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해부
- 일곱가지 힘에 담긴 에너지의 비밀 - 캐롤라인 미스 지음. 2003년 1월 출간 -
<서문>
超微粒子를 연구하는 量子物理學者들은 生命의 本質이 진동(振動)임을 밝혔다.
인간의 DNA는 52~78Ghz(주파수)로 振動한다. 과학적인 측정 장치들을 전부 동원한다고 해도 아직까지
특정인의 특정한 周波數나 에너지 흐름의 장래를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음의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첫째는 생명 에너지는 靜的인 것이 아니라 動的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생명 에너지는 항상 움직이고 있다.
둘째는 인간의 마음이나 에너지 시스템은 물리적으로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지만. 이책의
저자 캐롤라인 처럼 直觀的인 能力을 가진 사람한테는 그 비밀이 열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 역정이 곧 자신의 몸 그 자체다" "세계 4대 宗敎에 담긴 宇宙的 眞實은 神性이
일곱 단계의 힘으로 생물학적 체계에 갇혀 있다가, 이 일곱 단계의 힘이 發現되면 각자가 개인의 힘
에서 더욱 세련되고 초월적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
우리의 靈魂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우리의 直觀은 欲望과 偏見, 가족 대대로 물려받은 習慣
등으로 가려져서 靈魂이 보내는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 메시지를 보내고 소리를 지르고 꿈을 꾸게 해도
우리를 둘러싼 무거운 業習이라는 쇠사슬 때문에 靈魂의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하면 靈魂은 最後의
方法을 동원한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病들게 하는 것이다. 내 病의 책임은 전적으로 나로부터 起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말 - 의학적인 통찰력 갖기
사람의 肉身을 둘러싸고 있는 에너지는 그 사람이 살아온 人生 歷史를 말해주는 온갖 情報로 가득
차 있다. 그 에너지는 그 사람의 영혼(靈魂)이 확장(擴長)된 것이다. 쓰면 쓸수록 직관(直觀)은 점점
더 正確해진다. 靈的, 情緖的 스트레스 또는 不安이 모든 肉體的 疾病의 根本 原因이다.
心臟病 환자는 자신의 인생살이에서 사랑을 거부당한 적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허리에 요통이 있는
사람들은 經濟的인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癌 환자들은 과거에 마무리짓지 못한 일이나 풀지 못한
정서적 문제와 연관된 경우가 많았으며, 혈액순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대개 가족간의 골이 깊은
갈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
인간의 에너지 시스템을 더 깊이 연구할수록, 우리의 몸이나 삶에서 '닥치는 대로' 無意味하게 創造
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정서적, 영적 스트레스와 특정한
疾病 사이의 연관성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物質의 核心인 人間의 에너지 시스템의 해부학, 즉
그러니까 人間 靈魂의 解剖學이라는 맥락이 필요하다.
'치유'란 단순히 몸이 疾病에서 회복된다는 뜻만 아니라,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던 두려움이나 자신
또는 타인에 대한 否定的인 生覺에서 當事者의 靈魂이 놓여나 自由로워진다는 뜻일 可能性도 있다.
이런 종류의 영적인 해방과 치유는 심지어 肉體的인 死亡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경우까지 있다.
에너지의 言語는 여러분에게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한 새로운 시야을 열어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과 '힘'을 弱하게 하는 原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에너지를 헛되이 낭비
하지 않도록 방지할 수도 있다.
이 책이 갖는 몸과 마음에 대한 焦點은 象徵的 洞察力이 담긴 靈魂의 言語로 채워져 있다. 象徵的
洞察力은 자신과 타인들은 물론,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人生의 여러 事件들을
보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상징적 통찰력을 개발한다는 것은 바로 直觀的인 能力을 강화하는
훈련과 동의어이다. 우리의 靈魂에 삶은 물론 삶의 매 순간마다 내린 온갖 선택이 包含되어 있다.
삶은 그토록 單純한 것이다.
어떤 疾病도 우연히 일어나는 법은 없다. 人間의 免役體係 異常은 地球의 오존층과 관계가 있는데,
現在 지구의 오존층은 중환자의 면역체계만큼이나 虛弱하다.
제1부 영혼의 새로운 언어, ANATOMY of the SPIRIT(영혼의 해부학)
살아있는 것을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진동(振動)하는 에너지, 運動 그 자체다. 우리 몸도 마음도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 주위는 에너지로 둘러싸여 있고 자신만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에너지에는
한 개인의 역사 이상의 수많은 情報가 담겨 있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읽고 느끼고 분석함으로써 파동
하는 에너지정보체인 우리는 누군가의 固有한 삶의 경험과 감정, 영혼을 서로 함께 나눌 수 있다.
제1장 에너지 의학과 직관
우리 몸은 팔을 쭉 뻗은 상태에서 그릴 수 있는 圓의 반지름만큼 뻗어나간 에너지場에 둘러싸여 있다.
그 에너지場은 情報의 中心이자 高度로 민감한 知覺 시스템이다. 타인과 내 몸에서 오가는 메시지들을
받고 전달하는 意識의 相互交換 시스템의 일종의 意識 電流인 이 에너지場 시스템을 통해서, 우리들은
주변에 있는 宇宙森羅萬象과 끊임없이 '대화'(에너지 상호교환작용)을 하고 있다. 直觀이 知覺하는 것은
바로 宇宙에너지정보場에서 오는, 波動하는 에너지場에 담긴 情報(메시지)들이다.
우주에너지정보場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외부와 내부의 온갖 經驗이 만들어낸 일련의 감정
생각 에너지를 운반한다. 이러한 감정 생각 에너지의 '힘'은 우리 몸 안에 있는 組織에 影響을 준다.
이렇게 하여 그 사람의 이력, 삶을 구성하는 經驗 情報가 바로 物理的 生物學的인 肉身으로 現顯되는
것이다.
에너지 시스템에서 감정에너지를 傳達하는 經驗 情報의 集合에는, 과거와 현재의 개인적인 人間關係나
직업상의 業務關係, 깊이 박혀 있거나 상처가 되는 經驗과 記憶, 모든 영적 믿음과 미신을 포함한 信念
패턴과 마음의 태도 등이 포함된다. 이런 경험들에서 온 感情에너지는 우리 몸의 시스템에 入力되어
細胞 組織을 形成한 다음, 그런 感情을 투영(投影)하는 一種의 에너지체를 만들어 낸다. 감정에너지로
인해 발생한 화학물질인 뉴로펩타이드는 物質로 轉換된 生覺에너지이다. 우리의 감정은 몸 안에 물질적
으로 존재하면서 세포나 조직과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감정에너지를 화학물질을 만들고 받아들이는 腦
細胞는 뇌에 있든 몸 전체에 있든 똑같은 種類이므로 사실 마음과 몸은 더 이상 둘로 分離될 수 없다.
우리의 感情에너지는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 生物學的인 物質로 변한다. 각각의 신체 조직과 시스템은
특정한 감정적, 심리적 에너지를 처리하고 흡수하도록 조정되어 있다. 즉, 몸의 各 部分은 특정하고 세밀
한 波動 周波數로 에너지를 전달한다. 우리가 건강할 때는 모든 것이 제대로 '조율되어' 있다. 波動하는
周波數로는 전달되지 않는 肉體 부위가 있다면 바로 그 部位가 문제 부위이라는 뜻이다. 波動의 周波數가
强해지는 것은 本質的인 身體의 變化가 있거나 病이 심각해진다는 뜻인데, 이는 病이 惡化되는 원인인
스트레스의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現象이다. 대체로 사람의 에너지 시스템은 깨어있는 意識이 疾病이나
肉體의 에너지 不均衡을 알아차리는데 꼭 必要한 情報만큼을 傳達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과 正面으로 對面해야만 한다. 神, 부처, 어떤 靈的 스승이나 전통도 인간이
고통에서 도망치는 삶을 보호하거나 격려해주지 않는다. 무수한 영적 가르침은 모두, 영적 교훈인 괴로운
삶의 경험을 통해서 意識 스스로 성장하도록 권장한다.
直觀은 生存을 위한 技術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內在되어 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려면, 肉感의 반응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사실상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첫번째 원칙 - 자기가 살아온 역사가 바로 자신의 몸이다.
우리의 모든 生覺은 內容에 관계없이 먼저 波動하는 에너지의 形態로 생명에너지 시스템으로 入力된다.
정서적,정신적, 심리적, 영적 에너지들은 우리 記憶 細胞에 貯藏되고 몸의 반응을 가져온다. 이렇게 우리
가 살아온 삶의 경험정보는 몸의 에너지 시스템 속에 날마다 쌓여간다. 정신과 감정을 갉아먹는 피로감이
늘어나고 지속되는 것은, 몸 안에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명에너지의 신호이다.
우울증은 모든 상태가 좋지 않다는 또 다른 증상이다. 만성우울증은 신체적인 질병이 나타나기 전에 올 수
있다. 에너지 用語로 말한다면 우울증은 말 그대로 無意識적으로 에너지 내지 생명력이 흩어지는 상태다.
에너지가 돈이라면, 우울증은 지갑이 열린 채로 "내 돈을 누가 가져가서 써버리든 말든 상관없다." 라고 말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성우울증에는 반드시 주기적인 피로감이 따른다. 누가 내 돈을 얼마나 쓰든 상관
하지 않는다면, 파산되는 것이 불 보듯 뻔한일 아닌가! 이처럼 생명에너지가 없으면 건강을 지탱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도록 바뀌는 데는 조화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생의 모든
순간, 즉 모든 태도와 의견, 품고 있는 신념에 대한 관계는 생물학적인 구성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받아
들여야만 치유의 과정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다. 또한 그 진리를 철저히 느끼고 온전히 믿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精神的 段階에서 物理的 단계로, 마지막으로 몸의 단계로 移動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이 살아온 역사가 몸을 만든다는 생각은, 우리 자신이 병을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참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아프게 된데 대해 우리 자신이나 환자를 나무라는 빌미로 남용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알면서 意圖的으로 病을 만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완전히 독소로 변하기 전까지 그것이 생물학적
인 독소임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행동양식과 태도의 결과로 병이 생긴다.
다시 한 번 整理해보자. 우리는 모두 否定的인 感情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病을 만들지
는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이 지배적일 때 병이 생기고, 또한 그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계기는 부정적인 생각
이 해로운 줄 알면서도 의식의 내면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자라나도록 방치하는 마음의 태도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容恕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화를 풀지못하는 경우를 보자. 부정적인 데 매달리면
에너지가 無力해지므로, 지나친 분노를 품은 상태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 疾으로 발전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에너지는 곧 힘이므로, 고통스러운 사건에 머물러서 에너지가 過去로 돌아가게 되면 現在의 몸에서 氣力이
고갈되므로 病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氣力, 즉 '힘'은 치유와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무기력한 느낌을 만드는 태도는 自我를 깊은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몸의 에너지를 고갈시켜서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악화시킨다. 그러므로 다음에 탐구
하는 원칙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힘'에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다.
두번째 원칙 - 건강에는 힘이 필요하다
힘에 대한 내면적인 개념이란,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과 같은 내면적 에너지와 정서적인 자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스스로의 진정한 자기자신의 참된 모습과 문제를 일으킨 데 대한 자신의 몫,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인간관계 등에 대한 모든 '진실'을 똑바로 보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치유에 대
단히 중요하다. 힘은 인간경험의 뿌리에 있다.
세번째 원칙 - 스스로 치유하기
치유와 치료는 다르다. '치료'는 몸에 나타나는 症狀의 進行을 늦추거나 성공적으로 統制하는 작용이다.
그러나 신체적인 질병을 치료한다고 해서 질병의 원인인 감정과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완화시킬수 있다
는 뜻은 아니다. 이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病이 再發한다. 치료의 과정은 受動的이다.
