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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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경 교수는 “불변의 본성이 있다고 여기는 서양철학과 달리 불교의 사고는 변하지 않는 본성이라는 것은 아예 없고,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 모두가 본성으로 간주한다”고 강조했다. |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몇 가지로 요약할 때 많은 사람들이 연기법(緣起法)을 꼽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연기법이 뭐냐?’고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흔히 많은 사람들은 ‘중아함경’에 나오는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말을 인용합니다. 저도 그 문장을 봤는데, 그것만으로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말씀하려는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연기법은 불교 핵심사상
서양철학은 불변의 본성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만
연기법은 ‘그런 건 없다’
바이올린은 악기이지만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때론 고문기가 되는 것처럼
모든 건 조건 따라 달라져
저는 ‘연기’는 연기적 조건이라는 말과 결부되는데, ‘어떤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기대여 있는 조건’이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즉 연기법은 조건(條件)에 따라서 그 존재나 본성이 달라진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들도 서로서로 의지하고 기대여 있는 條件에 따라서 그 본성을 달리한다는 것이지요. 연기법은 이 세상을 보는 아주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을 갖게 합니다.
예를 들어 제 어깨에 바이올린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바이올린의 본질은 악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번도 연주해 본 적 없는)제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2분도 안 되서 여러분들은 “그만”하고 소리를 지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연주해봐야 그 때의 바이올린은 악기가 아니라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고문기구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유명한 연주자의 어깨에 올라간 바이올린은 어떨까요? 그때는 훌륭한 악기가 되겠죠.
또 있습니다. 백남준이라는 유명한 예술가는 예전에 미국 뉴욕에서 바이올린을 실로 묶은 다음 3시간동안 질질 끌고 다녔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그 바이올린을 바닥으로 내팽겨 쳐서 부셔버리는 퍼포먼스를 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바이올린은 또 뭘까요? 악기도, 고문기도 아닌 퍼포먼스의 도구인 것입니다. 이처럼 똑같이 생기고 물성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바이올린이라도 누구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럼에도 사랃들은 ‘바이올린의 본성은 이것이야’라고 고집합니다.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도 말이죠. 사실은 악기, 고문기구, 퍼포먼스의 도구라는 것 모두 바이올린의 本性입니다. 바이올린이 어떤 이웃과 만나느냐, 어떤 條件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것뿐이죠.
이것이 서양철학과 다른 점입니다. 서양철학은 대부분 불변의 본성을 찾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형이상학 같은 것입니다. 형이상학은 불변의 본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불변의 본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사고방식, 연기법의 사고방식에서는 條件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本性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變하지 않는 本性이라는 것은 아예 없고, 條件에 따라 달라지는 것 모두가 本性입니다.
사물뿐 아니라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서 강의를 할 때는 강사지만, 집에서는 제 어머니의 한 아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연기법에서 말하는 내 본성은 내 안에서가 아니라 내 이웃에 의해 결정됩니다. 달리 말하면 條件을 떠나 본래부터 이미 정해진 본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연기적으로 사고하게 되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고하는 방식과 매우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과학의 법칙도 緣起的 條件이 적용되면 법칙자체가 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연기법과 결부해서 12연기가 있습니다. 무명(無明)으로 시작해서 노사(老死)로 끝나는, ‘무명’과 ‘노사’의 관계를 연기법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출가할 때 중생들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 볼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졌습니다. 이후 깨달음을 얻었을 때 출가할 때의 그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답을 제시한 것이 바로 12연기인 것입니다. 노사의 고통이 어떤 식으로 연원하게 되는지, 그런 것들이 어떤 無知와 결부되어 있는지, 이런 연관관계를 밝혀 주는 이론이 바로 12연기입니다.
12연기 가운데 첫 번째 인연은 無明입니다. 흔히 무명에 대해 無知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무명을 무지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12연기는 노사의 고통이 어떤 식으로 연원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사를 고통으로 여기는 관념이 결국 무지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인 무명을 무지로 해석하게 되면 설명이 안 됩니다. 노사의 고통이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첫 단계에서 무지로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무지가 발생하는지 설명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12연기에 대해 다시 따져보게 됐습니다.
