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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없음이 곧 마음이다(無心卽心)

장백산-1 2018. 6. 27. 15:34

마음이 없음이 곧 마음이다(無心卽心)


“스님께서 마음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면 죄도 없고 복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중생들은 육도에 윤회하면서 삶과 죽음이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선어록과 마음공부 p45)


마음이 없으면 뭐 죄를 짓는 것도 없고 복을 짓는 것도 없어야 되는 거 아니냐? 그 얘기지요. 마음으로 죄도 짓고 복도 짓고 하는 것이니까. 그랬더니, 답한다.


“중생은 허망하게 헤매면서 마음 없는 가운데 헛되이 마음을 만들어 내고, 여러 가지 업을 지으며 헛되이 집착하여 있다고 여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46)


중생은 허망하게 생각하면서 막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온갖 중생심을 일으켜서 번뇌 망상을 일으켜서 그게 진짜로 있다고 착각하고, 또 부처의 마음이라는 걸 만들어내서 그것이 진짜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진짜로 있다고 여기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진짜로 있다고 여기면 그건 나라는 것도 진짜로 있고 세상도 진짜로 있다고 여겨서


내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진짜로 가져야 된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집착을 하게 되고 소유하게 되고 이런 어떤 집착심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걸 갖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업을 짓고 업을 지으면서 헛되이 집착하면서 있다고 여긴다, 라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육도윤회(六道輪廻)하며 삶과 죽음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있다고 여기면서 그걸 막 열심히 가지려고 하고 이러다가 이게 과도하게 집착심이 심해졌을 때 이게 이제 하나의 지옥이 되는 것이지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이런 어떤 육도윤회(六道輪廻)라는 환상(幻想)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사람이 탐욕심(貪慾心)을 막 일으키고 있을 때 그게 바로 아귀인 것이거든요. 또 성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진심 嗔心) 막 일으켰을 때 그게 바로 아수라가 돼버립니다 그 순간이. 그리고 어리석은 분별을 하는 마음(치심 痴心)을 일으켰을 때 그게 바로 축생이 되는 것이지요. 착한 마음을 일으킬 때 그게 천상이고, 나쁜 마음을 일으키면 그게 바로 지옥이고. 모든 마음이 하나로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인간계(人間世界)입니다. 그래서 이 탐진치 삼독과 선, 악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육도라는 것을 가상(假想)으로 이 교의(敎義:가르침, 교리)의 할당에서 지어낸 것일 뿐입니다.


진짜로 육도(六道,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라는 세계가 실제로 있어서 사람들이 죽고 나면 육도 중에 어디로 갈까? 그∼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 마음이 뭘 탐내면 그게 아귀이고, 진심(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게 바로 아수라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까닭에 육도윤회(六道輪廻)라는 것이 진짜로 있다고 여기면서 탄생과 죽음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비유하면 사람이 어둠 속에서 나무 등걸을 보고 귀신으로 여기고,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여겨서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46)


육도가 진짜 있는 것이 아닌데 진짜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 두려움과 괴로움을 느낀다 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물질이건, 사물이건, 사람이건, 심리현상이건, 육체이건  진짜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노후를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중에 늙어서 병이 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한다. 미래, 노후, 죽음, 병 그런 거 진짜로 있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이고 그게 있다고 한들 그게 반드시 괴로움인 것은 아니고 그냥 그것이 오면 그것을 느껴주면 됩니다. 경험해주면 됩니다. 병이 오면 병을 경험해주면 됩니다. 죽음이 오면 죽음을 경험해주면 됩니다. 늙음이 오면 늙음을 경험해주면 됩니다. 그것들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 의식으로 엄청난 뭔가로 막 만들어놨기 때문에 죽음이 그렇게 두렵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에요. 항상 죽음은 동시에 태어남 이거든요. 태어남은 동시에 죽음이고요.


어떤 의식이 죽을 때도 의식이 하나 죽으면 또 다른 의식이 깨어나거든요. 분별 번뇌 망상이라는 의식이 죽게 되면 분별 번뇌 망상이 없어졌을 때 그 자리에 무분별심(無分別心), 본래마음이라는 텅~빈 바탕이 드러나는 것처럼 죽음이라는 것도 우리가 그렇게 막 가슴 아파하면서 서러워하면서 눈물 흘리면서 그럴만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죽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늙음이고 병듦이고 죽음입니다. 죽음은 태어나는 것과 똑같이 축복받을 만한 일입니다, 늙어감, 병들어가는 것, 죽음 그것이 문제라는 것에서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일 뿐이지. 왜 늙는 게 문제인가요? 왜 쭈글쭈글해 지는 게 문제인가요? 쭈글쭈글해지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썩어가는 아름다움? 그래서 어떤 교수님이 썩는 것은 아름답다. 섞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이 썩지 않을 때 엄청난 문제가 된다. 그래서 그냥 자연스러운 당연한 일을 우리는 괴롭다 두렵다, 라고 생각하고 해석하면서 문제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중생의 허망한 집착심이 이와 같아서 마음이 없는 속에서 마음이 있다고 허망하게 집착하여 여러 가지 업을 지으니 육도에 윤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중생이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선(禪)을 통해 마음이 없음(無心)을 깨달으면 모든 업장(業障)이 전부 남김없이 소멸하고 환상에 불과할 뿐인 생사윤회가 곧장 끊어진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46)


