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은 한 번도 제대로 심판 받지 않았다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입력2016.08.15. 04:29기사 내용
을사늑약에 도장찍은 대한제국 대신 5명, 후손들도 부와 명예 물려 받으며 '떵떵'
‘을사오적(乙巳五賊)’이란 말은 유명하지만 을사오적이 누군지, 그들이 어떤 인물인지 아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을사오적은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기원으로 알려진 을사년인 1905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맺는데 동의한 5명의 대한제국 대신(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이지용)을 말한다.
日本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美國은 필리핀을, 日本은 한반도를 점령할 것을 계획했고,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해 영국의 동의도 구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같은 해 9월 러시아의 양해까지 얻어내 한반도 침탈을 위한 준비를 끝냈다. 11월 일본은 을사조약 체결을 위해 고종을 압박했다.
11월17일 하야시 일본공사가 각부 대신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을사조약 승인을 요구했지만 대신들의 반발이 있었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대신은 참정(총리)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공상부대신 권중현 등 8명이었다.
을사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한규설과 민영기 뿐이었다. 11월26일 윤병수가 올린 상소에는 당시 상황이 잘 묘사돼있다.
이완용은 “나는 조금 전에 (고종황제) 접견 석상에서 여차여차하게 말씀드린 바가 있을 뿐이고 끝내 찬성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며 모호하게 표현했고, 권중현은 “학부대신(이완용)과 같은 뜻이지만 한 가지 다른 건 황실의 존엄과 안녕에 대한 문구였다”며 “찬성과 반대의 두 글자 사이에서 충신과 반대의 두 글자 사이에서 충신과 역적이 구별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잘라 말했던 것”이라고 역시 모호하게 말했다. 이근택과 이지용 역시 “학부대신(이완용)과 같은 뜻”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각 대신들 의견을 물었더니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실지를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참정대신(한규설)과 탁지부대신(민영기)뿐”이라고 말했다. 이토는 대신 8명 가운데 5명이 찬성했으니 조약 안건이 가결됐다고 선언했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묵시적으로 승인했다.
▲ 을사오적, 위에서 순서대로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
자신의 종도 분노했던 을사오적 이근택
인간은 자신의 허물을 합리화하기 마련이다. 나라와 민중을 지켜야 할 군부대신 이근택은 나라를 일본에 팔고 와 식구들을 모아놓고 조약 체결과정을 설명했다.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토록 혁혁할 거요”
그러자 한 계집종이 부엌에서 칼로 도마를 후려쳤다. 그는 마당으로 뛰어나오며 안방을 향해 소리쳤다. “이집 주인 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 그는 이렇게 울부짖고 집을 나갔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오던 침모(바느질해 품삯을 받는 여자)도 도망갔다. (대한매일신보 광무 9년(1905년) 11월25일자)
이듬해인 1906년 2월 이근택은 자던 중 자객의 습격을 받아 칼에 13군데 찔리는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한성병원에서 가까스로 치료를 받아 살아났다.
이근택은 대한제국 초창기에 친러파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자 친일파로 변신했다. 이근택은 을사조약 체결 공로로 1906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과 태극장을 받았다. 그의 집안은 친일 귀족 집안으로 유명하다. 그의 형 이근호와 동생 이근상 모두 한일병합 이후 작위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통틀어 3형제가 작위를 받은 경우는 이근택의 집안이 유일하다.
이근택의 아들 이창춘은 자작작위를 승계했고, 큰 증손자 이상우는 국립 공주대 총장을 역임했다. 작은 증손자 이춘우 역시 공주대에서 물리학과 교수를 지냈다. 능력이 있어 총장과 교수직을 했을 수 있지만 국민정서에 맞지 않았다. 2005년까지 선대의 친일재산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총 9건의 소송을 진행한 집안이다.
기생이 꾸짖은 ‘역적’ 이지용
을사조약 이듬해인 1906년 이지용은 진주에 갔다. 거기서 기생 산홍을 만났다. 이지용은 산홍에게 반했고, 많은 돈을 내놓으며 자신의 첩이 돼달라고 했다. 이때 산홍의 말. “세상에서 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첩은 비록 창기이오나 자유로이 살아가는 사람이니 무슨 사유로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이지용은 크게 화를 내며 산홍에게 몽둥이질을 했다고 전해졌다. 대한매일신보는 같은해 11월22일 2면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 앞에 당당함은 일개 기생이 아니라 절대 권력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기개 어린 항일투사로 보는 게 마땅하다’고 실었다.
