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불문 해설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 / 무비스님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光明雲臺 周邊法界 供養十方 無量佛法僧)
헌향진언 '옴 바아라 도비야 훔' (세번)
# 세상은 항상 광명(光明)으로 빛나고 있다.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光明雲臺 周遍法界 供養十方 無量佛法僧 <옮김>광명의 구름대 법계에 주변하여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불. 법. 승께 공양 올림니다. <풀이>지혜의 광명이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하여 시방삼세에 한량없는 불. 법. 승 삼보께 공양 올립니다.
<해설>
오분향 다음으로 이어지는 위의 구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光明의 구름 덩어리가 온 우주법게에 두루 가득하게 충만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헤아릴 수 없이 무한히 많은 불. 법. 승 삼보께 공양을 올린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광명운대(光明雲臺)"에서 광명(光明)은 진리(眞理)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眞理의 世界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삶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대로 眞理에 입각하여 사는 삶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나 수행이 높은 깨달은 사람은 그들의 생활 자체가 바로 眞理의 具現인 것입니다.
眞理라고 말하면 좀 막연하고 추상적인 느낌이 들지만 眞理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 光明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眞理가 곧 光明입니다. 光明은 眞理를 現象的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광명(光明)과 관계되는 이야기들이 매우 많습니다.
경전이 설해지기 전에 먼저 光明을 놓는 일(放光)부터 시작합니다. 또 사리탑이나 스님들이 放光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법당 안에 인등을 켜는 일도 光明과 관계되는 일이며, 초파 일에 연등(蓮燈)을 다는 일도 光明을 수놓는 것입니다. 光明은 곧 빛, 진리(眞理)를 뜻합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빛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을 잘 분별할 수 없을 것이며, 길을 가다가도 부딪히고 넘어져서 온통 피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빛이 없다면 이 세상은 순식간에 캄캄해져서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光明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 입니다.
앞에서 오분향(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은 불교인의 人格 完成에서 오는 다섯 가지 德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오분향, 즉 다섯가지 德 그것은 바로 光明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光明은 오분법신향을 몸소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眞理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光明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상처로 얼룩졌던 것은 光明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智慧의 光明은 항상 우리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줍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金剛經>에 광명(光明)에 대한 말씀을 비유해서 설해 놓은 대목이 있습 니다. 그것은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입암 즉무소견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暗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입니다. 풀이하면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눈 밝은 사람이 햇빛 아래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다시 풀어서 해석해보면, 마음이 자기만의 소견과 편견과 고집과 굳어진 사상(固定觀念)에 사로잡혀 생활할 것 같으면, 어떤 사람이 캄캄한 데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만약 자기만의 고집과 편견과 아집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어떤 사물을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실상대로 진실하게 관찰(觀察)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눈도 밝고 햇빛이 환히 비춰서 아무 탈없이 다치지 않고 길을 갈 수 있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소견이나 고집, 편견, 고정관념들은 결코 지혜의 광명이 아니며, 슬기도 아니며, 빛도 아닙니다. 사물이나 감정, 사건 등을 실상대로 관찰 할 줄 아는 밝은 눈이 열릴 때 사라들의 삶은 참으로 환한 광명의 삶 이 될 것입니다. 밝은 눈이란 바로 깨달음의 슬기요, 지혜의 빛(光明)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곳곳에서 깨달음의 안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안목이란 바로 우주삼라만상이 일어나는 일체의 모습을 사실대로 파악하는 광명의 눈을 갖추는 것을 뜻합니다. 광명의 눈이 있다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상처받지 않고 목적한 곳에 무사히 다다를 수가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친 깨달음, 진리의 말씀은 곧 智慧의 光明에 관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교의 의식 가운데 촛불을 켜고 등에 불을 밝히는 의미는 모두 지혜의 빛(광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光明입니다.
