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을 위하여>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 설악 무산 조오현(1932~ ) ‘적멸을 위하여’
티베트의 장례법에 조장(鳥葬)이 있다. 죽을 때가 되면 숲 속에 들어가 명상하다가 앉아서 죽는다.
그래서 죽은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어 자신의 육신을 완전히 새들 중생에게보시하는 것이다.
중국의 총리 주은래가 죽으면서 자신의 몸을 반은 화장하여 비행기로 조국의 산하인 전국의 땅에
뿌리고, 반은 새들의 먹이로 주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중국이 공산국가이면서도 망하지않는
이유가 그런 先知的 보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虛妄한 肉身에 대한 愛着을 끊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의 行爲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
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래 전에 法頂 스님의 無所有하고 淸淨한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世界가 무섭
고 고통스러운 世界가 아니라 아름답고 황홀하며 평화로운 세계라는 깨우침을 얻었다.
마지막 5, 6연 “이 다음 숲에 사는 /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는 귀절은 온 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얼마나 멋진 詩의 종장(終章)인가.
이 詩 '적멸을 위하여'는 3장 6연으로 된 변형된 시조이다. 1·2연이 초장, 3·4연이 중장, 5·6연이 종장
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장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를 살펴보자.
오현 스님의 詩 속에는 죽음은 항상 삶과 한 짝이 되어 붙어 다닌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삶과 죽음은
本來 하나이다.
삶을 떠난 죽음이 없고, 죽음을 떠난 삶이 없다. 生과 死의 소식을 말로 표현하는 데는 限界가 있다.
겸손하게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고 정직하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본래 자기의 고유한 성질인 실체가 없다.
이 세상만물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성질의 요소들이 인연 따라 모여서 형상을 이루었다가 인연이
끝나면 自然과 虛空 속으로 되돌아간다. 色卽是空이요 空卽是色이다. 眞理의 世界, 法界인 空의
世界에서는 있음과 없음 유무(有無), 삶과 죽음 생사(生死), 오고 감는 거래(去來), 옳고 그름 시비
(是非)가 없고, 범부와 성인 간에도 어떤 分別 差異가 없다. 중생과 부처가 차이가 없어 둘이 아니다.
生死가 곧 涅槃(生死 涅槃 常 共和)이다.
이것이 분별사량(分別思量)하는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알이(식)이 끊어진 寂滅의 世界,
中道의 世界이고, 깨달음의 世界, 진리의 세계이다.
중장 “어차피 한 마리 /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에서 詩人은 自身을 ‘기는 벌레’라고 표현했다.
‘내가 나를 바라보니’에서도 “무금선원에 앉아 / 내가 나를 바라보니 / 기는 벌레 한 마리 /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 배설하고 / 알을 슬기도 한다.”고 노래한다.
그의 詩에서 하루살이· 쇠똥구리· 피라미들· 기는 벌레· 좀거머리· 개구리· 허수아비· 아지랑이·
지푸라기 등 네 글자의 하찮은 微物들이 主人公으로 등장한다. 이들이 깨우침을 주는 유마거사이다.
중생과 부처는 하나이다. 미물중생을 통해서 짐승보다 못한 인간중생을 깨우치고 있다.
내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무아(無我)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덜어주는
영약이다. 시인은 하찮은 벌레의 꿈틀거림 속에서 無限한 生命을 觀察하고 敬愛하고 있다.
미물중생이나 인간중생이 생명체를 가지고 수억 년을 進化해온 同類衆生이란 입장에서 보면 미물도
인간과 똑같은 등가(等價)의 위대한 생명체이다. 중생과 부처도 等價의 위대한 생명체이다. 고해(苦
海)와 화택(火宅) 속에서 苦痛 받고 있는 고륜중생(苦輪衆生)의 삶을 살피는 자비심과 오도의 세계가
오현 스님의 詩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적멸(寂滅)은 生死가 없는 열반(涅槃) 적정(寂靜)과 입멸(入滅) 입적(入寂)을 뜻하는 말이다.
열반은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인 三毒心의 불이 완전히 꺼진 평화로움 상태를 뜻한다.
또한 불교의 이상적인 경지로 석모니 부처님의 죽음 즉, 입멸(入滅)의 뜻도 있다.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하면 ‘平和’라고 번역하면 좋겠다.
죽음에 대한 執着心은 고통스런 죽음이고, 죽음에 대한 超越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열반이고 축제이고 행복이고 쉼이다. 깨달은 경지에서 보면 生死一如이고, 생사가 곧 열반이다. ‘
'적멸을 위하여’는 生死一如의 眞理를 일깨워주는 품격이 있는 시조이다. 불가에서 큰스님께서 열반
할 때 어려운 한시 게송으로 열반송을 만드느라 고생할 것 없이 이처럼 우리말 한글로 담담하고 멋지
게 한 가락 읊으시고 가시면 후인들에게 두터운 선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 해 본다.
오현 스님은 1968년 ‘시조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시조시인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최초로 시조시
형식에 禪詩를 도입한 선구자이며, 본격적으로 한글로 선시를 구가한 시승이다. 만해의 ‘님의 침묵’
이후 불교시의 성과 가운데 으뜸이다.
정지용문학상(아득한 성자), 공초문학상(아지랑이), 가람시조문학상에 이어 제13회 고산문학대상의
수상작 ‘적멸을 위하여’에 힘찬 박수와 찬사를 보낸다. 큰스님께서 강건하게 오래 우리 곁에 있어 주
셨으면 좋겠다.
<김형중 문학평론가·문학박사 / 동대부중 교장>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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