻게 하는지

알겠다’라는 것이 공부를 잘 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수행은 수행이 잘 되는 느낌이

아니다. 수행을 잘 하고 있다고 헤아리고 아는 것 또한 참된 수행이 아니다. 참된 수행이란 길 없는 길

(無門關)을 뚫고 나아가는 길이다. 거기에는 진도 같은 것은 있지 않다. 돈오라는 말에서도 보듯이 수행이

잘 되어가고 있는 어떤 느낌, 진도 같은데 속으면 안 된다. 수행에는 진도가 없다. 그냥 모를 뿐이다. 오로지

모르겠고, 알 수 없고,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도 없고, 진도가 나가고는 있는 건지도

도무지 모르겠고,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답답해 미치겠다고 하는 바로 그 때가 수행이 잘 되고 있는 때인

것이다. 이것이 祖師禪, 혹은 看話禪이라고 하는 修行 方便이다.

 

그래서 崇山큰스님께서 내려주신 話頭는 수행이랄 것도 없이 ‘오직 모를 뿐’ 밖에 없었다. 오직 모를 뿐이다.

그저 오직 모를 뿐이다보니 답답하고 꽉 막히고 무언가 답은 찾아야겠고, 깨달음은 얻어야 하겠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하는 것이다. 답답해 죽겠는 것이다. 어떤 方法이 있어서

이렇게 수행하면 저런 結果를 얻게 된다는 어떤 行路가 있어야 그 길로 나아가고, 잘 가고 있는지도 확인할텐데,

그런게 일체 없다보니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 전혀 손을 쓸 방도가 없어지는 것이다. 生覺이 전혀 솜씨를 부릴

수 없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바로 이 때가 공부가 잘 되고 있는 때인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화두고 수행이지 또 다른 수행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 공부를 지탱해주는 아주 중요한, 아니 ‘그것이 이 공부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중요한 것이 있다.

이 공부는 방법 아닌 방법이며, 길 아닌 길이다. 그것은 바로 보리심, 발보리심, 발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菩提는 깨달음을 뜻한다. 즉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大乘佛敎의 최상위 경전이라고 알려

져 있는 華嚴經의 核心 가르침이 바로 ‘一切唯心造’다. 일체유심조 卽 일체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짓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깨달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중생이 진리를 確認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發心이 선결조건이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眞理를 確認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發心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이 드러나게 해 주는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불교의 많은 불자들, 수행자들은 어떤가? 바른 보리심이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달음을

운운하기 보다는 現生에서는 福이나 짓고, 修行이나 적당히 하다보면 나중에 어느 生엔가 깨닫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마음가짐이 있을 뿐이 아닌가. 바로 그런 마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生에서,

바로 지금, 반드시 이 眞理를 確認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마음이 바로 發心이고 發菩提心이다.

 

얼마 전에 인도 맥그로드 간지에서 티벳불교를 수 년간 공부하고 있는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티벳불교

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강조되는 수행이 바로 ‘보리심’이라는 것이었다. 보리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발보리심이야말로 이 진리를 공부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깨닫겠다는 발심, 그것이

우리를 깨닫게 하는 지침이며, 수행이고, 스승인 것이다.

 

우리 목탁소리 도량에서도 이제부터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법문을 조금씩 풀어놓게 될 것이다. 보통은 正法을

알려주는 도량에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인적이 끊기고, 들풀만이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方便으로 理解

되는 법문을 섞어서 반 쯤은 이해되고 반 쯤은 이해 안 되는 그런 법문을 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그래야

大乘佛敎다. 따라올 사람만 따라오라고 하면 極少數의 因緣 닿는 이들에게만 법비가 뿌려질 것이다.

大乘佛敎에서는 少數의 엘리트 몇 사람끼리만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소 더디더라도 함께 가자는

것이다. 함께 가려면 方便이 필요한 것이다. 方便이란 이해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主로 方便에 대한 설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알음알이 方式의 

공부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부터는 조금씩 각오를 하라. 法, 진리, 깨달음을 만날 각오 마음의 준비를 하라. 그러나 참된

眞理는 혼돈 속에서 시작된다. 온통 모르겠고 답답한 그 혼돈 가운데 피어난다. 그 혼란과 혼돈, 모름과

답답한 마음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라는 말이다.

 

모르는 법문을 모른다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해되지 않는 법문을 애써 이해하려고 머리를 굴리지 말라.

모르는 답답함과 혼돈 속에서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