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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천진자연 역무인연수조

장백산-1 2018. 7. 23. 14:20

선어록과 마음공부 - 하이얀 마음 녹취(원광사아카데미 2018.4.27)-3|법상스님 법문


불성천진자연(佛性天眞自然) 불성은 타고난 그대로여서 자연스러우니,

역무인연수조(亦無因緣修造) 닦아서 만들 까닭이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70, 71)


우인탐착열반(愚人貪著涅槃)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을 탐하고 집착하지만,

지자생사실제(智者生死實際)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생사(生死)가 곧 실상(實相)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71)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생사가 곧바로 실상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생사가 곧 실상이기 때문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부처님이 죽는 것, 부처님의 죽음을 열반이라고 하는 이유가 모든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는 모든 번뇌의 불길이 완전히 꺼져버린 그런 최고의 어떤 깨달음이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생사가 곧 열반이기 때문에 생사가 곧 실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을 이제 잠시 돌이켜보세요. 내가 지금 망상을 피워서 인생은 괴로워. 죽고 나면 얼마나 무서울까. 내가 늙으면 얼마나 힘들까. 나중에 병이 나면 내가 얼마나 괴로울까. 다음 생에 지옥가면 어쩌지? 그런 온갖 망상을 피우고 있지만 그런데 그런 온갖 망상 그건 그냥 허상일 뿐이야, 허상.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결처럼, 물결은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즉 다시 말해 우리들 모두는 내가 깨닫지 못했다할지라도 사실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깨닫지 못했어도 잠깐 물결이 지가 새로운 뭔가, 바다를 벗어난 독자적인 무언가 인걸로 착각하는 것뿐이지만, 결국 바다로 갈 거거든요. 그걸 불교에서는 귀의(歸依 돌아가 의지한다)한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삼귀의(三歸依), 즉 본래 부처(佛)로 돌아갑니다. 본래 법(法)으로 돌아갑니다. 본래 승(僧)으로 돌아간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방심하셔도 좋다는 것이지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여기 이대로 아무 문제가 없다. 사실은 지금 여기 이대로 완전한 부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내가 허망한 망상을 피우는 것뿐입니다, 허망한 망상 허망한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져요,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망상에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 애써서 망상을 막 만들려고 애쓰거나 막 없애려고 애쓰거나 그러지 않고, 그냥 텅 내버려두고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망상만 부리지 않으면 되거든요. 어떻게 하면 망상만 부리지 않게 되느냐? 망상은 없애려고 애써서 망상이 없어지데 되는 게 아니라, 망상 그 자체가 실상이니까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그냥 개의치 않는 거예요. 그냥 망상을 내버려두는 겁니다. 


괴로운 일이라는 망상이 벌어져도 개의치 않는 거예요. 내버려두는 겁니다. 즐거운 일이라는 망상이  일어나도 막 거기 사로잡히고 호들갑떨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겁니다. 내버려두는 거지요. 그래서 뭐 어떤 스님은 뭐 내비도콘서트 이런 걸 한다 그러더라고요.(웃음) 냅두라는 거거든요, 그냥. 삶을, 삶을 이대로 내버려둬라 이겁니다. 삶이 이렇게 일어나도록 내버려둬라. Let it be, 그냥 나둬라. 왜냐하면 그냥 냅두면 되는데 우리는 냅두지 못하고 계속 뭔가를 잡고 쥐고 만들어내고 계획하고 구상하고 지금은 부족하다고 여겨서 뭔가가 있어야 될 거라고 생각하고 죽음이라는 놀라운 환상을 비참함과 절망과 어두움이라고 해석하는 겁니다. 영화에서도 그런 영화가 몇 개 있던데요. 제목은 잊어버렸는데 죽음이라는 그 놀라운 어떤 아름다움? 그런 것들을 이렇게 영화화 한 이런 것들도 몇 개 있어요. 그걸 일부러 한번 봤는데 그렇지, 정말 저렇겠지. 정말 저렇게 놀라운 장엄함이고 저런 놀라운 아름다움이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어떤 이런 귀의의 아름다움이겠지. 이런 느낌을 받았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한 겁니다. 한 번도 죽어보지 않았잖아요.


