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일상생활과 아미타불

장백산-1 2016. 5. 15. 18:57

유당|등급변경|조회 15|추천 0|2016.05.15. 07:18http://cafe.daum.net/yourhappyhouse/Ev0h/6036 





<iframe title='능생능멸(能生能滅)까지 가야 생사자재(生死自在)할 수 있다_종범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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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과 아미타불



능생능멸(能生能滅)까지 가야 생사자재(生死自在)할 수 있다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일상생활과 아미타불’이다. 일상생활이라고 하면 매일매일 항상 되풀이되는 


생활인데, 좋아하고 싫어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꿈을 갖고 때론 절망하는 등의 삶의 모습이 백년전이나 


천년전이나 비슷하다. 흥망성쇠, 희로애락하는 모습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같은 모습인 것이다. 모든 


심 걱정, 두려움의 중심을 보면 죽음과 연결이 되어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다.




불교의 여러 가지 가르침 중에 얼마나 깊이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배워야 


깊이 배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 선인들은 ‘그만한 배움으로는 生死 문제를 대적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정도로 공부를 하지 않고 그냥 본 것, 들은 것, 생각한 것만으로는 생사 문제에 직면했을 때 혼비백산


(魂飛魄散)하게 된다. 그러므로 臨終時에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간다고 하였는데, 임종


시에 열 번을 부를 정도면 생사를 대적할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 정도가 되려면 평소에 열심히 닦아야 하


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생겨난난 존재이므로 반드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음을 맞이할 때 얼마나 


넉넉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한용운 스님의 기행문에 보면 만주를 지나


다 총탄을 맞았다고 한다. 총탄을 맞는 순간 평소에 외우던 팔만대장경이 간곳이 없더라는 것이다. 얼


나 진실하게 마음을 닦았느냐, 깊게 닦았느냐 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말이다.

 



우리가 阿彌陀佛(아미타불) 할 때, 아미타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인데, 수명이 한량이 없고 


광명이 한량이 없다는 뜻이다. 시식(施食)할 때에 “불신장광(佛身長廣) 상호무변(相號無邊) 금색광명(


金色光明) 변조법계(遍照法界)” 라고 부처님의 몸이 길고 넓어 아니 계신 곳이 없으며 상호가 끝 닿는 


곳이 없고 부처님의 금빛광명이 온 우주를 두루두루 비추고 있다는 말입이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이 계시지 않는 곳과 계시지 않는 때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량수 무량광의 아미타


부처님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매일 매일 근심 걱정과 두려움 속에 쌓여 지내는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것


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다운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법장(法藏)을 여는 세계이며 法의 門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할 때, 불(佛)이란 부처님이요, 부처님은 覺者 즉, 깨달은 존재이


므로 무량수각(無量壽覺) 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 육십화엄경(六十華嚴經)에 보면 ‘심불급중생 시삼무


차별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고 해서,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이 셋이 똑같이 平等해서 


어떤 차별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량수불을 무량수심(無量壽心)이라고도 할 수 있고, 무량수중생(無量壽衆生)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 모든 衆生이 무량수중생(無量壽衆生)


이더라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중생이 죽음이 없다는 말, 불생불멸, 상주불멸, 무생법인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오래 살다 죽어도 그 壽命이 無量壽라 할 수 없기에 죽음은 없는 것이다 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입으로 아미타불을 말하면서도 죽음을 늘 걱정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희안한 일이다.


무량수가 될려면 죽음이 없어야 하고, 죽음이 없으려면 생겨난 것이 없어야 한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기 마련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불생불멸(不生不滅), 常住不滅의 세계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이다. 생겨난 것이 있지만 생겨난 것이 없고, 죽는 것이 있지만 깊이 보면 


죽는 것이 없다.

 


宇宙를 五蘊을 조견(照見) 하면 모두가 불생불멸이고 불생불멸은 무량수 무량광의 아미타불이다.

