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고통 없이 붓다를 낳은 마야 왕비, 그 비밀은 ..
백성호 입력 2017.04.28. 01:01 수정 2017.04.28. 06:15
아기 붓다의 탄생 장면 새겨진 마야데비 사원 속 희미한 부조그녀가 잡았던 '무우수(無憂樹)'는 왕자가 장차 체득하게 될 깨달음
━ 백성호의 현문우답 붓다를 만나다 ②
마야데비 사원 안은 다소 어두컴컴했다. 기원후 4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쯤이다. 당시 돌을 깎아서 부조를 하나 만들었다. 사라수 나무의 가지를 붙들고 아기를 낳고 있는 왕비 마야의 모습이다. 나는 조각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붓다가 입멸한지 800년 후에 누군가 이 조각을 깎았다. 그건 붓다의 법을 품고서 석굴암을 깎고, 석가탑을 깎던 신라의 석공과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 앞에서 눈을 감았다. 우리의 삶에도 나무가 자란다. 그 나무의 이름은 ‘유우수(有憂樹)’다. 우리는 늘 ‘걱정의 나무’를 붙들고 살아간다. 나는 궁금했다. 걱정의 나무는 왜 자꾸 자라는 걸까. 아무도 원치 않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걱정은 언제 생겨날까. 답은 ‘어긋남’이다. 자신의 기대와 자신의 삶이 어긋날 때, 나무가 자란다. ‘아이가 대학에 합격해야 할 텐데’ ‘이번 프로젝트를 꼭 성사시켜야 할 텐데’ 하는 나의 기대와 눈앞의 현실이 헛돌 때 말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터이다. 불교는 그걸 ‘번뇌’라고 부른다.
그래서일까. 왕비 마야가 잡았다는 나무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 나무의 이름이 ‘무우수(無憂樹)’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무겁고 수고로운 짐을 진 자들아, 내게로 와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32절)라고 말했다. 룸비니의 아소카 나무도 그런 희망을 건넨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로운 날들을 버티고 있는 우리에게 ‘걱정이 없는 삶, 걱정이 없는 나라’를 제시한다.
심지어 법정 스님이 번역했다는 일본의 저명한 불교문학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비슷하게 풀이한다. 쇼코는 “지혜(智慧), 선정(禪定), 지계(持戒)와 선근(善根)에서 자기만한 경지에 도달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이러한 뜻을 가리킨다”고 풀이했다.
나는 마야데비 사원을 나왔다. 룸비니의 바깥 풍경이 아름다웠다. 물음이 올라왔다. “실제 갓 태어난 아기가 일곱 걸음을 걸었을까?” “옹알이만 하는 신생아가 입을 열고 ‘천상천하’를 외쳤을까?” 물론 아니다. 과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일화는 그저 지어낸 허구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더 깊은 상징과 울림이 도사리고 있다. 그 상징이 바로 이 일화의 존재 이유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사람들은 대부분 ‘독존(獨尊)’에 방점을 찍는다. 나는 달리 본다. 핵심(核心)은 ‘독존’이 아니라 ‘유아(唯我)’이다. 그럼 왜 ‘오직 나만이(唯我)’라고 했을까. 유아(唯我)에서 말하는 ‘나(我)’는 대체 무엇일까. 바로 이 '나(我)'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있다.
한국 선(禪)불교에서는 그렇게 큰 나, 우주를 관통하는 오직 하나의 나를 ‘꽃’에 비유한다. 경허의 선맥을 잇는 만공(滿空·1871~1946) 선사는 그걸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불렀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만공은 그렇게 노래했다. 붓다는 우리에게 그 한송이 꽃을 보라고 말한다. 나와 우주를 동시에 관통하는 한 송이 꽃 말이다.
붓다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예수에게도 그런 어록이 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6절) 이 대목을 인용할 때마다 사람들은 말한다. “예수만이 유일한 문이다. 다른 곳에는 문이 없다. 예수를 통해야만 하늘 나라에 갈 수가 있다. 그러니 오직 예수다. 천상천하 오로지 예수만이 존귀하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보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나는 궁금하다. 그런 예수는 오히려 ‘작은 예수’가 아닐까. 그건 유대인의 핏줄과 유대인의 육신을 갖고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의 겉모습만 알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나’는 ‘신의 속성’이다. 그건 이 우주를 관통하며 ‘없이 계신 하느님’이다.
인도는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다. 인도 사람들은 무려 3000년 전에 벽돌을 구워서 집을 지었다. 집은 물론이고 거대한 규모의 계획도시까지 건설했다.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 유적이 대표적이다. 계획도시 한가운데 도로가 나 있고, 커다란 수로도 설치돼 있었다. 인도는 그런 문명의 나라였다.
룸비니 동산에 바람이 불었다. 시원했다. 사원 맞은편의 아름드리 보리수가 마구 흔들렸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숱한 순례객들. 룸비니 동산의 붓다는 그들을 향해 묻는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무엇이 홀로 존귀한가?” “무엇이 숨 쉬고, 무엇이 노래하고, 무엇이 생각하고 있는가?” 라는 그 물음이 걱정의 나무에 물을 주고, 걱정의 나무를 키우며, 걱정의 나무를 붙잡고 사는 우리 인간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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