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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즉시보리(煩惱卽是菩提) 번뇌가 곧 보리이다

장백산-1 2018. 7. 28. 20:50

오늘 날씨도 참 좋고 아주 좋은 날씨네요. 이제 내일부터 또 푹 쉬시는 연휴가 시작돼서 좋은 날이 아닌가 싶네요.


번뇌즉시보리(煩惱卽是菩提) 번뇌가 곧 보리이며,


무심즉시무경(無心卽是無境) 마음이 없으면 바로 경계도 없다.  


생사불이열반(生死不異涅槃) 생사는 곧 열반과 다르지 않고


탐진여염여영(貪瞋如焰如影)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은 불꽃 같고 그림자 같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75, 76)


이런 게송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번뇌가 곧 보리이다. 지금 여기의 우리는, 지금 여기의 나는 중생이고 분별번뇌 망상에 둘러쌓인 중생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의 나는 버리고 저쪽의 부처님으로 나아가야 한다. 저 피안으로 바라밀다해서 저 피안에 이르는 것. 그래서 지금 여기의 내가 아닌 부처로써의 나로 바꿔야 된다, 라고 이제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번뇌가 즉시 보리다, 즉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이라는 것이지요. 즉 나는 내가 중생이라고 여겼는데 내가 바로 번뇌를 일으키는 이 중생인 내가 바로 곧 부처다, 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야∼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고, 나는 부족하다고 분별을 하고 비교를 하고 판단을 합니다. 뭐가 중생이냐면 지금 여기의 나에 대해서 비교를 하고 분별을 하고 판단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지금 여기의 나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게 바로 부처고, 지금 여기의 나를 비교 분별 판단하면 중생이에요.


나를 좋게 판단해도 중생입니다. 나를 나쁘게 비교 분별 판단하면 당연히 중생이지만,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내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바깥에서 나를 괴롭힐만한 어떤 힘을 지닌 누군가가 있다거나 바깥 상황 때문에 내가 괴롭다거나, 보통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나는 인생이 아주 고달팠다. 내 인생은 곳곳마다 아주 힘든 늪에 빠졌었고 내 인생에서는 아주 안 좋은 일이 많았고 또 나에게 공격하는 사람도 많고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들도 많아서 내 인생은 평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바깥에 나를 휘두를만한 뭔가가 있다, 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내 바깥에 있는 외부상황에 휘둘리는 힘없는 존재로 스스로를 전락시켜 버리는 거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주변상황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주변상황이 괴로우면 나도 괴롭고 누가 칭찬하면 행복했다가 누가 나를 비난하면 괴로웠다가, 이렇게 외부상황에 끌려다니는 노예처럼 살았던 것이지요. 외부 상황에 휘둘리면서 외부 상황이 주인인줄 알고. 그런데 내가 돈이 많으면 행복하고 돈이 없으면 불행하고 남들이 나에게 잘해주면 행복하고 남들에게 대접받지 못하면 괴롭고. 자기 안에 힘을 주지 않고 내 바깥에 완전히 내 힘의 근원을 내 바깥으로 넘겨버리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주변상황에 내 힘의 근원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외부상황에 휘둘리는 노예처럼 그렇게 살아왔던 겁니다. 그러니까 외부상황이 행복해야지만 내 인생이 행복한 줄 알고 그랬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미래의 목표는 뭐냐 하면 좋은 외부상황으로 바꾸는 것에 올인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돈이 많은 외부상황, 남들이 나를 잘 대접해주는 외부상황, 돈이 많아야 남들이 나를 우습게보지 않는다는 외부상황, 이런 외부상황 저런 외부상황등의 수많은 외부상황들을 내가 스스로 추구해놓고 내가 희망했던 그런 외부상황들을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 딱 틀을 잡아놓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내 주변 외부상황을 바꿔야지만 내 인생이 행복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각자의 삶의 목적이 바깥을 향해서 외부상황을 바라보면서 바깥 조건을 바꾸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돈이 많은 상황, 더 여건이 좋아진 상황, 이런 내 외부적인 조건을 바꿈으로써 내 행복이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고 허망하게 믿는 것이지요. 신기하게도 40년 50년 60년 70년을 살면서 속아왔는데 아, 이 외부상황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구나 이 외부상황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수십 년 속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부상황이 좋은 것을 향해서 좇아가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자기 내면에 중심(中心)이 서있지 않은 것이지요. 자기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다보니까 끊임없이 바깥 외부상황을 향해서만 기웃 기웃거리는 것이지요.