앞에서 오분법신향으로 무장한 사람의 인생은 光明스러운 삶이라고 했습 니다. 광명의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은 엄청난 밝은 광명으로 이 세상을 비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따라 밝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光明을 "유여천일출(猶如千日出) "이라 하여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참으로 밝은 완벽한 光明의 化身(化現)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오랜 세월을 걸쳐서 우리에게 올바른 삶의 빛, 광명을 비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나마도 지금까지 별일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앞길만이라도 비출 수 있는 각자의 내면에 지혜의 등불, 지혜의 광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 각자의 내면에 지혜의 광명마저 없다면 이리 저리 부딪혀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상처받는 그러한 모습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지혜의 빛을 잃어 어둡고 캄캄한 세상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법신향이 사람들 각자의 마음 속에 원만히 성숙되어 지혜의 광명을 밝히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광명(光明)을 사람의 육신에 비유한다면, 광명(光明)은 바로 웃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밝게 웃는 모습은 광명(光明)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웃는 것은 밝은 인상을 말합니다. 밝은 인상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옆의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공덕입니다. 반대로 무겁고 침울한 표정은 옆 사람까지 무겁고 칙칙한 기분을 안겨 줍니다. 침울한 표정은 진리의 세계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진리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승화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웃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웃음을 절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출근할 때도 웃고, 퇴근할 때도 한 번 웃어주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선물은 없는 것입니 다. 웃음이라고 해서 실없는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의 광명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온몸 전체에서 향기로운 웃음을 웃는 것입니다.
"광명운대(光明雲臺)"에서 운대(雲臺)는 구름 덩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변법계(周邊法界)"는 광명운대가 법의 세계에 두루두루 충만하여 펼쳐져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 세속적인 표현으로 지구 전체를 나타내는 말이 삼계(三界 : 欲界, 色界, 無色界)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온 宇宙를 통틀어서 말하기를 法界, 법의 세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세계는 물론 텅~빈 공간(虛空)까지를 전부 다해서 法界라고 표현합니다. 法界라고 표현하는 것은 곧 진리의 세계를 일컫는 말이므로 온 우주 전체가 모두 진리의 세계, 즉 법의 세계(법계)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어느 때 그 어디에도 진리가 없는 곳은 없다고 해서 법계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일진법계(一眞法界)라 하지요.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스님이 개신교 목사님과 함께 우연히 기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자신의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고 하여 하나님은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스님은 그럼 변소에도 하나님이 있겠다고 말했더니 목사는 발끈하여 화를 냈다고 합니다. 어떻게 신성한 하나님이 변소간에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眞理의 世界, 法의 世界(法界)는 어느 때나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습니다. 眞理가 어느 정해진 곳 정해진 때에만 있다면 그 眞理은 이미 眞理가 아닙니다.
진리(眞理)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완전 평등하게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법계(周邊法界) "는 진리의 구름 덩어리, 즉 지혜의 광명이 온 법계, 온 우주에 두루 가득 충만하여 없는 때, 없는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지혜의 광명은 처음에는 자기 혼자만을 비출 수 있는 정도의 빛 이지만, 기도와 수행을 통해 더 많은 빛으로 발광(發光)할 수 있는 것입니 다. 그 지혜의 빛은 어디 다른 데서 가지고 오는 빛이 아닙니다. 본래 이미 사람들이 누구나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광명 덩어리를 발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 마음, 말, 행동으로 지은 업(業)과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의해 가리워진 어두운 구름을 걷어 버리고 부처님과 똑같은 德과 지혜의 광명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본래 이미 와넌하게 갖추고 있는 그 지혜의 광명을 수행을 통해 확연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살다가 가신 분이십니다.
다음으로 "공양시방(供養十方)"이라고 할 때 공양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공양은 흔히 꽃. 음식. 초. 향. 차, 과일, 음악. 춤. 의복 등 부처님께 이바지하고 도와주는 모든 사물과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 올리는 모든 것을 공양이라 하여, 엄밀히 말해서 부처님께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양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부처가 될 씨앗, 즉 불성(佛性, 靈性, 근본성품)이 이미 들어있기 때문에(일체중생실유불성/ 一切衆生悉有佛性) 모든 사람들에게도 공양이란 말을 쓰는 것입니다. 절에서 밥을먹는 것을 '공양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에는 '당신도 부처님입니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쓰는 공양(供養)이란 말을 사람들에게도 쓰는 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도 부처님처럼 공양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양 올리는 자가 곧 공양 받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부처님과 동등한 인격으로 대한다는 뜻이 공양(供養)이란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부처의 씨앗이 없다면 공양(供養)이란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됩니다.
