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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법계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한다

장백산-1 2018. 9. 1. 16:01

선어록과 마음공부 녹취(원광사아카데미-18.5.18)-3 법상스님 법문녹취록 by 하이얀마음 


시방지자 개입차종(十方智者 皆入此宗)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은 모두 이 종취로 들어온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97)


우주법계가 포용하는 것에서 제외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주법계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한다. 시방이라는 이 세상의 모든 지혜로운 일은 모두 불이법(不二法)이라는 종취(한 근본요지에서 내세우는 가르침의 취지)로 들어옵니다. 다시 말해 시방지자 개입차종이라는 말은 시방의 지혜로운 일체 모든 가르침은 불이법(不二法) 즉, 오로지 하나라는 이 가르침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이 사람들의 자유의지(自由意志) 뭐 이런 표현도 썼는데 사실은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나의 자유의지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내가 나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이냐? 이런 물음이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인데 내가 바로 이 우주법계와 둘이 아닌 하나(不二)이기 때문에 나의 자유의지가 곧 이 우주법계의 자유의지와 둘이 아닌 하나(不二)인데 사람들은 둘이 아닌 하나 그걸 따로따로 떼어 우주법계의 자유의지와 내 자유의지 둘로 분별해서 내 자유의지를 굳이 쓰려고 고집을 합니다. 나의 자유의지 자체는 하나의 오온입니다 오온, 오온은 생겨났다 사라지는 생멸법일 뿐입니다.


진정한 나의 자유의지는 곧바로 우주법계의 자유의지입니다. 우주법계의 자유의지는 지금 여기의 삶 자체,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삶,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우주법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구현하며 살 수 있느냐? 그것은 우주법계의 자유의지대로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겁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바로 우주법계의 참된 진리의 실상인 우주법계의 자유의지대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지요.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법계의 의지대로 이렇게 지금 여기 있으니까, 진리의 뜻대로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가지 마구니는 한 가지 마왕, 파순 또 악마, 지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내 생각입니다 내 분별심입니다. 내 인생은 않좋고 나빠 이렇게 생각하는 온갖 생각. 이 생각 하나가 유일한 마구니지 우리가 바깥에 마구니야 하면서 바깥에서 마구니를 찾지만 그 마구니는 바깥에 없습니다. 마구니는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내 안에 분별심이 마구니이지. 그래서 그냥 턱 나를 우주법계에 내맡기면 이 우주법계의 의지에 법계의 제법실상이라는 삶에 온전히 내 삶을 맡겨버리면 아무 문제없이 물 흐르듯이 무위로서 저절로 자연스럽게 삶의 실상대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사는 것도 실상이고 죽는 것도 실상이고. 아픈 것도 실상이고 건강한 것도 실상이고, 문제 있는 것도 실상이고 문제없는 것도 실상이고,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무재부재 시방목전(無在不在 十方目前) 있거나 있지 않거나가 없으니 온 세상이 바로 목전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97)


진리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두고 이거야라고 정해서 설명할 수 있는 뭔가가 진리가 아닌 것이지요. 그러나 온 세상이 바로 눈 앞에 펼쳐져있습니다.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있는 내 목전에 드러나 있는 지금 여기 이대로의 삶, 진리를 두고 또 다른 진리를 찾아갈 수가 없다.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존재, 나의 삶, 내 눈앞에 목전에 드러나 펼쳐져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 이것들 진리를 내버려두고 또 다른 진리의 세계를 찾아간다 라는 생각은 헛되고 허망한 착각입니다. 극락세계라는 서방정토를 찾아간다 라는 것도 전부다 허망한 망상이지요. 국락세계 서방정토라는 헛되고 허망한 망상이지만 극락세계 서방정토는 하나의 방편(方便)으로서 쓴 것이지요.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 서방정토로 간다는 이 말은 이법(二法)입니다. 둘로 나누는 거잖아요. 저기는 서방정토이고 여기는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니까 서방정토 저쪽으로 간다. 이거는 다 불이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리는 바로 지금 여기 온 세상이, 지금 여기 우주삼라만상이, 지금 여기 온 세상 전부가, 목전에 드러나있는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가 전부다. 다른 것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진리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진리를 찾는 마음 때문에 찾는 마음은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 없는 걸 찾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둘로 쪼개진 마음이거든요.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보지 않고 그래서 온 세상이 바로 목전에 펼쳐져있고 진리가 바로 목전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진리대로 턱 내맡긴 채 살아가면 아무 문제, 아무 괴로움이 될 것이 없습니다.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 一切卽一) 하나가 곧 전부고, 전부가 곧 하나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97)