무지라는 것은 도대체 뭘까? 왜 無明은 無知가 아닌데 ‘알지 못함’을 뜻하는 말이 됐을까? 고민 끝에 저는 無明을 ‘무엇을 안다는 개념이 없는 세계’라고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無常한 세계를 말합니다. 無常은 항상하는 것 없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개념입니다. 찰나의 순간에도 멈추어 있지 않음입니다. 집에서 여러분이 낮잠을 잔다고 할 때 신체는 죽은 듯 조용합니다. 그런데 그 안을 살펴보면 심장과 허파는 끊임없이 뛰고 있습니다. 그 안의 세포를 들여다보면 이웃한 세포와 교신을 하면서 영양소와 산소를 주고받는 게 확인됩니다. 그 세포 안에서도 미토콘드리아, 핵 등도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멈춰 선것처럼 보이는 잠든 신체조차도 無常이 겹겹이 중첩(重疊 겹쳐진)된 無限의 無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無常의 世界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안다’는 識은 변화하는 순간을 멈춰세워, 멈춘 상태를 명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識은 언제나 실상이 아니라 실상으로부터 떨어진 상태입니다. 마치 강물에 칼을 빠뜨리자, 나중에 그 칼을 찾겠다며 움직이는 배위에 표시를 해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無明은 이런 중중무진(重重無盡)의 無常하게 變하는 세계 그 자체입니다. 이게 바로 무명의 세계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諸行無常이라고 하신 말씀이 여기 무명의 세계에 해당됩니다.
無明을 條件으로 해서 行이 나옵니다. 行이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는 意圖, 意志, 욕망, 욕구이기도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識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면 識은 변화하는 것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실상과 멀리 떨어진 개념입니다. 識은 오히려 無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識이라는 이 無知는 이 세상을 사는데 유용한 무지, 없으면 곤란한 무지입니다.
예를 들어 토끼 다섯 마리가 어느 날 호랑이를 만났다고 합시다. 이때부터 토끼의 뇌는 사고기능을 작동합니다. 도망을 가야할지, 가만있어도 될지를 뇌가 판단을 하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 옆에 있던 토끼가 잡혀 먹혔다고 하면 나머지 토끼들은 ‘저 호랑이 놈을 만나면 죽는다’는 경험정보를 기억(記憶)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음에 비슷한 모양의 동물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토끼는 무조건 도망가게 될 것입니다. 전에 만났던 놈과 같은지 다른지를 생각하다보면 죽게 되니까, 비슷해 보이면 같다고 간주(看做)하고 우선 도망을 가는 것이지요.
비슷하다고 여기면 같다고 간주하는 것은 사실 정확한 판단이 아닙니다. 다른 것을 같다고 여기는 판단이니까요. 그래서 識(알음알이)는 無知입니다. 사람들의 知識도 그런 無知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지는 유용한 무지, 필연적인 무지입니다. 無常하게 변하는 카오스의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識을 포착해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바꾸는 것이 바로 行입니다. 行이라는 말은 幸福을 뜻하지만, 행복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意志를 뜻하기도 합니다. 無常의 카오스의 세계 속에서 無常의 흐름을 견디며 살아야 할 때 그 살려는 의지가 바로 行입니다. 정리하자면 생명체는 살기 위해서 識을 만들어야 하고, 그 識은 살겠다는 의지(行)이 만들어낸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은 名色인데, 명색은 識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명색은 두 개가 합쳐진 말입니다. 즉 色은 물질적인 성분을 갖는 모든 것, 다시 말해 감지 가능한 물질성을 갖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名이란 그런 물질성을 갖지 않는 것, 즉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만지고 보면 작동하는 인지작용과 그런 인지작용을 하는 성분을 뜻합니다.
그런데 識 다음에 왜 名色이 등장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識이 있다고 할 때 識을 분류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때론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등을 분류해야 합니다. 또 ‘먹이감’과 ‘적’을 비교 분별 판단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識들을 분류하게 되는 것이죠. 식識을 분류를 한다고 할 때 가장 기본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識은 만남 안에 섞여 있는 것이지만, 내게 속한 것과 외부에 속한 것이 애초에 분리돼 그 만남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 이렇듯 나와 대상, 나와 세계로 분할되는 것이지요. 名色으로 인해 내 몸과 내 몸 아닌 것들, 나와 내 주위환경을 구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이진경 교수가 7월18일 대한불교진흥원에서 진행한 화요열린강좌에서 ‘12연기’를 주제로 강의한 것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401호 / 2017년 7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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