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湘祖師 法性偈 (의상 조사 법성게) 머 릿 말 청운 대선사님의 법성게 강의 / 염회이천 법성게는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53人의 스승을 찾아다니며 법을 구하는 과정을 포함한 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 세존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 증득한 바를, 즉 삼매에 드시어 보신 바를 설한 경으로 세 존입멸 후 700년쯤 용수보살이 용궁장각에 가 화본화엄경을 가지고 와 편집한 경)을 처음에는 도장 모양 으로 法자에서 佛자까지 210자로 만든 것이 '화엄일승법계도'라 한 것이며 법계도란 우주법계(천상천하 일체법계)를 도표화한 것이다. 이름에 집착하지 않고 이름 없는 참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지은 것인데, 처음 지으신 것을 보신 지엄스님이 보시고 너무 길다고 하자 불전에 나아가 불사르며 "부처님 뜻에 맞지 않으시면 태우소서" 하고 불붙은 것을 던졌더니 다 타지 않고 남은 210자를 부처님 사리처럼 주워 모아 도표화하여 만든 것이 '법계도'(도장모양)이고, 이것이 우주근본인 법성의 도리(법계 성품세계의 진리)이다. 이 게송을 보신 지엄선사께서 "내가 지은 게송보다 더 좋다" 하고 지엄스님 것을 없애버렸다 한다. 한 게송인 것이다. 부처님은 굽은 활과 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는 활줄과 같이 말씀하시니, 활같이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은 과녁(근본)을 알게(깨닫게)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비유로(8만4천 교법) 말씀하신 것이며, 이다. 하는 것이니, 변견이란 치우친 생각으로 고집하는 것이다. 으면 말씀(死句)에 끄달리지 말고 그 도리에 따라 안으로 즉 근원으로 돌이켜 찾아 들어(회광반조) 직접 본원에 이르러 견성해탈(증득)하여 지혜가 발현케 하라 하는 것이므로 잘못 알지 말라. 말아야 하는 것이니 말뜻에 쫓지 말고 근본도리를 깨우쳐 알아야 한다.
이다. 이 경(법성게) 한편을 듣고 이제 근본 도리를 바로 깨닫지 못했으면 직접 실참수행하여 대오 견성 하기를 바란다. 가볍게 여기는 이가 있고, 예불하는 이는 교법과 선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며, 교법을 공부하는 이는 선과 불공을 멀리하고 교리(문자)에만 치우치나 이러한 것은 한편(변견)에 치우친 잘못이니, 부처님이 설한 바 불경은 읽고 믿되, 설하신 경의 겉만(방편인 말과 글) 보아 글을 굴려 읽는 것이 아니라 글에 굴림을 당하지 말고 그 깊은 도의 이치인 그 경 가운데 말밖의 소식인 도리를 사무치 게 꿰뚫어 깨달을 것이요, 예불·독송하는 이 또한 예불·독송하는 그 근원이 무엇인가를 념(생각)하 며 그것을 놓지 말고 해야 할 것이요. 참선 수행인도 예경에 소홀하지 말고 부처님 설하심을 바로 알고 믿고 행해야 할 것이니, 이 세 가지 모두가 근원이 하나인 것이므로 반드시 참불자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며, 부처님 가르침이 이것임을 꼭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구경(究竟)의 하나(一佛乘)로 귀결(깨침)되어야 하는 것이 참 불교의 진수인 것이다. 장군죽비 합장.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법성이 두루하고 평등하여 형상이 둘 없으니, 일체가 움직임 없이 본래부터 고요하도다. 법성은 우주삼라만상의 근본체에 붙인 명상(名相)인 근원이니 일체중생의 자성이며, 이름도 없고, 없이 존재하며 시작 없는 옛부터 삼천대천세계를 머금고(구족) 있어 두루하며 갓없는 태허와 같이 끝이 없어 무한대이며 무애자재하며 모든 움직임이 없어 부동(不動)하나, 고요한 가운데 일체를 항상 나투는(작용) 사량할 수 없는 현묘한 본체(本體)이다. 없어 본래부터 여여부동의 고요함인 것이다. 이름을 쓰는 것이다. 원융하다 하는 것은 법성은 일체에 두루하여 둘 아닌 융통한 것이며 부증불감 하는 것으로 일체만법의 실상인 것이다. 둘 없는 상이란 한 모양의 상도 없기 때문에 일체가 끊어져 대대(待對: 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가 진공(빔)으로 실상이 공하므로 생주이멸하 는 상이 없으니 비어서 변할 것이 없는 것으로 적적요요(고요)할 뿐이다. 