일체 모든 것,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 모든 것이 곧 하나, 하나의 부처, 하나의 진리, 하나의 나, 참나입니다. 내가 바로 일체 모든 것이고 일체 모든 것이 바로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처가 하나라는 온 우주법계의 실상이 나로써 이렇게 지금 여기서 살아지고 있는 것이거든요. 나는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우주법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부처로서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의 부처, 하나의 진리, 하나의 참나, 하나의 마음 속에 온 우주법계 전체가 담겨있다고 하는 것이 내가 바로 우주법계 전체이기 때문에 내가 내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열악하다고 생각하고, 괴롭다고 생각하고, 내 인생은 아주 못 살았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 자체가 우주 전체에 퍼져나가는 것이지요.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이 보는 관점에서는 이 우주 전체는 암담하고 어둡고 우울하고 그런 곳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법유식(萬法唯識), 삼계유심(三界唯心),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해서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오로지 사람들 각자의 의식(意識)이 만들어 낸 실체가 없는 환상의 세계, 환영의 세계이기 때문에 세계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그렇게 의식했을 때 이 세상은 우울한 세상이 있기도 하고 또 활짝 핀 세상이 있기도 하고 동일한 하루도 어떤 사람에겐 이 세상은 온통 회색빛 오염된 세계이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괴로워하고 있고 나 또한 우울하고 오염된 회색빛 세상 그곳에서 외롭고 우울하고 깊은 절망감 속에 빠져있어 라고 생각하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런데 같은 날 옆집에서는 바로 옆집일 뿐인데 그 옆집에 있는 누군가는 아, 세상은 어쩜 이렇게 아름답고 눈부시고,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고 모든 존재 하나하나 흘러가는 구름 한자락조차 이름없는 풀 한 포기조차 이렇게 눈부시게 경이롭고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라고 감동하면서 살수도 있는 것이지요. 동일한 세계를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것입니다.



언어도단 비거래금(言語道斷 非去來今) 말길이 끊어지니,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97)


이 구절에서 언어도단이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언어도단이라고 해서 선(禪)은 언어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길이 끊어진 것이다.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 말로써 선(禪), 진리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는 말로써 이거야 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진리는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라는 표현으로 방편으로 그나마 쓰고 있지만 그것조차 진리가 아닌 것이지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온전히 진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에서는 진리를 언어도단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다.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은 이해하겠는데 현재심 왜 아니라 그러지? 현재심불가득 현재도 얻을 것이 없다. 왜 현재는 아니라는 거지? 오직 지금 여기뿐인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니까 지금, 지금 여기 뿐 아니냐, 지금. 그러면 그 말은 과거나 현재가 아닌 지금 여기 뿐이라는 것을 딱 정하고 상정해서 지금 여기만이 진실이야. 이렇게 지금 여기라는 뭔가 알맹이가 있는 거 처럼 내세우는 거잖아요. 지금 여기만이 진짜야 라는 지금 여기만이라는 어떤 사실을 내세우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지금 여기를 내세울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럼 지금 여기에 머무를 것도 없고 지금 여기에 집착할 일도 없고 지금 여기를 내세울 것도 없고 지금 여기라는 것을 정할 것도 없다.


다시말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유정법(無有定法),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정해뎌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이지요. 즉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 라는 말은 말로써 설명한 모든 것은 다 그것이 아닙니다. 해탈도 해탈이 아니고 이름이 해탈일 뿐이고 열반도 열반이 아니라 이름이 열반일 뿐입니다. 이 세상 그 모든 가르침은 말로써 설명하기 위해서 분별 번뇌 망상을 깨주기 위한 방편으로만 유효할 뿐입니다. 



