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생(生)이고 무엇이 사(死)이냐 / 숭산스님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무엇이 생하고 또 무엇이 죽는단 말인가. 서산대사의 게송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니 장부가 하는 일을 모두 마쳤도다." 장부가 하는 일이란 바로 생사일대
사(生死一大事, 나고 죽는 한 가지 큰 일)을 이른다.
내가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푸른 눈의 미국인과 법회를 여는 것도 육대조사나 지구상 5억 불교 식구가
한결같이 바라고 행하고 깨닫고자 하는 것이 생사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生)이고 무엇이 사(死)인가. 내 몸을 두고 나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몸이 분명 나는 아
니다. 다만 몸을 나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면 먼저 나를 밝히자. 몸을 끌고 다니는 그 무엇, 그것이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이냐.
생종하처래 (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 (死向何處去)
생이 시작해 온 곳이 있다면 죽어 간 곳도 있을 터, 생이란 허공에 떠가는 구름이 생겨난 것과 같다 했다.
사란 허공애 떠가는 구름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무시무종으로 불생불멸로 항상 뚜렷이
드러나 이는 한 물건, 그것은 허공에 뜬구름과는 다르다. 그 한 물건은 맑고 깨끗해서 생과 사를 따르지
않는 특성이 있다. 사람들이 다만 없는 생과 사를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과 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원래 생겨남(生)도 없고 멸함[滅(死 죽음)]도 없다. 해와 달과 별도 인간이 해 달 별이라고 이름을 지어
그렇게 불러서 해 달 별이 있는 것이지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모든 물건의 이름조차도 없다. 무릇 삼라
만상의 이름을 생각으로 지었으니까 삼라만상의 이름을 지은 그 생각이 끊어진다면 중생이나 부처나 이
주장자나 똑같은 것이다.
생각을 내지(일으키지) 마라. 나라는 물건을 쥐꼬리만큼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차문래 막존지해
(以此門來 莫存知解) 하라. 생각을 일크기 전의 세상으로 들어왔으면 더 이상 생각을 쓰는 지식이나
해석등 분별하는 마음을 쓰지 말고 내려놓아라.
서양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인식의
확립이 선(禪)이요, 그 선(禪)의 이치를 깨달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곧 불교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명제와는 정반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텅~빈거냐. 생각을 하지 않는
자체란 생각 이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우주삼라만상, 모든 사물의 본성(本性)이 생각 이 전의 세계
여기에 있다.
"티끌 하나하나가 묘체(妙體)를 지니고 있으며 마땅히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한 조사의 말과 같이
삼라만상의 이름은 제각각이나 삼라만상의 본성(本性)은 똑같다. 즉 생각이 텅~비어 있다는 것은 대우주,
삼라만상과 동일체(同一體, 같은 한 몸)이 된 것을 이르는 것이다. 생각을 일으키면 대우주와 동일체가 안
되지만 생각을 끊으면 된다.
그러면 생각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느냐. '이뭣고'라는 화두, 즉 생각이 꽉 막히고 커다란 의심덩어리를 끌고
들어갈 때에는 벌써 하나의 원점(原點)에 이른 것이다. 생각이 끊어진 그 자리다. 이 원점을 사람들이 마음
이니, 부처니, 진여, 여래, 불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사실은 원점은 이름이 없는 것이다. 대우
주와 하나, 동일체가 되었을 따름이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입을 안 열고 어떻게 대
답할 것인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했다.
영산회상에 앉아 천이백 대중을 향해 설법을 하는 대신 꽃 한송이를 들어 보인 석가모니부처님에게 미소
를 지어 보였다는 가섭존자처럼 말이다. 내가 지금 주장자를 들어 보인 것과 이천여 년 전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것은 같은가 다른가?
삼라만상은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개도 불성을 지녔습니까?" 하고 조주 스님이 그의
스승에게 물었을 때 '무(無)'라고 대답했다는데, 이때의 '무(無)'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서구문화는
곧 기독교문화이다. 이 기독교문화 속에서 서양의 모든 사상과 주의가 다 나왔다. 이른바 하나님과의
계약(契約)에 의존해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으며, 그 본령인 인본주의사상
은 공산주의라는 사회혁명과 자본주의라는 산업혁명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두 갈래의 커다란 사회변천이
가져다준 것은 인간의 기계화와 이로 인한 윤리도덕의 타락이다.
천륜이 끊어진 상태에서 극도의 개인주의와 영리주의가 판치는 물질문명은 공해라는 새로운 큰 적을 만들
어냈으며 또한 인간성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지금 미국의 젊은이들은, 입으로 세계 평화를 부르짖지만 뒷전
으로는 가공할 핵무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기성세대를 향한 불신이 깊다.
대자연과 함께 살자는 명제 아래 탈취당한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고 나선 젊은이들 사이에 동양의 선사상
(禪思想)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선(禪)은 더 이상 불교의 전용물이 아니다. 종교를
초월해서 누구나 다 반성하고 '생각을 쉰다'는 소승선(小乘禪)의 경지까지는 들어간 셈이다.
미국에서만도 그 인구가 3백만에 법사(조계종)가 70명에 이른다. '모든 법이 다 오직 마음이 지어낸 그림자
이다.' 시공(시간과 공간)조차 고전 물리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며 동서남북이 다를뿐더러 백 사람의 무지개 또한 각각 다른 이유이다.
'아유필유(我有必有) 아멸필멸(我滅必滅)'이다. 내가 없어지면 우주와 나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몸속에 매달렸던 무거운 떡돌로 꽉 막힌 그 자리에서 문득 깨달았다는 대법안(大法眼)의 일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이다'를 금과옥조로 삼던
그 제자 현축도 "부처란 무엇인가?" 하고 다시 묻는 스승의 깨우침에 무릎을 꿇었다지 않던가.
모든 사물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곧 불교요 선의 본지이다. 나를 내 마음 속에 끌고 다니
지 말고 환경에 집착하지 마라. 그래야 올바른 생각을 하게 되는 법,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대립하고 갈등하고 싸움질을 하게 되고 정상화가 안 되는 것이다.
견해를 버리면, 즉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생각, 환상을 없애면 대자연의 파괴는 안 하게 되며
세계 평화도 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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