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삶의 순리 생각하며 잠시라도 겸손해지는 시간

김용규의 숲에서 배우는 지혜

가을을 맞이하며

삶의 순리 생각하며 잠시라도 겸손해지는 시간

말복 더위를 통과하고 있지만 여름은 이미 기울었습니다. 감각을 깨워두고 사는 이라면 이미 가을이 내 곁에 도착하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혹시 나무 곁에서 들려오던 매미의 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낮은 풀 섶에 찾아와 제 노래를 시작한 풀벌레 소리를 들으셨나요? 가까이서는 그렇게 소리로부터 가을 소식이 올 때, 멀리서는 창공의 배경과 구름의 모양으로부터 또 가을 소식을 보게 됩니다. 서서히 비구름을 지워가는 높고 푸른 하늘이 자주 배경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구름의 색과 모양도 바뀌고 있습니다. 잿빛 구름들이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다채로운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날은 양떼의 모양이다가 어떤 날은 새들의 깃털 모양이었다가 다른 어떤 날은 솜사탕 모양을 띕니다.

空과 色의 오묘한 운행 속에서 저마다 제 차례 따라 결실 맺어

감각깨워 타자 느끼며 살아갈 때 삶 풍부해지고 다양한 기쁨 연결

바람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엔 눅눅함이 지워지고 있고 이미 더운 기운이 시들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소리의 공(空)한 영역이 바뀌면 이윽고 가을꽃들이 차례로 저마다의 색(色, 모양)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차츰 짧아지는 낮 시간을 비끼면서 저녁 무렵에야 활짝 피는 달맞이꽃이 도처에 수줍은 노란 빛깔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돼지감자로 알려졌으나 뚱딴지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풀, 길 가장자리나 하천변에서 제 샛노란 꽃을 이제 막 피우며 노란 빛깔을 더해 나가는 중 입니다. 곧이어 코스모스 길섶에 한창 피어나고, 때맞춰 구절초며 쑥부쟁이며 야생의 온갖 들국화들이 가을 절정의 길목을 지키다가 차례차례 손 흔들 듯 피어나고 말 것입니다.

다시 공(空)과 색(色)의 사이를 차지하고 있는 낮은 하늘의 낮엔 온갖 잠자리가 물을 차고 날아올라 그 잡힐 것 같은 공간을 채울 것입니다. 밤 숲의 허공(虛空)은 늦반딧불이의 불빛들이 짧은 시나 음악처럼 흐르는 시간을 맞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가을이 이미 분명히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공(空)과 색(色)의 이 오묘한 구성과 질서의 운행 속에서 그 흐름을 따라 사윌 것은 사위고 일어설 것은 일어서는 것, 그것이 우주(宇宙)와 자연(自然)의 법칙(法則)입니다. 우주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그래야 삼라만상이 저마다 제 차례를 따라 깨어나고 일어서고 피어나고 결실을 맺으며 제 색을 피우다가 다시 흩어지고 또 모아지는, 조밀하게 관계하고 막힘없이 순환하는 아름다운 흐름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 역시 空과 色의 오묘한 구성과 질서의 운행 법칙, 즉 우주 자연의 운행 법칙의 운행과 흐름을 읽고 그 질서 위에서 살아가야 좋은 삶이 됩니다. 그것이 생명역사와 인류사, 그리고 개별 인간사의 교훈입니다. 空과 色의 오묘한 구성과 질서의 운행법칙을 거슬러 살면 언제고 필연적인 재앙과 화(禍), 혹은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살아있는 존재들을 지배하는 이치입니다. 속절없이 쇠락해 가는 광포했던 여름의 기운 끝자락에서 오래된, 그렇지만 늘 새로운 이번 가을을 다시 맞으며 나는 내 삶의 순리를 생각하다가 잠시라도 겸손해져 봅니다.

여름에게는 탐욕이 없습니다. 가을마저 가을의 시간으로 지배해 보겠다는 탐욕 같은 건 일부 어리석은 인간에게나 있는 것 같습니다. 한때 지난 여름날의 폭염과 수마처럼 세상을 지배해보려 했던 권력붙이들이 사위어 가는 자기들의 힘을 내려놓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뉴스로 보면서 나는 그들에게 지금 가을이 당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꼭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지울 것은 지우고 내어줄 것은 내어주며 언제고 되돌아올 새롭고 다른 여름날을 기약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이러한 지혜가 필요한 것은 권력붙이만이 아니라 인간의 탐진치라는 욕망붙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내 감각을 일깨우고 더 많은 타자를 느끼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삶이 더 풍부해지고 다양한 기쁨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나 역시 당도하고 있는 가을을 겸허히 맞으며 스스로 삶의 목적과 수단을 뒤바꿔 살아 귀하게 주어진 이번 생의 삶 전체가 끔찍해지는 어리석음을 경계하게 됩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403호 / 2017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