안 좋게 표현을 하면 거지같이. 거지들은 바깥에서 뭔가 자꾸 구걸하고 다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바깥을 향해서 자꾸 행복을 구걸하러 다녀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외부로부터 얻었을 때 마치 거지가 어느 집에 가서 음식을 받으며 행복해하듯이 내 삶의 상황이 조금 좋아지면 되게 행복해하는 거예요. 내가 좀 지위가 높아지거나 돈을 벌면 되게 행복해합니다. 사회적 지위나 돈 그게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내가 비로소 외부환경을 바꿈으로써 행복을 얻었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생각이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러한 외부에서 뭔가를 가져와서 내가 행복하리라고 여기는 이 생각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는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도 바로 알 수 있지요. 내 외부에서 나에게로 왔던 그것들로 인해 지금 내가 행복한 그 모든 것들은 반드시 나를 두고 떠나갈 것이니까, 건강도 따나가고 몸도 언젠가 떠나갑니다. 내 자식 내 남편도 떠나가고요. 돈, 명예, 권력, 지위, 사회적 영향력, 건강 당연히 반드시 떠나갑니다 반드시. 우리도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떠나갈 것들에 집착하고 떠나가지 않을 거라고 믿거나 떠나가지 않았으면 하고 집착한단 말입니다. 반드시 떠나갈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데 떠나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있는 동안 행복을 누린다면 그 얼마나 유한하고 제한된 행복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잠깐의 행복을 달콤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들판에서 도망가다가 발이 동아줄에 매달려 우물 속에 있는 사람이 위에서는 코끼리가 공격하려고 하고 밑에서는 막 그냥 독사들이 우글우글 하고 동아줄이 막 이제 끊어지려고 하는데, 그래서 이제 곧 죽겠구나 머지않아 곧 죽겠구나 싶은데 오히려 꿀이 입위로 똑 떨어지면서 금방 죽겠구나 했던 생각은 잠시 잊어버리고 달콤한 꿀 맛에 취해서 즐거워한단 말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지금 그런 지경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지금 여건이 좋다고 지금 몸이 건강하고 지금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산다고 그 달콤함에 빠져서 곧 일어나게 될 일, 즉 늙고 병들고 죽는 일들 곧 일어나게 될 일을 망각한 채 그 달콤한 즐거움에 취해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근원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처럼 끊임없이 바깥을 향하고 외부환경에서 뭔가를 얻고자 하는 그걸 통해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계속 바깥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자기 안에 중심이 잡혀있지 못하고 항상 외부를 의식하며 살아가야 되고 외부상황을 두려워하고 걱정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이런 외부환경에 휘둘리는 삶, 나약한 중생의 삶,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석가모니부처님말씀은 내 마음속에 있는 이 중생의 마음, 분별하고 번뇌하고  망상하는 이 중생의 마음, 그 중생심, 분별심이 그대로 부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고 사람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금 자신의 상황을 부족하다고 판단하면서 부족함과 완전함을 나눠놓고 지금은 부족하고 돈이 얼마 정도 생기면 완전할거야, 라고 해서 바깥으로 돈을 향해 외부로 뛰쳐나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외부로 향하는 삶을 포기하고 포기한다고 해서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내가 부족하다 라는 생각 그 생각이 바로 분별심이거든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해서 판단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해서 지금 여기 이렇게 펼쳐지고 있는 삶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라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 그래서 좋다고 해석함으로써 우월감을 느끼거나 싫다고 해석함으로써 열등감을 느끼거나 위축되는 마음을 가지거나, 그런 생각이 바로 우리를 중생에 빠지게 하는 번뇌 망상이고 분별심이거든요. 그래서 지금 여기 이대로에 대해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지 않고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허용한다면 그게 바로 보리, 깨달음, 부처입니다


지금 여기 이대로에 대해서 끊임없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 등 둘로 나눠놓고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나는 이렇다. 나는 이런 게 부족하니까 더 얻어야 되고 더 가져야 되고 뭔가 끊임없이 밖을 향해 추구하는 삶을 살고 그러니까 끊임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생겨난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지니까. 잠깐 생겨났던 것이 곧 사라지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생겨나는 것에 끊임없이 계속해서  목을 매고 살아요. 생겨나는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데. 생겨났을 때 되게 행복하잖아요. 그러데 반드시 사라질 건데. 그래서 지금도 계속 사라지고 있는데. 그리고 이제 여기에도 보면 이렇게 둘러보면 젊으신 분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우리 절은 젊으신 분이 많으신 거예요.(웃음) 여러분들이 상당히 젊으신 분들이시지요. 