다음은 102쪽에 우두법융(牛頭法融)선사의 심명(心銘)이라는 게송에서 일부를 좀 발췌했습니다.


본무일법 수론훈련(本無一法 誰論熏鍊) 본래 한 법도 없는데, 오랜 수련을 말하는 이 누구인가?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2)


본래 한 법도 없다. 본래 하나도 없다. 본래 아무것도 하나도 없는데 오랜 수련을 말하느냐? 즉 수련을 하는 것은 수행을 통해 뭔가를 얻고자 하는 거잖아요.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 깨달은 나, 혹은 지금의 이것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 지금의 나에게는 깨달음이 없으니 깨달음이라는 뭔가를 얻고자 해서 수련을 갈고 닦고 수행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본래 한 법도 없다. 진리라는 한 법도 없는데 그 진리를 얻고자 수행하고 수련할 필요가 있겠느냐. 지금 여기 이대로일 뿐인데. 지금 여기 이대로 이미 구족되어 있고 본래 이미 갖추어진 것일 뿐인데 수행을 통해서 진리를 얻고자 하는 그 생각이 바로 분별 망상이라는 것이지요.



일체막작 명적자현(一切莫作 明寂自現) 어떤 것도 조작하지 않으면, 밝고 고요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2)


일체막작, 어떤 것도 조작하지 않는, 조작한다는 것은 애쓴다, 노력한다, 뭘 만들어내려고 한다. 이런 것이거든요. 조작하지만 않으면 된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을 뿐이다. 조작하지 않는 게 있을 뿐이지. 사람들이 더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도 하나의 말이지만 불교는 더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깨달음을 더 하고, 복을 더 하고, 뭐 공덕을 더 하고, 부처를 더 하고, 지식을 더 하고, 경전공부를 더 많이 하고, 더 할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더 해놓은 것들을 생각으로 분별로써 끊임없이 만들어놓은 그 분별의 허망한 상을 빼는 거 빼기만 있을 뿐입니다.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만 있을 뿐이다. 그런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빼기를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공(空) 무(無)에서 뭔가를 환상(幻想)을 만들어놓았으니까 그 만들어놓은 환상만 그냥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지요. 환상 그걸 없앨 필요도 없고 어차피 허망하게 만든 환상이니까 허망하게 인연 따라 만든 환상이니까 내 의식이 사라지면, 인연 따라 만들어진 의식이기 때문에 의식이 사라지면 그환상도 사라지니까 그것을 시비 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내가 조작하지만 않으면 조작하던 것만 멈추면 분별하고 조작해서 무엇이 조작이냐? 대상을 좋다 나쁘다, 라고 둘로 나눠놓고 좋은 거를 취하려고 애쓰는 거 그게 조작입니다. 또 싫은 것을 버리려고 애쓰는 거 그게 조작이거든요. 이렇게 분별 조작하지만 않으면 참된 무위로 돌아가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불이법(不二法)입니다. 둘이 아니면 오로지 하나고 오로지 하나면 지금 여기 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니까.


하나가 하나로 돌아가는데 무슨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본래 하나밖에 없다면 아무런 노력도 필요가 없어요. 지금 여기 이대로가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것도 조작하지만 않으면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수행이 필요가 없습니다. 수행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뿐이지요. 그래서 수행하지 않는 것을 아무리 얘기해도 잘 못알아듣기 때문에 수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수행을 시키는 겁니다.(웃음)


그러니까 아이러니하지요. 하지 마! 이러니까 뭘 하던 것만 습관이 되어 있으니까 자꾸 뭘 하는 거예요. 하지 마! 이러니까 하지 마는 걸 또 자꾸 하는 겁니다. 하지 마라라고 해서 하지 않으면 되는데 하지 않는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 않는 걸 또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지 않는 걸 하기 위한 노력. 그러니까 얼마나 이 공부라는 것이 어찌 보면 참 얼마나 허망한 것이겠어요. 그런데 중생들은 분별의 세계에서만 살아오다 보니까 하거나 하지 않는 거 이거밖에 모르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도록 해야 하는 방편을 쓰는 겁니다.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을 하라고 이렇게 설명해줌으로써 그래 맞아. 이렇게 하라 해야 쉽지. 여러분도 마찬가지잖아요. 진리, 뭔가 명확하게 뭘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가르쳐주지 않으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싶어서 절에 안 오지요.