죽으면 괴롭다, 라고 겉에 껍데기만 보고 상(相)에 빠져서 죽고나서 난 꼼짝 못하니까 땅 밑으로 돌아가니까 괴로울 거라고 상상하는 것이지요. 한 번도 그렇게 해보지 않고서, 전부다 생각이 만든 환상입니다. 지난 학기 다른 종교 신도님이 오셔가지고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더니, 어떤 목사님의 말이 신(神)은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다, 라는 얘기를 듣고 당신이 너무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생각이 신(神)만을 만든들어 낸것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들, 이 생사법(생멸법)이라는 모든 것을 전부 다 사람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겁니다. 내 마음에서 조작해서 만들어 낸 겁니다, 전부 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야. 세상은 괴로운 곳이야. 이 세상은 어떤 곳이고 내 인생은 어때 이런 거 전부다 생각이 만들어 낸 환상(幻想)입니다. 사람들은 환상의 세계를 사는 겁니다. 본래는 실상이에요, 실상.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그 어떤 좋다 나쁘다, 라고 해석될 수 없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실상. 그걸 있는 그대로라고 하니까 중생들이 싫어하잖아요. 좋은 거라고 얘기해야 좋아하잖아요. 불교는 좋은 거야, 이래야지 좋아하지. 불교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야, 이러면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서 방편으로 또 장엄함이다. 극락이다. 뭐 이런 식의 또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좋음이다. 뭐 이러면서 얘기를 하는 것이지요. 자연 그대로입니다. 있는 그대로 아무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생각으로 문제를 만들어냈을 뿐이지, 아무문제가 없습니다. 죽음도 아무문제가 아닌데 병드는 게 문제겠습니까? 병드는 것도 아무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몸에 어떤 장애가 있어요. 그런데 장애는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 음악이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분야에 일반인들은 감히 범접하기도 힘들만큼의 놀라운 능력이 있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또 이런 부분은 너무 못하는데 다른 부분은 너무 잘할 수도 있고요. 우리가 하는 말로 그럼, 그렇지. 다 잘하는 사람은 없어.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물론 다 잘하는 사람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다 잘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겠고,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방편으로 설명을 굳이 한다면, 전생에 그 사람은 너무나도 다 못했기 때문에 이 생애는 균형을 맞추느라고 잘하게 태어났을 수도 있겠지요. 전생에 너무 잘 생긴 사람은, 전생 얘기는 다 방편입니다. 전생에 잘생긴 사람은 지가 잘났으니까 사람들을 아 못생겼다, 그렇게 얕잡아 보는 마음을 연습하니까 다음 생에 못생기게 태어난다는 거지요. 못생기게 태어난 사람은 아휴 저 사람은 저렇게 잘생기고 저렇게 아름다운데 하고 이렇게 동경을 했고, 그래서 다음 생에 예쁘고 잘 생기게 태어난다는 거지요. 지금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다 샘샘이지, 그걸 가지고 뭘 이러니저러니 괴로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잘생겼다 못생겼다 이것도 우리가 집단적으로 만든 공업이잖아요.


아프리카에선 뭐 뚱뚱한 사람일수록 더 미인이라고 그런다잖아요. 알 수 없는 겁니다. 이게 진짜 좋은 건지 진짜 나쁜 건지. 내가 진짜 능력이 있는 건지 능력 없는 건지. 옛날에는 노래 잘하면 그냥 딴따라라고 했거나 뭐 그냥 제일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만 노래하는 이런 거 시켰잖아요. 지금은 막 최고의,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운동부 이러면 아주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데ㄷ다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운동하나 제대로 하면 정말 최고의 스타가 되거든요. 모든 것이 이시대가 만들었거나, 내가 만들었거나. 그래서 내가 만들면 내가 만든 거에 빠져가지고 내 스스로 괴로워하고요. 시대가 만든 거에는 시대 전체가 거기 빠져서 괴로워합니다. 그걸 공업이라고 불러요. 사업과 공업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업에 스스로 집단적으로 다 같이 빠져버리는 거지요. 그게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거지요. 진짜 뭐 일부다처제국가는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살고 일처다부제국가는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데리고 사는 게 자연스러울 수도 있거든요. 또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서 그런 게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어떤 것을 진짜라고 할 거냐, 어떤 걸 진리라고 할 거냐, 답이 있습니까? 답이 없지요. 종교에서는 불교든 기독교 천주교든 어디든. 불교에서 규정을 정해놓은 게 있는데 인간이 편의로 만든 겁니다. 예를 들어 술은 먹으면 안 된다. 그런 법칙이 100% 정해졌어요. 다른 종교성직자가 술을 먹는 건 상관없잖아요. 그런데 결혼은 안 돼. 그런데 또 어떤 종교성직자는 술은 죽어도 안 되는데 결혼은 돼. 그런데 같은 성서를 가진 성직자를 얘기한다는 거지요.


