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평안하면 바로 극락입니다 / 법흥 스님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어야만 하는가?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무리 둔한 사람일지라도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특히 조용한 밤중에 홀로 깨어있거나, 고통스런 일을 당했을 때나, 저승길이 얼마 남지 않은
황혼녘에서 이러한 질문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정말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지요.
사실 사람들 누구나 자기 삶을 돌이켜 볼 때 만족한다거나 자부심이 들기보다는, 인생은
아쉽고 허무하고 무상(無常)하다는 생각이 일어나거나 마음이 생기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를 제대로 배워 알고, 진실로 믿는 사람은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에도 그러한 후회
를 하지 않습니다. 삶, 인생이라는 이 현실세상, 현상세계을 직시하고 참나(眞我)를 찾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의 삶이 순탄하기만 하고 생활에 여유가 넘치고 세상 일이 잘 풀려가면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즉 나의 본질, 본래의 나, 참나, 근원의 나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석양길에 접어드는 나이인
70~80대가 되면 거의 누구나가 자기가 지나온 인생을 성찰해보게 됩니다. 인생, 삶, 세상이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길에서 자신의 근본문제, 나의 본질, 나의 근원을 생각한다면 때는 늦은 겁니다.
당장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었인지 자신을 바로 보십시오..
인간은 부모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태어납니다. 태어나니 늙고, 늙으니 병들고, 병드니 죽게 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만 할 숙명을 갖고 태어난 것이 인간의 삶, 인생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만 같은 허망한 착각, 환상속에 빠져 바로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일을 생각하려 들지 않지요.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는 일시적으로 잠시 잠깐 와서 머물다 가는 임시적인 존재로서
불교에서는 이 임시적인 존재를 '가아(假我)', 가짜 나 , 고정된 실체가 없는 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는 가짜 나(假我)인가? 사람의 경우 이 육신은 수백년
수천년 영원히 유지되는 존재가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만 할 숙명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가아(假我)', 가짜 나, 임시적인 나, 고정된 실체가 없는 나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실아(實我), 진짜 나(眞我)는 무엇이냐? 진짜 나, 참나는 근본마음(本心), 넋(魄), 얼(魂),
영혼(靈魂), 정신(精神), 본래면목(本來面目), 주인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으로 육신을 끌고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놈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성(佛性), 자성(自性), 여래(如來), 근본성품, 진성(眞性)
등으로 말합니다.
육신은 생과 멸, 즉 나고 죽음(사라짐)이 있지만, 위에서 말한 실아, 진아, 본심, 넋, 혼, 영혼, 정신,
본래면목, 주인공, 불성, 자성, 진성, 여래, 부처(佛), 청정한 마음자리 법신(法身)은 생과 멸이 없습니다.
불생불멸, 불거불래의 자리 입니다. 청정한 法身은 우주에 충만해서 없는 곳이 없고, 영원한 세월에 항상
하기에 없는 때가 없는 불생불멸, 상주불멸하는 영원한 진실생명(永生), 상락아정(常樂我淨) 그 자체
입니다.
『법화경』에 '제법종연생(諸法從緣生) 제법종연멸(諸法從緣滅)'이란 말이 있습니다.모든 법, 즉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우리는 인연(因緣) 따라 생겼다가 인연(因緣)이 다하면 없어지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함허 스님도“ 무량한 세월 천겁이 흘러가도 옛날이 아니고(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끝없는
만세월을 돌고 돌아도 항상 지금 여기(亘萬歲而長今선만세이장금)” 라고 말하였듯이 육신은 생과 멸이
있으되 근본마음,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 진실생명, 法身은 생과 멸이 없는 불생불멸, 상주불멸, 永生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매순간 1초 1초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습니다. 생(生)과 사(死), 생과 멸은
동일 시점, 같은 곳에서 출발하고 도착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요. 끊임없이 부단한 삶을 살면서
쉼없이 부단히 죽음의 길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생과 사, 생과 멸의 모순, 이율배반입니다.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결국 영원히 살고픈 그 마음은 육체의 죽음에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육체의 죽음이 끝난 그바로 곳에서 生과 死(滅)은 서로 상즉(相卽)하고 있어요. 즉, 생과 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生卽死(생겨남이 곧 죽음이고)요, 死卽生(죽음이 곧 생겨남)
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니라는 말이고, 생사가 바로 열반이고,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이
이래서 나왔습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고,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라는 말입니다.
法身, 부처(佛), 근본성품, 참나라는 말은 불생불멸, 상주불멸, 상주불변, 불거불래의 眞理를 가리키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진리(眞理)란 생과 사(멸)이 없는 것이고 고금(古今, 옛날과 지금)이 없
어요. 동서고금을 통해 누구라도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眞理, 진정한 이치입니다.
우주의 근본성품의 작용은 일정한 이법(理法), 즉, 작용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의 근본성품이
작용하는 법칙, 理法을 道, 眞理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주에 가득차 있는 진리를 인격화시킨
것이 부처(佛), 淸淨法身, 참나, 본래의 나, 근본성품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겁니다.
