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馬)의 일이 온다.

장백산-1 2016. 3. 14. 10:32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馬)의 일이 온다./ 현웅스님 법문|영원한 나를 찾아서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馬)의 일이 온다.

 

우리 삶 속에서 만나는 많은 일들은 어떤 것을 먼저 하고, 어떤 것을 나중에 해야 하는 것인지 구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먼저 할 것을 나중에 하고 나중 할 것을 먼저 하면 生覺은 좋지만 써지는 生覺은

적다. 곧 空想이 된다. 이 속에서는 삶의 길이 막힌다.

 

生覺이 마음을 먼저하고 生覺을 뒤로하여 쓰면 그 生覺은 힘이 있지만, 生覺을 마음이라고 믿고 쓰면

그 生覺이 오히려 混亂을 일으켜 마음이 顚倒夢想 속에 묻히게 된다. 전도몽상 그곳엔 智慧가 없다.

헛된 허망한 生覺이 내 本性에 있는 智慧를 가려서 生覺이  전도몽상이 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전도몽상 속에서 사는 사람은 現實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곳곳에서 모순을 만나 生覺이 生覺을

물고  일어나기 때문에 쓸데 없는 生覺에 골몰하는 경우가 많다. 情緖가 不安定하고 感情이 굳어져

몸에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로 남는다.

 

이렇듯 “전도몽상”이라는 말은 오래된 경전 속에 묻어 둔 말이 아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現實 世上

속에 있다. 佛敎는 이 現實生活을 멀리하고 따로 두고 있는 宗敎가 아니다. 佛法은 사람을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을 떠나서 佛敎가 따로 있다면 그 佛敎는 迷惑 속에서 佛이라는 부처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의 일이다. 깨달음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여기 이 자리 이곳에 있다. 다만

전도몽상으로 가려져 있는 마음이 自覺을 만나 내려놔지면 전도몽상이 본래 있는 자리로 돌아가  그

生覺은 다시 秩序를 회복해서 올바로 써진다.

 

看話禪의 話頭 參究法은 지금 여기 삶 속에서 직면하고 있는 전도몽상, 혼란과 싸우지 않고 그것을 놔두어

나를 다시 탄생시키는 가장 간단한 명약 처방이다. 많은 화두 가운데 하나가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온다.”이다. 이 화두는 나무의 푸른 잎이 바람에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 나무끌텅이가 땅에 닿아 있다

는 사실을 만나게 하는 마음공부 방법이다.

 

마음공부 중에 어떤 生覺이 일어나더라도 그 生覺을 지우려고 애쓰지 않고 대신 이 “나귀와 말의 일 “을

參究하면 들끊는 근심 걱정도 전도망상인 煩惱 生覺이 힘 안 들이고도 그냥 사라진다. 또한 공부를 하고

싶으나 잘 안 되고 근심걱정이 많을 때도 이 나귀 일 말의 일이라는 화두만 참구하면 근심걱정이 곧 숨이

죽는다. 나귀는 당나귀이다. 禪門에 나오는 이 나귀나 馬의 一句는 옛날 중국 사람들의 日常生活이 묻어

있는 言語이다.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온다.”이 言句는 글로만 봐서는 불경에는 없는 말이다. 敎學을 신봉

하는 이들에게는 몹시 낯설다. 그러나 言語에 執着함이나 如來의 32相에 執着함이나 둘다 집착은 집착

이다. 깨달은 사람은 옛 사람이건 지금 사람이거나 그 當時 現在 時代의 言語를 사용하기 마련이다. 그

言語 속에는 반듯이 살아있는 하나의 뜻이 있다.

 

佛說은 부처가 설하고 있을 때 그 말이 불설이다. 그러나 듣는 자가 자기 마음을 가리고 불설을 들으면

言語는 불설이 아닌 중생의 말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記憶만하고 있는 불설은 중생의 말일 뿐이다.

오직 부처(佛)에게 있는 마음 本來의 性稟과 나에게 있는 마음 本來의 性稟이 다르지 않는 것을 믿어

깨달아야 이제 그 佛說이 다시새롭게 봐져서 나에게서 마음 본래의 성품이 살아난다.

 

간화선은 마음 본래의 성품을 보는 마음공부 방법이다. 내 마음의 본래 성품을 알면 부처 마음의 본래

성품을 곧바로 안다.  부처 마음의 본래 성품과 나의 마음 본래 성품이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話頭는 마음 본래의 性稟을 품고 있다. 그래서 禪을 부처 마음의 본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본래의 성품을 본 사람은 佛說이 곧바로 봐지는 것이다.