불교도 어느 나라에서는 결혼해도 되고 어느 나라는 또 결혼해도 안 되고 또 어느 나라에서는 이러이러한 계율이 아주 중요하고 어느 나라에서는 이런 계율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제가 남방불교 갔을 때요. 길거리에서 스님들이 담배를 피우고 계셔서 제가 너무 충격을 받았거든요.(웃음) 그런데 지금은 스님들을 담배 못 피게 했답니다, 얼마 전에. 그때만 해도 그런 게 없었다, 그래요. 부처님 계율에 담배 피우지 말라는 게 없대요.(웃음) 그런데 막 담배를 피우세요. 그런데 그뿐 아니라 태국의 어떤 절에 갔을 때 다 같이 탁발을 나간다고 해서 같이 나갔어요. 길거리에서 운전을 하고 가던 분들이 막 차를 세워놓고 스님들을 위해서 이렇게 음식을 준비했다가 주시는데 고기를 막 갖다 넣어주시는 거예요.


절에 돌아왔더니 혹시나 탁발을 좀 적게 받은 분들이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 또 한국에서 스님들이 왔다고 하니까 특별히 음식준비를 더 해서 부족한 사람은 더 갖다 먹어라, 하니까 이게 다 고기에요, 절에서. 부처님당시에는 소승불교에서는 고기 먹지마라, 이런 게 없었지요. 주는 대로 먹는 거였지요. 신도님들이 주는 대로 먹는 거예요. 특히나 더운 나라라서 뭐 고기 같은 거나 카레 같은 걸 막 해가지고 먹고 이러잖아요. 그냥 고기 먹고 이러는 게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냥 그렇게 정한 거지요. 고기 먹지 않는 것으로 하자, 라고 정했으면 그게 법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공업이 있는 집단적인 사람은 고기 먹는 스님은 아주 나쁜 놈인 걸로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냥 하나의 문화로 정해놓은 겁니다.


부처님 당시에 출재가라는 것을 공부하는 사람을 돕기 위한 지극히 간단한 방편으로 정해놨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너무나 권위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그럼 그것도 우리가 크게 사로잡힐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것을 절대라고 해서 사로잡힐 것이 불교에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만이 절대적이야. 그건 거 없습니다. 본래무일물, 본래 텅~비어서 아무것도 없는데


그 어떤 틀도 전부다 깨뜨립니다. 그 어떤 모든 틀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불교인데 불교적인 틀, 불교적인 어떤 윤리도덕, 불교적인 무언가를 새로 세운다면 그거는 불교를 무너뜨리는 일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지나오다 보니까 수많은 문화, 우리나라만의 불교문화, 다른 나라만의 불교문화, 다 나라만의 어떤 문화가 생성돼서 지금은 그 문화에서의 불교적인 문화가 불교인걸로 착각을 하는 겁니다. 불교의 본질은 사라져버렸어요. 상당히 많이 사라지고 그 문화만 불교인걸로 생각해요. 문화는 인간이 이해 가능한 범주다보니까. 아까 말한 것처럼 수행 같은 거 기도방법 수행방법 머리로 이해 가능한 범주의 것들이 2500년에서 1000년을 넘게 내려오면서 더 견고하게 자리 잡아서 우리 머리를 꽉 막고 있는 겁니다.


