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이 세상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

장백산-1 2016. 6. 23. 16:01

이 세상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


道를 배우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지 못함은 다만 종전의 分別意識을 진실이라고 알기 때문이네.

아득한 옛날부터 나고 죽는 근본을  어리석은 사람들이 본래의 사람이라고  부르네.


- 장사경잠(長沙景岑, ?~868)


학도지인불식진(學道之人不識眞)  지위종전인식신(只爲從前認識神)

무량겁래생사본(無量劫來生死本)  치인환작본래인(癡人喚作本來人)



이 공부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固定不變하는 實體를 

想定하는 것입니다. ‘부처(佛)’, ‘마음(心)’, ‘도(道)’, ‘알아차림’, ‘순수의식’, ‘참나’ 등등 方便으로 사용하

는 말(言語)에 속아 그러한 方便으로 사용하는 말이 가리키는 ‘무엇’이 實際의 實體로 있는 것처럼 잘못

認識하거나, 또는 바로 지금 보고 듣는 ‘이것’, 또는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놈’이라고 하는 그 말에 

該當하는 어떤 對相 境界를 想像하고 있다면 '무엇', '이것', '이놈', 이라는 그 말들은 全部 이 마음공부와

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놈, 즉, 외도(外道)에 해당합니다.


바로 그런 말들이 이 마음공부에서 極度로 禁忌視하는 알음알이(識), 分別意識, 分別心, 에고의식이며, 

사람들은 그러한 實體가 없는 虛妄한 알음알이(識), 分別心, 分別意識, 에고의식(識神)에 依存하기 때

문에 실체가 없는 허망한 에고의식[識神]을 자신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잘못 認識하는 겁니다. 왜냐하

면 떤 對相 境界가 있다고 生覺 想像을 하면, 그 對相 境界을 意識하고 認識하는 어떤 主體가 반드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보통 또렷한 의식의 상태나 고요한 마음의 상태, 육체적 감각적인 

에너지 現象 등등 어떤 對相 境界를 注視하고 알아차리는 ‘무엇’이 있다고 生覺하면 마음공부가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웬만큼 마음공부를 한 사람도 그렇게 어떤 對相 境界가 있다고 生覺해서 있다고 錯覺하는 그 對相 境界

를 注視하고 알아차리는 그놈이 바로 그 微妙한 分別心, 分別意識, 에고의식(識神) 즉, 나고 죽음의 根本

임을 알차리지 못하고 번번히 에고의식에 속아넘어갑니다. 그러한 病痛에 빠져 있는 사람을 위한 처방이 

바로 ‘오매일여(寤寐一如)’입니다. 에고의식(識神)은 分別心, 分別意識의 作用의 産物이므로 깨어서 分別

할 는 에고의식이 있는 것 같지만, 꿈도 없는 깊은 잠속에 들어가면 에고의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래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들었을 때 그대의 주인공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本來의 사람, 즉 나의 本來面目, 佛(부처), 覺(각, 깨달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나 

자신, 참나, 진짜 나, 본래의 나, 본래면목, 佛, 覺은 내 에고의식(識神), 分別心, 分別意識이 지켜보고 알아

차리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진짜 나를 가리켜서 생각 없음[無念], 머묾 없음[無住], 모양 없음

[無相], 마음 없음[無心], 알지 못함[不識] 등으로 친절하게 가리킨 바를 몸소 터득해야만 이러한 허망한 

病痛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리도 없고 위치도 없는 참사람[無位眞人],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無依道人], 배움을 끊어버린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絶學無爲閑道人]이 될 수 있습니다.


- 몽지님 /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