선지식의 이런 가르침을 받아 선을 통해서 마음 없음을 깨닫는다. 이 말은 곧 마음 있음을 깨닫는다, 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본래마음을 깨닫는다, 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본래마음은 마음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 없다, 라고도 표현을 하고 마음 있다, 라고도 표현해도 됩니다. 마음이 없다는 무심(無心)이라는 말이 곧 마음, 심(心)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무심(無心)이라는 측면으로 얘기하고 심이라는 측면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선에서는 두 가지를 다 쓰지요. 마음을 확인해라. 마음을 깨달아라. 그러나 마음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또 이렇게 얘기한다, 라는 것이지요. 마음이라는데 집착할 바가 없음을, 마음이 없음을 얘기합니다. 마음이 없음(無心)이 곧 마음(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결단코 마음은 없다(無心). 다만 사람들이 마음이 있다고 여기고 없는 그 마음에 헛되이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있을 뿐이다. 만약 마음이 없음을 깨닫는다면 번뇌와 보리(菩提:깨달음), 생사(生死)와 열반(涅槃)도 없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분별을 하는 마음(분별심)이 있는 사람에게만 생과 사라는 분별이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46)


생사라는 분별이 없는 사람에게만 불생불멸. 생멸이라는 분별이 없는 사람에게만 불생불멸이라는 것도 연기되어져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연기법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중생이라는 허망한 분별하는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만 부처라는 또 다른 분별하는 생각도 생겨나는 겁니다. 마치 이것을 (죽비) 이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지요. 긴 것도 짧은 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어떤 다른 비교대상과 함께 비교를 하면서 이것은 길다, 라고 얘기되어지는 것일 뿐이잖아요. 이것은 길거나 짧지 않지만 다른 것과 비교되면서 이거는 길다, 라고 얘기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것이 길다, 라고 얘기되려면 반드시 저것이 있어야 됩니다. 저것이 없으면 이것은 길다, 라고 얘기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긴 것이 있으려면 짧은 것이 있어야지만 긴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짧은 것이 없으면 긴 것도 없어요.


그래서 짧은 것이 있음으로 긴 것이 있고 긴 것이 있음으로 짧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짧은 것이 사라지면 긴 것도 사라지지요. 긴 것이 사라지면 짧은 것도 사라집니다. 이건 연기적인 관계입니다. 이 연기적인 관계는 하나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하나로서 지금 하나가 같이 없어지고 하나가 생기면 다른 하나가 또 생기잖아요. 그러니까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하나. 내가 있으려면 내가 아닌 다른 많은 것들이 있어야지만 내가 생겨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나 혼자 독자적으로 생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 아닌 것들을 통해서만 나일 수 있습니다. 나 아닌 것들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고 내가 있으려면 나 아닌 것들이 생겨나야 됩니다. 이처럼 연기되어진 모든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관계거든요.


그래서 번뇌가 있음으로 번뇌가 해결되는 깨달음도 생기는 겁니다. 중생이 있음으로 중생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도 생겨나는 것이고. 그러니 번뇌가 없으면 부처도 없습니다. 연기되어진 하나의 상대가 없으면 상대할 것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이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전부다 마음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것도 생겨난 그런 어떤 인연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보리와 열반을 얻을 수 없다면,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이 전부 보리를 얻은 것은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선어록과 마음공부 p46)


우리도 질문할 법한 그런 어떤 수준에 딱 맞는 질문들을 하지요. 다만 세속제와 진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다만 세속제(世俗諦:세간의 진리)의 문자로써 말하는 것일 뿐, 진제(眞諦:출세간의 진리)에서는 진실로 얻을 것이 티끌먼지 하나도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46)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을 이제 두 가지로 얘기를 하는데요. 세속제와 승의제라고 해서 진리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중생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리를 말로 표현을 해요. 그 말로 표현된 진리를 세속제라고 부릅니다. 경전의 모든 문자는 전부다 세속제에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방편일 뿐입니다.


