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부처란 곧 마음이자 곧 중생이다

장백산-1 2017. 10. 20. 15:27

부처란 곧 마음이자 곧 중생이다 / 황벽선사


모든 부처(佛)와 모든 중생(衆生)의 본체(本體, 본래바탕)는 하나로 같은 한마음(一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한마음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옛적부터 생겨나지도(生) 않고 죽는 것이(死) 아니고(불생

불사, 不生不死), 푸르거나 누른 일체의 색깔도 없으며, 어떤 형상(形象) 모양 모습도 없다. 


모든 이름과 말과 자취와 관계를 초월한 본체(本體, 본바탕)를 곧 한마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본체, 본래바탕 여기서는 자칫 한 가지 생각만 일으켜도 이미 벌써 본체, 본래바탕과는 어긋나는 것이니,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은 마치 텅~빈 허공(虛空)과 같아서 시작도 없고 끝이 없으며(無始無終), 시비

분별 비교 판단이나 어림짐작이나 생각으로써는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을

곧 부처(佛)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 한마음(心) 본체 본래바탕과 부처(佛)와 중생(衆生)이 결코 다르지 않아 분리 분별 차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중생(衆生)들이 분리 분별 차별되어 드러나는 상(相), 형상, 모습, 모양에 집착하고 그 모습에

머물러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밖에서 한마음, 부처(佛), 중생(衆生)을 찾으니 이것을 찾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 중생에서 더욱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중생(衆生) 스스로가 본래 

이미 완전한 佛(부처)이고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인데 다시 부처(佛)를 찾고,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으려 한다면, 이는 몰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 바깥에서 물을 찾으려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면 제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몸과 마음이 다하도록 애를 쓰더라도 찾는 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오직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생각, 분별심, 분별의식만 쉬면 부처(佛),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이

스스로 눈 앞에 드러나 있는 사실을 중생(衆生)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이 곧 부처

(佛)이며 부처(佛)는 곧 중생(衆生)이기 때문에(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중생(衆生)이 되었을 때도 줄어들지 않고, 마음은 부처(佛)가 되었을 때도 늘어나지 않으며, 마음은 육도

만행(六度萬行)과 온 바다와 온 강의 모래만큼 보다 많은 공덕(功德), 무한한 가능성이 모두 갖추어져 있

기에 이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佛), 중생(衆生)은 다시 더 닦거나 보탤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 중생은 인연(因緣)을 만나면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곧 인연을 따라서 일을 

성사시키고, 그 인연(因緣)이 다해 사라지면 곧바로 공적(空寂)하여 고요하다. 이런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佛), 중생(衆生)을 믿지 않고 상(相)에만 집착하고 머물러 부처,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을 찾겠다고

하며 그것을 공덕이라고 여긴다면, 이런 분별하는 생각이나 마음은 모두가 번뇌 망상일 뿐이요, 도(道)에 

서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고 중생이요 다시 다른 마음, 다른 부처 다른 중생이 없다.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 중생은 허공(虛空)처럼 텅~비고 맑고 깨끗하여 단 한 점의 모양도 없다. 


만약 분별하는 한 생각이라도 움직인다면(動念) 곧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 법체(法體)와는 어긋나

(즉괴 卽乖), 상(相), 모양에 집착해 머무는 것이니, 일찍이 이와 같은 相에 집착해 머문 한마음 본체 본래

바탕, 부처, 법체(法體), 법신(法身)은 없었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成佛)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곧 

점차로 부처, 법신, 법체,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니 점차로 이루어진 부처(佛)도 없다. 

다만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 중생, 법체, 법신만 즉각 깨달으면 다시 더 얻을 아무 法도 없으니 

이것이 곧 부처, 중생, 법체, 법신,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이다. 


부처와 중생과 한마음은 분리불가하게 삼위일체로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기에 이 셋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부처와 중생 한마음은 마치 텅~비어 空한 허공(虛空)과 같아서 더럽히거나 무너뜨릴 수 없으며, 찢어질 

수도 없고, 해가 온 세상을 비춰 환하게 밝음이 온 천하에 퍼지더라도 허공(虛空)은 일찍이 밝은 일이 없고, 

해가 져서 어둠이 천하를 덮더라도 허공(虛空)은 어두운 적이 없다. 밝음과 어둠이 뒤바뀌더라도 텅~빈

허공(虛空)의 성질(性質), 즉 虛空性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부처(佛)와 중생(衆生)과 마음도 이와 같다. 


부처(佛)를 생각할 때 청정한 광명과 자재 해탈의 거룩한 모양으로 보고, 중생(衆生) 볼 때 때가 묻고 

어리숙하고 生과 死의 윤회의 고통에 시달리는 혼탁한 존재로 생각한다면, 무량한 세월을 지내도록 

부처, 법신, 법체,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을 찾더라도 끝내 그것을 찾는 도(道)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相)에 집착해서 相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 법신, 법체, 중생,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에서는 다시 털끝만한 어떤 것이라도 얻을 것이 없으니 마음이 곧 부처인 까닭이다. 

요즘 道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 법신, 법체, 근본성품은 깨닫지 못하고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 법신, 법체, 근본성품에서 분별하는 생각을 일으켜 한마음 바깥에서 한마음

본체 본래바탕, 부처, 법신, 법체, 도, 근본성품을 찾거나 구하며 相에 집착하여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공부나 수행은 모두가 그릇된 방법이요 보리도(菩提道), 깨달음의 길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