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본래 이미 완전하고 온전한 존재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 쯤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사로잡혀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바꾸어서 말하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물음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물음
자체를 굉장히 사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묵살해 버립니다. 아닙니다, 이 물음은 우리들의 삶, 인생,
세상과 직접 연결되는 물음이기 때문에 아주 절박한 물음으로 이 질문이 나를 실현, 발현하는 배경이
되고 나를 발현, 실현으로 이끌어주는 에너지의 원천, 힘이 됩니다.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진정 어떤 존재입니까? 진지하고
절실하게 물어보고 느껴보십시오.
사람이 동물과 다르게 구별되는 것은 느낌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느낌을 드러낼 줄 알고
자기 고통이라는 느낌에 집중하는 존재며 느낌과 함께 함으로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존재입니다. 옷만
바꿔 입어도 행동 양식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사람인데 정작 사람에 대해 논의 되어지는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망각하고 살면 비탈진 길 위에서 기우뚱거리며 뒹굴면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비탈진 바닥에서 컵을 세우는 노력들을 즉시 멈추고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뒤에 컵을 놓으면 안 설 수가
없는 것처럼 바닥만 잘 닦고 잘 잡으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고 삶은 저절로 살아집니다.
사람이 영(靈), 혼(魂), 육(肉)으로 되어있다는 말은 말 그대로 분석일 뿐 핵심이 아닙니다. 서양 사람들은
사람을 분석하고 분석하는 바람에 더욱 더 사람의 본질(本質)을 아는 것에서 멀어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 자체가 되면 그 사랑으로 충분하고, 온전함을 알면 누군
가의 사랑을 갈망하거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 조차 없어집니다. 사람으로 온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
온전함이 평등(平等), 동등(同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본질(本質), 근원(根源)을 찾아가는 마중물 역할을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결론을 내리든지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나는 사람이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현실(現實)이라는 삶, 인생, 세상을 살아야하는 존재입니다.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충분히 느낌을 드러내고 표현하면서 삶을 실현, 발현해야 할 사람입니다.
느낌의 실현, 발현이란 삶의 실현, 발현이고 삶이 실현, 발현될 때 나는 실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그대로 내 삶의 배경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한없이 부족하고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존재라고 배웠습니다. 죄인이 되면
의지하는 기쁨이 있고 위로를 받고 구원을 받는 기쁨이 따라오지만, 이것 때문에 스스로 죄인의 굴레,
죄의식이라는 생각의 감옥 속에 갇혀 있었는지 모릅니다.
조선 시대에 어느 개혁가가 노비문서를 불에 태우고 노비들을 해방 시켜주었지만 노비들이 울면서
자기들은 계속 노비로 남아있겠다고 매달리더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사람들의 현재 상태나
다름 없습니다.
사람이 온전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겁부터 내는데 대상에 매달려 사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것입니다.
불교 초기 경전에는 참회(懺悔)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데 이것은 본래 사람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은 온전하지 못하고 부족하다는 말을 계속 들으며 살아왔고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사람이 온전하다는 그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손사래를 칩니다, 하지만
사람의 숭고한 덕목(德目)은 사람의 이 온전함을 알고 이 사실을 내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숨 잘 쉬고, 잠 잘 자고, 잘 먹고, 똥을 잘 누고. 기쁜 일 생기면 웃고, 슬퍼지면 엉엉 소리내어 울고, 화날
일이 생기면 벼락 치듯 화를 내고, 외로울 땐 죽도록 외로워하는 것이야말로 사실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우울증에 빠지거나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이 너무 섬세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들입니다. 섬세하다는 것은 자신의 느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안다는 뜻인데
그 느낌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제하는 것이 한계에 도달하여 그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우울증 불면증의 원인을 찾으러 다니고 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습니다. 그러나 진짜 뿌리는 느낌에
있습니다. 나라는 주체가 너무나 힘들었던 과거(過去) 상황에 묶여있습니다. 그 방향성을 지금 여기 現在로
돌릴 수만 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잠을 잘 때도 자는 주체가 나라는 것을 알면 불면증에 시달릴 일이 없습니다. 옆에서 누가 코를 골아도 주체
로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은 유난히 더 느낌이 섬세합니다. 느낌이 섬세하다는 것은
그가 정말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힘들다가 괜찮아지고 괜찮다가 힘들어지는 것이 반복되었지만 자신이 알지 못했고 주변
사람들이 몰랐을 뿐입니다. 그는 지금 너무 아프고 슬퍼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완전히 바닥에 떨
어져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실을 설명해 주어야 할까요? 어떻게 위로
해 주어야 좋을까요?