反面에, '치유'는 자신의 정서적, 영적 회복을 防害하는 모든 否定的인 생활 패턴을 놓아버리려는 意圖를
가지고 마음의 태도나 기억, 신념 등을 전반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을 포함하는 적극적이고 내면적인 과정
을 말한다. 이 내면적인 觀察은 자연스럽게 자기 생활을 재창조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외부 환경의 관찰로
이어지는데, 이와 같은 관찰은, 자기 인생의 眞實이 무엇이고, 자기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眞實을 바르게 보고 받아들이려는 意志를 活性化하는데 유용하다.
사로잡힌 사람들
인간의 에너지 시스템을 象徵的으로 보면, 환경과 개인이 상호작용을 하는 電子 回路(에너지 교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회로의 집합은 우리 몸을 관통하여, 외부 대상과 다른 사람들을 連結한다. 우리 마음
은 힘이 있는 대상이나 사람들, 혹은 '힘 있는 목표'에 끌린다. 그래서 그런 대상물의 힘을 우리의 에너지
체계로 끌어온다. 그러나 동시에 힘있는 목표와 連結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에너지場에서 어느 정도
힘이 빠져나가 목표를 향해 끌려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빠져드는 듯하다'고 말하거나, 어떤 대상이나
소유물을 지나치게 스스로와 同一視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직관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힘을 잃고 있는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부른다.
힘의 목표에 대한 執着을 제어하는 것은 감정의 욕구가 아니라 깨어있는 의식이다. 가슴은 이성이 모르
는 이유만을 한아름 안고 있다. 치유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로잡힌 자들'에게 치유는 엄청나게
무서운 도전이다. 무엇보다도 치유는 혼자 하는 일이다.
힘의 방향을 새롭게 잡기
일단 감정의 욕구를 認識하고 나면 그것을 잊기란 힘들다. 한번 불행의 원천을 알게 되면, 그 알음알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 선택하는 능력은 활기찬 힘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힘든
것은 現象에 매달리려는 自我意識의 執着性 때문인 경우가 많다. 變化하려면 반드시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래야 차츰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치유 과정에서는 신체의 힘을 빼앗아가는 대상이나
사람들에게서 떨어져나오는 방법을 배워한다. 변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치유는 두려운 경험이
되기도 한다. 치유에는 실천이 필요하다.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상징적인 통찰력 배우기
여러분은 자기 삶을 지배하는 힘의 상징을 해석하는 데 直觀을 사용하는 능력, 卽 상징적인 통칠력을
배우게 될 것이다. 여기에 소개된 내용 그 이상을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치유된다. 그러나 이런 능력
을 자신에게 실행화시키려면 이 情報를 吸收하는 內的인 手段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상징적인 삶의 도전을 해석하는 방법을 학습하는데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라.
둘째, 스스로를 항상 견고한 육체적인 존재인 同時에 振動하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라.
자신의 생명에너지는 모든 사람의 생각과 만나서 상호 의식을 교환하는 送受信者이자 記錄者이다.
내가 살아온 역사가 내 몸이 된다는 진리를 항상 마음에 새겨 두라.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나의
온갖 반작용과 그와 같은 반작용이 나의 감정과 육체에 미치는 영향을 의식적이고도 규칙적으로 잘
관찰해 보고 평가하라.
셋째,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스스로 평가하라. 에너지장에 스트레스가 모이는 現象을 느끼는
법을 배워서 에너지 단계에서 치유의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自己 觀察과 評價가 習慣이
되도록 해야 한다.
넷째, 자신의 에너지가 쇠약하다면, 에너지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 필수 요소에 초점을 맞춰라.
"내가 왜 힘을 잃고 있을까?" 라고 항상 자문하는 것이다. 어떤 불균형 상태를 치유하려면 그것이
에너지든 몸이든, 머리와 가슴 양쪽 모두를 포함시켜야 한다. 영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방향이 아니라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다섯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누가 내게서 힘을 뺏어가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
지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나의 에너지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이는 타인도 실제로는 자기자신
의 마음의 어떤 부분이 投影된 존재가 자기자신일 뿐임을 이해해야 한다.
예건대 누군가를 질투하고 있다면,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投影
되고 있는 내 本性의 어두운 側面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사실상 그 사람은 나의 거울인 셈이다.
그러므로 질투의 대상 인물에게만 에너지를 집중한다면 절대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한 '스승'(강한 감정의 에너지)을 점점 더 자주 만나게 될 뿐이다.
여섯째, 치유에 대한 요구를 단순화하라. 어떤 질병이나 치유에 필요한 조건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질병은 거의가 생명에너지의 異常이라고 생각하라. 피해를 입었다는 감정은 병을 덧나게 할 뿐이다.
치유에 필요하다면 개인적인 신상의 변화도 주저하지 말라. 특정한 변화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
한 것은 실제로 필요한 意識의 變化를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치유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일곱째, 영성을 단순하게 하라.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현재에 살라. 그리고 타인을 용서하라.
우리는 적정한 수준 이상으로 복잡하게 살아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진리를 배우게 되어 있고,
신성(神性)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작용하도록 창조되었다.
제2장 신의 형상을 좇아 창조되다
기본적으로 醫學的인 直觀이란 인간의 영혼에 대한 통찰력임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靈魂과 에너지와 氣運은 모두 하나이고 同一한 힘이다.
이번 生에서 부여받은 우리의 영적인 임무는 몸과 영혼의 에너지, 생각과 행동의 에너지,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서로 調和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치유를 위한 청사진이 이미 내재되어있다.
영적인 틀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면, 그 사람이 당면한 危機에 의미와 목표의 차원이
추가됨으로써 치유 과정에 가속도가 붙게 된다. 누구나 自己 自身을 치유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스트
레스는 영적 危機인 同時에 영적인 학습의 기회다. 그러므로 어떤 病에서든 자신의 영혼, 즉 개인적
인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지 아닌지, 혹은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영적인 성숙이란 신성한 문구에 담긴 심오한 메세지를 해석하는 능력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몸이 표현
하는 靈的인 메시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행위까지 포함된다. 우리는 意識化(삶의 매순간 깨어있
는 의식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의 단계가 진전되고, 내면적인 삶의 사고와 태도가 물리적인 몸과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게 되면서, 우리를 창조하고 또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하는 외부의 힘,
즉 신에 대한 생각을 따로 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영적인 聖人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삶과 건강을 共同으로 창조한다는 책임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共同創造야 말로 사실상 영적 성숙의 핵심이다. 그것은 선택의 훈련이며, 그 선택에 대한 우리의 책
임을 수용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선택하는 힘을 조절하는 것은 신성한 도전이며,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신성한 계약이다. 선택이란,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에 참여자가 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생각
과 정서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통하여 우리의 육신을 공동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작업은 일견 장엄하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스럽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나 생각은 단 한 조각도 힘을 발휘하지 않는 것이 없고, 또한 우리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개인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곱 차크라의 상징적인 힘
인간의 신체에는 일곱 개의 에너지 중심이 있다. 각각의 에너지 중심에는, 더 높은 意識 世界로 進入
함에 따라 우리가 보편적으로 배워야 할 영적인 삶의 교훈이 들어 있다.차크라 시스템은 개인 의식이
일곱 개의 분명한 단계를 거쳐서 성장하는 원형적인 모습을 잘 설명해준다. 차크라는 척추 밑바닥에
서 머리끝을 향해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세속적인 유혹의 힘을 뿌리치고 서서히 신성으로 올라
가는 길의 움직임을 암시한다. 각 단계마다 우리는 점점 더 정제된 개인의 영적인 힘을 이해하게 된다.
첫번째 차크라. 물라다라 (뿌리받침).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교훈
두번째 차크라. 스바디스타나 (그녀의 특수한 거주지). 성욕, 일, 육체적 욕망에 대한 교훈
세번째 차크라. 마니푸라 (반짝이는 보석의 도시). 자아, 성격, 자존심에 대한 교훈
네번째 차크라. 아나타 ('꺾이지 않은'- 순수한 창조음音). 사랑, 용서, 자비심에 대한 교훈
다섯번째 차크라. 비슈다('정화된') 의지와 자기 표현에 대한 교훈
여섯번째 차크라. 아즈나('지휘부' 또는 '조건을 가진 절대'). 마음, 직관, 통찰력, 지혜에 대한 교훈
일곱번째 차크라. 사하스라라('천 개의 꽃잎을 가진' 또는 '조건이 없는 절대'). 영성에 대한 교훈
차크라의 에너지는 병(病)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동양의 영적 전통에서는 病을 사람의 내면적인 힘,
卽 精이 고갈된 것으로 認識하고 있다. 영적 전통들 사이의 共通點은, 영혼과 몸, 질병과 치유의 관계
에 대해 일반적인 인간의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영혼을 쇠약하게 하는 것은 결국 몸도 쇠약하게 만든다.
차크라, 聖事, 세피라(sefira)는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가?
우리의 생물학적 시스템에 자리잡고 있는 힘의 일곱 층에는 각각 하나씩 神性한 眞實가 담겨 있다.
이 진실는 이러한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가는 방향을 지시하면서, 우리 안에 맥박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에너지 시스템에 內在한 이 일곱 가지 진실에 대한 지식을 알고 태어났다.
이들 진실를 무시하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약화되는 반면, 이들 진리를 존중하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강해진다. 에너지는 힘이며, 우리 몸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몸은 힘을 요구한다.
모든 行爲, 즉 生覺 말 行動인 業(까르마)는 果報(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物質인 同時에 靈魂이다. 이 사실을 스스로 이해하여 몸과 영혼이 모두 건강해지려면, 물질과
영혼이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에너지 교환)하여, 무엇이 몸에서 영혼 내지 생명력을 끌어당기는지를
이해하고, 어떻게 해야 두려움과 분노, 과거에 대한 집착이라는 '가짜 신'의 손아귀에서 우리의 영혼을
구해낼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가슴을 타오르게 하는 힘은 단순히 DNA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성(神性) 自體에 그 基盤을 두고 있다. 영혼의 잘못된 방향을 치유하려면, 過去나 미래로 향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淨化하고,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현재로 돌아와야 한다.
일곱 가지 聖스러운 진리(眞理)
<외부적인 힘>
1단계 부족(部族) 차크라(물라다라)
'모든 것이 하나' 라는 신성한 진리를 에너지와 몸의 시스템에 전달한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 및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서로 連結되어 있다. 생물학적인 가족에 대한 결속이 우리가 모든 사람,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와 連結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틱낫한 스님의 말처럼, 우주만물인 우리는 '서로 얽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연결된 이 에너지를
경멸하게 되면, 우리 영혼의 내부에 갈등이 일어나고, 그 영혼의 갈등으로 인해 신체에서도 갈등이
발생한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기본 진리에 따라 세상만사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우주적
이고 영적인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一卽一切 一切卽一)
2단계 관계(關係) 차크라(스바디스타나)
'서로 존중하기' 라는 신성한 진리를 우리 몸의 시스템에 전달한다. 우리의 삶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宇理/우주의 이치/우주의식)의 성장에 필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영적인 견지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보거나, 내가 누군가의 적이 되는 현상은 대단히 부자연스럽다. 부정적인 관계는 상
징적 통찰력을 차단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合一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우리
는 그와 같은 합일을 통해서 절대로 진리의 세계의 의도를 볼 수 없다.
두번째 차크라는 共同體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씨앗을 뿌려 에너지로부터 물질을
창조하고, 잠재력으로부터 형상을 창조하는 生植의 욕구다. 이 생명의 나무안에서 창조는 생명이 샘솟
는 自然의 相互 作用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타인과의 성스러운 結合, 즉 생명을 연속시키는 합일을
형성하고자 하는 에너지의 욕구를 대변한다. 또한 영적으로 볼 때 이것은 타인의 내면에 깃들인 신성과
連結되고, 배우자와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영혼을 움직이게 한다.
3단계 개인적인 힘의 차크라(마니푸라)
우리의 시스템에 '자신을 존중하라' 는 신성한 진리를 전한다. 이 차크라는 신체에 위험이 있을 때
육체를 보호하고,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행동과 에너지를 警戒하는 감각인 '생존에 대한 직관'을
포함한다. 肉感的 本能을 무시할 때 우리는 결국 이 에너지를 무시하는 것이다.
