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한 티끌이라도 있으면 허공꽃이 떨어진다
영훈(靈訓) 스님이 처음 귀종(歸宗) 禪師를 찾아뵙고 물었다. “ 무엇이 佛(부처)입니까?”
귀종 선사가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해준다 한들 그대가 내 말을 믿겠느냐?”
영훈 스님이 말했다. “화상의 정성스런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귀종 선사가 말했다. “바로 그대가 佛(부처) 그것이다.”
영훈 스님이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보임(保任, 보호하고 간직함)해야 합니까?”
귀종 선사가 말했다. “한 티끌만이라도 눈에 있으면 허공꽃이 어지럽게 떨어진다.”
영훈 스님이 하직 인사를 드리니 귀종 선사가 물었다. “어느 곳으로 가려 하느냐?”
영훈 스님이 말했다. “영중(嶺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귀종 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여기에 여러 해
있었으니 짐을 다 꾸리거든 다시 오너라. 그대를 위해 最上의 佛法을 말해 주겠다.” 영훈 스님이 짐을
다 꾸리고 법당에 가니 귀종 선사가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영훈 스님이 귀종 선사의 法門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가가 귀를 기울이자 귀종 선사가 말했다.
“날씨가 추우니 조심해서 잘가거라.” 영훈스님은 이 말을 듣고 以前의 見解, 알음알이를 단박에 잊었다.
- 경덕전등록
禪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見解, 知見, 알음알이(識), 分別心, 分別意識이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소위 알음알이(識)의 장애 즉, 소지장(所知障)은 깨달음, 禪, 眞理를 가로막는 最大
最高의 장벽입니다. 禪, 眞理, 깨달음, 佛法, 참나, 진짜 나, 本心은 ‘이것이 禪, 眞理, 깨달음, 佛法, 참나,
진짜 나, 本心이다’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禪, 眞理, 깨달음, 佛法, 참나, 진짜 나, 본심은 執着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텅~비어 空한 것입니다. 理解는 실체가 없는 槪念的 틀이나 境界 짓기를 통
해서認識의 相對的 分別 差別에 依存해서 생기는 것으로 純粹한 意識, 선, 진리, 깨달음, 불법, 참나, 진짜
나, 진공장, 영점장, 끊임없이 파동하는 텅~빔 바탕 공간의식 하나, 바로 눈앞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를 가로막는 一種의 拘束입니다. 따라서 見解 또는 知見, 理解, 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의식에 대해 無
意識的 習慣的으로 執着을 하는 生覺 意識 마음은 해탈(자유)과 열반(행복), 깨달음, 진리, 참나를 방해합
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이러한 어리석음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위에 든 예화 속의 영훈 스님이 귀종 선사를 찾아뵙고 무엇이 佛(부처)냐고 묻자, 귀종 선사는 선뜻 대답
하는 대신 자신이 부처가 뭔지를 말해 준다한들 그대가 내 말을 믿겠느냐고 반문합니다. 佛(부처), 佛法의
정수는 사람들의 보편적 理解, 知見, 見解, 알음알이(識), 分別心, 分別意識을 超越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같은 반문을 한 겁니다. 영훈이 어찌 큰스님의 진실한 말씀을 믿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바로 귀종 선사
는 '네가 바로 佛(부처)다'라는 事實을 곧장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영훈 스님은 이 眞實을 하나의
理海, 知見, 見解, 思量分別心, 알음알이(識), 分別心, 分別意識으로 判斷하고 解釋해서 받아드리고 나서
어떻게 그것, 부처(佛)을 보호하고 간직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귀종 선사는 한 티끌이라도 눈에
있으면 虛空에 피어있는 꽃들(空華)가 人間이 精神을 차리지 못하게 어지럽게 떨어진다고 답을 했습니다.
佛(부처), 佛法, 禪, 道, 眞理, 깨달음, 참나, 진짜 나, 본심에는 보호하고 간직해야 할 것, 지키고 유지해야
할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부처(佛), 공(空), 무아(無我), 무상(無常), 불법, 선, 도, 진리, 깨달음, 진짜 나,
참나, 본심, 본성, 진심, 법성, 진성, 자성, 불성, 신성, 본래면목, 주인공, 영점장, 진공장, 전시안, The All
Seeing Eye, 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 등의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 온갖 현상으로 현시되어 드러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결코 絶對로 나와 別個로 분리되어서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對相이나 槪念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自己 自身, 바로 이러함, 바로 이와 같음이 그것, 부처(佛)일 뿐입니다.