인간의 몸 받기 정말 어렵고, 불법 만나기 정말 어렵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 그 소중한
불법을 만났으니, 돈을 많이 벌거나, 명예를 탐하거나, 남을 이기고, 남을 헐뜯고 경쟁하는데 시간 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고, 공동으로 우주의 대진리를 찾아내 성불에 이르는 것
을 최고 목표로 삼으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분별하는 마음 작용의 산물이요, 분별하는 마음 가짐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존재 방법의 근본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형상과 모양과 빛깔이 없지만 이 세상 모든 것, 우리는 마음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고통과 분별
망상 잡념 번뇌를 여의어 내 마음이 평안하면 그것이 바로 극락인 것이고, 내가 죄를 지어 내 마음이 괴롭
고 고통스러우면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는 바로 모든 중생이 겪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자는 가르침입니다. 불교
공부는 마음을 갈고 닦고 기르는 마음공부입니다. 마음을 닦는 것이 수심(修心)이요, 마음을 기르는 것이
양심(養心)이며, 마음을 쓰는 것이 용심(用心)이고, 마음을 잡는 것을 섭심(攝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느냐. 어떤 마음을 가져야 극락이고, 마음을 잘 쓰는 것이냐.
첫째, 청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광명정대한 마음, 청풍명월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임제 선사
께서도 "청정심이 곧 부처"라 했어요. 청정한 마음 깨끗한 마음은 부귀나 권력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두번째는 이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법신의 은혜, 부모님 은혜, 스승의 은혜, 중생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쌀 한톨의
생산에도 , 우리가 사는 집도, 自然의 수고와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이루어낸 결과물입니다. 주의깊게
살펴보면 감사할 일은 차고넘침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확산될때 이 세상은 밝아지고 평화로워 집니다.
세번째는 용맹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은사스님이신 효봉 스님은 38세때 금강산 신계사 보은암에
입산하여 8년동안 장좌불와와 오후 불식(不食)으로 정진하셨습니다. 한번 앉으면 일어나는 것을 잊을 정도
로 용맹 정진하셨지요. 한번 목표를 세우면 그렇게 용맹심으로 밀어붙어야 성취가 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치솟아 올라오는 분별 망상 번뇌 잡념때문입니다.
강력한 정신집중이 안되면 분별 망상 번뇌 잡념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참선 수행을 하는
겁니다. 학문의 왕인 철학이라는 것은 개념을 논리에 의해서 구성해 놓은 환상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禪은 개념적인 논리와는 정반대입니다. 禪은 정신집중이고 公案에 대한 의심입니다. 정신집중과 공안에
대한 의심으로 날뛰는 마음 생각이 어디로 달아나지 못하게 해서 몸이 있는 지금 여기에 마음을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강력한 정신집중을 하기 위해서 공안을 붙들고 참선을 하는 것이지요. 오롯하게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을
깨쳐야 인간존재의 진면목, 본래면목, 참나, 본래의 나, 근본성품, 청정한 法身자리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참선을 하여 자성(自性), 근본성품, 불성, 본래면목, 참나를 깨치면 생사를 해탈하고 선악의 근본을 알고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닌 이치를 알게 됩니다.
나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생각, 망상, 환상과 집착을 버리고 무명을 깨뜨리고 본래의 청정한 나,
청정한 법신부처(淸淨法身佛)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이란 욕망과 아집으로 뭉쳐있는
삶을 근원적으로 비판, 탈각해서 진실하고 자비롭게 살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 현실은 지식이나 분별작용,
자기주관으로 뭉쳐져 있어서 우주삼라만상만물을 하나의 생명근원으로 보는 전인적인 입장이 아니라,
그때 그때 필요에 의해서 파악되는 협소한 개인의 주관적인 분별심의 투영(投影)이 이 세상 현실입니다.
참선은 열심히 하면 전인적이고 근본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보게 됩니다. 세속사람들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전부 고통덩어리입니다. 세속 사람들은 적자생존의 법칙하에 환경의 지배를 받아 먹고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道, 참나, 본래의 나, 청정한 法身, 불성, 근본성품을 깨우칠 여력이 없다고 합니다.
다람뒤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를 業에 이끌리는 습관(習慣)에 따라 보내지요. 생과 사라는 허망하고 헛된
분별심에 매여 구속당해 산다는 말입니다. 미혹한 중생으로 머물러, 생과 사라는 분별심의 윤회의 고통을
반복해야 하겠습니까?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이 수승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부처가 되고자 노력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혹한 중생이 세속에 부대껴 살며 부처가 되는 길이 그리 쉽겠습니까? 죽을 고비를 몇번씩 넘겨도 될까
말까 하지 않겠어요? 이 좋은 불법이 있는 줄 알게 된 이상 마음공부를 꾸준히 해야 발전이 있습니다.
법당 안에 있는 불상, 형상 앞에 나아가 무엇을 얻게 해달라고 열심히 절하고 기도하고 빈다고해서 그것이
참다운 절 수행,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나 예불은 스스로의 마음을 청정하게 해 근본성품, 본래의 나, 참나, 진아, 법신부처님께 진심으로
회귀함을 말합니다. 지극한 마음이 우선이지요. 우주의 본질, 내 생명의 본질을 깨닫고, 만 가지 다른 모습
에서도 근본성품, 본래의 나, 참나, 진아, 청정한 法身을 보고 결국 나의 생명이나 우주의 모든 중생의
근본성품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라고 하는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나의 본래면목, 나의 근본성품, 나의 法身이 무엇인지 모르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말세가 되어 혼탁한 것은 자기 자신의 본래모습을 모른 채 가아
(假我)에 정신이 팔려 사람들 모두가 진실한 참나, 근본성품, 법신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제대로 깨치면 매일 매일 새롭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나, 본래의 나??? (0) | 2017.10.16 |
---|---|
수월(水月)스님 전기 (0) | 2017.10.15 |
그윽이 분리 분별 차별을 잊는다 (0) | 2017.10.13 |
무유정법(無有定法) 이 세상에 본래부터 미리 定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0) | 2017.10.11 |
시작도 끝도 없는 허공에 글귀 하나 찾아오고 (0) | 2017.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