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최고의 이치 즉 진리는 해탈도 아니고 속박도 아니다

장백산-1 2018. 9. 5. 16:09

선어록과 마음공부 녹취(원광사아카데미-18.5.18)-4 법상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마음


지리무전 비해비전(至理無詮 非解非纏) 최고의 이치는 설명할 수 없기에, 최고의 이치 즉 진리는 


해탈도 아니고 속박도 아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3)


최고의 이치, 즉 진리(眞理)는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해탈도 아니고 속박도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해탈이라고 배웠잖아요. 진리, 최고의 이치는 해탈이라고. 그런데 진리는 해탈도 아니고 속박도 아니다, 라고 해서 다시 진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어줍니다. 어떤 것에 속박된 사람을 그 속박에서 풀어주는 것을 해탈이라고 이름 붙이거든요. 그런데 해탈 그건 어디까지나 말이라는 방편에 불과할 뿐입니다. 특정한 것에 집착해서 그것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에게 그 속박을 풀어주는 방편으로 쓰이는 것이 해탈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A라는 것에 집착해서 A에 속박되어 있고 구속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A라는 거를 풀어주기 위해서 이 사람에게 맞는 것을 설명해줘서 A라는 거로부터 풀려나게 합니다. A라는 구속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는 것 그걸 해탈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그냥 이름을 붙인 겁니다 그냥. 그런데 스스로 구속됐다가 스스로 해방이 됬는데 그걸 뭐 해탈이라고 이름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본래 자리로 돌아온 것일 뿐인데 아무 일 없던 자리로 돌아온 것인데. 내가 생각으로 억지로 조작해서 환상인 뭔가를 만들어놨다가 만든 환상 그걸 그냥 ‘아 이게 아니구나.’ 하고 탁 놓고 돌아왔을 뿐이거든요. 회심(廻心)했을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무엇을 억지로 생각으로 만들어 그 환상에 구속됬다가 풀려나 제 자리로 돌아온 그것을 가지고 해탈이다, 열반이다, 부처다, 깨달음이다 라고 이름하는 것 또한 하나의 분별(分別)입니다. 왜냐하면 해탈, 열반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이법(二法)이잖아요, 분별법(分別法)입니다. 


너희들은 어리석고 미혹한 중생이니까 부처가 돼라. 이게 둘로 나누는 이법(二法, 분별법)이잖아요. 이법, 분별법은 불법이 아닌 것이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얘기하지 않으면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 법문 듣지 않고 마음공부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법문을 듣고 마음공부를 해서 부처가 돼야 된다, 라고 말을 한 겁니다. 말을 해놓고 나서 그 다음에 어떻게 얘기를 하냐면 그러나 그 부처라는 것도 실체가 아니야. 부처라는 것도 진짜 있는 게 아니야. 라고 해서 거기 부처라는 거에조차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게. 즉 이것은 중생을 버리고 부처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에도 머물지 못하고 중생에도 머물지 못해서 어디에도 머물지 못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해야 되는 겁니다. 참된 법이 이끄는 방향을 이렇게 딱 만들어줘서 '아 그대로만 가면 나는 되겠구나.' 이런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고 이 길도 아니고 저 길도 아니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나보고. 어디도 뿌리내리지 못하게, 어디도 머물지 않게, 어디도 안주하지 못하게, 안주할 만한 밑바탕을 다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방편을 가르치는 사람은 끊임없이 방편을 쥐어줘서 사람들에게 방편이라는 선물을 주고 사람들은 그 방편을 쥐고 막 행복해하는데 바른 선지식은 가지고 있던 모든 방편들을 다 빼앗아가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거지요.


모든 방편을 다 뺏으니까 내가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괴로운 거지요. 허망한 거지요. 그러니까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은 쇠뿔처럼 드물다. 이 세상에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새털처럼 많을 수 있지만, 이 참된 공부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겠다, 하는 사람은 쇠뿔처럼 드물다. 쇠털은 소의 털은 얼마나 많아요. 허나 소뿔은 딱 두 개밖에 없거든요. 그 많은 것 가운데. 그러니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드물다는 거지요. 왜? 남들은 다 이것만 공부하면 돼, 하고 딱 의지할 곳 의지처를 탁 쥐어주면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의지할곳, 방편을 그것을 싹 빼앗아버리니까 괴로운 겁니다. 