부처(佛)인 自己 自身은 是非 分別 비교 판단 해석하는 生覺 망상 번뇌 마음 意識 즉, 알음알이(식) 분별
의식 분별심을 일키는 絶對의 主體이지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生覺 망상 번뇌 상념 의식 마음이
라는 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의식으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고 헤아릴 相對의 客觀 對相이 결코
아닙니다. 위 글 중에서 '이러함', '이와 같음'이란 말을 시비 분별하는 생각 망상 번뇌 상념 의식 마음이
라는 알음알이(識) 分別心 分別意識으로 理解하려는 순간 벌써 이러하지 못하고, 이와 같지 못하게 되어
버립니다. 한 티끌이라도 눈에 있으면 허공에 피어있는 허공꽃들이 人間이 精神 차리지 못하게 어지럽게
떨어지는 법입니다.
귀종의 가르침을 받고도 여전히 자신의 見解, 지견, 식견, 알음알이(식), 분별심, 분별의식을를 온전히 놓아
버리지 못했던 영훈은 얼마 후 귀종을 떠나기로 결심 합니다. 아무래도 공부의 진전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
일 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가르침, 이해하여 잡을 것이 없는 가르침에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직 인
사를 드리자 귀종은 영훈이 이곳에 오래 있었으니 짐을 다 꾸리고 나서 내게 오면 떠나가기 전에 이제까지
말해 주지 않았던 最上의 佛法, 진리, 깨달음, 佛(부처), 참나 진짜 나, 본래면목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합니
다. 영훈은 짐을 싸면서 마음이 설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껏 듣지 못했던 最上의 佛法이란 어떤 것일까?
영훈이 짐을 다 꾸리고 다시 귀종을 찾아뵙자, 귀종은 가까이 오라고 합니다. 뭔가 비밀스런 가르침, 최상의
佛法에 어울리는 제스처가 펼쳐지는 듯합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귀종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
영훈의 귀에 대고 귀종은 말합니다.
“날씨가 추우니 조심해서 잘 가거라.”
이 말에 영훈은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理解, 지견, 견해, 알음알이(식), 분별심, 분별의식을 단박에 잊어버
리게[頓忘] 된 겁니다. 不必要하게 가지고 있던 見解, 分別心만 사라지면 本來 있는 그대로의 상태입니다.
즉, 부처(佛), 佛法, 道, 眞理, 禪, 깨달음, 참나, 진짜 나, 本來面目, 주인공,본래마음, 관세음보살입니다
말끝에 단박 깨닫는 일[言下便悟언하편오]은 發話의 내용이 아니라 發話의 상황에 의해 촉발됩니다. 어떤
말도 이해할 필요가 없고, 분류하고 정리하여 체계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불법을 공부한
다면 그것은 동쪽으로 가려는 사람이 서쪽으로 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간절한 마음, 진실로 알고
싶은 純粹한 마음만 남고 雜多한 見解, 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의식이 사라졌을 때, 어떤 말이나 행동,
상황에 의해 본래 있던 마음, 부처(佛), 진리, 깨달음, 진짜 나가 저절로 자연스럽게 불쑥 드러나게 됩니다.
진리 그것을 덮고 있던 소지장만 사라졌을 뿐, 새롭게 얻은 진리, 불법, 부처(불), 도, 깨달음, 진짜 나, 참나
는 아무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佛法은 무다자(無多子) 즉, 여러 가지가 없이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見解, 지견, 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
의식의 장애만 사라지면 눈앞 ㅏ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佛
(부처), 불법, 진리, 깨달음, 선, 도, 깨달음, 참나, 진짜 나, 본래면목, 진공장, 주인공, 본래마음, 관음보살
입니다. 眞實에 對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見解, 지견, 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의식에 의지하는 것이고,
見解, 분별심에 의지하기 때문에 眞實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眞實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백
척 장대 끝에서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딛지 못하고, 천 길 절벽 위에서 매달린 손을 놓지 못합니다. 뿌리
깊은 장벽인 見解, 知見, 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의식이라는 장애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보지 못했습니
까? 신심명(信心銘)에 이르기를,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고, 둘 아닌 것이 믿는 마음이다[信心不二 不二信
心]’ 하였습니다.
진실을 믿는 그대의 마음이 그대를 구원할 것입니다.
- 몽지님
* 多聞第一인 아난이 부처님 입멸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여기 이곳에도 以前의
지식공부, 알음알이(식) 공부, 분별심의 공부, 분별의식으로 하는 공부를 포기하지 못하고 여전히 말과
글을 理解, 사량분별심으로써 정리하고 체계화 하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아무리 그 정리가 깔끔하고 통쾌할지라도 理解는 理解일 뿐입니다. 그 어떤 理解도 없어야 참다운 이해입
니다. 완전히 몰라야 완전히 아는 겁니다. 크게 죽어야 크게 살아난다는 옛사람의 말을 흘려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완전히 통밑이 빠지듯 마음 속에 담아 둔 것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소지장 즉, 理解와 알음알이(識) 分別
心 分別意識을 통째로 포기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微細한 分別心, 미세한 分別意識, 미세한
알음알이(識)에 사로잡혀 한 평생 마음공부를 망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렇기 되기 보다는 차라리 바보가 되는 편이 낫습니다.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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