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아니요(不是心) 부처도 아니요(不是佛)”
마조선사의 선법(禪法)은 조사선(祖師禪)의 사상(思想)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조의 주요 사상
(思想)으로는 즉심시불(卽心是佛), 도불용수(道不用修),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을 들 수 있다.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는 사상은 마조에 의해 처음으로 설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선종 초기 혜가
와 도신의 설법에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설법이 등장하고 있으며,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사상은
혜능 남종선의 핵심법문이기도 하다. 홍주선은 적극적으로 이러한 즉심시불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떤 스님이 마조에게 묻기를, “왜 마음이 부처(卽心卽佛)라고 말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애기의
울음을 달래기 위함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애기가 울음을 그친 후에는 어찌 합니까”라고 묻자,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대답했다.
“이 두 종류, 卽心卽佛 非心非佛을 제외한 사람이 오면 어떻게 가르칩니까”라고 묻자,
“마음도 아니요(不是心), 부처도 아니요(不是佛), 물건도 아니다(不是物)라고 한다”고 답하였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마음(心)이 본래부처(本來佛)임을 깨닫지 못하고 본래부처인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고 있다. 마조는 이러한 잘못된 분별 망상을 깨뜨리기 위해 “마음이 부처(卽心卽佛)”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마조가 卽心卽佛을 강조한 이후 사람들은 또한 卽心卽佛이라는 방편의 말에 집착하여 수행하지
않게 되자, 지해(知解)의 方便의 말인 卽心卽佛을 부수기 위해 이번에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는
방편의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非心非佛은 卽心卽佛에 대응하여 제기한 일종의 부정어인
셈이다.
非心非佛의 뜻을 음미해 보자면, 주관의 인식작용(육식六識)은 인식주관(六根)과 주관이 인식한 바의
객관대상(六塵육진, 六境 육경)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상(虛想)에 불과하다. 즉 인식작용(六識)은 인식
주관(六根)에 있는 것도 아니요, 객관대상(六塵/六境)에 있는 것도 아니요, 그 둘이 합쳐지는 六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합쳐지는 육식에 없는 것도 아니니, 인식은 세계(대상)의 인식이요, 세계는
인식의 세계일뿐이다. 따라서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어서 마음이라 해도 틀리고, 부처라 해도 틀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말하기를 “마음도 아니요(不是心), 부처도 아니요(不是佛), 물건도 아니다
(不是物)”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사상 계승 발전시켜 ‘비심비불(非心非佛)’로 지해(知解) 방편 부숴버려
이러한 비심비불(非心非佛 )주장은 중생의 병에 따라 처방하는 대치방편(對治方便)에 집착하지 않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부처(佛)라는 지견(知見)은 안과 밖(內와 外), 생과 멸(生과 滅) 등의 상대적인 분별
의 두 가지 법(二法)인 양쪽에 치우침이 아니고, 불이중도(不二中道)의 法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마음이 부처라고 해도 틀리고, 마음이 부처가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다. 마음도 부처도 본래 공(空)한 것
인데 空 어디에 “이고(卽), 아니고(非)”가 있겠는가. 우주삼라만상만물, 일체가 다 空이지만(一切皆空),
그 공(空) 또한 空을 고집해 지키지 않고 색(色)으로 드러나니, 色이 그대로 空이요(色卽是空), 空 그대로
色이니(空卽是色), 이를 일러 즉색즉공(卽色卽空, 色 그대로 空)의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선이 세운 종지이다.
사실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는 말은 근본성품(根本性稟)이 곧 마음(卽性卽心즉성즉심)이라는 말을
전제하고 주장한 말이다. 조사(祖師)란 근본성품이 곧 마음임(卽性卽心)을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사선의 卽性卽心의 사상이 발전되어 卽心卽佛의 사상이 되고, 더 나아가 즉인즉불(卽人卽佛, 사람이 곧
부처다)라는 대승(大乘) 사상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훗날 임제 선사는 마조의 卽心卽佛 사상을 계승하여 “사람이 바로 부처(卽人卽佛)”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조사선 사상의 최고봉이 바로 “사람이 부처다(人佛)”라는 사상이다.