(설법대를 두드리며) 이 소리를 내면서 스님들이 이게 바로 부처다. 이런 식의 선의 법문의 핵심만을 막 그냥 하는 스님들 얘기를 멋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불교는 완전 미친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복적인 기도나 기복적인 수행방법, 이것만이 불교라고 여긴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것은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얘기하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옛날에 제가 어떤 책에서 보니까. 명상서적 같은 거 보다보니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위험하다. 이 세상이 보기에는 상당히 위험하다. 뭐 이런 표현을 썼던데,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이 수행에 대한 비판은요. 제가 이제 여러분이니까 그냥 막 이렇게 얘기하지만, 이러면서 할거 다 하지만(웃음) 쉽게 얘기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이것을 되게 위험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요. 이런 얘기가 불교를 아주 내치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수행에 있어서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기복적인 것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 기복에 대해서 탁 내려쳐주면 발끈하는 사람이 있을 것처럼. 그래서 선이라는 것이 지금은 많이 안 읽히잖아요. 선의 어록들이 많이 안 읽힙니다. 이게 쉽게 이해해서 풀기가 쉽지만은 않아요. 그래서 이 선에 나오는 것들을 문자 그대로 하나하나 막, 다 이해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분별일 수 있습니다.


중생여불무수(衆生與佛無殊) 중생과 부처는 다름이 없으며,

대지불이어우(大智不異於愚)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네.  (선어록과 마음공부 p71)


둘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냥 중생이 있으니까 중생에 대비해서 부처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가정해서 만들어 낸 것이지요. 어리석은 자가 있으니까 어리석음이 없어진 상태를 지혜라고 그냥 만들어놓은 것이지요. 어리석음이 없으면 지혜도 없습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습니다. 긴 게 없으면 짧은 것도 없고 긴 게 있어야지만 비교해야지만 짧다고 얘기할 수가 있는 것처럼. 긴 것과 짧은 것이 둘이 아닌 하나, 동시생 동시멸입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음과 부처는 동시생 동시멸이에요. 어리석음이 없으면 부처도 없고 부처가 없으면 어리석음도 없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어리석음도 없다.


하수향외구보(何須向外求寶) 어찌하여 밖에서 보물을 찾으려 하는가?

신전자유명주(身田自有明珠) 자신 속에 본래 밝은 보배구슬 있는데  (선어록과 마음공부 p71)


저기 안에 본래 보배구슬이 있다. 이 깨달음을 보배구슬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뭐 여의주라고도 하고, 마음거울이라고도 하고.


정도사도불이(正道邪道不二) 바른 길과 삿된 길은 둘이 아니고,

료지범성동도(了知凡聖同途) 범부와 성인이 같은 길을 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71)


끊임없이 불이법(不二法)을 말하고 있어요, 불이법, 둘이 아니다. 바른길과 삿된 길, 둘이 아니다. 정법과 사법이 둘이 아니다. 되게 위험한 얘기지요. 그냥 일반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하면 아주 위험한 얘기입니다. 나쁜 짓 막 해놓고 정법과 사법은 둘이 아니야, 이렇게 얘기한다면 그런 사람에겐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없어요. 선, 악이 본래 없어, 이런 얘기를 성격 나쁜 사람들한테 할 수가 없습니다. 나쁜 짓 해놓고 그것을 자기를 어떤 정당화하는 합리화하는 그런 걸로 잘못 쓸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불법에서 어찌 보면 옛날 사람들이 근기가 낮다보니까 계속해서 방편만 자꾸 얘기했을 수도 있어요. 본질을 얘기할 만한 근기가 되는 사람이 없으니까. 괜히 그런 얘기했다가 위험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쉬우니까.