 

옛날에는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가 없었다. 당나귀에 짐을 싣고 장에 오고 갔다. 큰 짐을 나를 때는 말을

이용하고 작은 짐을 나를 때는 당나귀를 이용했다.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馬)의 일이 온다.” 여기서

나귀는 머리 속에 일어나는 是非 分別 比較 判斷 解釋하고 헤아리는 生覺이나 마음, 내일 할 일을 오늘

미리 걱정 하는 마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고 돈을 주고 받는 일 속에서 일어난 생각들, 가지가지

번뇌 망상 등 世上 살아가는데서 일어나는 雜多한 生覺들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런 헛되고 허망한 雜多한 생각 마음 번뇌 망상들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본래 밝은 智慧를 갖추고 있는 마음 本來의 性稟은 現實 世上을 살아가는 過程에서 일어나는 雜多한 生

覺들을 한 순간도 떠나 본적이 결코 없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이 화두가 참구되면 일상을 놔두고

공부가 된다.


붙들고 있는 執着은 놓으려 들면 더 안놔진다. 오로지 화두를 참구하므로 놔진다. 번거로움은 힘 안

들이고 사라진다. 이것이 話頭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마음공부 중에 문득 한 生覺이 일어나면 그 生

覺이 왜 일어날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런 生覺이 일어나더라도 화두를 참구하면 한 생각은 곧 사라

진다.


그러나 화두 없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雜多한 生覺들이 떨어져 나가기만 바라면 마음만 더 복잡해진다.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馬(말)의 일이 온다는 이 화두를 들면 곧 나에게 본래부터 佛性이 있음을 안다.

그러면 일어나는 雜多한 生覺들이 저절로 그친다.


사실 우리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雜多한 生覺 妄想 煩惱를 알고는 있지만 生覺이나 知識으로는 놔지지

않는다. 텅~빈 곳에서 온 슬기로움, 智慧를 만나야 없어진다. 아는 것(知識)과 智慧는 다르다.


부처의 性質을 바로 알고 믿어야한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 밥과 물이 스스로 소화되어 대소변으로

나온다. 이런 일은 누가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다. 소화를 시키는 이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것이 

스스로 소화를 하고 있다. 이것은 모습이 없다. 모습이 없으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의 性稟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본래 이미 내게 와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공부가 잘 안 되느냐!

形像인 이 몸에 執着하는 생각 마음, 질서 없이 알고 있는 지식 견해들이 내 마음의 본래 성품을

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래 성품을 가리고 있는 執着心 分別心 知識 見解 雜多한 生覺이 없어

지면 우리는 누구나 부처인 것이다. 執着하고 있는 생각 마음 지식 견해 잡다한 생각들이 부처를

가린다.


이 몸에 숨이 그치면 곧 내 몸이 못 된다. 그러나 이 몸을 살게 하고 있는 것이 있다. 몸을 살게하는

이것은 분명하게 있지만 그 모습이 없다. 이것은 몸을 통해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몸이라는

형상 모양을 보면 중생이고 몸이 형상 모양이 아닌 사실 즉, 몸을 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이것을 알면

여래, 부처를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모든 相이 相 아닌 줄 알면 如來를 본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이다.

 

스승은 하나의 간단한 言句로 사람을 살려낸다. 즉, 마음 본래의 성품을 곧바로 보게 한다. 이 공부는

내가 서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곳에서 발 한자국도 옮기지 않고 곧장 이 자리에서 되는

공부이다. 왜냐하면 마음 본래의 그 성품은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反對로 마음 본래의 성품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곳에 놔두고 다른 곳으로 찾아나서면 만나는

것마다 길을 잃고 부딪치고 미혹에 빠긴다. 佛祖는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

곳에서 마음 본래의 성품을 보는 길을 보여 주고 있지만 내가 못 본다. 생사의 윤회 속에 괴롭고 어둡다.

오직 믿음 하나가 귀하다. 내 마음을 부처에게 허락하는 것은 믿음 속에서는 쉬운 일이다.


唐나라 방거사는 그의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있는 法도 없게 해야 하거늘 없는 法을 있다고 지켜

고집해서야!”  있는 법을 집착하고 지키는 것은 나귀의 일이다. 法이 法 아닌 줄 알아서 집착하고

지키는 法을 놔버리면 馬의 일을 만난다. 나귀의 일 즉, 雜多한 生覺 分別心 執着心 煩惱 妄想 속에서는

날마다 바쁘고 번거로움만 붙어 다닌다.


말(馬)의 일에는 障碍가 없다. 반야심경에  “심무가애 무가애고 ”가 그것이다. 다른 말로는 五蘊이

비었다(五蘊皆空)이라 한다. 오온 속에 묻혀 사는 우리는 동쪽에 가도 어둡고 서쪽에 가도 밝지 못하다.

우리는 關心을 마음 본래의 성품 즉,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공간의식 하나 이 자리에 두지

않고 늘상 다른 곳에 두고 밖을 향한다. 남과 比較하여 物質의 많고 적음에 마음이 가 있다. 나는 형상에

붙들려 있고 道人은 형상을 놓고 산다.