 

무량광을 적광(寂光), 대광(大光) 이라고도 하는데, 寂光은 고요한 빛을 말함이고, 大光이란 빛이 


비추는 곳이 있고 빛이 비추지 않는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빛이 비추는 때가 있고  빛이


비추지 않는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아주 큰 무한한 큰 빛을 말한다. 또 적광과 대광을 합하여 


대적광(大寂光)이라고도 한다.

 



햇빛이나 불빛은 그늘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아미타의 무량수 무량광의 빛은 그늘과 그림자가 


없고 밤낮이 없는 빛이다. 우리는 이러한 무량수 무량광의 빛인 아미타불 속에 살고 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다. 쓸데없는 시비 분별하는 생각 망상 번뇌 마음 걱정으로 인해서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


이다. 사람은 자기 집에서 잠이 들었어도 잠을 자는 동안에는 자기 집에서 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곳에서 잠을 자더라도 잠을 자는 동안에는 잠을 자고 있는 그곳이 좋은 곳인 줄을 알지 못


한다. 음식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입에 있을 때에만 맛이 있는 줄 알 뿐 삼키고 나면 


알지 못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 모든 것이 환상 환영 망상이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항상 무량수 무량광의 아미타불 속에서 살고 있는데 아미타불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송불(誦佛)하고 독불(讀佛)하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마음으로 하는 


정도가 되어야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읽고 외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염불을 하고 깊이깊이 들어가면 


아미타불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염불도 참선과 같이 강조를 많이 하는 것이다.

 


施食을 할 때 하는 게송(偈頌)이 있다.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염도념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은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 속에 이 화두을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말라 간절히 잊어버리지 말라.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는지 부르고 있지 않은지도 모를 지경인 무념처


(無念處), 無心, 無分別心에 도달하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등의 六門, 六根에서 


아미타불의 광명이 발산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죽음과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實際로는 아미타


의 무량수 무량광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양이나 형태가 사라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암흑도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므로 깊이깊이 아미타불을 관찰해서 


깨달아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깊이 보지도 않고 미리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을 妄想이라고 말한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무량수 무량광인 아미타불을 만나지 못할 때 온갖 근심 걱정 두려움이 생기는데, 이것이 중생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여기서 조금 더 공부하다 보면 시간이 없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지루함을 느끼면 공부가 되지 않는다. 공부의 특징이 항상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다. 시간이 없음을 경험


하는 것이 공부의 힘을 얻어가는 첫번째 단계이다. 오랜 시간 공부를 하였지만 잠깐이었던 것처럼 느껴


지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환상의 덫으로 없는 것이고 시비 분별하는 스스로의 생각 망상 의식 마음으로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즐거울수록 시간은 짧게 느껴진다. 행복할수록 시간은 없는 것 같다. 지루하다는 것은 


생각이 많고 망상 번뇌가 많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곧바로 보는 것이어야 한다.

 



마음공부를 할 때에 생각으로 마음공부를 하는 것인지 마음을 보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념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면 달아나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일어


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면 그런 생각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이 사라지도록 환경이 조성되면 


그런 생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생각 그것은 주인이 아니라 손님인 것이다. 도둑인 생각 즉, 마음을 


주인으로 잘못 알아 그것을 최고로 알고 매달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심하면 번뇌중의 심한 번뇌인 


狂症(광증)이라 한다.

 



시비 분별 비교 판단 분석 해석하는 생각 의식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으로써 이 세상을 보는 아니라 


실제로써 이 세상을 보는 것을 照見이라 하고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을 正見이라 한다. 조견과 정견으로써


불생불멸, 상주불멸,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이 세상으의 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진하면 죽음이 없는 불생불멸의 세계를 보게 된다. 죽음이 없는 세계를 보더라도 죽음에 


대한 걱정을 너무 많이 해왔기 때문에 그 습기(習氣)가 아직 남아있다.