실제로 선을 공부하는 스님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때때로 욕 얻어먹고 아주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그런 경우들이 더러더러 있었다고 그래요. 저도 이렇게 공부하러 딱 온 사람들이 아니면, 오히려 수행자들일수록 더 이 공부에 대한 얘기를 잘 안 합니다. 마음을 저에게 활짝 열고 있는 사람에게 얘기했을 때는 난 이해는 안 가지만 저분이 저렇게 얘기한다면 정말 그럴까? 하고 되게 충격을 받으면서 공부할만한 그런 사람에겐 얘기해 줄 수 있는데. 그냥 같은 이런 사람들한테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하면 이게 좀 쉽지 않다는 걸 느끼기도 해요. 그래서 입을 딱 막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큰스님들도 이게 근기가 안 되는 사람에게 법을 함부로 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냥 침묵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법의 얘기를 안 해요. 그냥 일상생활의 삶을 살지.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는 그냥 우리랑 똑같아 보이지요. 그런데 법을 들을 만한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법은 진짜 어찌 보면 참 위험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이렇게 삿된 법과 바른 길이 둘이 아니다, 라고 하니까. 본래 한바탕인데 물결이 거칠게 치나 작게 부드럽게 치나 똑같은 물결일 뿐이고 똑같이 허망한 것일 뿐이거든요. 선, 악이라는 게 삿되다 바르다, 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정해진 게 어디 있어요. 정해진 거 없습니다. 여기 절에 오는 사람은 다 바르고 옆에(교회) 가면 다 삿되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데 실질적으로 삶이 맨 날 자식들 괴롭히고 남편하고 맨 날 싸우고 옆집 엄마들하고 맨 날 싸우고 맨 날 나쁜 짓을 한다. 베풀지도 않고 한다.


그런 사람은 삿된 거고 교회 성당 다니는데 항상 자비를 사랑을 실천하고 옆에 사람들 돕고 항상 지혜롭고 자비롭고, 그 사람은 전법을 실천하고 있는 겁니다. 전법의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깨달음은 그래서 이법계 사법계라고 하잖아요. 이법계(理法界), 깨달음의 법계에서는 여러분이 우위일 수 있어요. 어쨌든 깨달음에 발심을 했다는 그 자체가. 그런데 이 사법계(事法界)에서는 훨씬 더 우위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사법계라는 현상세계라는 이 법계. 이 세계의 법칙에서는 당연히 인과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깨달은 사람이라도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행단보도를 건너면 병원에 가거나 감옥에 갈 수도 있고 법을 지키지 않으면 감옥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지요.


사법계에서는 나쁜 짓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 것이고 착한 일을 하면 착한 결과가 있는 것이고. 남들을 도우면 내가 도움을 받는 것이고 많이 베풀면 내가 베풂을 받는 것이지요. 사법계는 명확하게 이 현상세계법칙은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이법계라는 이 깨달음의 세계는 이 사법계와는 좀 다른 공부에요. 우리는 쉽게 말해서 세상 안에서의 공부를 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출세간의 공부를 하기 위해서 모여 공부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까 현상세계법칙에서 봤을 때는 현상세계이치에서 봤을 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너무 위험할 수 있지요. 정법과 사법이 둘이 아니다. 이런 말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래서 지금 이 출세간의 공부, 선, 악을 넘어서는 공부, 그 공부에서만 이것이 가능한 얘기입니다. 현실에서까지 이런 얘기를 막 써먹으면 안 돼요. 범부와 성인이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미오본무차별(迷悟本無差別) 미혹과 깨달음이 본래 차별이 없고,


열반생사일여(涅槃生死一如) 열반과 생사(生死)가 하나로써 같구나.  (선어록과 마음공부 p71, 72)


생사와 열반이 하나의 바탕. 하나의 배경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동시생 동시멸하는 것으로써 서로 둘이 아니다.


무유일법가득(無有一法可得) 얻을 수 있는 법(法)은 하나도 없으니,


소연자입무여(翛然自入無餘) 자재하게 저절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네.


                (선어록과 마음공부 p72)


