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영혼의 통로, 모딜리아니의 눈
입력 2017.09.05. 02:13 수정 2017.09.05. 06:29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토스카나”, 그 포도주병의 라벨이다. 노란 스웨터를 입은 새초롬한 여인을 그린 유화(사진)가 인쇄돼 있다. 화가 모딜리아니(Amedeo Modiliani, 1884~1920)의 고향에서 생산된 포도주다. 어느 유쾌한 날 작업실 파티에서 친구들과 마신 흔적이다. 포도주의 향도 달아나고 친구들도 멀어진 지금 귀뚜라미는 이 빈 병을 제 울음소리로 공명했었나 보다. 화가라면 라벨 속의 여인을 알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가을,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연인 잔느 에뷔테른을 그린 것이다.
화가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그다음 해에 서른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림에는 그의 죽음을 예고할 암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온화하고 따뜻한 화가의 마음이 화면 구석구석에 배어난다. 포근하고 안정된 붓질로 인물을 담백하게 묘사했다. 연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 뚜렷하다. 모딜리아니는 그림을 통해 주변 사람들과의 교감을 오래도록 남기려 한 것 같다.
실제 그의 삶은 결코 포근하거나 안정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끊이지 않았고, 혈혈단신 고향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 외곽 몽파르나스에 정착해서도 결핵과 폐병에 시달렸다. 그는 이미 자신의 요절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대인이란 태생적 차별을 견뎌야 했다. 모딜리아니에게 곤궁과 가난, 그리고 소외는 익숙했다. 한창 열정적으로 작업에 매진하던 그의 파리 생활은 어느 것 하나 긍정할 수 없는 현실의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비애와 절망 외에 다른 것이 없었다.
모딜리아니와 함께 몽파르나스에 모인 당시의 예술가들을 뭉뚱그려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라고 한다. 그들 중에는 샤갈·수틴·피카소와 같은 미술가뿐 아니라 헤밍웨이 같은 소설가도 있었다. 다가올 시대의 가능태로서 ‘에콜 드 파리’라는 알(卵) 속에서 예술가들은 서로 사귀고 부대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역사에 기록될 양식을 창안하거나 중요한 유파를 형성할 것이지만 모딜리아니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가능성을 품은 채 그 알을 깨고 나오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는 폭음과 압생트·줄담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점점 반 고흐처럼 비극적인 작가의 전철을 밟아 갔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그 절망의 알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가 그린 여인들 상당수는 눈동자가 없다. 특이하다. 고대 수메르인과 아프리카의 조각·그림에서도 눈동자가 생략된다. 눈이 영혼의 통로이기에 그것을 가로막는 짙은 색의 동자(瞳子)는 신상(神像)에서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모딜리아니도 인물의 눈동자를 지워 갔다. 눈동자를 지움으로써 저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듯한 눈빛, 더 생생한 영혼의 통로를 얻었다. 모딜리아니의 베일에 가린 듯 동자 없는 반투명색 눈이 어색하지 않고 오래도록 뇌리에 남게 된다.
‘노란 스웨터의 잔느’는 작업실을 데울 땔감이 다 떨어져 만삭의 잔느를 따뜻한 그녀의 집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그린 것이다. 수려한 외모 말고는 가난하고 병약한 남자가 연인에게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는 때에 이 그림은 그려졌다.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끝끝내 놓지 않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지금 내가 쥐고 있는 포도주병의 표면에 있다. 잔느를 돌려보내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작업실에서 모딜리아니는 오늘 저녁 내가 들은 저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을까.
전수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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