병을 치유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데는 자아존중의 역할이 중요하다. 자아존중이 결핍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일시적이고 연약한 상태의 친밀감에 그치고 만다. 그렇게 되면 홀로 되는 데 대한
공포가 행동의 동기가 되고, 끊임없이 홀로 버려지는 상태를 두려워하게 된다. 자신을 확립하는 것,
즉 명예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을 의식적으로 인정하고 개발하는 일이야말로 건강한 몸 만들기에 필수
적이다.
<내면의 힘>
4단계 정서적인 힘의 차크라(아나타)
'사랑이 성스러운 힘' 이라는 신성한 진리를 우리의 시스템에 전달한다. 이 에너지 중심은 인체 에너지 시
스템의 正中央에 있는 힘의 中心點으로 內面 世界로 들어가는 象徵的인 出入口다. 이 차크라의 에너지는
우리에게 사랑만이 확실한 힘이라는 智慧를 말해 준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물론, 몸도 생존하고 번성
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에 가장 나쁜 독(毒)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용서(容恕)하지 못하
는 것이다. 이것은 정서적인 根源을 손상시킨다. 이 차크라 안에 내재한 도전은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용서의 힘을 개발하는 것이다.공허한 가슴은 疾病으로 이어지는 공허
한 삶을 만들어낸다. '가슴'을 짓밟는 행위는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치유는 불가능하다.
5단계 의지력의 차크라(비슈다)
'개인(個人)의 의지(意志)를 신(神)의 의지(意志)에 맏기라' 는 신성한 진리를 인간의 시스템에 전달한다.
다섯번째 차크라는 神性의 계획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와 자극을 위한 중심이다. 인간의 에너지 시스템이
거짓을 독(毒)처럼 여기기 때문에 거짓말(毒)은 몸과 영혼을 파괴한다. 영혼과 몸이 성장하려면 정직하고
고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만든 왜곡된 상황을 제거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해치
는 말은 그 사람과 스스로를 함께 타락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몸도 이런 형태의 파괴에 대한 책임을 우리
자신에게 지운다(불교에서 가르치는 바른말 正語)
6단계 우주마음(宇宙意識)의 차크라(아즈나)
'진실만을 추구하라' 는 신성한 교훈을 우리의 시스템에 전달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믿음을 바꾸어놓는
환경을 만나면서 진리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여섯번째 차크라에서 오는 에너지는 자신이 진실치
못하다는 인식(認識)에 이르도록 무자비할 정도로 밀어부친다. 이 에너지에 맞서 저항하면, 다시 말해서
더욱 심오한 진리가 정신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意識的으로 차단하면, 우리의 認識 시스템은
거짓에 덮여버리고 만다.우리가 무언가를 자꾸만 判斷하고자 하는 '먹물근성'에서 벗어날수록, 우리는
本來부터 神性한 이해의 속성을 향해 스스로의 마음을 더욱더 활짝 열어놓게 된다. 인간의 理性은 우리
삶의 神秘로움에 결코 해답을 줄 수 없다.
7단계 大靈魂(사하스라라)
'지금 여기 이순간 이 자리에 살라' 는 신성한 진리를 전달한다. 대영혼의 차크라는 우리의 영혼이 영원하
다고 말한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보다 강해져서 육체가 영혼의 명령에 순응할 때, 바로 그 희열의 순간에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여러 종교의 전통적인 경전이 행하는 가르침에 담긴 진리는, 우리가
분리(分離)가 아닌 통합(統合)으로 인도하게 한다.
제2부 일곱 가지 신성한 진리
우리 몸에는 힘의 중심점이 7개 있다. 각각의 힘이 갖는 상징적인 지혜를 통해 자신의 몸,마음,영혼의
건강을 평가할 수 있다. 두려움이나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에너지를 잃지 않고 우리 內面의 眞正한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다.
에너지를 읽는 법, 차크라에 대한 이해, 에너지를 완전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病이 나타나는 부위가
어디든간에, 일곱가지 차크라 전부를 포함한 총체적인 삶을 살피는 작업인 것이다.
<차크라, 기관, 정신적, 정서적 문제, 신체적 이상>
차크라 | 기 관 | 정신적,정서적 문제 | 신체적 이상 |
1 물라다라 |
육체의 지탱 척추 아래쪽 다리,뼈 발 직장(直腸) 면역 체계 |
가족과 집단의 물리적인 안전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능력 자립 능력 가정에서의 느낌 사회나 가족간의 법과 질서 |
만성요통 좌골신경통 정맥류 직장종양/암 우울증 면역 체계 이상
|
2 스바디스타나 |
성기 대장 요추 맹장 방광 엉덩이 부위 |
책임감과 죄의식 돈과 섹스 힘과 통제 창조력 대인관계에서의 윤리와 명예 |
만성 요통 좌골 신경통 남,여 생식기 문제 골반/요통 성적인 힘 소변 이상 |
3 마니푸라 |
복부 위장 장의 상부 간,쓸개 신장,췌장 부신 비장 중간 척추 |
신뢰 두려움과 위협 자존심,자신감, 자기 존중 자신과 타인 돌보기 결정에 따른 책임감 비판에 대한 감수성 개인의 명예 |
관절염 위나 십이지장 궤양 결장/장의 이상 췌장염/당뇨 급,만성 소화불량 식욕 부진,항진 간 기능 이상 간염/부신 기능 장애 |
4 아나타 |
심장과 순환 폐 어깨와 팔 갈비뼈/가슴 횡경막 흉선 |
사랑과 증오 원한과 비통 슬픔과 분노 자기중심성 외로움과 몰입 용서와 연민 희망과 신뢰 |
충혈성 심장 기능부진 심근경색(심장마비) 승모관 탈수 심전도 이상 천식/알러지 폐암 기관지 폐렴 흉추, 어깨/유방암 |
5 비슈다 |
목 갑상선 기관氣管 경추 입 이와 잇몸 식도 부갑상선 시상하부 |
선택과 의지력 개인적인 표현 꿈의 성취 창조를 위한 힘의 사용 탐닉 판결과 비판 신뢰와 지식 결정하는 능력 |
뻐근한 목 만성적인 인후통 입의 궤양 잇몸 이상 관자놀이 하악골 관절 이상 척추 만곡 후두염 내분비선 부기 갑상선 이상 |
6 아즈나 |
두뇌 신경체계 눈, 귀 코 송과선 뇌하수체선 |
자기 평가 진실 지적인 능력 적정성에 대한 균형 감각 타인의 생각에 대한 개방성 경험에서 배우는 능력 정서적인 지성 |
뇌종양/뇌출혈/뇌졸중 신경 교란 시각,청각 장애 척추 전체 이상 학습 장애 중풍 발작 |
7 사하스라라 |
근육 체계 두개골 체계 피부 |
삶을 신뢰하는 능력 가치, 윤리, 용기 인도주의 이타심 좀더 큰 틀을 볼수 있는 힘 신뢰와 영감 영성과 헌신 |
에너지 교한 정신적인 우울증 신체 이상과 무관한 만성 피로 빛 소리, 기타 다른 환경적 요소에 극도로 민감함 |
제1장 1차크라 부족의 힘
1차크라의 내용은 '부족의 힘'이다. 부족部族이란 말은 가족을 뜻할 뿐만 아니라, 관습적인 정의를 뛰어
넘는 좀더 함축적인 의미로 원형原型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형적으로 부족이란 말은 집단의 정체성,
집단의 세력, 집단의 의지력, 집단의 신앙 패턴 등을 내포한다. 1차크라는 우리를 땅 위에 존재하게
한다. 1차크라는 정서적,정신적인 건강의 기초다.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안정성은 가족 집단과 어린
시절의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다. 다중인격을 비롯해서 강박관념, 우울증, 알코올 중독과 같은 파괴
적 행동 등 각종 정신질환이 가족관계의 장애에서 시작된다.
부족문화
부족(部族)의 힘이나 그와 관련된 제반 사항은 다리와 뼈, 발, 直腸뿐만 아니라 免役體係의 건강 상태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상징적으로 볼 때, 免役體係는 부족의 힘이 집단을 위해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의 건강을 위해서 움직인다. 즉,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만성 통증, 뼈에 대한 문제 등은 개인이 속한 부족
의 힘이 나약해지면서 반대로 활동력이 왕성해진다.
부족에게 닥치는 힘든 도전은, 일반적인 感氣에서부터 낭창(피부결핵)에 이르기까지 면역 관련 질병에
민감해지는데, 그 도전은 극단적인 스트레스가 되어 우선 1차크라에서 힘이 빠져나가게 한다.어떤 사건
이나 사물, 아니면 사람에 의해 희생당해 왔지만, '희생'과 관련된 사람들의 意識은 자신이 소속된 부족
의 문화에 널리 퍼진 무력감을 반영한다. 개인이 1차크라의 건강을 유지하는 관건은 개인적인 부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社會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느낌을 갖고 있으면, 이
부정적인 認識을 잘 처리해서 그 때문에 에너지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부족의 문화를 향해 怨望을 키우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라는 신성한 진리의 치유력을 가로막는, 끊임
없는 내부 갈등에 우리의 에너지를 모두 낭비하게 되고 만다. 우리가 가진 靈性의 힘은 부족의 가르침에
내재한 모순을 넘어서서 더 깊이있는 단계를 추구할 때 비로소 성장을 시작한다. 상징적인 각성을 향해
變化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의 생명에너지와 생물학적 시스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앙 패턴에 따른 에너지
칼 융은 집단의 마음이 '가장 낮은' 의식의 형태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부정적인 집단 행위에
연루된 개인이, 자기의 개인적인 역할과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라는 진리에 반하는 어두운 측면이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볼 때, 意識化에는 活力이 필요하다. 자신의 개인적 신앙을 스스로 평가하고,
더 이상의 意識의 成長을 防害하는 요인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행위는 극단적인 도전이며,
따라서 지극히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變化는 삶의 本質이며 變化는 內外的으로 끊임없이 계속된다.
더욱 '의식적인 사람'이 되는 쪽으로 끌리려는 순간, 그것이 자기 자신이나 건강과 경력, 태도, 思考
등에 대해 혼자서 책임진다는 뜻임을 알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일단 삶의 한
영역에서만이라도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기 행동을 변명할 목적으로
'부족의 합리화'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部族意識에서는 개인의 책임이 제대로 定義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부족적인 여건에서는 개인적
선택의 결과를 회피하기가 훨씬 쉽다. 부족의 책임은 주로 개인이 재정과 사회적인 업무, 대인관계,
직업 등을 책임지는 상황을 의미하는, 삶의 물리적 영역으로 범위가 확장된다. "모두들 그렇게 하는데,
왜 나는 안돼?" 하는 이런 변명은 '모두가 하나'라는 신성한 진리의 가장 거친 모습이다. 그러나 의식화
된 成人은 부족의 합리화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
해로운 부족(部族)의 힘에 도전하기
忠誠은 부족의 아름다운 자질이다. 특히 그것이 의식적인 충성이며, 집단뿐 아니라 개인에게 바치는
헌신일때 더욱 아름답다. 그러나 방어능력을 해치는 극단적인 충성은 벗어나야 할 일종의 신념 패턴
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제가 그런 관념에서 떨어져 나오기만 하면, 그 관념이 더 이상 제 삶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부족의 결속은 충성뿐만 아니라 명예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죽을
때, 평생 뭘해서 먹고 살았다고 이야기해야 좋을까?"
부족들은 각자 나름대로 우리에게 '正義'의 槪念을 알려준다. 부족의 일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값진 일을 하면, 다른 구성원들도 자동적으로 '에너지 보상'을 받는다. 한편 부족의 정의를 위반하면
개인의 에너지 체계에 대한 힘을 잃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상태가 심해지면 영원히 '뿌리없는' '느낌'
으로 살아야 하거나,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부족의 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족의 法이 自然의 理致를 반영한 것은 아니다.
부족의 定義가 우리의 영적인 진보를 저해하는 경우라면, 개인의 선택권 너머에 있는 그런 權位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 도전은 우리와 결속되어 있는 가족이나 집단의 구성원들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질 것을 요구할 때가 많기 때문에, 1차크라에 연관된 가장 어려운 도전에 속한다.