無名無相絶一切 證知所知非餘境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 일체가 끊어짐이니, 깨달아 알 바요 분별로 아는 경계가 아니로다. 법성은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생각이나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일체 사량분별이 끊어진 것이니, 이것은 다만 스스로 이르러 보고(體達) 스스로 깨달아(體認) 알 바요(證悟) 분별지(알음아리, 知識) 로는 알 수 없는, 명상(名相)이 있을 수 없는 절대평등의 무량한 대법체(법계의 성품)인 것이다.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참성품은 한없이 깊고 신비롭고 묘하여, 자성은 지키지 않고도 인연따라 이루도다. 참 성품(진성)은 현묘하여 형태도 모양도 없으며 크기도 없으면서 일체를 구족하여 나투는(진공묘유 →묘용) 오묘하고 수승한 것이다. 그것을 이름하여 법성이라고 하며 자성이라고도 한다. 진성은 중생 모두의 근본바탕으로 일체 법(모든)의 성품과 둘이 아니며, 부처님의 성품과 또한 둘 아니기 때 문에 불성(佛性)이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진성(근본 실상체)은 인연 따라서 작용하고 나투나 [움직이지 않으니(不動) 지킬 것도 없고(不守)] 또한 그 성품은 무궁무진하고 걸림없(無碍: 空)어 지킬 것도 없고 지키고 있지 않으면서도 고요히 머물면서 항상 쓰고(나툼) 있는 것이다.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하나 가운데 모두요 일체 가운데 하나이니,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로다. 하나(법성)의 빈 것(空) 가운데 일체(모두)가 구족되어 있으며 하나 하나 모두가 그 하나와 같기 (眞空이기) 때문이다. 차별문으로 살피면 각 하나 하나는 법성에서 나왔(나툼)으므로 그 하나 하나는 곧 하나(법성)를 여읠 수가 없듯이 자식이 아버지와 꼭 같은 이치요, 파도는 물을 여의지 못하고 물은 파도를 여의 지 못하는 도리와 같다. 하나도 본질적으로 환이므로 멸하면 공(空)하고 또한 그 공한 가운데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작은 티끌 가운데도 시방세계를 머금으니, 모든 낱낱 티끌마다 이와 같도다. 법성은 좁히면 바늘 끝도 꽂을데 없이 작으나, 빈(空)가운데 삼라만상 일체를 원만구족(머금고) 하여 있으며, 일체 작고 큰 모두가 근본성품이 그러하여 절대 하나(법성: 空)가운데 일체가 있고, 하나 하나 모두가 그 하나와 같은 것(空)이다 하는 것이니, 따라서 하나의 빈 가운데 일체가 구족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 하나가 모두 법성이라고 하는 근본체와 함께 일진법계로 본질적으로 비었고 빈 가운데 일체 를 머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크고 작음에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넓히면 우주를 감싸고 좁히면 티끌보다 작다 하는 것이니 그 모두를 구족하여 있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본래 법계의 실상이 일체가 차별상이 없는 공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한없는 긴 시간도 곧 한 생각에서이니, 한 순간이 곧 끝없는 긴 시간이도다. 시· 공은 가변적으로 만든 것이요, 분별상일때)가 시간이라 구분하나, 시간 공간을 초월한 법성인 공한 본래면목의 근본으로는 시간 이라는 것이 없으나 시간이라는 차별상으로 분별할 때 무량한 시간도 찰나(한 생각 일으키는 순간) 에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한 생각이 무량겁을 지을 수 있음인 것이다.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구세 십세도 서로 같은 것이니, 혼잡하지 않아 별개의 것이 아니노라. 구세(과거 현재 미래 각3세)니, 십세(9세에 + 원융한 평등세계인 전체 1세를 포함한 전체를 말함) 니 하는 것도 역시 지어 만든 것일 뿐, 평등문에서는 한 뭉치로 구분이 없는 것이다. 다만 차별문에 서는 구세니 십세니 가변적으로 별개를 지어냈을 뿐이다. 아 알게 되면 차별로 지어 만든 것이었음을 아는 것이니, 본래 한 뭉치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경계인 것이다. 이 평등이라는 것은 보편적이고, 절대 법계평등이니 본성 본질적인 일체평등(不二) 한 것이지 상대적 평등이 아닌 것을 유의해야 한다.