 


불생불멸의 그 세계를 보긴 했지만 순간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 정진


을 하게 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원리전도몽상(遠離


顚倒夢想)이다. 이 단계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보던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였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환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게 된다.

 



다음의 단계로는 자비가 성숙하여 화현(化現)하게 된다. 불신(佛身)으로 제도할 사람은 불신을 나타내어 


제도하고, 보살신(菩薩身)으로 제도할 사람은 보살신을 나타내어 제도하고, 성문신(聖聞身)을 나타내어 


제도할 사람은 성문신을 나타내어 제도하는 것이 化現이다. 몸을 자유자재로 화현하는 단계가 최상의 


성불이다. 선에서는 이 단계를 능생능멸(能生能滅)의 단계라 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보고 다음으로 


전도몽상을 버려 망상이 일체 없게 되고 다음으로는 뜻대로 능히 태어날 수 있고 능히 죽을 수도 있는 


단계가 능생능멸의 단계인 것이다. 이 정도 되어야 공부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불생불멸만 알면 체(體)는 얻었지만 용(用)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능생능멸까지 가야 생사자재(生死


自在)할 수 있는 것이다. 생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정도로는 모자라는 것이다. 공부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므로 스스로의 공부가 어느 정도까지 와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념으로 정진하면 무엇


을 하더라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지 못하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지루함을 느낀다면 아직 공부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때 이미 一念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며, 비로소 무량수


무량광인 아니타불을  보고 불생불멸을 보게 되는 것이다.

 



죽을 때나 살아 있을 때나 헤어지거나 만날 때나 일체 근심걱정이 사라진 경지이면 體는 얻은 것이고, 


다음으로는 죽고 싶으면 죽고, 태어나고 싶으면 태어나는 能生能滅의 단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禪에서는 생사가 없음을 체험하는 단계를 체무생사(體無生死)라고 하여 생사가 없음을 체험하는 단계


라 하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므로 더 정진하여 용무생사(用無生死) 즉, 생사가 없음을 活用


하는 단계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화현이 자재하시어 분신으로 제도가 될 사람은 즉시 분신으로 화현하여 제도를 


하시는 것이다. 남자의 몸이 필요하면 남자의 몸으로 화현하여 제도하고, 여자의 몸이 필요하면 여자의 


몸으로 화현하여 제도하는 극치의 단계에 계시는 것이다. 거기에 갈 때까지 서원을 하여 닦아야 한다.

 

도둑이 들어왔을 때 또는 손님이 들어왔을 때 그에 매달려 있다 보면 도둑이나 손님은 온 목적이 다하면 


떠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미혹하면 그것이 진짜인 줄 알아 매달리곤 한다. 그러므로 도둑과 손님에 속아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공부해서 능생능멸, 화현자재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생사 속


에서 생사를 대적할 뿐만 아니라 생사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기본이 신심(信心)인데, 신심은 바로 예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불교의 기본적인 


예배방법으로는 합장례(合掌禮), 투지례(投地禮), 고두례(叩頭禮), 접족례(接足禮) 등이 있다. 그리고 


마음으로 본다면 귀명례(歸命禮)를 하여야 한다. 귀명례의 첫째는 공경례(恭敬禮)이다.  목숨 속에는 


눈, 코, 귀 등 온 몸이 들어있는데 목숨을 돌이켜 예배한다는 뜻이다. 두번째는 일심례(一心禮)로  온 


목숨은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눈으로 보는 생각이나 귀로 듣는 생각 등의 육경(六境)을 한 마음으로 


돌이켜 하는 것이다. 원효스님께서는 “歸命禮란 온 몸을 다 기울여 공경스럽게 하는 것이며 一心으로 


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을 만나기 위해 들어가는 관문인 것이다.

 


이 관문을 지나 능생능멸하고 화현자재한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심으로 예경하고, 일심으로 


염불하고, 일심으로 좋은 인연을 지어나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 종범 스님 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