1차크라가 주는 궁극적인 가르침은, 神性하게 주어지는 것만이 唯一한 정의(正義)라는 것이다.
인간의 논리와 정의가 항상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우리를 失敗로 이끌며,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事件들의 순서를 바꾸거나 願하는 대로 되돌릴 힘이 우리에게는 없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배신을 당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든가,
희생에 執着하게 된다. 우리는 (설령 물리적인 세계에서 배신을 당했더라도) 자신이 절대 희생당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아울러 이 고통스러운 경험도 우리가 어디에 믿음을 두고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한
일종의 사랑임을 믿어야 한다.
제2장 2차크라 관계의 힘
이 에너지는 7歲 무렵부터 고동치기 시작하여 뚜렷해진다. 이 또래의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조금씩
떨어져 나오면서 집 밖의 다른 아이들이나 어른들과 交流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最初의 相互作用
을 통하여 아이들은 個體化되고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자신의 선택 능력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2차크라와 함께 에너지도, 부족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으로 부터 개인적이고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다른 관계를 찾는 방향으로 이동해간다. 2차크라는 여전히 외부의 氣運과 연관되는 방향으로 우리
를 이끄는, 비교적 하위의 차크라지만 그래도 상당히 강력한 기운이다.
이 차크라는 다른 사람들과의 關係를 바라는 우리의 욕구와, 육체적 환경의 역동성을 어느 정도 통제하
려는 우리의 욕구에 感應한다. 이 에너지의 중심에서 비롯되는 疾病은 통제력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2차크라에 내재한 神聖한 진리는 '相互尊重'이다.
2차크라의 에너지에는 固有한 兩面性이 담겨 있다. 부족의 마음으로 나타나는 1차크라의 統一된 에너지
는 2차크라에서 兩極의 에너지로 분화된다. 2차크라에 담긴 양면적인 에너지와 결합되어, 우리가 과연
스스로 眞正한 自身을 알아가는 데 유익한 관계를 '끌어당기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익히 알고 있는 '유
유상종'이라든가, '제자가 준비되면 스승이 나타난다' 와 같은 말은, '무대 뒤에 숨어서' 일하는 宇宙의
에너지가 사람들을 만날 時間과 場所를 엮어서 언제나 꼭 必要한 때에 만나게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物理學은 2차크라의 에너지를 '因果의 法則(모든 行爲/業에 따른 반대급부의 結果/果報가 있음)'과
'磁性의 법칙(다른 극은 서로 당김)'으로 인식한다. 이것을 인간관계에 적용해 보면, 우리는 배워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와 反對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에너지 패턴을 생성한다는 뜻이다. 우연
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형성한 모든 關係에 앞서,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생성하고 아울러 門도 활짝
열어두게 된다.
선택의 힘
2차크라의 에너지는 우리가 부족의 집단 에너지를 넘어서서 진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선택은 양극단
에서 나온다. 그리고 2차크라의 兩面性은 긍정과 부정이라는 反對되는 에너지 패턴의 두 세계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選擇은 宇宙로 흐르는 微妙한
우리 에너지의 흐름에 기여하는데, 이와 같은 에너지의 흐름은 다시 인간 의식의 영향력에 감응한다.
모든 창조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담긴 선택의 힘을 管理하는 일은 인간경험의 핵심이다.
모든 영적인 가르침은, 선택하는 힘이야말로 靈魂을 物質로, 말을 肉身으로 轉換시키는
역동적 체계임을 깨닫도록 하는 영감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選擇은 創造 그 自體의 過程이다. 그러므로 현명하게 선택하라. 당신이 하는 각각의 선택이 곧
영적인 힘의 창조 행위며, 그러한 창조 행위의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 때문에 행한 선택은 믿음의 에너지를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나 選擇에는 神秘로운 側面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선택의 결과를 완벽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차크라의 첫번째 교훈은 선택이 가진 逆說的인 本性이다. 즉 옳게 보는 것이 틀리게 되고,
좋은 듯한 일이 나쁘게 끝난다. 그런가 하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잘 돌아갈 때 꼭 혼란이 일어나 일을
망치게 된다.
逆說的으로 들릴 지 모르지만, 2차크라의 에너지는 우리에게 스스로의 삶을 統制해 볼 마음이 생기게
하는 반면, 2차크라의 敎訓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統制力이 없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는 肉體的인
存在인 同時에 生命에너지로 이루어진 存在다. 하지만 物理的인 世界는 統制될 수 없으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任務는 外部世界에 對한 우리 內面의 反應, 卽 우리의 生覺과 感情을 統制하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을 統制하려 하기 때문에, 결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굴레에서 방황하고 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永遠한 秩序 속에 定着시키고, 變化의 움직임을 영원히 停止시켜서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에 대한 최종적인 통제력을 정립시켜줄 실로 엄청단 단 한가지 선택을, 우리는 끊임없이 추
구한다. 眞理는 바로 이 驛說的인 兩面性의 本性에 內在한다. 즉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다. 결과에 영향을 주는 우리의 힘은 선택의 動機에 있는 것이다.
2차크라의 과제는, 우리에게 어떤 選擇을 하도록 動機를 부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選擇은 믿음의 에너지나 두려움의 에너지 둘 중 하나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모든 결정의 결과는
그 믿음이나 두려움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이와 같은 選擇의 力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스스로 내린
決定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선택과 관계
2차크라의 에너지는 창조를 추구하기 때문에 대단히 변덕스럽다. 2차크라의 어두운 側面은, 우리를
支配하는 가장 代表的인 두려움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강탈과 배신, 경제적인 손실이라든가 가난
과 고립, 경제적 무능력 등이 그것이다. 이들 두려움은 평생 동안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행위를 이
끌어 가는 힘이다. 경전에서는 이 두려움을 '가짜 神들'이라고 표현한다. '가짜 神들'을 알기 위해서는,
關係가 필요하다. 關係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에너지 또는 개인적인 힘의 일부를 사용한다.
상충되는 에너지를 조절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우리의 도전은, 역설적으로 그 에너지를 宇宙에
內在한 '하나됨'에 대한 意識에 머무르게 하려는 試圖다. 우리는 關係의 내부에 자리잡은 갈등을
탐구함으로써 이 도전의 여행을 시작한다. 關係는 갈등을 낳고, 갈등은 選擇을 가져온다. 또한
選擇은 움직임을 낳고, 움직임은 더 많은 갈등을 낳는다.
우리는 自身과 他人 및 自身과 神 사이의 分裂을 초월하고 兩面性을 超越하는 選擇을 행함으로써
이와 같은 惡循環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한, 그
리고 그 사람이 우리 스스로를 投影하는 거울이라는 眞理를 잊어버리는 한,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갈등하는 에너지을 결코 떨쳐버릴 수 없다. 반면에 자신과 타인을 상징적인
合一體로 보면 서로의 差異를 조정하는 데 아주 유익하다.
창조적 에너지에 도전
2차크라의 에너지는 생명을 창조하고, '땅을 움직이고', 생명의 연속성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 7차크
라의 特質인 靈感과 달리, 創造的 에너지는 本質的으로 物理的이며, 땅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
리적으로 살아있는 생생한 존재감이다. 창조적 에너지는 自我의 兩極性 내지 相衝하는 性향들과 내면
의 대화를 갖게 하고, 이들 兩極端을 中和시키는 외부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또한 창조적 에너지
는 行動과 思考, 關係의 習慣的인 패턴을 벗어나게 한다. 習慣은 變化의 흐름을 멈추려는 試圖에 執着
할 때 만나게 되는 地獄이다. 창조의 에너지는 습관의 반복을 거부한다. 反復과 創造라는 이들 두 힘은,
인간의 心靈 내부에서 서로 반목하면서, 개인적인 의미를 가지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도록 우리를 몰아세운다.
2차크라의 에너지는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건에 대처하면서 精神的, 身體的, 靈的 문제 내지 주제에 대한
창조적 해결책을 얻는 데 필요한 주요 資源의 하나다. 이 에너지를 遮斷하면 發起不能이나 불임, 질 감염,
자궁내막증, 우울증 등이 나타난다. 또한 영적인 성숙도 방해받는다. 이는 마치 영혼이 스스로에게 "더 이
상 보고싶지 않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삶을 배우는 과정과 상호작용을 하고 싶지도 않아"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創造의 에너지가 계속 흐른다면, 그 에너지는 우리 삶의 形態를 지속적으로 變化
시키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事件의 意味에 대해 더욱 많은 內容을 가르쳐줄 것이다.
生存은 2차크라의 主된 錚點이다. 그러나 창조의 에너지는 매우 변덕스럽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일도 우리에겐 힘든 도전 중 하나다. 우리는 창조성을 마음 속으로만 활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창조의 에너지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도 나타난다. 가십거리를 만들거나 남을
교묘하게 操從하는 행위 등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활동은 2차크라에서 힘을 앗아간다. 否定的인 行동과
生覺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2차크라의 창조적 잠재력 속에는 갈등의 잠재력 또한 내재해 있다. 2차크
라의 신성한 진리는, 엄청난 영적 힘과 영적인 도전의 조절법을 포함하는 '서로 존중하기' 다.
性 에너지의 조절
성욕이나 성욕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2차크라 속에서 모양이 정해진다. 성욕은 다듬어지지 않은 힘이며,
생명을 생산하고 부양할 수 있는 다른 사람과 강한 결속 내지 친밀한 合一을 形成하려는 힘이다. 2차크라
의 에너지는 생명을 창조하려는 욕망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능력도 포함하고 있다. 섹스는
생명을 창조하는 手段 이외에도 자기 표현의 통로,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물리적으로 관계를 맺는 데서
얻는 便安함에 대해 우리의 意思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인 것이다. 성욕은 관능적인 양상을 찾아내
려는 우리의 잠재력과도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육체적, 물리적 욕구와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心靈과 肉體의 서로 모순된 에너지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1차크라에 자리잡고 있는
氣丹에서부터 머리의 '王冠'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크라 모두를 나선형으로 돌면서 척추 둘레를 휘
감고 있다. 쿤달리니 요가에서는 이 에너지를 조절하여 쿤달리니를 체험하는 방법, 즉 성적인 에너지를
훈련시켜서 영적인 엑스타시의 활홀한 상태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쿤달리니의 영적 수행은
性的인 에너지를 肉體的인 오르가슴을 통해서 定常的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에너지가 척추
를 타고 올라가서 마침내 신성과의 영적인 합일이라는 至高의 境地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에너지를 강탈하는 행위는 당하는 彼害者 못지 않게 뺏는 加害者에게도 害를 끼친다. 다른 인간을 침해
하는 행위는 에너지 체계의 독(毒)이 되므로 가해자의 생물학적 체계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에너지
침해는 비록 법적으로는 범죄행위가 아닐지라도, 육체적 정의를 超越하는 內面의 正義라는 카르마(業報)
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正義는 恒常 에너지 次元에서 實現된다. 이 때문에 영적인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容恕를 强調하고 圓滿하게 삶을 꾸려나가라고 권고한다. 영적인 신의 秩序는 삶의
均衡을 지속적으로 복구시켜 주는 힘이며, 공명정대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힘이다. 우리가 지켜보든 지켜
보지 않는, 正義는 적절하게 실현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소화하기 힘들다는 '靈魂의 事實'이다.