야 하는 것이다.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和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처음 믿는 마음 낼 때가 곧 깨달음이요, 생사와 열반도 곧 서로 같은 것이니라. 깨닫겠다는 한 생각 일으키는 것이 원인이 되어 결과로 정각(대오, 견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일으키는(인) 곳에 떨어지는(과) 것이다. 겠다는 생각 일으켜 짓지 않고 어찌 구경각을 이룰 수 있으랴. 따라서 시공이 초월하여 상주하는 본원(평등문: 진제)으로 살필 때 초발심이 곧 변정각이 되는 것이다. 것이므로 생사가 공하고, 공하므로 같은 것이며 그러므로 평등문으로 살필 때 생사가 본래 없고 열반이 본래 없으니 같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생사가 없는데 열반이 있을 것이며 생사(윤회의 고)가 있다면 곧 열반(해탈의 낙)도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因 곧 果인 것이다. 따라서 생사가 곧 공하므로 공은 열반적정과 함께 빈 것으로 생사와 열반이 서로 같고 다름이 없으니 서로 함께 하는 것이다.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이사명연무분별 십불보현대인경 진리와 현상이 그윽하여 분별할 수 없으나, 모든 부처의 행하고 나툼이 성인의 경계니라. 절대평등(체)과 차별현상(용)이 묘연하여 사량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를테면 생각 일으키기 전과 한 생각 일으켰을 때 어디서 어디까지를 평등(體)인 理이고 또 차별(用)인 事로 분별할 수 있으며, 차별 현상을 사(事)라고 하나 사의 본질이 리(理, 공)이니 분별할 것이 없는 것이다. (事)인 것이다.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보현이라는 명사는 부처님의 행으로 봄이 옳다.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부처님은 자취 없는 고요한 선정 가운데 머물면서도, 끊임없이 자재로이 드러내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라. 능인은 부처님이다. 그러나 따로 밖으로 쫓아 부처를 찾지 말 것이니 여기서 능인은 곧 여래, 법성을 일컫는 것이니 여래께서 삼매에 머무신 때이다. 다시 말해 법신이 그렇게 고요한 선정(부동)가운데 머물면서 바다가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비추면서도 해면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형체도 흔적도 없이(진 공묘유) 적적요요하여 동함이 없듯이 머물면서 묘하게도 끊임없이 나투고 행(관자재보살로 하여금 설함)하는 진여묘용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한 것이다 하는 말이다.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 비가 일체 허공에 가득하여, 중생의 근기 따라 유익함을 얻느니라. 보배 곧 보배(법보)같이 귀한 법비가 허공에 꽉 차게 내린다 하는 것은 법성이 삼천대천세계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두루하여(津津察察: 제망찰해) 모두를 유익하게(곧 상즉하여 함께 하므로)하니 일체중 생마다 고루 미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근기(닦은 선근에 상응하여)따라(隨器) 얻게 (성취) 되는 것이다.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그러므로 수행인은 본처로 돌아가, 망상을 쉬지 않으면 반드시 증득하지 못하노라. 수행하는 자가 본원으로 돌아간다 하는 것은 번뇌망상 사량분별을 쉬게 되어 무명을 거두면 곧 본원 (법성)과 둘 아니게(不二) 되니(견성) 이때가 곧 본원으로 돌아간 때인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계교나 사량 방편을 써서는 본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성취가 불가능(必不得)한 것이다. 곧 밖으로 (사량분별, 알음알이/識) 으로 본원을 찾아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교묘한 수단 필요 없이 여래의 참뜻 알리니, 본처로 돌아가면 분에 따라 증득할 것이니라. 깨달음(견성)에는 묘방(특별한 방법인 계교나 재주를 부리는 조작방편)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로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게(증오, 증득)되는 것이다. 이런 때에 이르러 말로는 얻는다고 했으나 둘 아닌 그 가운데 무엇을 구할 것이며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구하고 주고받을 것이 있겠는가? 따라서 구해 얻으려해도 구하고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니, 이때가 부사의 해탈경인 것이며 이때는 객진 번뇌인 미세망념까지 쉬게 되어 본원과 합일, 계합하게 됨을 일컫는 것이다. 以多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이 진언은 한량없는 보배로, 일체 모든 곳을 정토로 만드느니라. 이 다라니(眞言)는 즉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설한 법성게는 진언(참말, 총지, 진실된 말)으로 한량없는 보배이니 온 법계를 실답게 정토로 청정(장엄)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것이다.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다함 없는 실상이 갓 없는 가운데 머무니, 시작 없는 옛부터 움직임도 없으나 이름하여 부처라 하니라. 다함 없고 머무는 곳 없이 머무는(중도상: 응무소주) 법성은 시작 없는 옛부터 적적요요하여 움직임이 없이 고요히, 본래부터 존재하며 형상도 없는 것인데 이름하여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묘유), 부처님(정각인)이란 실은 그것(법성: 진리: 本覺)을 깨쳐(不二: 始覺) 진리의 밝은 지혜를 행사 하는 분을 일컫는 존명(尊名)인 것이니, 억지 이름을 만들어 붙여서 부르는 부처(佛)와 부처님(정각인 )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혼동해서는 옳지 못하다. 진불인 까닭이며 부처님은 이를 깨쳐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신 覺인을 일컫는 까닭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 론 뜻과 이치는 이러하나 세존께서 설하심도 이 하나(법성)과 이로부터 나툰 법성의 세계(法性界)의 참 이치(진리)였으나 실은 말로써 미치지못했으며, 이것은 필설로써 미칠 일이 아닌 불가사의한 것이다. 바닷물을 먹으로 하고, 모든 새들의 털을 뽑아 붓으로 하여 우주를 덮는 글을 수만 번을 쓰고 수 겁 이르도록 말로써 설명한다 해도 허물만 더할 뿐 감히 이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연고로 말이 나 문자로 이를 수 없음으로 "언어도단" "개구즉착"이라 하는 것이다. 확연히 아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지 체인, 체달하여 불과를 얻음이 없이 얻고(증득) 일체종지를 깨우쳐서 이고득락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어야 한다. 이 경의 대의가 바로 이것을 요약한 것임을 알기 바란다. 장군죽비 합장 법성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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