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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는 있는 건가?

장백산-1 2015. 12. 20. 21:59

 

‘참나’는 있는 건가?

2015년 12월 15일 (화) 10:38:23법상 스님 beopbo

초기 경전에서는 무아(無我)를 설하고, 대승경전에서는 我相 타파를 설한다. 그러면서도 同時에 自性淸淨心, 참나(眞我), 本來面目, 主人公, 일심(一心), 법성(法性), 마음, 法 등을 설하기도 한다. ‘나’라는 것이 色受想行識, 五蘊皆空이라 固定된 實體가 없다고 말하면서, 同時에 참나, 본래의 나, 진실된 나가 있다고 말하니 이 쯤에 이르면 많은 분들은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이다.

 

실제 불교의 역사 속에서 이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주제 중 하나다. 심지어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는 진아(眞我)와 無我를 두 편으로 나누어 어느 쪽이 맞는지 토론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혼란스러움을 잠시 비워두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참나’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참나’ 찾으라고 말하는 건  眞理 찾으라는 方便의 말일뿐
'참나'는 認識 · 分別로써 확인될 수 없어, 區別하려는 生覺은 결국 執着心일뿐


보통 우리가 참나를 말할 때, 그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참나라는 말, 이름일 뿐이고, 生覺일 뿐이고, 참나라는 槪念에 대한 認識일 뿐임을 分明하게 알아야 한다. 많은 선지식 스님들께서 참나를 찾으라고, 本來面目을 보아야 한다고 方便으르 들어서 설법을 하시지만, 많은 제자들은 ‘도대체 참나가 무엇일까’ 하고 참나에 대하여 生覺하고, 分別하고, 認識해서 참나를 알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참나는 生覺되어질 수 없고, 말로 表現되어질 수 없으며, 인간의 認識과 分別, 앎 그 너머에 있고 없음을 超越해서 있을 뿐이다. 행여 ‘生覺 그 너머에 말로 表現할 수 없는 참나’를 말로 表現했다고 했을 때조차 表現된 그 참나는 그렇다고 말로 表現되어지고 있을 뿐이지 그 참나는여전히 참나가 될 수 없다. 그 참나는 단지 ‘인간의 生覺과 認識, 말의 表現을 超越해 있을 뿐’이구나 라는 또 다른 生覺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의 마음에서는 누군가가 참나에 대해서 무언가 表現을 하길 바라고, 論議되길 바라고, 說하여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經典에서는 참나, 그 자리는 表現할 수도 없고, 論議의 대상도 아니며, 生覺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참나, 그 자리에 대한 그 어떤 상(相), 관념, 개념, 생각도 내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라는 말이 대승불교 경전이 나온 이후에 논사들에게 설파되고 있는 理由도 바로 참나, 그 자리에 대한 어떤 相도 내세우지 말라는 가르침 여기에 있다. 결코 相으로 내세울 수 없는 참나, 그 자리를 어쩔 수 없어서 方便인 言語라는 相으로 說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에서 世俗諦와 第一義諦로 區分하는 方便을 썼던 것이다.

그동안 方便의 가르침을 사용해서 부처(佛)가 되어야 한다고, 自性佛을 찾아야 한다고, 本來面目을 보아야 한다고,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했던 모든 말 또한 단지 方便을 써서 참나를 가리키는 말뿐이었음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가 쉽게 쓰는 말 ‘참나’, ‘자성불’, ‘본래면목’, ‘한마음’이니 하는 모든 말들 또한 하나의 眞理, 참나를 가리키는 方便으로써 表現하는 ‘말’일 뿐이지, 그런 말들, 참나, 자성불, 본래면목, 주인공, 진리, 부처등의 이름 自體가 당처(當處)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方便의 말에 걸려서는 안 되며, 집착해서도 안 된다. ‘金剛經’의 表現대로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단지 이름이 참나일 뿐’이다.

 

그래도 여전히 ‘方便일 뿐이지만 참나, 자성불이 있긴 있는 게 맞지요?’ 하고 質問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런 質問이 바로 人間의 分別하고 認識해서 알고 理解하려는 習性, 있는 것 없는 것으로 둘로 나눠놓고 그 중 하나를 選擇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識(意識)의 헛되고 虛妄한 習性을 反映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도 五蘊, 十八界가 다 虛妄하다고 했듯이, 알음알이라는 分別心 즉, 分別意識은 헛되고 虛妄한 것이다. 알음알이를 통해서는 결코 禪, 法, 道, 佛, 心, 참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禪에서는 언제나 禪問答이나 話頭를 通해 分別意識 즉, 分別心인 生覺 妄想이 오도가도 못 하도록, 生覺이나 理解가 꽉 막히도록 이끄는 것이지, 머리로 理解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일견에서는 大乘이나 禪佛敎에서 方便으로 表現하는 法, 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 등의 이름만을 보고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인 無我에 어긋난 것이라고까지 폄하하는 일이 있던데 결코 그렇지 않다. 眞理를 가리키는 손가락 方便일 뿐인 그 모든 이름들은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言語的 方便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참나’  ‘본래면목’이라는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實際로 實在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물론 없다는 말도 아니다.

  
▲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육조단경’에서는 ‘本來無一物’이라고 했고, ‘백장어록’에서는 ‘원래 부처란 없으니, 부처라는 見解를 내지 말라. 부처란 중생에게 사용하는 藥이다’라고 했다. 또한 임제는 ‘구할 수 있는 부처도 없고, 이룰 수 있는 道도 없고, 얻을 수 있는 法도 없다’고 했고, 황벽은 ‘본래 부처에게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다’고 했으며, 대혜종고는 ‘모든 부처가이 세상에 나오고 祖師가 서쪽에서 왔지만, 역시 傳해줄 수 있는 法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러니 참나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오직 중도(中道)로써 설할 뿐이다.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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