돈의 에너지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돈 역시 그 돈을 가진 個人의 의도(意圖)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되는 中道的인
物質이다. 무의식적인 경우가 많지만, 사람들이 돈을 자기의 生命에너지와 對等하게 여기게 되면, 그
結果는 대개 否定的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쓰는 돈은 단 한 푼일지라도 無意識的인 에너지
의 支出이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면 몸의 에너지는 결핍된다. 이 역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 모두는 영혼 속에
돈과 생명력을 어느 정도 接合시키고 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돈을 우리의 생명력과 分離시키면서,
쉽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에너지에 끌려오게 만들려고 한다. 돈에 대한 關係에서 人格的인 側面이 줄어들
수록, 우리는 돈의 에너지를 필요한 만틈 우리 삶 속으로 불러들일 可能性이 더 커진다. 2차크라의 에너지
는 떨쳐버려야 할 記憶의 파편들을 미묘하게 불러온다. 그러면서 몸과 영혼이 좀 더 총체적으로 행동하고
자 하는 欲望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윤리적 에너지
2차크라는 몸의 윤리적인 중심이다. 법(法)이 1차크라와 연결되어 있는 반면 個人的인 倫理와 道德은 모두
2차크라에 깃들여 있다. 1차크라가 담당하는 物理的인 秩序는 우리에게 安全하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고,
우리의 環境에 통제가 존재함을 느끼게 해준다. 반면, 2차크라의 倫理와 道德律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우리의 인간관계에 전달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는 言語를 제공한다. 倫理는 엄청
난 拘束力을 가진다.
그러나 다른 個人의 情緖的, 精神的, 心理的, 靈的 成長을 統制하기 위한 規則을 設定하는 것은 相互 에너지
의 破壞 行爲다. 개인적인 복수 역시 2차크라의 에너지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다. 2차크라는 자기 방어와 무
기의 중심으로, 2차크라를 둘러싸고 있다. 모든 사건의 심판을 '법에 맡기는' 일반적인 행위는, 우리에게 상
처를 입힌 누군가에게 복수하려는 욕망과 마찬가지로, 명예라는 개인적, 심리적, 감정적인 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복수의 에너지는 각종 生殖器 障碍를 유발하는 原因이며, 따라서 우리의 생물학적 체계에 가장 유해한
정서적 해독害毒이라고 할 수 있다.
2차크라의 개인적인 힘
힘은 生命力의 表現이다. 生命을 유지하고, 旺盛하게 뻗어나가고,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1차크라의 수준에서는, 마치 電流처럼 일정한 방식으로 우리와 결속되어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힘을 느
낀다. 그러나 2차크라가 가진 힘의 특성은 이 에너지를 물리적인 형태, 즉 유물론, 권위, 통제, 소유권, 성적
인 매력, 성욕, 에로티시즘, 중독 등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1차크라의 힘은 본질적으로 集團的이지만, 2차크라는 그와 달리 個別的인 본성을 갖는다. 우리 모두가 도전
해야 할 것은, '독불장군의 힘'을 갖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靈魂을 팔아넘기지 않고도 물리적인 힘과 편안하
게 相互作用할 수 있는 충분한 內面의 힘을 갖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에 살되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하
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네 몸에는 영혼이 없어. 영혼을 다시 불러올 수 없으면, 우리는 너를 죽게 내버려둘테다. 영혼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살아갈 수 없다. 네 영혼이 바로 네 힘이다" 우리 人間關係의 兩面性을 하나로 合一시키는
가장 核心的인 問題는 어떻게 '서로 尊重하기'를 배우느냐다. 그 길에서 외부적인 도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와 더불어,
우리 자신과도 건강하고 사랑이 깃들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3차크라의 에너지에 속하는
임무인 것이다.
제3장 3차크라 개인적인 힘
1차크라가 집단이나 부족의 힘에 感應하고, 2차크라가 자기와 타인 사이의 힘의 흐름에 感應한다면
3차크라는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인 힘과 관련되어 있다. 1차크라는 무게 중심이 밖에 있고,
항상 집단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2차크라 역시 무게 중심이 밖에 있지만, 그 초점은 관계와 관계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놓여 있다. 그러나 3차크라에서는,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초점이 옮겨감에 따라서, 그 무게 중심이
부분적으로 內面化한다.
3차크라의 神聖한 眞理는 自己 尊重이다. 이 차크라에 모이는 에너지들은 오직 한 가지의 영적인 목표,
즉 우리 자신의 自我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도와주려는 의도를 갖는다. 3차크라에 내재한 靈的인 特質은
우리에게 부족적 자아로부터 分離된 正體性을 創造하도록 촉구한다. 특히 3차크라는 물리적 몸의 境界에
까지 공명(共鳴)한다.
내면적인 힘의 강화
物理的 現象인 환영(幻影)을 극복하고 영혼(靈魂)을 選擇할 때 우리는 삶을 '재배열'한다. 우리가 행하는
매번의 선택으로 인하여 우리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물리적인 세계에 가깝게 가기도 하고, 영혼의 힘에
에너지를 투자하기도 한다. 내면적인 힘을 강화하기 위한 선택을 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삶과 몸, 건강,
마음, 영혼을 뒤덮고 있는 物理的인 世界의 權位를 制限하게 된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영혼
을 강화하는 모든 선택은 에너지場을 역시 강화한다. 그리고 에너지장이 강해질수록 부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경험에 연결되는 일도 적어진다.
자기 존중과 직관
워크숍에서 관(觀)에 대해 지도하면서, 나는 참가자들에게 내면적인 수련과 명상 수행을 가르쳤다.
그러나 명상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直觀을 개발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에 한 워크숍
을 통해 굳이 直觀을 개발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이미 직관에 접하고 있다.
문제는 이미 자기가 갖고있는 直觀의 本質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워크숍에서 모든 참가자들은 直觀을 豫言의 能力으로 混同하고 있었다. 그들은 直觀이 미래를 예견
하는 혜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直觀은 예언하는 능력도 아니고, 재정적인 손실이나 고통스
러운 관계를 피할 수 있는 수단도 아니다. 直觀은 지금 여기 이 즉각적인 瞬間에 에너지 데이터를 이용
해서 決定을 내리는 能力이다. 에너지 데이터는 '미래'의 어떤 장소에서 오는 신비한 정보가 아니라,
삶인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構成하는 材料의 集合인 것이다.
직관적인 안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목소리를 따른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가 느끼는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야말로, 침체되거나 불행에 처한 상황을 뚫고 나올 수 있게, 자기 삶을 책임지고
선택하도록 이끌어주는 主體임을 깨닫는 自己 尊重 意識을 갖는다는 뜻이다. 자기 존중 의식이 없는
사람은 失敗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直觀的인 衝動을 따를 수 없다. 직관이 제공하는 안내를 따를
勇氣와 개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 直觀은 엄청난 結果를 불러올 수 있다. 안내는 행위를 요구하
지만,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우리는 安樂함과 安全으로 成功 여부를 가늠하는 反面,
우주(宇宙)는 우리가 '얼마나 삶을 경험하고 배웠는지' 에 따라 우리의 成功 여부를 결정한다.
치유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치유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信賴다. 自己 尊重의 程度가 낮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또한 결여되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
이다. 疑心할 여지없이, 믿음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는 삶을 넘어서서 다른 세계로 도전할 수 있게 해주
는 核心이다. 內面의 힘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의 무게 중심을 外部 條件에서 內面으로 옮겨놓는 행위다.
<개인적인 힘의 4단계>
1단계. 變革
집단적인 사고에서 분리되기 시작하고, 자기 자신의 권위 의식을 확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행위도 작은 변혁에 들어가는데, 영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靈的인 盛熟도는 한 사람
의 意識이 얼마나 세련되었는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意見을 表現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眞實
과 勇氣로 測定된다. 용기란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우는 억지스러운 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역학은
2차크라에서 나오는 힘의 게임이다. 반대로 영적인 성숙은 진정한 내면적 신념의 반영으로, 자기 자신의
에너지場을 확립하는 능력을 말한다.
2단계. 혼란
새로운 만남이나 추구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내면의 자아에게 묻는다. 내가 다른 무엇을 믿고 있는가?
다른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자신을 더 알고 싶다.'
새로운 상황에서 情報는 우리의 肉感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3단계.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은 강한 자아의 감각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에너지를 주는 경우가
많다. 나르시시즘의 에너지는 우리에게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우리의 경계를 다시 설정할 수 있는
근간을 제공한다. 이 단계에서 일어나는 變化는 우리에게 좀더 중요한 內面의 變化를 따르도록 準備하
게 한다. "원하는 대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면, 곧 바로 제가 원하는 만큼 강해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願하는 存在는 네 번째 단계, 즉 進化의 重要性을 담고 있다.
4번째 단계. 進化
자기 존중을 개발하는 마지막 에너지는 내면적인 단계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서 오는 에너지와 妥協
하지 않고, 자신의 원칙과 존엄성, 신념을 지속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內面的으로 進步된 사람들이다.
테레사 수녀는 깊은 靈的인 默想의 時期를 지나서, 때가 무르익었을 때 自身의 直觀的인 案內에 따라
行動했다. 이 단계에서는 인간의 개성이 수백 만의 사람들에게 靈感을 줄 수 있는 源形的인 힘인 페르
소나(에고를 제거함으로써 도달하는 집단의식)로 變化하게 된다. 당신 自身의 靈魂이 命令을 내릴 때,
世界가 그 힘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여행의 도전
3차크라는 우리가 아직 마주할 준비가 안 된 두려움과 비밀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야심과 책임감, 장단
점에 대한 존중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가끔 개인적인 갈등으로 마음이 찢어질 듯한 커다란 전율과
함께, '채워지기 위해 먼저 비워지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 죽어야 하는' 낡은 生活習慣과 관련된 영적인
도전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독립과 성숙을 개발하는 길은, 건강을 위한 심리적인 어떤 행동보다 훨씬
더 엄청난 것이다. 자아 탐구의 내면적인 과정과 상징적인 통찰력에 적응하게 되는 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믿음을 성장하게 하는 중요한 靈的 使命이다. 直觀에 따라 움직이면, 두려움에 直面하는 도전을
그냥 지나치도록 내버려둘수 없다, 아니 두지 않는다. 온전한 인간이 되는 데 지름길은 없다. 그리고
직관적인 능력은 분명 대답이 아니다. 그것은 自己 尊重의 마음을 가진 결과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결과일 뿐이다.
제4장 4차크라 감정(感情)의 힘
4차크라는 인간의 에너지 체계에서 中心이 되는 發電所이다. 중간 차크라인 4차크라는 몸과 영혼 사이
의 媒介體로서, 몸과 영혼의 건강과 강약을 결정한다. 本質的으로 정서적이며, 우리의 정서적인 발달을
돕는다. 이 차크라는 사랑과 慈悲를 어떻게 行動으로 옮기는지, 우리의 가장 强力한 에너지가 사랑임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 지를 가르쳐 주는 靈的인 敎訓을 담당한다. 이 차크라는 우리의 情緖的 認識에
感應하는데, 삶의 質을 決定하는 데 이 情緖的 認識이 精神的 認識보다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신이 되게 하는' 우리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 에너지를 통해서 우리는 개인의
정서적 도전을 좀더 폭넓은 신의 계획으로 받아들인다. 神의 計劃은 우리 意識의 進化를 意圖한다.
정서적인 고통을 누그러뜨리고 人生이 어떻게 展開되는지를 알고자 하는 욕구에서 벗어남으로서
우리는 평정의 상태에 이른다. 내면의 평화를 얻기 위해 우리는 容恕라는 치유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人間의 私小한 欲求에 불과한 (스스로 규정한) 正義를 놓아버려야 한다.
4차크라에 내재한 도전은 3차크라의 도전과 비슷하다. 그러나 4차크라의 도전은 영적으로 더욱 세련
되게 다듬어 진 것이다. 3차크라의 도전이 物理的 世界와 連結된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이라면, 4차크
라는 內面 世界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 초점을 맞춘다. 卽 정서적 욕구에 기울이는 관심뿐만 아니라,
우리 自身의 生覺과 理念, 態度, 靈感 등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 段階의
실천은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關係를 形成하는데 가장 本質的인 要素다.
主된 두려움은 외로움, 범행, '느낌을 따르는' 두려움, 자기자신을 영적으로 보호하지 못하는 두려움,
정서적인 나약함과 배신에 대한 두려움 등이다. 4차크라의 에너지를 상실하면 질투와 비통, 화 미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도 容恕하지 못하는 固執 등이 생기게 된다.