시골 절에 가보면요. 많은 다른 시골 절에 가보면 그냥 평균연령이 80대 한 중반정도의 연령이 시골 절에서는 되게 많습니다. 시골 절에 가보면. 그런데 지금 여기도 보면 젊으신 분들이 안 계시고 조금 연세가 드신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 이유가 젊은 사람들은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못 본 거지요, 인생에서 승승장구해야 될 일이 남았다보니까 승승장구하기에도 바쁜 시기이다보니까 생기는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진다 라는 사실을 절감하지 못하는 겁니다. 건강도 계속 건강할 시기잖아요. 어느 정도 이제 적응력이 생겨서 점점 건강해지는 시기고 몸도 더 튼튼해지고 점점 이제 사회적으로도 20대가 넘어가면서 사회에서 취직도 하고 돈도 벌고 하면서 아상(我相)이 확대되는 시기인거지요.


그런 시기를 계속 보내게 됐을 때, 그때는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이치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소멸할 수도 있다, 라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자각하지 못해요. 어떤 분이 공직생활을 하시다가 나가시면서 저한테 했던 얘기가 있었는데요. 되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면서 야, 저는 퇴직하는 이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지금 보세요, 지금 되게 비웃으셨잖아요.(웃음) 그지요. 비웃으셨잖아요. 그런데 그 얘기가 되게 웃을 만한 이야기거든요. 어떻게 그걸 몰랐지? 싶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되게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는 그러고 살거든요. 그날이 설마 나에게 올까. 그렇게 생각을 해요. 설마 나에게 죽는 일이 벌어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산다는 거지


중요한 점은 아∼참 뭐랄까, 이건. 그동안 많은 비유를 들었지만 지금 여기 이대로에 대해서 문제라고 생각할 때만 문제이지. 사실 지금 여기 이대로에 대해서 문제라는 생각을 거두면 문제될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사람들에게 최악의 문제라고 하는 죽음 조차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죽음이 진짜 괴로운 건지 아닌지 증명해봤습니까? 죽음이 진짜 괴로운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중에 제일 큰 게 죽음이잖아요. 죽음만이 최악의 괴로움이라고 생각한, 그 죽음만 놓고 보더라도 빨리 죽으면 실패고 좀 오래 살다가 죽으면 성공일까요? 방편으로 윤회를 비유로 들어본다 하더라도 아, 이번 생에 30년 살다가 다음 생에 100년 살고 그다음 생에 10년 살고 그다음 생에 50년 사나, 그 반대로 이번 생에 80년 살고 다음 생에 20년 살고 그 다음 생에 50년 살고 그 다음 생에 40년 산다면, 부증불감이지. 뭐 그렇게 다를 게 있겠습니까?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심지어는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임사체험을 하고 돌아왔던 어떤 사람들조차도 이구동성으로 죽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섭고 두렵고 어둑어둑한 컴컴한 이러 곳이거나 지옥 같은 곳이거나, 그런 곳이 아니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눈부신 아름다움이라는 말로도 부족해서 뭔가 장엄함이다. 신비로운 어떤 장엄한 아름다움이다. 이런 표현을 쓰고 있거든요.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도 죽음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지요. 삶과 죽음이 전혀 다르지 않다 둘이 아니다, 라는 불이법(不二法)에 대해서 온전히 깨닫기 때문에. 장자(莊子; 중국고대 도가(道家)의 사상가)도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서 막 표주박을 두들기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고 그러지요, 생사에 대해서 온전히 깨닫고 난다면 말이죠.


그러나 사람들은 생사 불이를 깨닫지 못했다 뿐이지,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지금 보통 사람과 똑같이 살거든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우리도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요.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이 사실은 둘이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면 죽고 나서 깨달은 사람은 더 행복해지고 살아서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덜 행복해질까요? 이 세상은 불이법의 세계, 하나의 세계입니다. 하나의 세계. 불이법의 세계, 일진법계. 하나의 오로지 진실한 법의 세계, 진리의 세계밖에 없습니다. 지옥이라는 세상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있어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내가 만들어낸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의 머리속에서 창조해낸 겁니다. 지옥도 사람들이 머리를 가지고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사람들의 무한한 창조력 상상력은 얼마나 거대한지 요즘에 나오는 온갖 영화들을 보세요. 어떻게 저 정도의 상상력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저렇게까지 상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아주 놀라운 상상력들을 만들어내요. 뭐 우주에 대한 온갖 상상들, 외계인들에 대한 온갖 상상들, 심지어 인간이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범죄내지는 어떻게 저런 상상력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을까, 싶은 정도의 최악의 영화까지 만들어내면서 온갖 상상을 만들어내지요. 신(神), 우주, 인간, 지옥, 천당, 극락 전부다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력입니다. 신(神)만 상상력이겠어요? 부처도 상상력이지요. 그래서 절에서는 부처도 없다 라는 얘기를 지속적으로 합나다. 깨닫고 나면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조차 없다. 


