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깨달음, 진리, 진짜 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장백산-1 2016. 8. 9. 19:16

깨달음, 진리, 진짜 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대혜 스님이 운거사(雲居寺)의 수좌로 있었는데, 하루는 서적장(西積莊)에 갔다가 원통(圓通)에서 온 

한 승려를 만났다. 그 승려가 말했다. “수좌께서 지은 ‘여자출정(女子出定)’ 話頭에 대한 게송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기에 수좌의 인증(印證)을 구하려고 특별히 왔습니다.”


대혜 스님이 말했다. “깨달음은 그런 게 아니니 가시오!”  승려가 말했다. “제 견처(見處)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어째서 아니라고 하십니까?” 대혜 스님은 거듭 손을 흔들며 말했다. “가시오. 깨달음은 그런 

게 아니오, 그런 게 아니오!”  승려는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 종문무고-


깨달음에 대한 흔한 誤解는 깨달음이 어떤 特別한 見解, 知見, 理解, 知識, 分別心, 分別意識, 알음알이

(識)이거나, 신비한 체험이거나, 평소와는 전혀 다른 意識의 상태일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당장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特別한 ‘무엇’ 일 거라고 生覺하는 想像

입니다. 깨달음이 무언지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銘心해야 할 事實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卽, 이 마음(心), 無始無終으로 永遠히 波動하는 宇宙根源 에너지정보場을 벗어나서는 결코 새롭게 달

리 터득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는 事實입니다.  ‘무엇’이 아닌, 바로 지금 ‘이것’! ‘이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것’도 '무엇'도 결코 모양이나 형체가 있는 '이것' ‘무엇’이 아닙니다.


經典에서도 ‘智慧도 없고, 터득할 깨달음도 없다(無智亦無得)’, ‘한 法도 얻은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없던 것을 새롭게 얻게 된 그 ‘무엇’은 本來부터 이미 完全하게 있던 것이 

아니므로 時間이 지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없

었던 것이 새롭게 생겨났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져버리는 그것은 眞理, 깨달음, 진짜 나, 本來面目,

心, 본래마음, 眞心, 眞性, 佛性, 法性, 自性, 본래의 나, 근원의 나 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本來부

터 이미 完全하게 있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도 分明하게 存在하지만 나의 헤아리고 시비 

별 비교 판단 해석하기를 좋아하는 生覺 妄想 번뇌 잡념 의식 마음 卽, 알음알이(識), 지견, 견해, 이

해, 知識, 분별심, 분별의식에 빠져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던 그것을 뒤늦게나마 아~하  ‘그렇구나

!’ 하는 自覺을 일컬어서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입니다. 깨달음, 眞理, 진짜 나 그것은 特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깨달은 바가 있어서 인증을 구하러 온 승려에게 대혜 스님은 ‘깨달음은 그런 것이 아니니 가라’고 합니다. 

대혜 스님 말씀처럼 깨달음은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깨달은 바가 있고, 깨달은 그것을 남에게 인증, 

인가 받을 것이 있는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 사람은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진실

로 깨달았으면 진실로 깨달은 ‘깨달음’이 없는 겁니다. 남에게 묻고 確認 받을만한 깨달음 ‘그것’이 없습

니다. 自己 存在를 내가 지금 여기 있습니까 라고 남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제 정신

이 아닐 것입니다.


깨달았다는 生覺을 한다면 즉, 깨닫고 깨닫지 못했다는 二分法的인 生覺을 한다면 아직은 진실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깨달았다는 妄想 分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전히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생각 망상 번뇌 잡념 의식 마음 卽, 知見, 見解, 理解, 知識, 알음알이(識), 分別心, 分別意識의 티끌이 남

아있기 때문에 確然하게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가부(可否)를 남에게 물어야 한다면 바로 그것

이 깨닫지 못한 것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나의 깨달음이 맞는가? 분명한가?’ 하는 疑心이 남아

있으면 아직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결코 알고 모르는 分別의 對相 경계가 결코 아닙니다. 아는

것도 分別일 뿐이고, 모르는 것도 分別일 뿐입니다. 개구즉착(開口卽錯) 동념즉괴(動念卽乖)입니다, 즉,

입을 벙긋하는 同時에 깨달음, 眞理, 진짜 나와는 틀어지는 것이고, 是非 分別하는 생각 마음을 굴리는 

同時에 깨달음, 진리, 진짜 나와는 틈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비 분별하는 생각 망상 마음 의

식 말 행동과 깨달음, 진리, 진짜 나는 둘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닌 아주 妙한 無始無終으로 영원히 끊임

없이 波動하는 宇宙根源 에너지정보場이 펼치는 하나의 거대한 幻想의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음공부를 함에 있어서 점검, 인증은 필요합니다. 아직 안목이 철저하지 못할 때는 자기의 見處를 

점검 받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위에 든 예화 속의 승려는 대혜 스님으로부터 ‘당신은 아직 깨닫지 못

했다’는 점검, 인증을 받은 셈입니다. 듣지 못했습니까? 아는 자는 묻지 않고, 묻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진실로 깨달으면 모든 疑問이 해소됩니다.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疑問이 남아 있다면 아직도 

여전히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둘로 나뉜 의식상태이므로 그런 分別 妄想은 깨달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깨닫기 前에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깨달으면 깨달음은 없습니다. 그냥 깨닫지 못했을 

도 있던 깨달음, 진리, 진짜 나가, 깨달은 뒤에도 그냥 그저 그렇게 한결같이 如如하게 있을 뿐입니다.


깨달음, 진리, 진짜 나가 있다고 方便의 말로 表現은 하지만 깨달음, 진리, 진짜 나는 ‘무엇’으로 있는 것

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깨달음, 진리, 진짜 나는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없는 것 역시 있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말해보면 깨달음이란 곤한 잠 속에서 꾸고 있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實體가 없고 現實이 아닌 虛妄한 꿈속 意識狀態에서 깨어나 本來의 멀쩡한 意識狀態로 돌아온 것이 깨

달음입니다. 꿈에서 깨어나서 보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이 꿈에서 깨어나서 보는 것과 똑같이 깨닫고

나서 보면 온갖 現象들로 現示되어 나타나 있는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本來부

터 이미 언제나 完全한 적멸(寂滅)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적멸의 모습이 이 세상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諸法이 空相인 同時에 諸法이 實相입니다. 즉,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텅~빈 空 

寂滅의 모습인 同時에 온갖 現象들로 實際인양 이렇게 現示되어 드러나 있는 現實의 모습, 實相입니다


- 몽지님- / 무진장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