1908년 2월 이지용은 지인의 생일잔치 등에서 산홍에게 보석과 반지, 거금 등을 줄테니 첩이 돼 달라고 끊임없이 협박했다. 유학자 양회갑의 시문집 ‘정재집’에는 “산홍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다”고 돼있다. 돈이라면 뭐든 하는 사람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미-친러-친일로, 이완용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넘어간 건 이근택 뿐이 아니다. 25살이 되던 1882년 과거급제한 뒤 1887년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임명돼 미국으로 건너갔던 이완용은 원래 ‘친미파’였다. 이완용은 미국의 근대교육제도에 매력을 느꼈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삼권분립과 민주공화제 등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이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적은 것을 파악했다.
이완용이 죽은 1927년 조카뻘이자 이완용이 내각총리대신 시절 비서관을 지낸 김명수는 이완용의 일생을 엮은 ‘일당기사’(일당은 이완용의 호)라는 책을 냈다. 책에 따르면 이완용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미국과 교제가 긴요한 까닭에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친러파)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해 현재의 일파(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이완용은 당시 암살대상 1순위였다. 1909년 12월22일 이완용은 명동성당 근처에서 이재명 의사의 암살시도로 옆구리와 어깨 등을 찔렸지만 대한의원(서울대병원의 전신)에서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졌다.
이완용의 작위는 아들 이항구와 손자에게 대물림(습작)됐다. 장손 이병길은 조선귀족회 회장을 지냈고,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간부, 배영동지회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지냈다. 이병길은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돼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과 전북 익산소재 임야 절반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증손자 이윤형은 ‘친일파 후손 조상 땅 찾기 소송’을 촉발한 장본인으로 캐나다에 이민을 떠났다.
권중현은 무서웠을까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을사조약 당시 농상공부대신으로 을사오적이 된 권중현은 1907년 이홍래·강원상의 암살 시도에 가까스로 살았다. 같은해 그의 동생 권중면은 형 권중현과 의를 끊고 벼슬을 내려놓고 계룡산에서 은거했다. 이듬해인 1908년 권중현은 일본 정부가 내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그의 공로는 지속적으로 일제로부터 인정받는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 10월16일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조선사편수회 고문을 지냈다.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정5위에 서위됐으며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이 서훈됐고, 1918년 종4위로 승서됐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총독부에 작위 반납을 신청했다. 민중이 무섭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걸까? 하지만 총독부는 작위 반납을 거절했다. 그렇지만 잠잠해지자 친일단체인 동민회에 회비를 계속 내는 등 적극적인 친일활동에 가담했다. 1934년 세상을 떠났다.
동학군 때려잡던 박제순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박제순은 충청도관찰사였다. 자국 농민이 먹고 살기 어렵다고 들고 일어난 사건에 대해 박제순은 일본군과 연합해 공주 감영에 머물며 동학농민군토벌작전에 참여했다. 공주 이인면 도로변에는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가 있다. 의병을 일으켜 토벌한 대상이 일본군이 아닌 동학농민군이라고 돼있다. 심지어 이는 1994년에 세워졌다.
근처에는 박제순 공덕비도 있다. 해당 비석은 동학농민전쟁 다음해인 1895년에 세워졌다. 2005년에는 인천에 설치돼있던 박제순의 공덕비가 철거되기도 했다. 인천부사를 지낸 박제순에 대한 찬양이다. 당시 경인일보는 “박제순 공덕비가 인천도호부청사에 있다는 것을 아는 시민은 거의 없다”며 “박제순이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아는 시민도 드물다”고 보도했다. 친일청산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걸 뜻한다.
▲ 을사조약 풍자도 |
을사조약은 군대를 앞세워 강제로 체결했고,조약문의 공식 명칭이 없으며,부실하게 보관이 이루어졌고,고종황제의 도장이 없다.또한 국제협약 표준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불법적인 조약으로 취급받는다. 용어 사용에 있어서는 을사조약은 을사늑약으로 한일병합은 한일병탄으로 고쳐 부르자는 주장이 있다.늑약은‘억지로 맺은 조약’을 말하고, 병탄은‘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빼앗아 제 것으로 만든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정운현,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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