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廻光返照)
회광반조 할 수 있으면, 즉 밖으로 비추는 의식의 빛의 비춤을 안으로 돌이켜 삼독심을 비추어 또렷이 볼 수 있다면, 탐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게 분별하는 마음(삼독심)의 근본성품(本性)이 곧 불성(佛性)이고, 탐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게 분별하는 마음, 즉 삼독심 외에 다시 다른 불성(佛性)은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54,55)
바로 눈앞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본다면 탐진치 삼독심이라고 이제 중생은 탐진치 삼독심을 가지고 분별 번뇌 망상에 시달리며 살고 있고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은 불성, 즉 탐진치 삼독심이 완전히 소멸된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탐진치 삼독심을 없애버려야만 부처님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겠지만, 탐내는 마음 자체, 또 성내는 마음 그 자체, 어리석게 분별하는 그 마음 자체가 전부 다 불성(佛性) 아닌 것이 없다. 비유를 많이 드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보면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나면 파도는 바다인가요? 바다가 아닌가요? 파도도 똑같이 바다인 것처럼 내면에서 올라오는 탐진치 삼독심 그대로가 바로 불성(佛性)이다.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리가 불성의 바타입니다. 이 탐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게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거든요. 사람들이 삶을 살면 인생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내가 쥐겠다는 마음 무언가를 얻고 싶다하는 마음이 올라오다가, 그게 진실에서 실체이고 아주 영원한 진실이라면 무언가 하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원히 그것 하나만을 좋아해야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럴 땐 이걸 좋아하다가 또 좀 가지고 놀다가 마음에 안 들면 버리고 또 다른 것을 취하려고 하고 인연 따라서 계속해서 새로운 무언가 다른 것들을 취하려고 하거든요. 이처럼 탐심 분심 치심이 인연 따라 잠깐잠깐 올라왔다 사라지고, 그 삼독심의 대상도 끊임없이 바뀌어갑니다. 삼독심의 대상도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현상, 즉 생멸법(生滅法)일 뿐이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그 탐심 분심 치심이라는 삼독심이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사라졌느냐. 분명히 탐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게 분별하는 마음 산독심이 일어났다가 사라졌거든요.
그러면 탐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게 분별하는 마음, 삼독심이 올라오고 사라지는 삼독심의 당처(當處), 즉 본래자리가 있다. 삼독심의 배경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탐진치 삼독심을 없애려고, 애쓰고 애써서 삼독심 없애는 것에 성공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지금까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탐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게 분별하는 마음, 삼독심이 일어나면 스스로 막 자책감에 빠지고 야 내가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인가? 화내는 마음이 많은 사람인가? 어리석게 분별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인가? 그렇게 자문하면서 나는 수행자답지 못하구나 하고 아주 괴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그랬단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게 분별하는 마음, 삼독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삼독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인생을 살아가기가 쉽지가 않지요.
탐욕심이 없으면 뭔가 열심히 돈을 벌려고 해도 돈 벌려면 열심히 일을 해야 되거든요. 열심히 일을 하는 이유는 뭔가 얻고자하는 게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그냥 평범한 탐진치 삼독심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마음들이에요. 삼독심 그 자체에 대해서 무조건 다 잘못되었다. 싹 다 버려야 된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탐진치 삼독심에 가려서 사람들이 자신에 내재되어 있는 본래의 불성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선(禪)의 방법은 탐진치 삼독심을 일상생활에서는 될 수 있으면 일으키지 않고
또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났을 때 삼독심의 본질이, 삼독심의 당체(當體)가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뭐 이런 마음공부를 통해서 조금 이제 덜 일으키는 것을 당연히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나 이 탐진치 삼독심을 문제 삼으면서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보다도 불성(佛性)이 무엇인지, 본래 진리(眞理)가 무엇인지, 내 마음 분별심의 본바탕이 무엇인지에 관해 직지인심(直指人心)해주는 것을 통해서, 곧바로 한 생각 몰록 탐진치 삼독심에서 벗어나는 그런 어떤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이제 이 선(禪)의 공부입니다.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깨달음을 얻고 났을 때 탐진치 삼독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날 땐 그대로 일어나지만 삼독심에 끌려 가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삼독심이 더 이상 내 인생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뿐이지요.
그러니까 깨달음을 터득했다고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다 해서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을 수 있고 각자가 예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찾아서 먹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또 화나면 화를 내기도 하지요. 화나면 화를 냅니다. 또한 살면서 분별을 할 일이 필요할 땐 분별을 합니다. 저는 도인은 화를 내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저희 은사스님 딱 보고서 어쨌든 저는 그 분이 도인이라고 생각해서 찾아갔는데 화를 너무 잘 내셔서(웃음)~~~.
법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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