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하대오(言下大悟)
보적(寶積) 선사가 하루는 시장을 지나가다가 한 손님이 돼지고기 파는 푸줏간에 있는 것을 보았다.
손님이 백정에게 말했다. “깨끗한 것으로 한 근 잘라주게!” 그러자 백정이 칼을 탕 소리가 나게 도마
에 내려놓고는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나리! 어느 것이 깨끗하지 않습니까?”
보적 선사가 이 말을 듣고 홀연히 깨우친 바가 있었다.
또 어느 날 보적 선사가 山門을 나섰다가 우연히 장례를 치르는 한 무리를 목격하게 되었다. 상여 앞에
한 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면서 노래를 하였다. “붉은 해는 반드시 서쪽으로 지는데, 오늘 혼령은 어느 곳
으로 가는가?” 그러자 상여 뒤를 따르던 상주가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을 하였다.
보적 선사가 이 소리를 듣고 활연히 크게 깨달아 몸과 마음이 가뿐하였다. 바로 절로 돌아와 자기가
깨달은 바를 마조(馬祖) 스님에게 말하니 마조 스님이 그를 인가하였다.
- 오등회원-
앞에서 말끝에 문득 깨닫는 일[言下便悟 언하편오]은 발화(發話)의 내용이 아니라 발화의 상황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흔히 간화선(看話禪)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화두(話頭)에 강렬한 疑問의 감정[疑情]이
일어나 그 疑情이 온 宇宙를 덮어씌운 듯이 하나의 의심덩어리[疑團]가 되면, 마치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풍선이 작은 자극에도 터져버리듯, 어떤 찰나 어떤 因緣에 의해서 그 疑團이 박살이 나게 깨져버리
면서 眞理를 깨닫는다고 합니다. 반드시 특정한 화두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러한 疑問의 感情이 생기
는 상황이 형성되면 意識이 思量分別하는 生覺의 限界를 돌파하는 체험이 일어납니다.
붓다를 비롯하여 간화선 형성 以前의 모든 선사들은 물론, 오늘날에도 佛法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러한 疑團의 상황에 떨어져 문득 자신의 本性을 發見 確認하는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證據들이야말로 佛法이란 것이 특정한 경전이나 교리, 수행과 상관없이 人間에게 本來부터
이미 완전무결하게 갖추어져 있는 本性을 깨닫는 일이라는 방증(傍證)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수행하느냐 보다 어찌 하면 그러한 상황, 疑問의 感情(疑情)에 강렬하게 사로
잡히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問題일 것입니다.
간화선의 경우처럼 그러한 疑情의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 話頭公案이라는 方便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화두공안에 강렬한 疑問의 感情이 일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애를 써서
의문을 일으키려다가 염불(念佛)과 비슷한 수행이 되어버리거나, 노력이 지나쳐 상기(上氣)병을 얻거나,
理致나 理解로 헤아려[義理] 터무니없는 격외(格外)의 문구로 문답하는 것을 공부로 삼는 폐해가 일어
나게 되었습니다. 意圖를 가지고 하는 수행은 生覺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쉽게 자기 자신의 無意識的
條件化, 生覺의 굴레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부터 이 마음공부를 하는 데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자기 生覺의 굴레로부터 벗
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경험을 해 본 사람의 지시와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운동선수와
코치의 관계처럼 자기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당사자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 주는 선지식의
말이나 행위가 강렬한 疑問의 感情이 일어나는 상황, 자기 生覺으로는 어떻게도 해 볼 수 없는 상황 속
으로 당사자를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임기응
변, 선지식의 手段이나 方便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화 속의 보적 선사처럼 특정 선지식의 지도나 수단 방편 없이 스스로 因緣을 따라 깨닫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이 때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당사자의 내면은 분명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강렬한 疑問의 感情 속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풍선의 내부압력이 높지 않으면 작은 자극에 의한
폭발이 일어나지 않듯이 당사자의 강렬한 의문의 감정(疑情)이 없다면 말끝의 깨달음이란 일어날 수 없
기 때문입니다. 당사자 본인도 왜, 어떻게 그러한 疑問의 感情에 사로잡혔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소위
흔히 時節因緣을 운운하게 마련입니다.
疑問의 感情이 힘을 얻게 되는 경우,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헤아리는 雜多한 生覺 妄想 煩惱 意識 마
음 즉, 알음알이(識), 지견, 견해, 이해, 분별심, 분별의식이 사라지고 疑心의 感情 덩어리만 홀로 드러나
는 경우는 당사자가 그 疑情을 알 수 없습니다. 당사자가 자신이 疑問의 感情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아직도 生覺 속에서 分別하고 있는 것이지 自己 生覺의 굴레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마음공부 중에 있는 사람은 자기 상태를 자기 스스로 자꾸 점검하려 들어서는 안되는 겁
니다. 자꾸 理解를 하려하고 마음공부의 過程을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혼자서 공부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發心이 지극하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어찌 되었건 예화 속의 보적 선사는 우연히 시장에서 백정과 손님 사이의 실랑이를 구경하다가 “어느 것
이 깨끗하지 않습니까?”란 말에 문득 깨우치는 바가 있었습니다. 우주전체, 일체가 한 덩어리일 뿐인데
한 덩어리 여기에 어디가 깨끗하고 어디가 깨끗하지 않느냐는 약간의 의미, 뜻이 남아있는 듯합니다.
그러다 나중에 상여가 나가는 것을 보다가 소리꾼이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혼령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라고 노래하는데, 상여를 따라오는 상주가“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는 소리를 듣고 통 밑이 빠지듯 시원
하게 본래면목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렇게 있는 이것을!
道는 결코 道를 벗어날 수 없으며, 道를 벗어날 수 있는 道라면 그 道는 道가 아닙니다.
- 몽지님 /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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