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붓다를 만나다1-붓다는 왜 옆구리로 태어났을까
[중앙일보] 입력 2017.04.13 11:13 수정 2017.04.14 14:19
‘백성호의 현문우답-붓다를 만나다’ 시리즈를 오늘부터 격주로 연재합니다. 지난해 연재한 ‘예수를 만나다(총 42회)’ 시리즈에 이은 기획물입니다. 2600년 전 붓다가 살았던 인도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갑니다. 붓다가 태어나고, 방황하고, 수행하고, 깨닫고, 법을 펼쳤던 시공간 속으로 들어가 붓다의 생애, 붓다의 메시지를 만납니다.
<백성호의 현문우답/붓다를 만나다①-붓다는 왜 옆구리로 태어났을까>
열 사람이 가면 여덟이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둘만 살아서 돌아왔다. 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인도로 갔던 승려들 이야기다. 산중에는 도적떼가 우글거렸다.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에서 쓰러지거나,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에서 실족할 때는 시신조차 건지지 못했다. 인도로 가는 길은 그토록 험했다.
육로만 그런 게 아니었다. 뱃길을 택한 이들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허름한 목선과 조잡한 항해술로 집채만한 파도에 잡아먹히지 않아야만 인도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의 현장 법사는 땅에서, 신라의 승려 혜초는 바다에서 목숨을 걸었다. 붓다의 법(佛法). 佛法 (불법) 그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왜 동아시아의 수행자들은 목숨을 걸고 인도로 갔을까.
지난 겨울 끝자락에 인도행 비행기를 탔다. 봄으로 들어서면 인도는 뜨거워진다. 기온이 40~50℃를 웃돈다. 숨을 들이마시면 ‘불덩어리’가 코와 입으로 훅훅 밀려온다. 냉방 시설도 기대하기 어렵다. 여행에는 최악의 조건이다. 그래서 순례객이나 여행객들은 겨울이 끝나기 전에 인도로 떠난다. 나도 그랬다.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서둘러 인도로 갔다.
델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공항 청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인도는 달라지고 있었다. 8년 전 인도를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이 나라는 100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도시 기차역의 화장실도 마음 놓고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지저분하고 낙후된 나라였었다.
붓다가 태어난 땅은 카필라 왕국이었다. 히말라야 산맥 아래의 북인도였다. 지금은 네팔 영토다. 그래서 인도와 네팔은 종종 다툰다. “붓다는 인도 사람”이라는 인도 측 주장과 “아니다, 네팔 사람”이라는 네팔 측 주장이 맞선다. 그런데 인도냐, 네팔이냐 따지는 건 지금의 기준일 뿐이다. 당시에는 그런 국경도 없었다. 붓다는 그저 카필라 왕국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코살라국ㆍ마가다국ㆍ밤사국ㆍ말라국 등 인도에 16개 왕국이 있었다. 그 왕국 중 하나인 카필라 왕국은 아주 작고 약한 나라였다.
붓다의 탄생 일화에는 수수께끼의 코드가 박혀 있다. 다름 아닌 옆구리 출생이다. 왕비 마야는 붓다를 옆구리로 낳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당시 제왕절개를 했던 것도 아니다. 나는 탄생지 둘레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실제 왕자가 옆구리로 태어났을 리는 없다. 그럼 이건 하나의 상징이자 은유이다. 옆구리 탄생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긴 걸까.’
절집에서 이 대목은 수수께끼처럼 거론되기도 한다. 한마음선원의 대행(1927~2012) 스님은 생전에 “부처님의 옆구리 출생은 ‘중도(中道)’를 말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선승인 고우 스님도 “주위에 있는 스님이 나보고 도통 이해가 안 간다고 하더라. 부처님의 옆구리 출생은 ‘중도(中道)’를 뜻한다”고 말했다. 그럼 아기 붓다의 옆구리 출생이 왜 ‘중도(中道)’를 뜻하는 걸까.
사람들은 어디로 태어날까. 엄마의 자궁을 통해 아래로 태어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출생이다. 아버지의 기질과 업장이 자식에게, 다시 그 자식에게 수직으로 내려온다. 과학에서는 그걸 유전자라 부르고, 불교에서는 인과의 윤회라고 부른다. 붓다의 출생은 달랐다. 위에서 아래로 계단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1을 딛고 2가 나오고, 2를 딛고 3이 나오는 식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출생, 그 근원과 바탕을 ‘로고스(말씀)’라고 표현한다. 그 로고스가 육신(肉身)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는 역사적 사건. 그게 바로 역사상의 인간 예수의 출생이다. 예수 역시 위에서 아래로 태어나지 않았다.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기는 했지만, 예수는 성령에 의해 잉태됐다.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가 또 누구를 낳는 식의 출생이 아니었다.
붓다의 출생도 파격적이고 혁명적이다. 아기 붓다는 ‘공(空)’의 옆구리를 뚫고 튀어나온 ‘색(色)’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의 출생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상징한다. 이 말이 ‘중도(中道)’를 관통하는 본래적 의미다.
마야데비 사원을 거닐며 생각했다. 그럼 붓다만 옆구리로 태어났을까. 붓다만 空 '0'에서 태어났을까. 아니다. 우리는 모두 '0'에서 태어났다. 옆구리를 뚫고 나왔다. 다만 이 사실을 망각했을 뿐이다. 옆구리 이전의 나, 태어나기 이전의 나,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주인공, 空 '0'. 그걸 잊어버렸을 뿐이다. 그래서 붓다가 이 땅에 왔다.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 말이다. ‘너는 어디로 태어났나, 너는 누구인가’.
맨발로 룸비니 동산을 걸었다. 그 물음이 내면의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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