얻을 수 있는 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법을 얻으려고 하잖아요. 법은 얻는 게 아닙니다. 법은 그냥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내가 아, 여기가 서울이구나. 여기가 원광사구나, 라는 사실을 몰랐다가 아 여기가 원광사였어, 하고 알면 되는 것이지. 원광사에 앉아 있으면서 원광사를 갈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위해서 부처를 얻을 필요는 없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교리 모든 사상 모든 철학은 그것을 얻는 게 아닙니다. 얻을 것이 없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리입니다. 무아(無我), 나라는 게 없어. 무상(無常), 항상 하는 게 없어. 공(空), 아무것도 없다니까. 이게 공이에요. 아무것도 없다. 무분별(無分別), 분별할 게 없다. 무집착(無執着), 집착할 게 없다. 비실체성, 실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부다 연기법, 즉 인연 따라 잠깐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지는 거지, 실체적인 거는 아무것도 없다. 중도, 그러니까 이거 실체라고 생각해서 여기에 집착하거나 저걸 밀어내거나 그럴 필요 없다. 있는 그대로 허용하며 사는 것이 바른 삶이다. 모든 불교교리는 이와 같이 전부다 뭔가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다, 라는 걸 설명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어졌을 때 공으로 돌아갔을 때 본래무일물. 본래 얻을 것이 없다, 라는 사실에 탁 계합하게 되었을 때 본래 완전하게 구족되어 있었던 이미 언제나 완전하게 구족되어 있었던 나의 본성? 본래모습을 되찾는 것이지요. 본래의 나를 되찾는 겁니다. 되찾는 것도 아니지요. 확인하는 것이지요. 몰랐다가 알게 되는, 깨닫게 되는. 그래서 얻을 수 있는 법은 하나도 없으니. 그래서 특정한 것을 이것만은 절대적으로 끝까지 쥐어야 될 거야, 라고 얘기하고 주장하는 것은 전법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른 조직과 불교는 크게 싸울 일이 없습니다. 내가 내세우는 게 있어야, 내가 내세우는 게 내가 옳다, 라고 하는 게 저 사람은 틀렸다고 하게 되니까,둘이 싸워야 되잖아요. 그런데 내세우는 게 없는데 싸울 일이 뭐가 있습니까? 허공과도 같이 텅 비었는데. 싸울 일이 없는 것이지요. 무쟁삼매(無諍三昧)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재하게 저절로 무여열반에 들어가는 것이지, 저절로. 본래 자재하기 때문에 본래 저절로 무여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체무비불사(一切無非佛事) 모든 것은 부처님의 일(佛事) 아님이 없는데,


하수섭념좌선(何須攝念坐禪) 어찌 생각을 거두어 좌선(坐禪)해야 하겠는가? (선어록과 마음공부 p75)


좌선을 하는 거는 좌선을 통해 부처가 되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본래부처 아닌 게 없는데 모든 것이 다 불사라는 것이지요. 절을 짓는 것만 불사가 아니라 계속 길을 걷는 것, 숨을 쉬는 것, 음식을 먹는 것, 모든 것이 불사 아님이 없다. 부처님이 하는 일이 아님이 없다. 내가 바로 부처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손가락 까닥하는 것조차 전부다 불사라는 것이지요. 보는 것이 그대로 불사인데 부처님의 불사는 절을 짓는 거를 절을 완공시키는 것, 부처님 계시는 곳을 완공시키는 걸 불사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좌선을 해가지고 불사를 완공할 필요가 없다. 좌선을 해서 부처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좌선이나 수행을 통해서 생각을 막 거두고 생각을 통제하고 그래서 부처를 만들어야 되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부처는 생각이 없는 사람일 겁니다. 아무생각도 없이 아무 판단도 없이. 그러니까 부처님도 생각이 다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번뇌 망상이 다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옛날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스님들, 우리 은사스님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하는 것과 똑같은 고민들을 합니다. 그게 되게 그 당시 20대 때 너무 당황스러운 거예요.


아니 저 깨달은 분이라는 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깨달은 분은 완전히 자유로워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생각이 아예 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일어났다가 거기에 금방금방 쉽게, 쉽게 이렇게 사라져가는 것이지. 거기에 과도하게 크게 매어있지 않은 것이지. 예를 들면 그런 식이지요. 아 어젯밤에 잠을 못 잤다고. 자리가 바뀌니까 잠을 못 잤다고 이러면서 아∼ 베개가 좀 그래서 그런가? 저는 이것도 이해를 못했어요. 부처가 아무데서나 자면 되지.(웃음) 잠을 못 자는 거는 불면증 있는 사람이나 못자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했다는 말이지요.(웃음) 그런 일이 당연히 있을 수 있지요. 몸이 망가지면 몸이 망가지는 것에 대한 타격을 그대로 받습니다.