오로지 하나밖에 없을 때는 거기에 뭐라고 이름 붙일게 있겠습니까? 오로지 남자밖에 없으면 이 우주에, 그 사람들이 우린 남자야 우린 남자끼리 살아 여자는 어디 있을까? 이런 얘기를 생각할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온통 남자밖에 없었어요. 여자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거예요. 오로지 하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면 거기 이름붙일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눌게 하나도 없습니다. 지옥과 극락세계 이런 게 전혀 차별되지 않는다. 전부다 방편입니다. 왜 그런, 요즘에 불교 안에 보면요. 온갖 차원의 방편이 다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야∼ 절에 스님께서 어떻게 저런 수준 낮은 말씀을 하실까?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스님들이 아주 수준 낮은 방편을 가지고 기복적인 법문을 하면서 힘든 사람에게 말하길 열심히 기도하면 다 될 수 있다. 기도하면 됩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기복이 필요한 근기의 사람에게는 기복적인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데 그 근기에 맞춰서 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줘야 되는 겁니다. 불교 안에는 온갖 수준 낮은 방편에서부터 높은 수준의 방편까지를 다 갖추고 있는데,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수없이 많은 경전 속에 온갖 다양한 차원의 방편들이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요? 다양한 차원의 다양한 수준의 중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아주 낮은 수준의 의식을 가지고 괴로워하면 낮은 수준의 의식에 맞춰서 동사섭으로. 동사섭보살이 중생을 섭수하는 방법은 동사섭이거든요. 같은 일을 같이 하면서 같은 수준에서 맞춰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낮은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낮은 수준의 법문을 해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중생이 천만 가지 망상을 부리면 부처님은 그들의 근기에 맞춰서 천만 가지의 법문을 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법이 많아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교는 너무 복잡하게 많고 너무 머리 아프고 왜 그렇게 불교는 복잡하냐? 교회는 진짜 심플해서 좋은데. 하느님을 믿어, 하면 끝나는데. 불교는 왜 그렇게 복잡하고 뭐 그렇게 공부할 게 많고 대수승의 경전이 왜 그렇게 많으냐?


불교야말로 가장 심플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이 복잡하게 분별 번뇌 망상을 일으키니까 복잡한 분별 번뇌 망상을 깨트려주기 위해서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서 얘기를 해주다보니까 법문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거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평생 법문을 그렇게 많이 했지만 나는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라고 하셨어요. 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라고 설하셨다는 것이지요. 번뇌가 곧 보리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 이대로의 내가 그대로 부처입니다. 다만 지금 여기 내가 지금 여기 이대로의 삶을 좋다 나쁘다, 라고 분별하고 해석하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고 분별하고 해석하고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이 삶 이 세상 이 인생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고 분별하고 해석하고, 그래서 좋은 거는 집착하고 싫은 거는 거부하고 화를 내고 이러한 삶을 사는 그것이 바로 분별 망상 번뇌거든요.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그러니까 중생의 삶을 산다고 해서 보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지요. 부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우리는 부처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부처로서 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자리에서는 항상 부처를 보고 어떤 소리를 들으면 바로 부처를 듣고 어떤 눈으로 뭔가를 보면 바로 부처를 봅니다. 냄새를 맡을 때도 부처를 냄새 맡고 맛볼 때도 부처를 맛본단 말이지요 첫 번째 자리에서. 