아예 공부를 안 해버립니다. 뭐 우리는 뭐가 익숙하냐면 요렇게, 요렇게 노력해서 요런 결과를 딱딱 얻는 거. 그래서 누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이거 목탁소리도 있고 뭐 이렇게 절에 신도님들한테 신도님들을 잘 공부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왜 그 방법을 안 쓰느냐? 뭡니까 이랬더니. 단계를 만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처음 초발심한 단계는 요런 기도를 시켜서 요 기도는 몇 달 동안 시키고, 그걸 한 사람들은 그다음 기도를 시키고, 그다음 수행을 시키고 이렇게 점점 수준 높은 수행을 착착 만들어서 딱 만들어놓으면 사람들이 아주 재미를 느끼면서 공부를 한다는 거지요. 아, 요 단계 끝났다. 2단계를 넘어간다. 성취감도 느끼고 이런 걸 느낀다는 것이지요. 졸업장도 주고, 그러면서. 그것도 이제 하나의 방편으로서는 뭐 할 수도 있겠지요, 그지요. 하나의 방편으로서는.


그런데 그런 어떤 단계? 이것이 본질은 아닌 겁니다, 본질은. 그래서 불교라는 것 자체가 입을 벌렸다면 어긋나는 거예요, 하여간. 그러니까 법문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허물입니다. 모든 법문은 죄다 허물입니다. 경전도 전부다 허물이에요. 언어도단이라 했잖아요. 언어로 설명되어진 모든 것은 다 끊어버려야 됩니다. 사실은 모든 언어나 문자는 달(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 즉 방편일 뿐이지 언어나 문자가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 방편인 언어나 문자 거기에 사로잡히면 안 되는 것이지요. 경전에도 사로잡히면 안 되고 법문에도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제 말을 적고 녹음하고 막 녹취도 하고 하시는데, 제가 하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웃음) 뭐 항상 하시니까 그냥, 그냥 두는 건데. 그냥 듣고 놔버리면 되는 거지요. 막 적고 막 노력하고 이럴 필요가 굳이 없습니다. 그냥 듣고 흘려버리면 되는 거지요.


듣고 흘려버려야지만 공부가 되지 들은 걸 이걸 쥐고 있으면 공부가 안 되기 때문이에요. 쥐라고 해드리는 법문이 아니기 때문에 듣고 흘려버려야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쥐는 게 있으면 그건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분별해서 조작하지만 않으면 밝고 고요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우리의 본래 본성이 밝고 고요함이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조작함으로써 본래 밝고 고요한 본성 그걸 덮어버렸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거지요.



지법무지 무지지요(知法無知 無知知要)


법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진짜 앎이 아니니, 알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앎의 요체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2)


이런 식이에요 불교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 안 되는 얘기들을 이렇게 합니다. 법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진리를 진짜 아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안다, 모른다 둘로 나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다 하면 아는 무언가가 있어야 되잖아요. 너희들은 모르는 걸 나는 알고 있어 하는 무언가를 내가 쥐고 있어야 되잖아요. 아는 무언가를 쥐고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아는 것이 앎이 하나의 대상이 되잖아요.