“닦되 닦지 않고, 닦지 않되 닦는다”
지금까지 선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마조 홍주선의 수증관(修證觀)을 언급할 때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道不用修)” 혹은 “평상심이 도다(平常心是道)”라는 어구를 사용한다. 종밀은 홍주선을 “촉류시도(觸類
是道. 접촉되고 부딪치는 모든 것이 道)라고 정의했다. 즉 도(도)가 곧 마음(心)이니, 마음으로써 마음을
닦지 못하고, 악(惡) 또한 마음이니 악한 마음으로써 악한 마음을 끊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하는
것(任心)이 수행이요, 마음에 그대로 맡겨서 자재함(任運自在)이 해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접촉되고 부딪치는 모든 것이 道” 강조로 ‘不二中道行’ 원칙으로 제시
이른바 “접촉되고 부딪치는 모든 것이 도(觸類是道)”라는 것은 마조가 말한 즉심시불(卽心是佛), 비심비불
(非心非佛)의 중도불성(中道佛性), 즉 중도(中道)의 근본성품(根本性稟)에 대한 절대긍정의 가르침이다.
즉 마음(心)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는 탐진치(貪嗔癡) 삼독심의 번뇌 및 선불선(善不善)의 분별하는 행위
모두가 中道佛性, 中道의 根本性稟의 작용이요, 道라는 것이다.
“촉류시도(觸類是道)”라는 말의 근거는 〈능가경〉의 여래장자성청정(如來藏自性淸淨)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淸淨한 自性은 體와 用의 두 面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무궁무진한 작용면에서 보게 되면 접촉되
고 부딪치는 일체 모두(觸類)가 中道佛性의 전체작용(全體作用)인 것이다. 체와 용(體와 用)이 둘이 아닌
체용일여(體用一如)의 각도에서 보면 일체가 다 진실이다(一切皆眞). 일체가 진실임(一切皆眞)을 주장하는
홍주선은 지금 당장의 일거일동(一擧一動), 일언일행(一言一行)으로부터 자기가 본래부처이며, 임운자재한
자신 전체가 그대로 부처임을 깨닫게 한다. 이것은 작용으로 근본성품을 삼기(作用爲性) 때문이다.
홍주선의 작용으로 근본성품을 삼음에 대한 사상적 연원은 〈전등록〉권3에 바라제가 王을 위해 설한
게송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근본성품을 보는 것이 부처입니다(見性是佛). 근본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근본성품은 작용에 있습니다(性在作用). 무슨 작용입니까? 근본성품의 작용이 태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 맡고, 입에 있으면 말하고, 손에 있으면 잡고, 발에 있으면 걷고 달리고, 들어내면 세계에 가득하고,
거둬들이면 한 티끌에 들어가고, 깨달으면 불성(佛性)인 줄 알고, 깨닫지 못하면 정혼(精魂)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성품은 작용에 있다(性在作用)”고 한 말의 뜻은 수행자는 현실의 구체적 생활 가운데,
즉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바로 中道佛性, 中道根本性稟을 깨우치고, 또한 밖을 향해 구하지 않아야
하며, 일체의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중도불성의 전체작용이 아님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 근거해 홍주선은
촉류시도(觸類是道), 혹은 일체개진(一切皆眞) 설을 개진하고 있다. 眞理는 平常時의 매일 하는 일 가운데서
마음대로 행하는 것(任心而行)으로 실현할 뿐 추호도 조작(造作)하고 취향(趣向)함이 없어야 하니, 일체가
도(道) 아님이 없는 연고로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道不用修)”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조는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生과 死라는
분별심으로 조작하고 취향함이 있으면 오염이다. 만약 道를 깨달으려면 평상심이 도다(平常心是道)”라고
주장하게 된다. 여기서 마조는 한편으로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 오염시키지 말
라고 하여 범인이 평상시에 닦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수행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마조는 “닦아서 이루는 것은 성문(聲聞)법이요, 닦지 않는 것은 우인(愚人)법이다”라고 말해, 닦되
닦지 않고(修而不修), 닦지 않되 닦는(不修而修) 보살의 불이중도행(不二中道行)을 수증의 원칙으로 내세
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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