하지만 정작 그는 사람은 누구나 본래 이미 완전하고 온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만나는 걸 두려워하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사실을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아파도 아픈 이 삶에 안주(安住)
하는 것이 더 낫고 안주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자식도 너무나 예뻐서 고통이 된다는 그 사실을 알아
야만 합니다, 너무나 미운 남편이 사실은 너무나 좋아서 고통이 되었다는 그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통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국은 주변을 모두 죽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진흙탕처럼 더럽다고 생각되어도 어느 한 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아픈 이유가 바로 당신이 그 맑은 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 엄연한 사실을 한 점
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치유됩니다. 이 사회는 그런 사실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 느낌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하면 주변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느낌의 속성(屬性)이 스스로 따뜻해서 내
주변을 적시기 때문에 갈등이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설령 갈등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적용할
대상이 되니 고통의 대상을 오히려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만나게 되고 수용하게 됩니다.
나의 온전함과 숭고함을 배경으로 세우고 그 느낌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삶은 그대로 아름다운
여정(旅程)입니다. 내가 바로 부처라는 배경, 내 삶이 바로 부처의 삶이라는 배경을 세워야 하는 까닭은
아무리 많은 앎이 드러나고 내 느낌이 풍부해져도 현실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가 바로 부처다, 내 삶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라는 분명한 배경을 세우면 느낌의 선이 살아납니다.
느낌의 선이 살아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선명해집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게되고 그 느낌으로 현실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느낌이 더욱 분명해 지고 내 느낌에 탄력이 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사람이 온전하다는 그 사실에 동의가 일어나기만 하면 드디어 내가 주인공으로서
나만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온전합니다. 이것이
내 잘못이 아니구나. 나에게 아무 문제가 없었구나, 내가 죄인일 수가 없는거구나 하는 느낌들이야말로
온전한 느낌들입니다.
온전한 느낌에 뭔가 차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충분하고 상처나 아픔이 있어도 사람이 본디
온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다 하다 지치면 폐쇄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고 , 나를 보호하려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거나 위로 받기 위해 병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냥 쉬면 지
탄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병을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
다만 지친 것에 불과합니다.
그때는 쉬어야 되는데 사람들은 진정으로 쉬지 못합니다. 지금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푹~쉬세요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당황해서 어떻게 쉬는 것이 푹~쉬는 것이지 하며 이 생각 저 생각을 머리로 굴리
기 시작합니다. 결국 또 다른 생각을 굴리느라 푹~쉬지를 못하는 것이죠.
쉬면 안될 것 같고 쉬면 주변에 영향이 가거나, 혹은 내 역할을 내려 놓을 수 없어서 남들이 인정하는
만큼만 쉬지요. 그러다가 어느 새 쉬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사람은 쉬어도 되는 존재입니다.
푹 자고 나면 더 자라고 해도 못 자고, 배가 부르면 더 먹으라 해도 못 먹습니다. 사람의 느낌은 필요한
만큼 하고 나면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외부의 어떤 대상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나약한 존재
가 결코 아닙니다. 어떤 경우와 환경에 놓여 있더라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본래 이미 완전하고 온전한
숭고하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http://cafe.daum.net/emiso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달음의 공덕 (0) | 2017.10.19 |
---|---|
삶의 목적은 무었인가? (0) | 2017.10.18 |
진정한 나, 본래의 나??? (0) | 2017.10.16 |
수월(水月)스님 전기 (0) | 2017.10.15 |
마음이 평안하면 바로 극락입니다 (0) | 2017.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