사랑이야말로 神性한 힘이기 때문에, 4차크라는 인간의 에너지 체계의 무게중심이다. 일반적으로
知性이나 '精神的 에너지'가 情緖的 에너지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지만, 實際로는 情緖的 에너지가
人間의 몸과 靈魂을 움직이는 眞正한 原動力이다. 가장 순수한 형태일 때, 사랑, 특히 조건없는 사랑
은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는 無限한 能力을 가진 神의 實存이다.
우리는 사랑에 익숙하도록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한평생 사랑에 대해 배운다. 사랑의 에너지는
순수한 힘이다. 우리는 사랑에 친숙한 만큼 사랑에 이끌린다. 사랑으로 움직이고, 사랑으로 조종되며,
사랑으로 고무되고, 사랑으로 치유되며, 사랑으로 파멸한다. 사랑은 우리의 물리적인 몸과 영혼의 몸
모두를 태우는 연료이다. 삶의 다양한 도전은 제각기 사랑의 측면이 가진 교훈이다. 이러한 도전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우리의 細胞 組織 속에 모두 記錄되어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選擇이 모두 담긴
生物學적 結果物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힘 배우기
부족(部族)의 사랑은 條件없는 사랑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부족에 대한 충성과 지지를 담보로 한다.
2차크라가 각성되어 우정의 결속을 알게 되면서, 사랑은 '아웃사이더'들을 끼워넣을 수 있을 만큼 성장
한다. 우리는 血緣으로 連結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를 나누고 共有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3차크라가 깨어나면서, 우리는 외적인 것,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개인적, 육체적, 물리적 욕구에 대
한 사랑을 발견한다. 이들 세 차크라는 모두 외부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동반한다.
삶에서 맞이하는 다양한 위기는 그 핵심에 모두 사랑의 문제를 안고 있다. 몸을 치유하기 위해 정서적인
문제를 먼저 치유해야 할 때가 많지만, 정작 환자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는 때가 많다.
神性으로 가는 길, 自己 自身을 사랑하기
만약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다. 4차크라의 도전인 자기를 사랑하기
란 심장의 정서적인 메시지와 영적인 명령에 귀를 기울일 용기를 갖는다는 뜻이다. 자기를 사랑하기란,
심리 상태안에 깃들여 있는 이 원형적인 힘과 직면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상처 입은 아이'(상처 입은 영혼)
의 권리를 거두어들이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치유되지 않은 영혼의 상처는 우리를 계속 과거 속에 살게
하기 때문이다.
직관적인 안내를 따르는 것은 예방 차원의 건강 돌보기에서 택할 수 있는 최상의 형태다. 즉, 우리를 해칠
수 있거나 해치려는 부정적인 흐름을 직관이 경고하지 않거나, 육체적인 질병이 되기 전에 부정적인 에너
지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선택을 직관이 알려주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치유는 容恕의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 예수는 항상 환자의 情緖的인 苦痛을 먼저 치유했다.
肉體의 치유는 그 다음에 自然스럽게 따라온다. 자기애는 과거의 사람들을 다 용서할 정도로 충분히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야 그 상처가 더 이상 우리를 손상시키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상처는 우리를 손상시킨 사람들만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상처
에 대한 執着을 놓아버리면 아래 쪽 세 차크라의 신성과 맺은 '아이 같은' 관계에서 벗어나, 4차크라가
가진 사랑과 慈悲의 神性에 참여하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상처입은 아이'처럼 생각하는 한, 우리는
條件이 달린 사랑만을 하게 되고, 상실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 문화는 전반적으로 상처와 희생을 강조하는 데서 치유를 향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상처의 힘에 빨려들면, 우리는 이 부정적인 힘을 어떻게 내보내고, 어떻게 하면 '상처입지 않고'
스스로 강해지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의 문화는 아직 상처에서 벗어나 영적인 성인기로 진입하지
못한 '4차크라의 문화'다.
의식화된 자아 일깨우기
자신의 심장 내부로 들어갈 때, 우리는 아래쪽의 세 차크라, 특히 부족적인 마음의 친숙한 사고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습관적인 개념의 보호망에서 벗어나 '그럼 나는?'이라는 한 가지 질문만 가지고 우리는
자기 마음의 출입문 앞에 서게 된다. 그 질문은 수 년 간 스스로 억눌러 왔지만 잊혀지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자신을 위한 새로운 길을 결정할 수 있는 정서적 자료를 이끌어내는
주문과도 같다. 어디에도 우리를 편하게 해 줄수 있는 위력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우리는 다른 누구와의 관계나 다른 어떤 사물과의 관계도 아닌, 오로지 우리 자신과 관련되는 정서적 본성
을 발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만만찮은 임무를 시작해야 한다. '자아'와의 만남은 인간 의식의
변형을 활성화한다. 1960년대의 革命的인 에너지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럼 나는?'을 노래하게 만들었다.
그 뒤 人間의 意識에 대한 움직임은 우리 문화가 제4차크라의 원형적인 출입문을 통과하도록 몰고 갔다.
4차크라의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이혼을 증가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4차크라의 개방은 결혼의 원형을 협력관계의 원형으로 변형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대다수의 결혼에
서는 전통적인 결혼에서 요구되었던 '자아'의 포기 代身 오히려 성공을 위한 강한 '자아'감각을 요구한다.
혼배성사의 상징적인 의미는 그 자신의 인격 및 영혼과 먼저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명한 내면적인 이해가 이루어진 다음에라야, 우리는 비로소 성공적이고 친밀한 협력 관계를 창조할
수 있다. 따라서 이혼의 증가는 4차크라의 열림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되었는데, 이 4차크라의 열림은 사람들
을 먼저 자기 발견으로 인도한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생활의 파경에 대한 원인을 배우자와의 정서적, 심리적,
지적 욕구의 불일치로 설명하면서, 진정한 협력 관계 추구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4차크라의 열림은 또한 건강과 치유, 질병의 원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바꾼다. 한때 질병은 본질적으로
아래쪽 차크라가 원인이 되어, 즉 유전적 특질과 세균 때문에 발병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는 발병의
원인을 유독성 정서 스트레스 차원에서 찾는다. 우리의 전반적인 의학 모델을 심장의 힘을 중심으로 다시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상처의 언어를 넘어서기
'
친교의 언어'로서 상처는 치유를 지원하는 단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그 기능을 발휘한다.
사실, 현대의 결속 의례는 상처를 '요구한다'고 해도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전형적인 결속 의례는
대개 이렇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다. 서로 이름과 고향을 밝히고, 인종 내지는 혈통의 뿌리와 종교
경향에 대한 이야기(1차크라의 자료)를 주고 받는다. 다음으로 대화는 2차크라의 화제 쪽으로 옮겨간다.
직업에 대한 이야기나 결혼과 이혼, 자녀 등을 포함한 주변 관계의 역사, 아마 살림살이에 대해서도 이야기
를 나눌 것이다. 그 다음은 3차크라의 주제들인데, 개인적인 기호에 대한 내용으로, 식습관과 운동 스케줄,
여가 시간의 활용, 개인의 성장 프로그램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친밀한 관계를 확립하고 싶다면, 여기서
4차크라로 옮겨간다. 둘 중 한 사람이 아직도 '진행중'인 상처를 내비친다. 상대가 '결속'의 태도로 반응하
고 싶으면, 그 역시 중요도가 비슷한 필적하는 상처를 꺼내놓는다. 두 사람의 상처가 서로 엇비슷하면
둘이 '상처 짝꿍'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상처의 친교'에 바탕을 둔 결속은, 약해진 상대가 항상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내면으로 가는 길을 영원히 열어둘 것을 암묵적으로 보장한다. 그러헌 결속은 의사전달의 측면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뜻한다. 즉, 그것은 치료의 지원과 치유에 대한 서로간의 헌신을 북돋우기 위한
사랑이다. 1960년대 이전, 성숙과 힘의 개념은 자신의 고통과 취약점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이 개념에 자신의 내면적인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까지 포함되어 있다.
心臟을 강하게 하기
한 걸음, 고통의 근원으로 가는 모든 길을 치유 쪽으로 인도하라. 이것은 자기 시각의 방향을 내면으로
돌린다는 뜻이며, 자신의 상처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두 걸음,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상처를 확인하라.
상처를 이미 힘으로 전환시켰다면, 왜 치유를 두려워하는지를 직시하라. 상처를 확인했을 때, 누군가에
게 그 상처 존재와 아울러, 상처가 앞으로의 성장에 미칠 영향을 '목격'하게 하라.
세 걸음, 일단 상처를 입에 올리게 되면, 상처를 이용해서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통제력을 행사하는 양상을 잘 관찰하라.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가 상실될
까봐 두려워한 적은 없는가?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선택 때문에 익숙한 생활의 일부 혹은 상당 부분을 잃
게 될까봐 두러운가?
이상의 사항이 스스로 정직하게 대답해야 할 일련의 질문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놓아버리는 것보다 상처에서 나온 힘을 떠나보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때가 많다.
상처의 힘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사람은 일단 상처중독이다. 이 걸음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치료법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는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네 걸음, 감사와 은혜의 의식 안에서 살라. 필요하다면, '실제로 해낼때까지 그런 척이라도 하자.' 영적인
수행을 시작해서 끝까지 밀고 나가라. 영적인 규율을 무너뜨리지 말라.
다섯 걸음, 일단 감사하는 마음으로 의식이 바뀌면, 용서의 도전을 맞이할 수 있다. 용서는 의식의 복잡한
행위다. 개인적으로 복수해야겠다는 마음과 자신이 희생되었다는 인식에서 정신과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용서는, 상처 입힌 사람을 책망하는 데서 벗어나는 일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희생자
'의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뜻한다. 용서가 주는 해방은 의식을 이론상으로가 아닌, 에너지상으로, 생물학적
으로 한층 더 고양시킨다. 사실, 진정한 용서의 행위가 빚어내는 결과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을 정리해 보라. 의논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원망의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건 진정으로 상처를 흘려보내고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의도가 나의 영혼을 과거로부터 되찾는 것임을 분명히 하라. 절대 또 다른 분노의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
여섯 걸음, 사랑을 생각하라. 치유에 대한 이상한 것 한 가지는,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느냐에 따라, 그보다
더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그보다 더 복잡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4차크라는 인간 에너지 체계의 중심이다. 우리 삶의 안과 둘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슴의 에
너지를 연료로 소모한다. "내가 받은 고통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더 큰 권위로 나를 두렵게 하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의 행위를 통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물리적 세계의 권위를 해방시킬
것인가? 4차크라에 담긴 의문은, 이 물음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자신의 해방'이 될 때까지, 우리의 삶 속에
거듭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의식을 일깨워서 그 의식이 우리의 삶을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영적인 의식을 향하는 유일한 길은 가슴을 통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진실은 타협할 수 없는
것이며, 신을 깨닫기 위해 어떤 종류의 영적인 전통을 선택하든 마찬가지다. 사랑은 신성한 힘이다.
제5장 5차크라 의지의 힘(意志力)
우리 자신의 의지력을 둘러싸고 있는 도전과 신의 의지에 대한 느낌을 드러낸다.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우리의 가장 높은 목표는, '신의 손'에 우리의 개인적인 힘을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사물이 우리에게 어떤 권위를 가진다는 부족적인 인식으로부터, 오직 나만이 나에게 위력을 발휘
할 수 있다는 인식을 거쳐, 진정한 권위란 신의 의지에 나 자신을 결합시키는 데서 온다는 최후의 인식에
까지 이르게 된다.
두려움은 각 차크라에 있는, 그 차크라의 고유한 意志力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자기 삶의 테두리 안에
어떤 권위나 선택 능력을 갖기를 두려워 한다. 그리하여 물질과 돈, 힘,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두고 이루어
지는 타인의 정서적 통제 등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이제는 자기에게 아무런
권위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두려움을 낳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神의 意志에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의 選擇 能力을 神聖한 힘에 스며들도록 풀어버리는
행위는 영적인 의식을 추구하는 길에서 거치는 가장 큰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주된 힘은 믿음, 자아, 지식,
개인적 권위,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결정을 알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로 인해 우리 자신이
나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지킬 수 있다.