분별하지 않고 볼 때는 보자마자 분별하지 않은 그 이전의 첫 번째 봄에서 보는 자리가 보는 성품이 바로 부처다. 들었을 때 듣는 소리를 해석하기 그 이전으로 순수하게 듣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듣는 것. 그 자리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처가 아니고서는 눈귀코혀몸뜻을 가지고도 어느 것 하나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인식하기 그 이전의 순수한 인식이라고나 할까요? 인식하기 이전의 순수한 의식이라고 할까요?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되기 그 이전의 순수한 봄이 있다는 거지요. 그 자리는 예외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나는 부처가 아니어서 부처가 돼야 되겠다, 그게 아닙니다. 이미 본래 누구나 완전한 부처인데 부처를 도외시하고 부처 아닌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 순수한 의식, 순수한 인식, 이것은 관심을 기울이면 되는 겁니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 이 마음공부라는 것 또 발심이라는 것 수행이라는 것은 뭐냐면, 마음공부라고 하잖아요. 마음으로 하는 공부다. 어떤 마음공부냐? 관심을 기울이는 공부입니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느냐? 겉에 드러난 생겼다 사라지는 이 허망한 거에는 관심을 자꾸자꾸 덜 갖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생겼다 반드시 사라질 거니까. 관심을 갖는 건 좋은 데 반드시 사라질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요. 왜냐면 생겼다가 반드시 사라질 거니까 집착할 필요가 없잖아요, 명명백백하게 생겼다 사라질 거니까. 그렇다고 그것을 쓰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배고픈데 아무리 먹어봐야 먹는 것도 다 공한데 다 텅 빈데 먹는 것도 사라질 건데 내 몸도 사라질 건데 먹을 필요도 없다. 그러라는 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먹을 때 먹고 옷도 사 입고 내가 할 일은 충분히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연극과도 같고 한바탕 꿈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들을 하면 힘을 완전히 뺀 채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힘을 뺀 채 살아가면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다 라고 여기지만, 오히려 힘을 뺀 채 살아가야만 근원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하는 생각을 거두었을 때 생각 이면에 있는 직관적이고 창의적인 그런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어떤 지혜? 힘? 그 모든 공덕의 근원 원천이 내 안에 이미 구족되어 있는데. 우리는 생각을 가지고 사니까 생각한 대로 좋은 건 취하고 싫은 건 버리려고 애쓰게 돼요. 애써야지만 생각한 것을 얻는다고 잘못 생각해요. 그러니까 유위법적인 노력, 즉 노력을 해야만 성공한다 이런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지요.


전에 한번 그 말씀드렸나요? 그 뭐죠? 고등래퍼에서 일등 했던 김하온이라는 아이가 명상을 한다, 이러는데. 그 친구가 끝날 때쯤인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자신은 정말 열심히 노력해야지만 성공한다, 라는 그 오래된 그 누구도 깨지 못하는 그 말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틀을 깨고 싶다. 왜 열심히 노력해야지만 성공하느냐? 그래서 본인은 랩을 할 때 처음, 작년에 했을 땐 열심히 하려고 잘하려고 했는데, 바로 떨어지고 나서는 명상을 하면서 삶을 즐기는 방법을 배웠다. 음악을 할 땐 즐겁게 해야지 막 힘들게 잘하려고 성공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잘 안 되는 것을 알았다. 그 친구가 처음 나와서 랩을 했을 때 사람들이 전부다 너무 잘한다고 하니까, 나는 이런 대접을 처음 받아봤다. 이렇게 잘한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내가 랩을 잘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것처럼 사실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노력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절로 노력할 거는 저절로 노력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쉽게 말해서 보세요 자기가 꽂히는 뭔가를 할 때는 힘쓰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하게 되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하다못해 세속적인 거라도, 내가 어떤 가방을 하나 갖고 싶다. 또 옷을 하나 사 입고 싶다. 아니면 보살님들 중에는 보니까 저기, 저기 청소중독이신 이런 보살님도 계신다는데. 청소기만 보면 막 그냥 환장하는 보살님도 계시고 또 어떤 분은 보면 막 그 뭐죠, 그릇 같은 거를 막 좋아해서 그릇만 보면 또 막 이렇게 꽂히는 거지요. 그런데 꽂히면 그걸 사기위해서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서도 스스로 힘들지 않을 수도 있어요.


