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

장백산-1 2018. 5. 12. 07:31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


앎이란 '알 수 있는 대상' 바깥에 '아는 자'가 따로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분리 분별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알았다 혹은 파악했다고 하면, 전체(全切)가 아니라 부분(部分)을 알았거나 파악한 것입니다.


아는 것, 앎은 분리 분별이 전제된 것입니다. 분리 분별되어 있기에 앎에 대한 인력이 작용합니다. 앎은 소유의 대상이고 얻는 대상이며, 구하는 마음의 결과물입니다. 앎 그것은 찾은 어떤 것이며,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앎은 늘 주와 객(主와 客)을 따로 따로 분리 분별해서 두고 있는 것입니다.


도(道)를 알려고 하는 의도는 도(道)를 두고 도(道)를 알려고 드는 주체의 소유로 만들려는 심리가 발동하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을 다루고 조작하고 유지시키려는 아상(我相)의 습관적이고 치밀하며 교묘한 형태입니다. 안다는 것은 분리 분별된 꿈속 세상으로 떨어지는 일이며, 꿈 속에서 깨달음을 이루려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삶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안다는 것은 분리 분별(分別)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나', 아상(我相)를 그대로 두는 것이어서 분별 망상 번뇌와 갈등이 끊이지 않게됩니다.


깨달음은 '나'를 따로 두지 않습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알려는 나'와 '알려는 대상'이 본래 분리 분별되어 있지 않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인정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따로 없다는 자각(自覺)은 엄청 난 변화를 몰고 옵니다. 이런 자각은 다른 사람이나, 바깥의 대상을 생각할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시작점부터 사라졌으니, 시작에서 비롯되는 거리감, 길, 공간, 시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일대 혁신을 불러 일으킵니다. 


진리를 구하겠는 마음이 사라지고 진리를 찾겠다는 마음 작용이 멈춥니다. 알려는 마음이 동력을 잃어버리지만, 까마득하지도 않습니다. '알 수 없음'이 실재(實在)이고, '알 수 없음'이 생생하고, '알 수 없음'이 살아 움직입니다. '알 수 없음'이, '오직 모를뿐'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아는 모든 것이 '알 수 없음'이며, 알지 못하는 것 또한 '알 수 없음'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이것임을 깨닫습니다.


-릴라님의 <아줌마와 禪>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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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이란 '존재', 즉 궁극의 실재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는 인식(unknown knowledge)'을 가지는 것이다. 반야(般若)의 직관이란 바로 내가 궁극의 실재 그 자체이며, 절대적인 인식자이고, 어떤 종류의 근심과 두려움에서도 벗어난 자라는 느낌을 단적으로 깨닫는 것을 말한다. 선은 어떠한 당위도 넘어서는 무위(無爲)와 무사(無思)라는 토대 위에 서 있다. 선은 '존재(存在)'이다.


인간은 자신과 사실 사이에 어떠한 개념이나 마음의 조작도 나타나지 않는 순간에만 비로소 '올바른 견해(正見)'에 도달할 수 있다. 선(禪)에서는 즉, 공성(空性)에서는 존재(有)와 비존재(無), 삶과 죽음, 진리와 비진리, 시간과 무시간도 넘어선다. 선(禪), 즉 공성(空性)은 이분화(二分化)를 야기하는 자아의식의 모태를 철저하게 깨부수어버려서 사람들을 일체 사물의 '시작없는 시작'인 불이(不二)의 영역으로 즉각 인도한다. 선(禪)에서 초월하고자 하는 것은 유한과 무한이라는 이분법(二分法)인 것이다. 선(禪)이란 존재(有)와 비존재(無)의 초형이상학적 변증법이다.


<서양철학과 禪>은 철학과 선, 하이데거와 선, 비트겐슈타인과 선을 주제로 여러 편의 논문을 모아 놓은 책이다. 선(禪)이란 언어를 넘어선 존재의 초월성, 즉 궁극의 실재, 즉 존재의 본질을 찾는 것이다. 존재의 차원에서 깨달음의 진정한 내용을 찾는 선(禪)은 개념(槪念), 관념(觀念) 초월하여 직관적으로만 알 수 있다고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서양 실존주의 철학과 언어 분석철학과 관련성이 크다. 따라서 이 책은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 시적 언어, 침묵 또는 일상언어로도 궁극의 실재를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선불교 선사들의 선어록을 비교하면서 존재라는 심연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개념을 기조로 연주된 다양한 변주곡의 역사였으며, 칸트에 이르러 서양의 철학사상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여, 실체적인 '존재'의 형이상학은 주체적인 '당위'의 형이상학으로 전환된다. 칸트 이후 존재와 당위라는 양극 사이의 긴장 속에서 니체와 하이데거는 존재[有]와 당위와는 또 다른 '무(Nichts 無)'에 대해서 원리로서 접근하여, 존재[有]와 당위와 무(無)를 인간 존재의 세가지 근본범주에 넣게 되었다. 절대화한 무(無)는 상대적인 유(有)와 무(無) 양자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자신 속에 포괄한다. 여기에서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무(無)라는 관점에서 불교의 공(空) 개념과의 접접이 이루어진다.


"존재자의 존재는 애당초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에 근거하여 무(無) 속으로 들어가 있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고, 바로 여기에 초월의 가장 심오한 유한성이 놓여 있다." 하이데거의 말이다. 


존재는 존재자의 속성이 아니다. 무(Nichts無)가 바로 존재이다. 무(無)는 존재자에 대한 타자로서 존재의 장막인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무(無)는 존재에로 나가는 통로인 것이다. 무(無)는 '아니라는 것' 부정보다 한층 근원적인 것이다. 무(無)가 분명 존재의 은폐이기는 하지만, 결코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자신이 가려져 있을 때 조차도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선악' 이외에도 완급, 강약, 대소, 냉온 등등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각각 그것의 반대되는 것, 즉 분리 분별된 개념(槪念)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던 소크라테스나, "유무(有無)가 서로를 낳는다[有無相生]"고 했던 노자와 다르지 않다. 존재와 무(無)의 공속성(共屬性)이다. 존재가 사유에 대해 우선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선(禪)을 이해하는데는 John V. Canfield의 <비트겐슈타인과 선의 언어관>이라는 논문이 도움이 된다. 언어는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이해도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사유가 하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사유를 모두 벗어버릴 때 남게 되는 것, 그리고 사유가 필요치 않을 때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흐름이고, 어떤 것을 '그냥' 하는 유형화된 양식들이며, 관행이다. 이것이 도(道)의 드러남, 선(禪)이다.


이러한 삶의 흐름을 실현시키고, 또한 그것대로 살아가는 것을 선(禪)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선(禪)에서 중요한 것은 사유를 벗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참다운 근본성품을 직접 대면하는 데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은 사유와 이해 간의 관계에 대한 불교의 이론과 일맥상통하여,언어가 비트겐슈타인이 묘사한 대로 기능을 한다면 선사의 방식처럼 사유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과 양립 가능하다고 본다.


"나는 다른 사람이 아프다는 것에 대해서는 '믿을' 수 있을 뿐이지만, 내가 아프다면 그것을 '알' 수가 있다." "나는 아무런 교리가 없고 따라서 아무런 말도 필요가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있다. 종교의 본질은 말할 수 있는 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실재, 존재의 궁극적 본질, 다시 말해서 깨달은 사람이 살아가는 인간적 삶의 본질일 것이다. 사유 분별과 禪과의 괴리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