5차크라는 영적인 카르마의 선택과 그 결과의 중심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選擇, 우리가 갖는 모든 生覺과
느낌은 生物學的이고, 環境的이며, 또한 社會的이고 個人的이며 全切적인 結果다. 우리는 생각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있으며, 우리의 개인적인 책임은 에너지가 뻗어나간 범위까지 그 전체의 영역에 걸친다. 실제로
우리가 에너지의 結果를 볼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행동뿐만 아니라 사고와 믿음의 에너지 결과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정직함을 요구하기
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든 자기 자신에게든 거짓말의 에너지 결과는 뚜렷하다. 완전한 치유인 진실은 우선
자신에게 정직할 것을 요구한다. 정직해지지 못하는 무능은 용서하지 못하는 무능만큼 심각하게 치유를
방해한다. 정직(正直)과 용서(容恕)는 '과거'의 에너지 차원으로부터 우리의 에너지, 즉 우리의 영혼을 회복
시킨다. 5차크라와 이 차크라의 영적인 교훈은, 개인적인 힘이 우리의 생각과 태도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비싼 에너지의 대가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위에서 나온다. 시대적으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에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幻想 속에서 살고 있다. 더 큰 선택의 힘을 갖기 위해 돈과 사회적 지위를 추구
하고, 다른 사람들이 강요하는 선택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힘있는 사람에게 기준을 두면, 個人的인
意志를 神聖한 意志에 내맡겨버리는 일이 매우 혼란스럽고 어려울 것이다.
5차크라의 정수는 믿음이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의 한 부분을 맡기는 것이
고, 어떤 이념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념에 우리 에너지의 한 부부늘 맡기는 것이며, 두려움을 믿는다는 것
은 두려움에 우리 에너지의 한 부분을 맡기는 것이다. 에너지를 내맡긴 결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가슴
과 우리의 삶 전체는 그 結果 속에서 組織된다. 우리의 믿음과 선택의 힘은 創造의 힘 그 自體다.
우리는 이번 生에서 에너지가 物質로 變하는 통로로 사용되는 그릇이다.
우리의 物質的인 삶과 靈的인 길이 하나이며 같은 것임을 항상記憶하라.
신성한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물질적인 생활의 즐거움과 안락함에서 解放된다는 뜻이 아니라,
物質的인 환상(幻想)에서 解放된다는 뜻이다.
사랑의 가장 偉大한 行爲는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判斷하는 일을 自制해야 한다는 점이다.
判斷을 즐기는것이야말로 영적인 失手임을 기억해야 한다. 判斷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智慧를 얻고
두려움을 이긴다. 고백의 행위는 우리가 내린 선택의 결과로부터 영혼을 바로잡는 것이다. 에너지의
本質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수록, 우리는 過去와 現在를 통틀어 우리의 영혼이 부정적인 사건과 생각에
얼마나 많이 사로잡혀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고백은 단순히 그릇된 행위를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意識
만이 아니다. 고백은 예전에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던 두려움을 認識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러한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음을 認定하는 행위다. 상징적으로 볼때, 고백은 우리의 영혼을
과거의 두려움과 부정적인 사고 패턴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부정적인 일과 믿음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 세포조직, 나아가서 삶 전체에 毒素가 된다.
카르마는 우리가 행하는 선택의 에너지인 同時에 물리적인 결과다. 부정적인 선택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선택을 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계속적으로 反復的인 狀況을 만들어 낸다. 일단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배워서 긍정적인 선택을 하기만 하면, 우리의 영혼은 가르침을 주려고 발생하는 부정적인 선택에 더 이상
執着하지 않으므로, 그런 부정적인 상황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고백의 행위는 우리가 지은 업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게 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실수를 깨닫게 하는
의미를 갖는다. 에너지의 용어로 설명한다면, 고백은 우리의 영혼을 고통스러운 배움의 순환에서 벗어
나,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에 편입되도록 방향을 전환하게 만든다. 우리의 마음과 몸, 영혼의
건강에 대한 고백은 너무도 本質的인 것이어서 우리는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意志의 中心은 감성 에너지와 정신 에너지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우리의 반응을 이들의 충동에
어떻게 조화시킬지 배울 필요가 있다. 정신적인 에너지는 외부적인 세계에 힘을 주는 반면, 감성적인
에너지는 개인적인 영역에 힘을 준다. '머리'와 '가슴'이 만나 이루는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는 사람을 조
화로운 인간으로 재 규정하게 되었다. 머리와 가슴이 서로 분명하게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면, 어느 한 쪽
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게 된다. 머리가 앞서면 정서적인 모든 정보를 적으로 돌리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고통받는다. 가슴이 앞서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머리가 앞서든 가슴이 앞서든,
양자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게 되면, 내면의 안정감이 아닌, 두려움이
나 헛된 목표인 통제의 욕구가 의지를 움직이게 된다.
이와 같은 머리와 가슴의 부조화는 사람을 중독 상태에 빠지게 한다. 에너지로 말하자면, 내면적인 성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행위가 탐닉이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이나 명상과 같은 비교적 건강한
행동까지도 고통이나 개인적인 통찰력을 피하기 위해 이용된다면 일종의 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훈련이 의식과 무의식의 마음 사이를 가로막는 고집스러운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정신적으로는 변화를 원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전환의 기회가 올 때마다 늘 변화를 두려워하는,
끝이 안 보이는 순환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악순환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
은 마음과 가슴의 합일된 힘을 약속하는 선택이다. 삶의 반복되는 악순환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어제가
아닌, 내일을 목표로 하는 강력한 선택이 필요하다. 이러한 결정은 머리와 가슴 양쪽의 에너지를 통합
하는 힘을 발휘한다. 삶은 이렇게 강력한 수준의 선택에 내재한 권위의 결과로 즉시 변화하기 시작한다.
제6장 6차크라 마음의 힘
마음의 차크라는 意識的이고 無意識的인 心理的인 에너지에 感應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마음(心)과
심령(心靈)의 相互作用은 直觀적인 洞察力과 智慧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智慧의 차크라다.
6차크라의 도전은 마음을 열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마음을 개발하여 人爲的이고 '거짓된 진실' 때
문에 잃어버린 우리의 靈性의 힘을 회복시키는 것이다.즉, 內面化된 行動을 보이고, 靈性의 힘에서
비롯된 生覺과 두려움이나 幻想에서 비롯된 生覺을 區別하는 것이다. 인간의 心理的인 特性엔 우리
가 아는 것과 事實이라고 믿는 것이 뒤섞여 있는데, 結局 이것들은 우리의 精神的 에너지體 內部에서
계속 活動하고 있는 事實과 두려움, 개인적인 경험, 기억 등의 요소가 配合된 總體라고 할 수 있다.
6차크라는 우리의 意識을를 智慧로 이끌어주고 轉換시켜주는 에너지을 活性化시킨다.(轉識得智)
주된 두려움은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자신의 두려움을 파헤치기 싫어한다. 이성을 흐리게 하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 건전하고 사실적인 판단에 대한 두려움, 외부의 상담에 의존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규율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어두운 면과 그 어둠의 속성을 두려워한다. 주된 힘은 지적인 능력과 솜씨. 의식적
이고 무의식적인 통찰력을 평가하기. 직관을 받아들이기. 창조성과 직관적인 합리성, 즉 정서적인 지성
의 역할 창출이다.
6차크라의 神聖한 진리는 오직 眞實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차크라는 모든 瞬間에 存在하는 두 힘인
眞實과 幻想의 差異를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밝혀내도록 인도한다. 幻想과 眞實을 分離해내는 것은 頭腦
보다는 마음이 해야 할 일에 더 가깝다. 頭腦는 肉體의 活動을 命令하지만, 마음은 인간의 生覺 思考와
認識에 관련된 에너지體의 活動을 命令한다. 頭腦는 思考를 行動으로 유도하는 육체적인 道具다. 그러나
知覺(혹은 '의식하는' 행위처럼 지각과 관련된 모든 것)은 마음의 特性이다.
對相을 認識하는 過程에서 眞正한 自身의 우리는 主觀的인 知覺, 自我意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주어진 狀況에 담긴 眞實 내지 象徵의 意味를 볼 수 있다. '떨어진다'는 것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목소리를 잠잠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內面的인 超然함을 얻은 사람은
너무나 완벽해서 外部의 어떤 狀況도 그 사람의 意識에 아무런 影響을 미치지 못하는, 그런 眞正한
自身의 느낌을 갖는다. 그러한 마음과 眞正한 自我의 明徹함이야말로 6차크라의 신성한 힘 가운데
하나인 智慧의 骨髓다.
초연(超然)해지기
'모든 것은 끊임없이 變한다'. '끊임없는 變化'라는 無常의 眞理는, 恒常 끝나는 終點이 同時的으로
새로운 始作點이라는 眞實이다(우주에너지정보장의 無始無終의 循環). 의식(意識)은 오래된 것을
解放시키는 能力이며, 모든 것은 가장 적절할 때 끝난다는 자각과 함께 同時에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은 變化없는 安定을 추구하기 때문에 안정 속에 사는 한 이 眞理를 배우기
어렵다. 따라서 意識化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現存하고 있는 것
이며, 어떤 사람도 똑같은 狀況이나 來日을 맞을 수 없다는 事實을 아는 境地다. 變化가 일어남에
따라 우리는 그 變化를 自然스러운 삶의 한 부분으로 해석하고, 道德經이 충고한 대로, 그 變化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變化와 함께 흐르려고'(無爲自然)) 노력한다. 똑같은 상태로 두려고 애쓰는
人爲的인 努力은 무모하고 허망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 최상의 에너
지를 투여하여 내일 경험하게 될 사건에 영향을 미칠수는 있되 統制할 수 없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과제다.
어떤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이 여러분의 人生 行路를 決定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이
바로 초연(超然)함이다. 따라서 나의 삶에 어떤 變化가 생겨날 때, 그것은 더 큰 力動性이 나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나를 해고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幻想이다. 그 幻想을 믿는 쪽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당신을 사로잡아 평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幻想의 그 瞬間을 놓아버리면 그 '음모'는 성공하지 못한다. 幻想을 놓아버리는 瞬間은 變化
에 대한 한 차원 높은 진실이며, 초연함을 동반하는 상징적인 통찰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實相이다.
'바깥 世上은 진정한 내게 아무런 意味가 없다. 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귀울일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意識化되는 방법, 신비가 솟아나는 방법이다. 즉 하나를 행동에 옮기면 또 다른 신비가
뒤따라온다. 그 과정을 중단하면, 生命力에서 점점 더 멀어져서 보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개인적
인(일상적인 개념 외에 人間의 靈性이 발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自然的인 靈性의 槪念을
갖지 못한 채 自己自身의 利己的인 '自我/에고'에만 눈떠 있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마음에서 一切
에 超然한 마음으로 進步하는 것은 아주 自然스럽고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意識이 없는 삶은 바로 죽은 삶, 習慣的 無意識的인 삶이지요, 자기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는 사실 조차도 모르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삶에서 가장 基本的인 것, 음식, 옷, 집, 돈 따위
등만을 생각하고 살아요. 그런 삶은 우리가 人間으로 이 世上에 왜 왔는지 그 목적을 생각해 볼 機會
를 전혀 안주죠. 그런데 일단 그런 疑問이 생기면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 의문은 항상
또 다른 진실로 향하게 합니다"
의식(意識)이 치유(治癒)에 미치는 영향
치유에 대한 의지(意志)를 갖는 것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반대로 內面的인 힘이 없으면 疾病이라는
에너지정보體는 肉體라는 에너지정보體를 자기 마음대로 망가뜨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疾病을 經驗함
으로써 밖으로만 내달렸던 自身의 意識의 빛을 자신의 內面으로 돌리고 자신들의 태도와 생활 스타일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치유 과정 회복 과정을 인간의 마음
과 신의 마음이 合一되어가는 여행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일단 眞正한 自己自身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나면, 이미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지만 두려움 때문에
그 느낌을 지워버렸다고 말한다. 직관적인 안내는 몸이 힘을 잃고 있음을 경고하므로, 이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일이다. 두려움이 점차 가라앉으면서, 사람들은 意識의 빛을 內面으로 向할 수 있게 되어, 마음과
정서적인 情報들의 내용을 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一致
되는 과정 내지 생각과 느낌의 되먹임질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방법이다. 치유는 머리와 가슴의 合一을
요구한다. 특히 감정에 대한 우리 의식의 태도는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일상적인 선택
에서 느낌 감정을 너무 과소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意識化의 한 가지 側面은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現在에 살고 매일 感謝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치유가 '의식화'의 문제임을 보아왔다. 문제는 질병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식이
기꺼이 認識하지 못한 생명력(生命力)인, 자연치유력인 것이다.