<법화경>에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는 참으로 훌륭한 보살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불경보살은 평소에 수행을 할 때 남들처럼 경을 읽거나 기도,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도 부처님이 되실 것입니다"라며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존경하고 예배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았습니다.
상불경보살은 모든 사람이 본래 이미 완전하게 부처님의 씨앗을 품고 있음을 알고, 그에 대한 확신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예배하는 일에 너무 바빠 다른 수행은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처럼 존경하고 예배하는 일을 평생 수행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 일로 해서 그는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공양(供養)이란 말 속에는 상불경보살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 니다. 사람들도 각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공양 하십시오'라는 말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 말 속에는 훌륭한 만행 만덕과 전능한 무한한 능력과 전지한 지혜의 광명을 본래 이미 완전하게 지니고 있는 부처님의 씨앗이 당신에게도 심어져 있으므로 부처님 처럼 존경하고 예배드린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양(供養)이란 말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가르침)을 전하는 제일성(第一聲)으로 삼아도 좋은 훌륭한 말입니다. 공양(供養)이란 말 한 마디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진정한 포교사가 되는 길입니다.
<금강경>에는 법공양(法供養)의 위대성을 "설사 삼천대천세계를 채울만한 금은보화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시한다고 해도 짧은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한 구절만이라도 서사수지(書寫受持) 위인연설(爲人演說)을 한다면 그것 보다 더 큰 공덕은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법공양(法供養)의 훌륭함을 나타낸 말로, 결국 사람들 속에 본래 이미 완전한 무한한 보배, 즉 부처(佛)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말보다도 '공양(供養)하세요'라는 말 한 마디가 가지는 존칭은 참으로 엄청난 힘입나다. 공양(供養)이란 말을 계속 씀으로써 공양(供養)이란 말이 은연 중에 상대방의 가슴 속에 파동(波動)쳐 마침내 사람들이 부처님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공양(供養)이란 말을 일상생활 속에 사용함으로 해서 사람들은 법계에 무한한 공덕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 속으로는 미운 생각이 들더라도 상대방을 향해 '공양(供養) 하십시오'라고 하면 그 뜻은 미운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공경하고 예배하는 진정한 표현이 됩니다.
공양(供養)이라고 해서 단지 먹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공양시방(供養十方) 여기서의 공양(供養)은 진리에 대한 공양, 법에 대한 공양, 가르침에 대한 공양입니다. 이것은 곧 智慧의 光明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불문(禮佛文 >의 공부를 통해 조금이나마 진리의 공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양(供養)이란 말은 참으로 고맙고 빛나는 값진 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공양(供養)이란 말과 함께 있는 시방(十方)은 동. 서. 남. 북의 사방과 동남. 동북. 서남. 서북의 사유(四維)에 상. 하를 합한 것이 시방(十方)입니다. 결국 시방(十方)은 불교의 공간 개념을 나타낸 말로서 온 우주 전체(法界)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공양시방 여기서의 시방(十方)은 항상 어느 때 어느 곳에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眞理)는 어느 때 어는 곳에도 없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무량불법승(無量佛法僧)"은 '한량없는 불. 법. 승 삼보'라는 말입니 다. 불. 법. 승은 부처님과 진리의 가르침과 불교 단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온 인류, 모든 만물에게 진리의 빛(지혜의 광명)이 무량하게 골고루 펼쳐지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다종다양한 온갖 만물에게 진리의 빛이 무량하게 골고루 펼쳐져 바람직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무량불법승" 속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불. 법. 승 삼보 중에서 "승(僧)"이라고 하는 말은 단지 출가한 수행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승가라고 해야 하는 데, 그것은 불교단체, 불교집단, 불교대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출가 비구. 비구니는 물론 재가 남녀인 청신사. 청신녀를 모두 합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흔히 사부대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다른 말로 부처님의 아들 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향"에서부터 "무량불법승"까지의 내용에서 살펴볼 때, 예불문 이 속에는 불교의 목적하는 바가 모두 들어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光明雲臺 周遍法界 供養十方 無量佛法僧)은 비록 짧은 글이지만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기본 밑천으로 삼아 자신의 수행을 쌓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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