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이전(以前)도 아니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모든 말이 마지못해 쓰는 임시 방편의 수단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갖추어진 오직 하나뿐인 본래성품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말이
이 깨달음, 본래성품 바깥의 일이 아니지만 어떤 말로도 깨달음, 본래성품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 깨달음, 본래성품을 마지못해서 生覺 이전의 일이라는 말로 표현할 뿐입니다. 또한 깨달음,
본래성품을 禪에서는 위음왕불(威音王佛) 以前 소식이라고 하기도 하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소식이라고도 얘기합니다. 위음왕불 이전의 소식이라는 것은 최초의 부처
(佛)인 위음왕불이 세상에 나타나기 이전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미생전의 소식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소식이고, 천지미분전의 소식은 하늘과 땅이 나뉘어지기 以前 太初의 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根源의 性稟, 깨달음, 本來性稟을 말하는 것입니다.
황벽스님이 행각하던 시절, 남전보원 스님 회상에 찾아갔을 때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황벽스님이 식사 때 발우를 받들고서 남전스님의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남전이 내려와서 보고는 물었습니다. "장로는 어느 해에 불도(佛道)를 행하였소?"
황벽이 말했습니다. "위음왕(威音王) 이전입니다."
남전이 말했습니다. "오히려 왕노사(王老師)의 자손(子孫)이로군요."
황벽은 곧 아래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황벽 스님은 남전스님과 법담을 나누기 위해 일부러 남전 스님의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무례를 무릅쓰고 아버지뻘 되는 남전 노스님의 자리에 앉은 이유는 뻔한 것입니다.
남전스님이 황벽 스님에게 언제부터 불도를 행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황벽 스님은 위음왕불 이전이라고 했습니다.
최초의 부처가 세상에 나기 이전부터 불도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최초로 불도를 행한 사람이 위음왕불인데 최초 부처가 나기 이전에 불도를 행했다고 하는 것은
생각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생각 이전부터 생각했다, 말없이 말했다 또는 시작도 하기 전에 시작했다. 등등의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말로 봐서는 수승한 경지입니다.
그러나 이 대답을 들은 남전스님이 '王老師의 子孫' 즉, 자신 아래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눈치 빠른 황벽 스님이 군말 없이 아래로 내려옵니다. 무엇을 가리켜 보인 것일까요?
당장 바로 지금 여기 눈앞의 당처는 아무리 그럴 듯한 生覺이라도 그런 生覺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生覺은 이미 벌써 觀念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위음왕불 이전 운운하는 말이 바로 지금 여기 내 살림살이이니 내 자손이다.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이들이 마지못해 생각 이전의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生覺을 통해서 드러나는 데 生覺은 그저 生覺일 뿐이어서 허망하다.
그런데 온갖 생각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드러난다.
온갖 생각 생각이 일어나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는 생각 以前의 消息(소식)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이 자리다 라고 이끕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진실로 가리켜 보이고자
하는 것은 '생각 이전'이라는 생각이 아닙니다. '태초' 혹은 '근원'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 등등
時間的인 時點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모든 말과 헤아림을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헤아림 없이 통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생각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언어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데 아주 유용한 방편의 도구입니다. 많은 사람이 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말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말을 씁니다. 善知識의 설법을 듣다 보면 수긍이 가서 자기도 모르게
긍정하며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많은 생각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萬象이
그저 지금 여기 이 순간 드러난 虛妄한 모습이라는 데 긍정하게 되고 많은 집착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개의 執着과 헤아림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法에 대한 執着과 헤아림입니다. 모든
分別心과 執着에서 벗어나는 공부인데 마지막 關門에서 法에 대한 分別想과 執着에 걸려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래의 성품, 깨달음, 근원의 성품 이것은 생각 이전도 아니고 생각 이후도 아닙니다. 이것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 소식도 아니고 태어난 이후의 소식도 아닙니다. 이 모든 헤아림, 분별망상이 바로 장애일
뿐입니다. 모든 분별 망상 번뇌 헤아림 생각을 내려놓아버리면 眞實은 虛空과 같이 탁~트여서 막힘이
없습니다. 法은 생각 이전이라는 指定된 위치에만 놓여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 불성이 감추어져 있다'는
경전의 말을 듣고 '나'라는 指定된 공간을 쥐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혹은 '만물에 불성이 있다'는 좀 더
넓은 指定된 공간에 머물러서도 안됩니다.
生覺 分別心은 區劃이고 境界線입니다. 생각 자체가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 분별심은 자꾸 規定하려 하고 限界를 지으려 합니다. 이런 생각 분별심은 공부에 장애일 뿐입니다.
애써 생각 분별심으로 규정하려는 온갖 시도를 놓아버리고 보면 모든 시공간이 바로 이것뿐입니다.
진실을 규명하고 이해하고 정리정돈하려는 생각, 분별하고 분리하는 마음의 습성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法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法이 나와 나의 모든 시도를 정리해 버려야 합니다.
- 릴라님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글쓴이 : 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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