意識과 죽음
이 말은 치유되지 못한 사람들은 意識을 擴張하고 성숙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失敗라는 槪念은 全一的인 통찰에서 매우 큰 쟁점이 된다. 우리 마음의 진정한 본바탕 텅~빈 바탕 공간
의식의 메커니즘은 승리와 패배, 선과 악 같은 분리 분별이 없지만 現實로 나타나 보이는 모든 상황의
兩面을 다 보라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疾病이 치유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환자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곤 한다.
죽음은 치유에 失敗한 것이 결코 아니다. 죽음은 삶의 불가피한 한 몸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정서적
심리적인 고통을 스스로 치유하고, '치유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의식화'의 목표는 幻想인
죽음을 속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화된다고 해서 질병에 면역이 생가는 것도 아니다. 그 목표는,
삶의 모든 變化와 우리 몸의 모든 變化를 그 變化에 포함된 眞實의 메시지를 認識하고 바라보면서 아무
두려움없이 자신의 意識을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명상 같은 수련을 통해 意識이 擴張되면 신체적
인 질병에 대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명상하는 목적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物質 世界의 정복이 意識化의
목표는 아니다. 物理的인 世上과 肉化된 物理的인 몸은 삶이라는 여행 길을 가는 과정에 가르침을 주는
도우미일 뿐이다.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을 치유하는 일은 인간의 영혼이 의식화의 여행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평온한 의식 상태의 한 측면일 뿐이다.
"죽는다는 것은 전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에요. 다음 여행지로 떠나기 위한 적절한 때를 그냥
알아채기만 하면 되지요. 그냥 껍데기인 몸을 벗어 던지고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어떤 영혼이 지구를 떠날 때는 宇宙全切 에너지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아주 强한 靈魂이
떠나게 되면, 지구에 미치는 영향도 굉장히 극적이지요. 우리 모두 우리의 생명에너지가 이 지구에
들어와야 할 가장 완벽한 순간에 태어나듯이, 이 지구를 떠나는 가장 완벽한 순간 또한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苦痛이나 疾病으로 죽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의식적인 마음은 육체가 죽어가는
고통을 허용하지 않고도 몸에서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소걀 린포체는, 영적으로 어떤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신과 아무런 갈등도 없음을 아는' 意識의 水準을
깨달은 상태이며, 그래서 우리 意識의 選擇이 神의 選擇과 合一되는 段階라고 말했다. 소걀의 스승은
選擇의 딜레마(어떤 선택이 다른 선택보다 더 낫다고 믿는 것)가 存在하지 않는 意識 상태에서 사셨다
고 한다. 모든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 완벽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신의 마음과 상징적인 통찰력의 개발
"기독교에서는 神의 本質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佛敎에서는 現象의 背景, 本質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永生의 眞實은 무엇인가? 이번 生의 목적은 무엇인가?"
문화권마다 眞理의 表現이 달라도 모든 진리는 진리 그 자체의 수준에서 똑같은 것이다.
즉,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社會의 文化的인 形態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生覺 마음 意識의 限界를 넘어서는 生覺 마음 意識을 계발하는 일은 필생의 사명이다.
아주 구체적인 도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깊이 자리잡은 幻想의 두려움 속으로 우리 의식을
데리고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밖으로 향하는 우리 자신을 내면을 향하는 자신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 과정은 우리의 삶에 수없이 많은 變化를 가져올 것이다. 意識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내면이 재구성되는 동안 '기다림'의 시간을 경험했다. 영혼에 대한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일단 길을 떠나기만 하면 되돌아오는 길은 없다.
다음의 지침들은 宇宙的인 마음을 開發하고, 幻想을 꿰뚫어 보는 능력과 幻想의 背後에 있는
本性에너지의 능력을 이해하는 象徵的인 洞察力을 성취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자기 성찰을 실천하라.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과 그 이유를 의식하라.
- 마음을 활짝 열어두라. 그리고 마음이 언제 '닫히는지'도 깨닫도록 하라
- 방어란 새로운 통찰력이 마음의 장(Mind Energy Field)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시도임을 인식하라.
- 바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모든 상황과 관계를 상징적으로 중요하다고 해석하라.
- 꿈을 통해 안내와 통찰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라.
- 자기 연민이나 분노를 일으키는 생각, 자신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생각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 든 흘려보내라.
-초연함을 익혀라. 특별한 결과를 만들려고 하기보다 자신을 위해 가장 현명한 판단에 바탕을 두고
결정하라.
- 모든 判斷을 自制하라. 사람이나 상황을 거슬러 判斷하지 말고 사안의 크기나 중요성을 고려하여
판단하라. 어떤 상황, 사실이나 세부적인 사항을 모두 볼 수 없고 행동의 장기적인 결과도 볼 수
없다면, 자신이 줄곧 더 높은 진리로 여겼던 것을 염두에 두라.
-어떤 두려움에 영향을 받을 때가 언제인지 알아차리라. 마음과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여
그 두려움에서 즉시 벗어나라. 그런 다음 그 두려움의 영향을 약화시키는 쪽을 선택하라.
-삶에서 성공이 어떤 성취를 뜻한다고 믿는 모든 가치에서 멀어지라. 대신에 성공적인 삶이란
자아 통제를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보고, 삶에 도전을 하는 능력으로 보라. 성공을 물질적인 것이
아닌 생각에너지의 힘으로 視覺化시켜라.
-내면의 진정한 자신에 안내에 따라 행동하라. 그러나 내면적인 안내가 확실하다는 '증거'를 잡아
내려는 생각은 버려라. 증거를 요구할수록 받을 수 있는 것은 더 적어진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현재에 모든 마음을 두라. 즉 過去를 회상하거나 오지도 않은 未來를
염려하는 일을 자제하라. 볼 수 있는 것 보다 볼 수 없는 것을 더 굳게 믿어라.
意識化
의식화'에서 쉬운 단계는 하나도 없다. 책임을 외부적인 데로 돌리는 일은 적어도 순간적으로는 훨씬
쉬워보인다. 그러나 일단 진실을 알게 되면, 스스로를 오랫동안 속이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선택은 항상 지금 여기 그 자리에 있다. 意識化는 자기 삶을 사는 규칙과 의식을 바꾼다는 뜻이다.
제7장 7차크라 영성(靈性)의 힘
7차크라는 靈的인 性稟, 靈性을 우리의 意識과 連結시켜주는 고리이며, 영성이 우리 의식의 물리적인
삶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의식을 이끌어줄 수 있도록 영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우리에게 명상과
기도를 통해 강렬한 內面의 覺性을 일어나게 해준다. 이 차크라는 자연의 의식 차원의 삶과 우리
자신의 의식의 삶을 연결함을 뜻한다.
7차크라는 끊임없이 波動하는 에너지정보체인 인간에게 필요한 생명력(生命力)이 들어오는 지점이다.
이 生命力은 우주마음, 神靈, 神性, 佛性, 참나 또는 道라고 이름하는 宇宙 大自然의 波動하는 에너지정보
가 인간의 에너지정보 시스템 속으로 끝없이 밀려드는 현상을 말한다. 이 우주 대자연의 파동하는 에너지
정보장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宇宙의 純粹한 生命에너지, 宇宙心, 宇宙意識이다.
7차크라는 헌신, 직관적이고 예언적인 사고, 초월적인 이념, 신비체와의 연결 등을 생성하는 에너지를
포함한다. 보통사람의 意識을 훨씬 뛰어넘는 영적인 통찰과 비전, 직관을 위한 에너지 중심이다. 그것은
신비의 영역이며, 신성과 의식적인 교감을 나누는 차원이다.
7차크라와 연관되는 기독교 성사(聖事)는 죽음을 다스리는 儀式인 終傅聖事(또는 마지막 의식)다.
상징적으로 종부성사는 아직도 마음을 놓지 못한 '미완의 일'을 삶의 여러 '구석' 으로부터 거두어들
이는 과정, 그리고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말,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해버린 말 등과 같이, 우리의
意識을 계속 잡아당기는 悔恨을 놓아버리는 過程이다. 삶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그 때 했던 選擇을
받아들이고, 달리 선택했더라면 할 수 있었던, 혹은 달리 선택했어야 했던 것에 대한 느낌 생각을 내려
놓아버리면서, 意識的으로 이들 記憶을 마지막 終着點으로 가지고 간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해 '영혼이 다시 불려가는', 그리하여 완전한 영성의 차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뜻하는 바다. 우리의
의식는 살아가는 동안에 이전 삶의 패턴을 '죽여야(바꿔야)하는 瞬間'을 수없이 맞이하게 된다.
7 차크라의 神聖한 眞實은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現在에 살기다. 일곱 번째 차크라의 핵심은
개인적으로 영성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영적인 위기와 헌신의 필요성
영적인 危機의 증상은 뚜렷한 세 가지 側面으로 나타난다. 먼저, 영혼의 위기는 대개 삶의 외부적인
조각들을 뒤섞는 것만으로는 고칠 수 없는, 무의미와 목적의 결여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일상적인
해결책은 매력이 없다. 영적인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그들 내부에서 뭔가가 깨어나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 그들은 다만 그런 강한 욕구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를 뿐이다.
새롭고 이상한 두려움은 영적인 危機의 두 번째 증상이다. 이 두려움은 그 사람의 자아 또는 정체성의
감각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드는 특이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더 이상 알수도 없고, 내가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7차크라의 에너지에 흠뻑 젖어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다.
세번째 증상은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에 대한 헌신을 경험할 필요성이 생긴다는 점이다.
헌신은, 의식적인 마음의 일부를 무의식적이고 영원한 자아에 맡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신성한 존재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의미의 부재, 자아 정체감의 상실, 헌신의 필요성 이 세 가지는 그 사람이 '어두운 밤'에 들어섰음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징후다. 이들 특성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흔한 심리적 딜레마와 확실히 비슷하다.
그러나 그 뿌리가 영적인 근원에 닿아 있을 때, 그 사람이 위기를 맞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비방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위기의 원인이 자기 내면에 있음을 깨닫는다.
삶의 외부적인 구성 요소들이 보이는 부조화는 결국 영적인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것이다.
이 지상에 머무는 동안, 우리의 목표는 幻想을 타파하여 우리 영혼의 진정한 힘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창조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으며, 그러므로 사랑과 지혜로 행동하고 생각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과 모든 생명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
매일의 명상
우리는 내면의 영성, 불성, 진정한 자기자신의 힘을 통해 어떤 딜레마도 극복할 수 있다. 체험으로
배우고자 하는 의식적인 약속이 연결된 이 단순한 깨달음의 행위는 두려움을 무력하게 하고 영혼을
강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本性, 佛性, 神性을 갖고 있다. 우리가 神이고 부처다. 일단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깨달으면 즉, 참나가 무었인가?를 깨달으면 다른 선택이란 없다. 다만
영적인 삶을 살아갈 뿐이다.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과 마음 / 서암 스님 (0) | 2015.08.31 |
---|---|
완전한 깨달음 / 몽지 심성일 번역 (0) | 2015.08.30 |
나라고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0) | 2015.08.29 |
'텅~비어 있음'이 마음의 진정한 本性이다. (0) | 2015.08.29 |
다석 류영모 “예수 靈性은 佛性· 仁性과 결코 다르지 않아” (0) | 2015.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