다만 과도하게 거기 스트레스 받거나 이런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몸이 늙어가는 것, 늙어가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아플 때 아픈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허용해주는 것이지. 그게 아예 안 일어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문염훤구정(聲聞厭諠求靜) 성문은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구하니,

유여기맥구병(猶如棄麪求餠) 마치 밀가루를 버리고 빵을 구하는 것과 같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75)


빵은 본래 밀가루인데 조작하면 사람에 따라 백 가지로 달라진다. 아까 제가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여기는 또 다른 중생세계와 부처. 세간과 출세간의 삶과 피안을 다르게 비유하는 선의 독특한 방식인데, 그게 바로 밀가루와 빵의 비유입니다. 빵집에 가서 밀가루반죽을 해요. 밀가루를 반죽하는데 a라는 사람은 꽈배기를 만들고 b라는 사람은 뭐 이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들고 뭐 사람모양으로도 만들고 온갖 다양한 모양으로 빵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만들어진 빵의 모양은 다 달라요. 다 다른데, 결국은 전부다 밀가루잖아요. 원자재는 원천소스는 다 밀가루, 밀가루일 뿐이다. 밀가루를 가지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모습을 만드는 것이지요.밀가루 본래 하나인데. 


본래 밀가루인데 그것이 빵으로써 그저 이렇게 드러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본래의 밀가루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빵에 관심을 가지다보니까 빵의 모습을 보고 어느 게 더 맛있을까? 하고 그 빵에만 사로잡혀 있는 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이 삼라만상 모든 사람들 모든 존재 모든 일들이 살아가는 수많은 모습, 모습들 그것은 하나의 빵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의 파도와 같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본래 한바탕 본래하나의 밀가루 본래하나의 자리에서 잠깐 인연 따라 왔다가 가는, 여러분이라는 실체가 없습니다. 외모를 보고 나는 이렇게 예쁘고 이렇게 건강하고 능력 있고, 그거는 내가 하는 망상이지. 그냥 내가 하는 망상일 뿐인 겁니다. 실체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밀가루 하나의 바다 하나의 불성 하나의 자성 하나의 본래면목 그래서 일진법계, 하나의 진실한 법계밖에 없다. 뭐 일불승, 하나의 부처밖에 없다. 제가 어릴 때 우리 집 안방에는 가화만사성 거실에는 일심, 이렇게 쓰여 있는 액자가 걸려있어서요. 어느 날 아버님이 그걸 사와서 우리가족은 이제 한마음 한뜻으로 일심(一心)이 우리 집 가훈이다.


아버지하고 친한 사람들의 집을 몇 군데 갔을 때 보니까 똑같은 일심이 다 걸려있더라고요.(웃음) 누가 아마 이걸 해가지고 이렇게 나눠주었던지 아니면 뭐 같이 샀던지, 그러신 것 같아요. 집집마다 가보면 일심, 되게 많이 걸려있거든요. 우리는 어릴 때 아∼ 우리가족은 한마음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화합하고 살아야 된다. 이렇게만 배웠습니다. 그 일심이 바로 원효스님이 얘기한 일심이고요. 일심 그게 바로 불교의 핵심. 한마음, 마음 하나를 얘기한 겁니다. 본래마음, 자성, 불성, 본래부처, 기독교 천주교 신자들 집에 가도 다 일심이 붙어 있거든요. 다 하나의 부처,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신, 하나의 마음, 하나의 진리,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본래 밀가루인데 본래부처인데 조작하면 사람 따라 백가지로 나눠진다. 


사람들은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 이 사건 저 사건 좋은 일 나쁜 일 그냥 인연 따라 잠깐 왔다가는 것일 뿐인데, 연극을 하면서 이 연극 저 연극 다양하게 하는 것일 뿐인데, 연극하다말고 앞사람하고 진짜 화가 나가지고 멱살 잡고 진짜 싸우면 안 되잖아요, 연극이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형국이지요. 이 현실세계가 전부다 진짜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어∼ 이 세상에서 내 인생에 등장하는 내 삶 위에 등장하는 모든 괴로운 일들 즐거운 일들 지금까지 등장해왔던 것들 앞으로 등장할 것들, 그 모든 것들에 깊이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걸 진짜 나라고 여기고 진짜라고 여겨서 거기 사로잡힐 필요도 없고요. 그 모든 것에서 한 발 뒤로 나앉아서 언덕위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듯 정신적으로 한 발짝 뒤에 서서 이 삶이라는 뭔가가 사라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이렇게 끊임없이 파도치고 있는 것들을, 그냥 바라보는 관찰자? 목격자? 그냥 삶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좋다, 라고 해석해서 바라보거나 싫다, 라고 해석해서 그걸 밀쳐 내거나 그렇게 작용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그냥 그 속에서 이렇게 살아갈 뿐이지만 그거 하나하나에 막 일희일비하면서 움직일 필요는 없다.


