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성의 정토행자 편지
불로장생 아닌 왕생인 까닭은
불로장생 버린 자리에 왕생의 길 열린다
‘나무아미타불’에는 산스크리트(범어)와 한문이 합성되어 있습니다. ‘나무(namo)’는 경배, 경의, 예배, 귀의를 의미하는 말이고 ‘아미타불’은 경배, 경의, 예배, 귀의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의 이름입니다. ‘아미타불’ 에는 ‘아미타’라는 말과 ‘불’이 합성되어 있습니다. ‘아미타(amita)’는 한량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미타불’은 한량없는 부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무량수불 선호하는 이유는 오래살고 싶은 욕망서 비롯
담란스님 진정한 무량수 찾고 정토종으로 개종 신앙에 매진
담란스님이 발견한 무량수불은 육신이 아닌 법신의 진리일 뿐
죽는다거나 산다거나 하는 분별의 미혹 벗고 아미타불께 귀의할때 왕생
무엇이 무량하다는 말 한량이 없다는 말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애당초 산스크리트에서부터 두 가지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는 ‘아미타유스’인데 ‘무량수(無量壽)’라고 옮겼습니다. ‘아유스(āyus)’는 생명, 목숨, 장수라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의 원어를 ‘아미타유스’로 본다면 아미타불을 뜻으로 옮길 때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아미타아바’입니다. ‘아바(ābhā)’는 빛, 光明이라는 뜻입니다. 원어를 ‘아미타아바’라고 생각한다면 그 뜻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미타불의 두 가지 의역 즉 무량수불과 무량광불 중에서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 압도적으로 널리 선호(選好)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정근)을 시작할 때 “나무 서방대교주 무량수여래불 나무아미타불…”이라 하고 있습니다. 부석사의 법당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만 그 이름이 무량수전(無量壽殿)입니다. 추사 김정호가 쓴 글씨 중에 ‘무량수각(無量壽閣)’도 있습니다.
그 반면에 무량광불(無量光佛)을 말하는 사례는 대단히 드뭅니다. 영화 ‘굿바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원작이 ‘납관부일기(문학예술사)’입니다. 그 책의 앞부분에서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란 스님은 무량수불 보다는 무량광불을 많이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진시방무애광여래(南無盡十方無碍光如來)”라는 명호도 많이 썼습니다. 사실 이 말은 천친의 ‘정토론’에 나오는 말입니다. 무애광(無碍光)은 곧 무량광(無量光)을 의미합니다.
자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무량광불(無量光佛) 보다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더 선호한 것일까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에서입니다. 장수의 꿈을 무량수라는 말에 의탁했다고 할까요 아니면 장수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량수라는 말이 깊이 다가왔다고 할까요? 그 어느 경우이든 장수하고 싶은 꿈, 이 꿈을 사람들은 갖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태도는 그대로 긍정하고 말아도 좋을까요? 정말 정토신앙은 그런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오래 살고 싶고 또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을 투영(投影)해서 극락을 만들고 그 극락에 가서 더 오래 살고 싶은 것, 그것이 정토신앙일까요?
이 질문을 생각할 때 담란 스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담란 스님에 대해서는 앞의 편지들에서도 언급하였습니다만 공(空) 사상을 깊이 연구하신 분입니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 큰 병에 걸렸습니다. 많은 고통을 당하신 것 같습니다. 병을 한 고비 넘기고 나서 아마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무엇보다도 몸이 건강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몸이 없다면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이며 법은 어떻게 깨닫겠는가, 정당한 자기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담란 스님이 선택한 방법론입니다. 불로장생을 주장하는 도교(道敎)의 수행법을 배워서 몸을 튼튼히 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쩌면 불교는 몸 그 자체보다는 마음을 중시하기 때문에, 불로장생에 초점이 있는 도교의 수행법(養生法) 보다는 약점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담란 스님은 도교의 유명한 도사(道士)를 찾아 갔습니다. 불로장생의 비법을 배우고 그 비결을 적은 책 한 권을 얻었습니다. “이제 되었다”라고 하면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수련만 잘 한다면 불로장생할 수 있겠다고 자신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는 중에 보리류지(菩提流支) 스님을 만납니다. 이 스님은 법명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인도(印度)에서 오신 스님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셔서는 많은 산스크리트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담란 스님은 이 보리류지 스님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보리류지 스님은 담란 스님께 경전 한 권을 주십니다. 한 번 읽어보라고 주신 것이겠지요. 그 경전이 바로 ‘무량수경(無量壽經)’입니다.
“아! 무량수? 여기에 무량수의 비결이 담겨있다고?” 이렇게 놀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병으로 인한 고통, 불로장생의 꿈을 갖고 있었기에 ‘무량수’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경전에 느낌이 왔을 것입니다. 곧 ‘무량수경’을 정독하고서는 도교의 도사로부터 얻은 불로장생의 비법을 적은 책을 불태워 버립니다. 진정한 무량수의 비결을 무량수경 속에서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담란 스님은 그로부터 정토종(淨土宗)에 귀의합니다. 정토종으로 개종을 했다고 해도 좋겠지요. 정토신앙을 깊이 해가면서, 중국 정토교만이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는 업적을 남깁니다. 바로 인도의 천친이 저술한 ‘淨土論(=往生論)’에 대한 주석을 지은 것입니다. 그것이 ‘정토론주’(=왕생론주)라는 책입니다. 이렇게 주석을 하게 된 ‘정토론’을 중국에서 번역해 주신 분이 바로 담란 스님에게 무량수경을 전해준 보리류지 스님이라고 하니 기연(機緣)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담란 스님이 불로장생(不老長生) 대신 발견한 무량수(無量壽)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담란 스님의 책 ‘정토론주’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담란 스님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법신(法身)의 관점으로 이해합니다. 아미타불이 法身이기에 무량수(無量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미타불이 法身이 아니라 色身이라면, 색신으로서의 아미타불은 바로 空할 수밖에 없습니다. 空하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은 무상(無常)입니다. 무상에서 어찌 변하지 않는 법신, 아미타불, 무량수불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도교의 불로장생은 바로 이 육신(肉身)을 그대로 갖고서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육신을 그대로 갖고서 오래 살고 안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현재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100살까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보면, 중국의 조주(趙州) 스님이나 허운(虛雲) 스님은 120년을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120년을 살고 나서는 육신은 죽습니다.
불로장생은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더라도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담란 스님이 발견한 무량수(무량수), 무량수불(무량수불)은 육신으로서의 무량수 무량수불이 아닙니다. 무량수 무량수불의 法身은 곧 眞理입니다. 法입니다. 이 무량수, 무량수불, 법신, 진리, 법은 원래로 존재합니다.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불생 불멸의 그러한 法身을 아는 것, 깨닫는 것이 그것이 곧 무량수를 하는 것이라 본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불로장생을 구하는 한 우리에게는 극락왕생은 불가능합니다. 불로장생을 바라는 꿈, 어리석은 희망을 버리는 곳에서 왕생은 열리는 줄 알겠습니다. 그래서 죽는다거나 산다거나 하는 분별을 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바로 그 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왕생의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죽는다거나 산다고 하는 분별을 하는 생각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정토신앙일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의 사후는 어떻게 될까요? 왕생하나요, 육신을 다시 받나요? 이런 물음이 그래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지(自然法爾자연법이) 않을까요?”, 신란 스님 대답입니다. 그 뒤의 일은 저절로 극락에 왕생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 전망입니다. 왕생하고자 하는 분별심 조차 내버리게 될 때 아미타불께 모든 것을 맡겨버릴 때 왕생이 가능하리라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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