마음이 텅~빈 사람은 몸도 놔두고 마음도 놔두고 세상을 본다. 輪廻를 놔두고 세상을 본다. 그리고 어두

사람들을 밝음으로 인도한다. 끝이 없는 무한하게 깨달은 나무 깨달음의 나무! 곧 菩提樹가 그것이다.

이 나무는 心地 , 마음의 땅에 그 뿌리를 내리고 그 몸통과 가지와 줄기, 잎사귀가 달려있다. 우리 몸에

달려있는 보고 듣는 것 , 손과 발도 이와 같다. 우리가 배운 學識이나 藝術이라는 것도 眞理라는 나무에

달려있는 줄기나 가지 잎사귀와 같은 것이다. 이 학식이나 예술 또한 眞理라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心地 , 마음의 땅으로부터 오면 그 예술 과 학문은 심오한 道의 손발이 된다. 예술과 학문에 써지는

五感이 “ 진리가 있는 곳 ” 심지의 땅으로부터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이 몸에 붙어 있는

부분적인 것이 될 때는 쓸 때만 나오고 곧 없어진다. 유행하다 만다. classic 일수록 예술성이 오래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술의 깊고 낮음,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이 그래서이다.

 

그러나 사람 속에서 있다가 눈 뜨고 나온 眞理는 예나 지금이나 變하지 않고 있다. 그 眞理가 聖人이

말해 놓은 聖經이나 佛經이다. 禪은 성인의 언어가 지닌 뜻을 얻게 한다. 내가 그 뜻을 얻으면 곧 성인

이 나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성인의 마음이 마음 본래의 性稟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 본래의

性稟을 덮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言語는 그 맛이 오래간다. 禪을 깨달은 분들은 그 맛을 알고 있다.

사람이 이 禪心을 믿고 깨닫게 되면 누구나 얽키고 설킨 삶의 모든 문제가 풀린다.


그러나 心地의 바탕에서 먼 예술은 남보다 잘하고 못하는 分別에 놓이게 되어  本質을 떠나 심오함이

없다. 그러나 옛 문헌에는 음악이나 학문도 道를 떠나지 않은 예가 많다. 순임금의 음악이 그것이고

공자의 중용이 그것이다. 이 둘은 五感에 障碍 받지 않고 나온 음악이고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神의 소리가 되고 경전이 된다.


공자는 순의 음악을 듣고 3개월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한다. 음악이 곧 道를 떠나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공자는 순임금의 음악소리를 듣고 道에 든 三昧를 경험한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소리

나는 곳마다 觀世音菩薩이 있다는 말이요. 깨달음은 소리 나는 곳을 떠나서는 없다는 말이다. 곧바로

깨달음을 만나고 나온다. 깨달음 속에 있는 예술은 쓰는 손과 발이 다 예술이 된다. 깨달음이 있는 살

아있는 종교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 眞理를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는 그

잎과 가지가 무성하고 향기로운 꽃도 피워낸다. 오래가는 예술이다. 그렇지만 그 나무뿌리가 흙과 먼

곳에서 나오면 그 예술은 곧 시든다. 종교 또한 시든다. 그런 종교는 사람 속에서 시끄럽다. 세속에

있는 불안정한 연예인들의 생활이나 종교 속에서 道를 등지고 사는 종교인들에게서 많이 본다.


살아있는 나무가 흙을 안 떠나 있듯이 학문이나 예술 종교 또한 그 바탕엔 마음 본래의 성품을 안 떠나

있다. 사람이 마음 본래의 성품을 떠나있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다. 절 마당 옆에 꽃이 핀 복숭

아나무가 한 구루 있다. 나무뿌리를 찾아 들면 땅에 흙만 있고 꽃이나 잎이 없다. 그러나 나무 끝 줄기엔

꽃이 있다. 이 나무를 길러 준 흙은 잎도 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푸른 잎과 꽃을 피어낸다. 이렇

게 흙 속에는 푸른 잎의 모습이 없지만 나무에 붙어 있는 잎에 푸름을 주고 꽃에 색깔을 준다. 잎과 꽃의

그 生命 바탕은 그 始源을 흙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흙의 性質이 곧 佛性인 것이다.


내가 보고 듣는 것도 또한 이 성품인 심지의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내 어리석은 마음이 이것을 만나면

지혜로 바뀌어져 나온다. 있는 罪도 놔진다. 마음 본래의 성품은 나를 오게 하고 보게 하고 걷게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빈 것 속에 있다. 이것을 禪家에서는 짝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

예수는 이것을 南女關係를 하지 않고 나오는 獨生者라고 한다. 모든 성인은 마음 본래의 성품을 보고

나온 사람들이다. 나도 이 성품을 보면 그들을 만난다. 사람은 스스로 귀한 존재다. 이 믿음 하나가 귀하

다. 그리고 나는 밝아진다.


 주간불교:<한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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