우리들 모두는 이 세상 모든 일이 벌어지지만 모든 일이 벌어지는 그게 내가 아니라, 그것이 벌어지도록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모든 것들이 벌어지도록 하는 그 배경과도 같은 것이란 말이지요. 생각은 좋은 생각도 하다가 나쁜 생각도 하지만 생각은 어디에서 나와요. 생각이 나오는 자리를 보면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 같은 자리에서 나오고 같은 자리로 돌아갑니다. 생각이 잠깐 나왔다가 돌아가잖아요. 나쁜 생각도 나왔다가 없어지고 좋은 생각도 나왔다 없어졌어요. 어디로 없어졌습니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좋은 생각도 했다가 나쁜 생각도 했다가 좋은 일 때문에 막 즐거워했다가 나쁜 일 때문에 막 괴로워했다가 잠깐잠깐 좋은 연극, 싫은 연극을 할 뿐이에요. 잠깐잠깐 쓴 것뿐이지, 본래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아무 오염도 없고. 얼굴은 그대로 하나인데 화도 냈다가 웃었다가 하는 거지요. 


손은 그냥 아무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손이 손의 모양에 따라서 이렇게 하면 욕하는 것 같다가도 이렇게, 이렇게 하면 사랑한다고 하는 거 같다가 이렇게 하면 또 최고라고 하는 거 같다가 이렇게 하면 나쁜 것 같다가, 이 손은 아무상관이 없어요. 손은 얘가 뭘 해도 사실 아무상관이 없는데 사람들끼리 공업으로 이 모양은 어떤 모양으로 상징적으로 하자. 해놓고 이걸 이제 진짜라고 여기는 것뿐이지요. 이거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이 손에는 아무의미가 없어야지만, 요렇게 이렇게 해서 좋고 나쁜 의미를 개입시킬 뿐이지요. 


의미는 잠깐 쓸 수는 있어도 이 손이 이랬다고 해서 이 손이 썩 좋아졌다가 이렇게 하면 손이 썩거나 이러지 않습니다. 본래바탕에 아무상관이 없어요. 삶도 마찬가집니다. 나라는 존재도 불성 자성 본래면목 나라는 것의 실상, 본래자리 그 자리는 그 어떤 오염도 없고 그 어떤 흔적도 없다. 인연 따라 다양한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지만 좋고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만 거기에 우리의 본연에 본래면목의 자아는 전혀 오염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을 가지고 파도를 가지고 잠깐 오염되는 것처럼 느낄 뿐이지. 실제 우리가 그렇게 항상 쓰고 있잖아요. 생각이 없을 때 분별하지 않을 때는 우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화가 나가지고 막 그 말에 사로잡혀서 막 짜증내면서 그 사람을 욕하면서 막 이럴 때는, 중생으로 사로잡혀가지고 그 중생이 화난 게 나 인줄 알고 거기에만 빠져있는 것일 뿐이지. 그러다가 그것도 지나가거든요. 지나가면 다시 본래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따라가는 자리에 서지 말고 파도의 자리에 서지 말고 빵을 따라가지 말고 본래 밀가루, 본래의 바다, 본래의 텅 빈 자성, 본래의 허공과도 같은 그 자리에 딱 머물러있을 수 있다면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거 자체가 부처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 온 것은 인연 따라 시간이 가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 생긴 모든 것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걸 빨리 없애려고 애쓴다고 빨리 없어지지 않아요, 많은 경우. 그냥 내버려두는 겁니다.


그냥 내비둬버리면 그래서 모든 것들이 내 존재 위를 흘러오고 흘러가도록 통과해지나가도록 허용해주게 되면 모든 것은 저절로 본래자리를 찾아갑니다. 나의 인생은 아무 문제없이 그 모든 삶을 그냥 경험하는 자. 누리는 자가 되는 것이지요. 비교되지 않고.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수 (이어서 90분 40초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