이 세속제는 세간의 진리이기 때문에 진짜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세속제는 방편(方便)이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고 나서는 버려야만 할 것입니다. 참 진리는 진제라고 해서 출세간의 참된 진실. 이 진제를 제일의제(제일가는 진리)라고도 한다고 했고요. 이 진제라는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말로 표현해서 진제라고 이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 진제에서는 진실로 얻을 바가 아무것도 없으나, 이 세속제에서 문자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문자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이 문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문자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건 우리의 이해가 갈 수 있는 범주가 아닙니다. 이해범주를 넘어서는, 그러니까 보리와 열반은 없다, 라고 하면 중생들은 분별로 판단하니까 없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보리와 열반은 있다 이러면 있구나,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말은 이해가 가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이해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에 하나만 이해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자리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길다 짧다, 라고 하려면 이렇게 대상이 있어야지만 이게 긴지 짧은지 알 수 있지만 불성(佛性)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 굳이 표현을 한다면 우주법계 전체가 불성인 것이지요, 이 마음이라는 것은 전체고. 마음이 뭐지 하는 그 놈이기 마음이기 때문에.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부처가 부처를 지금 찾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은 내가 나를 확인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분별로써 대상화시켜서 알 수가 없습니다. 분별된 것은 전부다 대상화된 거니까. 대상화된 건 전부다 틀린 거지요. 있느냐 없느냐, 라고 하려면 있거나 없는 대상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건 대상이 아니니까,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출세간의 진제라는 표현을 씁니다.


⟦유마경⟧에서도 ‘보리는 몸으로도 얻을 수 없고,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다’ 고 했고, ⟦금강경⟧에서는 ‘얻을 수 있는 티끌만한 조그마한 법도 없다’ 고 했다. 모든 부처님은 다만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었다.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음을 알라(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선어록과 마음공부 p46.47)


유마경에서도 보리는 깨달음이지요. 깨달음은 몸으로도 얻을 수 없고,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다고 했고, 금강경에서는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법도 없다고 했다. 모든 부처님은 다만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었습니다. 굳이 표현을 하면 얻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은 거다.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음을 알라. 마음이 있을 때 이 세상 모든 게 이제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고 마음이 없으면 모든 게 다 사라지는 겁니다. 이 중생심도 마찬가지예요. 중생심이 일어날 때 모든 삼라만물 만상이 일어나는 것이지. 그 마음이 사라지면 만물이 갑자기 일시에 사라져버립니다. 만법유식(萬法唯識),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고 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환상 환영이지 내 마음을 떠나 별도의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세상 모든 것은 없습니다.


놀랍게도 진짜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꿈꾸는 것처럼 꿈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게 다 진짜 같지만 꿈을 깨고 보면 그게 전부 꿈이었구나, 라고 깨닫는 것처럼. 지금 사람들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분별 망상이라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이 이게 다 진짜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꿈을 깨고 본 성품.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해서 쓰고 있는 온 우주법계 전체가 함께 공유해서 쓰고 있는 이 바탕 자리, 이 근본성품 자리를 확인하고 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꿈이구나. 있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아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삶에 대한 아무런 무게감이 없게되고 집착심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삶에 그 어떤 근심걱정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삶이 완전히 가벼워지니까.


내 삶 자체가 바로 나인데, 삶 거기에 무슨 고민 걱정 근심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자각몽을 꾸듯이 꿈을 꾸고 있지만 그 꿈이 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안 채 꿈을 꾸고 있는 거니까. 남들은 꿈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귀신이 나와서 막 무서워해도 그 꿈꾸는 자는 귀신도 나고 그 귀신을 무서워하는 자도 나 인줄 아니까. 거기 전혀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만약 스님 말씀처럼 마음이 전혀 없다면 나무나 돌과 같은 것이 아닌지요?”(선어록과 마음공부 p47)


마음이 없다고 하니까 그럼 나는 나무나 돌하고 나하고 뭔 다른 점이 있느냐? 이렇게 묻는거지요.


“나의 마음 없는 이 마음은 나무와 돌과는 같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비유하면 마치 하늘북(天鼓)과 같아서 비록 마음은 없으나 마음은 저절로 여러 가지 묘한 법(法)을 나타내어 중생들을 교화한다. 또 마음은 여의주(如意珠)와 같아서 비록 마음은 없으나 마음은 저절로 여러 가지 변화된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처럼 비록 마음은 없으나 마음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잘 깨닫고 참된 반야(般若:지혜)를 갖추어 삼신(三身 : 법신, 보신, 화신)이 자재하게 반응하고 작용함에 거리낌이 없다.”(선어록과 마음공부 p47)