뭐 영어단어 하나를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나는 알고 있다. 수학 문제 푸는 방법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나는 알고 있다. 이런 것처럼 무언가 내가 아는 대상이 있어야 되잖아요. 아는 나와 아는 대상을 둘로 나눠놓고 그 중에 하나를 취하는 거잖아요.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알고 모르고라는 그 생각, 분별심이 일어나는, 내가 미적분을 풀풀 줄 아는 것이 진리냐. 풀 줄 모르는 것이 진리냐가 아니라 풀 줄 안다는 것, 풀 줄 모른다, 라는 것 그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는 그 바탕, 그 배경 그것을 설하는 것이거든요. 내가 안다 모른다가 아니라 안다 모른다, 라는 생각, 분별심이 일어나는 그 바탕자리를 설한 것이기 때문에 생각, 분별심이 일어나는 그 바탕자리는 안다 모른다는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옛날에 그런 얘기가 많습니다. 뭐 스승을 찾아가서 당신은 법을 아십니까? 나는 법을 모른다. 그러니까 휙 도망간 사람도 있고. 성철스님한테도 그랬다고 그러지요. 어떤 수좌스님이 와서 법을 아느냐? 나는 법을 모른다. 뭐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걸 얘기하는 것이지요. 알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앎의 요체입니다. 안다 그건 지식이지요 분별입니다. 안다 이러면 벌써 이 공부와는 멀어지는 것이지요. 알지 못하는 것을 설하기 위해서 알지 못하는 거를 알기 위한 공부를 시키는 거예요.


알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알지 못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 공부와는 다르지요. 세상 공부는 열심히 공부하고 받아 적고 외우고 해서 성적이 올라가야 되는데. 이거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바보가 돼야지만 잘 나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마음공부를 하면 할수록 야 내가 불교의 요체를 이제 알 거 같다. 아 불교는 이런 것이구나. 불교교리는 이제 환하게 꿰뚫을 거 같다. 야∼ 이렇게 공부하면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자꾸 뭔가 아는 게 있으면 그 사람은 아 내가 공부를 잘못하고 있구나 하면 정확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하는 방법은 뭐냐면 법문을 듣기는 계속 듣는데 듣고 나서 이렇게 집에 가서 보면 하나도 기억나는 것도 없고 하나도 생각나는 것도 없고 들으면서도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안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아는지도 모르겠고 모르는지도 모르겠고.(웃음) 그냥 이상하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똑똑해지는 거 같지 않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바보가 되는 거 같고 더 모르는 거 같고. 그러다가 이제 점점 더 모르는 거에 이제 꽉 사무쳐버리는 것이지요. 왜냐면 우리가 아는 건 세상을 아는 거잖아요. 세속을 아는 거잖아요. 세속을 아는 거를 얘기하는 게 아니니까, 이건.


이 마음공부는 출세간을 얘기하는, 법, 진리를 얘기하는 거니까 법, 진리를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오직 모를 뿐'이라고 하지요, 법에 대해서는. 그런다고 세속을 모른다는 건 아니고 세속은 세속대로 다 알고 세속적인 교리적인 이해도 그 교리적인 이해는 많이 늘어나겠지요. 그런데 교리 그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강을 건너는 뗏목 방편이기 때문에 방편인 교리를 쥐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데 지금까지 불교에서는 세간의 공부처럼 불교교리나 경전공부를 쥐도록 이렇게 이끄는데 그 쥐는 목적은 놓기 위한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거든요. 그러니 놓기 위해서 쥐는 걸 설명하니까 사람들은 쥐는 거에만 관심이 있는 거지요. 쥐는 설명 그걸 통해 딱 놔야 되는데. 그 말을 통해 그 문자를 통해 그 언어를 통해서 알고있는 모든 걸 놓아야 되는데 잘못알고 방편인 그 언어, 그 말, 그 문자를 쥐는 것이지요.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앎의 요체입니다. 그래서 오직 모를 뿐. 이 뭐고? 이 말은 이 뭐고?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뭐고? 그런데 나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뭐고라고 하는 말보다 차라리 '오직 모를 뿐'이 더 나은 화두다, 이런 표현을 쓰지요. 그냥 모르겠다, 모를 뿐. 그래서 모르는 것이 앎의 요체이지 참된 앎의 요체이지 참된 지혜의 요체이지, 아는 것이 앎의 요체가 아니다. (이어서 1시간 1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