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없기에 연기는 만물을 하나로 묶는다

장백산-1 2017. 7. 17. 01:01

연등불 회상에서 얻은 법이 있는가?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없기에, 無我이기에 연기는 만물을 하나로 묶는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득부? 불야세존.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실무소득.


법을 얻었다는 생각 있으면 여전히 분별심 남아있음을 의미함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분리 분별 구분해 임의로 이름을 붙여도 분별심 남있음을 의미함

이 세상 모든 것 일체의 흐름은 영속적으로 이어져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석가모니 부처인 나 여래가 까마득한 옛날에 연등불 회상에서 얻은 法이 있을까? 아니옵니다. 얻은 法이 없사옵니다.’


法을 얻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我相)에 사로잡힌 것이다. 主인 석가모니 여래와 客인 法 모두 공(空)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法도 없고 法을 얻을 者도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입장에서으로 볼 때, 法, 깨달음은 연기현상(緣起現狀)이다. 일체 배움과 지식과 인식도 연기현상인데 하물며 깨달음이랴. 그래서 석가모니 여래도 없고 얻은 法이 없는 것이다. 물론 아직 배움의 길에 있는 사람은 얻는 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배운 사람, 깨달은 사람, 석가모니 여래의 입장에서는 배운 게 없고 깨달은 것도 없다. 교학(敎學,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제자와  스승 사이와 때와 환경 사이에 일어난 연기현상이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에게 가르치고, 누가 누구에게 배운단 말인가? 비가 오듯, 눈이 내리듯, 바람이 불듯, 산불이 나듯, 달빛이 내리듯, 주객이 없이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작은 法을 즐기는 자에게는 주체, 견해, 相이 있고, 큰 法을 즐기는 자에게는 주체, 견해, 相이 없다(若樂小法者 卽 我見人見衆生見壽子見).


‘내가 무엇을 얻었다’는 생각은 意識과 아상(我相, 내가 있다고 여기는 착각)이 있으므로 일어난다.


우주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 一切는 의식의 연속적인 흐름이다. 時間的으로도 연속적인 흐름이고, 空間的으로도 연속적인 흐름이다. 지금 여기 이 시점 이전은 꼬마(올챙이)이고, 지금 여기 이 시점 이후는 어른(개구리)인 그런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우주, 이 세상에는 연속적인 변화의 흐름만이 있을 뿐인데, 분별 망상 번뇌에 빠져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이’ ‘어른’으로 분리 분별 구분한다. 아이나 어른은 인간의 편의상 만들어진 개념이고 이름일 뿐이다.


이 금(線)  밖은 외국(외설악)이고, 이 금(線) 안은 우리나라(내설악)인, 그런 경계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땅은 모두 連結되어 있어 분리 분별 구분되어 있지 않건만, 사람들이 생각 망상 분별심으로 지구라는 땅을 분리하고 분별 구분하여 그 각각에 이름을 붙인다.


생물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 이 시점 이전 또는 이 표면 밖은 내가 아니고, 지금 여기 이 시점 이후 또는 이 표면 밖은 나인, 그런 시점이나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의 특성을 결정하는 DNA·유전자도 마찬가지이다. 작게는, 여기까지가 유인원의 DNA·유전자이고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DNA·유전자라는 그런 경계선(境界線), 즉 분리 분별 구분하는 생각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게는 식물과 동물과 광물의 경계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進化의 역사에서 모든 생물은 연속적인 흐름 위에서 존재한다. 분리 분별되어 서로서로 떨어있는 존재는 없다. 35억 년 지구 생물역사상 존재한, 모든 생물의 DNA 유전자는 거대한 한 그루 나무이다. 의식도 연속적인 흐름이다. 지금 여기 이 시점 이전은 의식이 없고, 지금 여기 이 시점 이후에는 의식이 있는, 그런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세계에는 수많은 의식의 흐름이 존재한다. 


진화의 역사에서 모든 생물은 연속적인 의식의 흐름 위에 존재한다. 분리 분별되어 서로서로 따로따로 떨어져 잇는 존재는 없다. 35억 년 지구 생물역사상 존재한, 모든 생물의 가지가지 의식은 거대한 한 그루 나무이다.


35억 년 전부터 의식의 흐름은 점차 연속적으로 변해왔다. 의식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 의식체로부터 물고기 · 파충류 · 포유류· 영장류 · 유인원 · 인간으로의 의식의 흐름은 계속해서 진화를 해왔다. 이런 의식 진화 과정의 흐름 중 어디서부터를 의식이라 해야 할까? 당신은 이 의식 진화 과정의 흐름을 분리 분별 구분해서 제각각의 의식으로 나눌 수 있는가? 의식은 연속적인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인간이 짐짓 연속적인 의식의 흐름을 분리 분별 구분해, 여기서부터 의식이고 그 전은 의식이 아니라고 한다. 연속적의 의식의 흐름을 분리 분별 구분해 보지 않고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으로 보면, 즉 의식의 흐름은 끊어진 게 아니라 연속된 것으로 보면, 意識과 自我에 대한 幻想과 妄想에서 벗어난다. 그러면 神과 아트만(참나)이라는 망상 번뇌 분별의 감옥, 굴레에서 벗어난다. 진정으로 무아(無我)와 무상(無常), 연기(緣起)의 이치를 깨닫는다.


인도의 힌두교와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사람은 변화하는 현상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며, 즉 緣起法을 否認하며 현상세계 배후에 불변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아예 변화와 운동을 부인한다. 힌두교는 ‘현상세계는 브라흐만의 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세상이 하나인 것은 이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의 변화를 통해서 서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연기(緣起)는 만물을 하나로 묶는다. 이것이 저것이 될 수 있으므로 하나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99호 / 2017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