나의 마음 없는 이 마음은 나무와 돌과는 같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비유하면 마치 하늘북(天鼓)과 같아서 비록 마음은 없으나 저절로 여러 가지 묘한 법을 내어 중생들을 교화한다. 참 하늘북이라고 해서 하늘에 따로 북이 있는 것은 아닌데 북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지요. 그처럼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은 인연에 순응하여 저절로 수많은 묘한 법을 만들어낸다.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드니까. 아, 바다라는 뭔가가 있구나. 그래서 내가 바다를 확인해야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바다는 하나를 가리키는 비유일 뿐이지 바다라는 뭔가는 없다,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허공(虛空)을 비유로 듭니다. 허공 속에 모든 것들이 등장하고 퇴장하고 끊임없이 반복하지만, 그 허공 속에서 모든 것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퇴장하지만 허공은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막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 생각이 진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인연 따라 잠깐 왔다가 잠깐 가는 것일 뿐이지. 그래서 본래 마음은 없지만 마음이 없는 그 마음 가운데서 수많은 우주삼라만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겁니다.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의 배경 위에서 생멸하는 무수한 것들이 등장을 하고 퇴장을 하는 겁니다. 생멸하는 그것은 진짜 있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그러나 중생심의 눈으로 봤을 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진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마음은 또 여의주(如意珠)와 같아서 비록 마음이 없는 것이나 마음은 저절로 여러 가지 변화된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 여의주 같은 경우를 보면 깨끗하고 투명해서 그 자체의 색깔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의 뭐가 여의주 안에 막 그려져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여의주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텅~비어 있습니다, 그냥 텅~비어 깨끗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다가가 얼굴을 이렇게 들이대면 거기에 내 얼굴이 나오잖아요. 동그란 여의주. 하나의 거울과 같은 여의주를 이래 보면, 사람이 보면 사람이 나오고, 이 죽비를 갖다 대면 이 죽비가 나오고, 뭐든지 삼라만상을 갖다 들이대면 거기 삼라만상이 탁 드러나잖아요. 그런데 여의주는 그 어떤 모양이 아닌데도 모든 모양이 비춰지면 그 모양을 다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이것처럼 이 마음자리는 본래 그 어떤 틀도 없고, 그 어떤 모양도 없고, 그 어떤 색깔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우주삼라만상을 다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모든 만법이 다 오는 걸 다 드러낸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아무것도 없고,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지요. 마치 거울과도 같이. 이처럼 비록 마음은 없으나 마음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잘 깨닫고 참된 반야(般若:지혜)를 갖추어 삼신(三身)이 자재하게 반응하고 작용함에 거리낌이 없다.


이 말은 마음은 없으나 법의 실상은 깨닫는 마음이 또 있습니다. 또 참된 반야를 갖추는 마음도 있습니다. 또 삼신이 자재한 마음도 있다는 말이지요.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세 부처 이것은 방편으로 설한 것이지만 그것이 있다, 라고도 할 수 있고 반야라는 것이 있다. 법의 실상이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라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 없다, 라고도 할 수 있다. 자재하게 대응해서 반응할 수 있다.


“이제 마음속에서 어떤 수행을 할까요?” “다만 모든 일 위에서 마음이 없음을 깨달으면 될 뿐, 다시 다른 수행을 할 필요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47)


마음이 없음(無心)이 곧 마음(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될 뿐, 즉 마음을 깨달으면 될 뿐, 이 소리에요. 즉 병만 나으면 될 뿐. 따로 건강을 찾을 필요는 없다. 병만 나으면 될 뿐. 그래서 병 없음을 깨달으면 될 뿐. 아 본래 병이 없었구나. 본래 병이 나을 자리라는 것도 따로 없구나. 병이 있는 사람에게만 병이 낫는 자리가 필요하잖아요. 병이 없는 자리, 목표가 있잖아요. 병이 낫기를 목표로 잡잖아요. 사람들은 병이 낫기를 목표로 잡지 않는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병이 나아야 된다, 라는 목표가 사라져버리지요. 그 목표가 사라져버리면 되는 겁니다. 병이 있는 사람만 그 목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없음은 마음 없음을 깨달으면 될 뿐. 그게 똑같은 얘기지요. 본래 마음이라는 것이 없구나. 마음이 없음(無心)이 곧 마음(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을, 마음이 없음을 마음이라고 방편으로 표현한 겁니다. 마음이라는 실체가 없잖아요. 마음이라는 실체가 없는데 실체가 있는 마음인것 처럼 표현해놓고 실체가 없는 마음에 집착할까봐 마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마음이라고 얘기 한 것은 곧 마음이 없음과 다르지 않는 마음이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고 다음부터 오성론을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수 (이어서 1시간 47분 녹취)


법상스님, 하이얀 마음님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