또 자식들을 내가, 내가 어떻게든 돈을 좀 벌어서 자식을 학원엘 보내야 되겠다, 생각하면 힘든 줄도 모르고 할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정말 좋은 걸 할 때는 그럴 수도 있지요. 사실은 진정으로 가슴을 뛰게 하는 것.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할 때는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되 함이 없어요. 애쓰지 않는데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애써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애쓰지 않는데 이루어지는 것들이 훨씬 더 근원적이지요. 왜 그러느냐면 애쓰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본성(근본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왜 애쓰지 않는 게 본성(本性)일까요? 이미 갖추어져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은 구족되어있기 때문에. 원만구족하신 부처님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들 누구나에게 구족되어 있는 게 원만구족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미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존재들입니다. 다만 내 머리가 항상 분별하면서 남들과 비교해가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고 애쓰는 거예요. 내가 나를 안다고 할 때, 여러분은 결코 여러분 자신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해요. 내가 아는 것은 고작 분별입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상대적으로 어떤지를 아는 것밖에 없어요. 그건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하는 거는 진실이 아니지요. 가짭니다. 내가 잘났는지 못났는지 내가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알 수 없습니다. 더 많은 부자들 앞에 가면 당연히 가난하고, 더 많은 가난한 사람 앞에 가면 당연히 부자인 것이지요. 뭐 음악을 잘한다? 그것도 절대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음악을 잘한다고 하지만 딴 사람에게는 저 사람이 더 잘할 수도 있잖아요.


또 이렇게 결혼하는 거보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르신들은 결혼하고 다들 잘 사시잖아요. 저 사람이 결혼할 수 있을까 싶어도 누군가에게는 이 세상 누군가에게는 그 사람이 둘도 없는 사랑스런 사람일 수 있는 것이지요. 다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보는 관점에서 다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옳은 사람 절대적으로 잘난 사람 절대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 그런 거 없습니다. 이효리를 보면 그렇게 잘생기고 능력 있는 많은 남자들이 이효리에게 대시를 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더 훌륭하고 잘생긴 친구하고 만나가지고 저렇게 재밌게 살잖아요.(웃음)


본인의 가치관에서 본인의 시선에서 본인의 안목에서는 육신의 안목만이 아니라 금강경(金剛經)에서도 그러지요. 뭐 육안(肉眼) 천안(天眼 )지혜의 안목 혜안(慧眼)이 있고 법안(法眼)이 있고 불안(佛眼)이 있고 뭐 이런 표현들을 쓰는데. 다양한 안목이 있는 거지요. 그 말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 모든 사람들을 전부 다 판단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내 생각의 기준으로만 누군가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에요. 누군가의 생각의 기준의 판단에서는 그 사람이 별로인 것이지요.


모든 부모님들은 학교에 있는 전교생 중에서 내 자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예쁘지요. 뭐 예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봤을 때 가장 귀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차별되어서 인식하는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내가 누군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은 잘사는 건지 못사는 건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판단해서도 안 되고. 판단하는 것은 중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분별 비교 판단 해석만 멈추면 그냥 아무 문제 없이 사는 거예요. 문제 없다는 말도 필요 없어요. 그냥 사는 거지요. 해석을 붙일 필요 없이 그냥 사는 거지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사는 겁니다, 그냥 그냥 그저...거기 무슨 개념이 붙고 무슨 해석이 붙고 잘사느니 못사느니 라는 분별하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 이대로 모든 것은 원만구족되어 있다. 그래서 번뇌가 곧 보리라고 말하는 겁니다.


번뇌 곧 보리의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번뇌가 생겨나오니까 번뇌가 일어나는 그 자리가 번뇌가 올라오고 사라지는 그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이기 때문에 바다에서 파도가 치고 사라지듯이. 지난 시간에 밀가루와 빵의 비유를 들었듯이 모든 빵은 다 다르게 생겼어도 밀가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듯이, 모든 분별 번뇌 망상 생각들은 한자리에서 나온 거예요. 본성이라는 자리에서 온갖 분별 번뇌 망상 생각들이 일어난 것이지요.


좋은 생각도 부처자리에서 생겨나왔고 나쁜 생각도 부처자리에서 생겨나왔을 뿐이다. 그러니 모든 생각은 부처의 파편입니다. 부처자리에서 인연 따라 잠깐 생겼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허망한 생각들입니다. 그 생각을 실체화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생겨났다 사라지는 생각에 과도하게 구속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올라오는 모든 생각을 그냥 흘러 보내주면 됩니다. 일어난 생각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도록 흘러 보내주면 됩니다. 나를 중심으로 오지 못하게 막을 것도 없고 더 오라고 집착할 것도 없이 그냥 나라는 존재를 밟고 지나가도록 흘러가도록 통과해지나가도록. 내가 나라는 상이 있으니까 요거는 좋고 요거는 싫으니까 요거는 통과하고 저거는 막잖아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지요. 좋고 나쁜 해석을 하지 않고 그냥 통째로 흘러가도록.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없어야지만 나를 지나 흘러가는 모든 것에 대해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지 않습니다  (30분 12초 녹취)


법상스님의 선어록과 마음공부 녹취(원광사아카데미-18.5.04)-1 하이얀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