특정한 법에도 의지하지 마라. 뭐 특정한 스님에게도 의지하지 마라. 특정한 사찰에도 의지하지 마라. 특정한 수행법에도 의지하지 마라. 모든 의지할 것을 다 빼앗아버리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해라.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본래 진리, 본래 깨달음)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본래 법이기 때문에. 내 안에 본래부처 본래법이 있다. 그러나 그 자기라는 것도 없고 법이라는 것도 없다. 해서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을 해야 되는데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라는 것 자체 거기에도 집착해 머물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지요.



영통응물 상재목전(靈通應物 常在目前) 신령하게 통하여 사물과 호응하니, 항상 눈앞에 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3)


본래 부처, 본래 법, 본래 진리, 본래 깨달음은 영활하게 통한다. 영통자재하다. 신령스럽다. 아주 활활 발발하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라는 말니다. 본래 진리는 왜 그렇게 신령스럽게 모든 것을 통하느냐? 우리는 이렇게 통하지가 않잖아요. 걸리잖아요.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이 세상은 세상이고, 나는 나고, 이렇게 서로 이분법으로 나눠서 서로 꺼리잖아요. 거리낌이 있고 걸립니다. 그런데 이 법의 세계는 그렇게 걸림이 없다. 완전히 융통자재하다. 완전히 확 통해버린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로서 완전히 통해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신비스럽고 신령스럽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신령스럽게 통해있다, 영통하다. 통해서 사물과 호응하니, 모든 삼라만상 사물 전체와 그냥 하나가 된다는 것이지요. 하나로 호응한다는 거지요. 사물전체가 그대로 하나의 법의 나툼이고, 진리의 나툼이고 하나의 부처의 나툼입니다. 물결이 그대로 물이듯이 말입니다. 이것을 이 사물전체와 하나로 호응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다, 라는 소리에요.



그래서 진리, 법, 깨달음은 항상 눈앞에 있다. 진리, 법, 깨달음은 항상 나로서 언제나 이렇게 드러나 있다. 그러니 이 바른 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보세요. 이법(二法), 분별법(分別法) 갖고 공부하는 사람은 수행을 열심히 해야 되는 나와 열심히 하지 못하는 내가 있어요. 내가 수행을 못하면 죄의식을 느끼고 수행을 못하면 내가 수행자가 아닌 거 같고, 내가 천상에 못갈 거 같고, 복을 안 지으면 내가 복을 못 받을 거 같고 죽고 나서 좋은 세상으로 못갈 거 같고,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돼요. 그런데 이제 제 말이 아니라 종교학자들이 인간세계의 수많은 종교들을 연구하고 나서 어떤 얘기를 하느냐면 종교가 신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고 가장 많이 쓰인,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쓰인 방법이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하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자기 종교 신자들에게 지옥을 강조하고 인과응보를 강조하고 뭐 너는 나쁜 짓 했으니까 지옥 갈 거야. 복 지었냐? 복 안 지었지, 지옥 갈 거야. 절에다 보시했냐? 보시 안 했으니까 지옥 갈 거야. 나쁜 마음을 가졌지? 그 나쁜 마음을 가진 거 자체가 지옥 가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 면제부가 있어. 절에 와서 기도하든지, 교회 와서 기도하든지, 헌금을 많이 하든지, 복을 짓든지 해야되, 이런 방식으로 두려움을 조장하면 중생들은 두려워서 두려움에 떨다가 방법이 있다 하니까 그 방법을 너도 나도 따라 하더라는 거지요. 그런 방식으로 종교가 지금까지 무지몽매한 수많은 중생들을 통제해 왔다는 것이지요. 이런 얘기까지.(웃음) 그런데 참된 법, 불법은 무외시(無畏施)라고 하잖아요. 재시(財施), 법시(法施), 제물로 보시하고 법으로 보시하지만 무외시(無畏施)를 으뜸으로 치거든요.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은 진정한 법이 아닙니다. 


본래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본래는 무한한 자비, 무한한 사랑, 본래 이거 하나밖에 없으니까. 하나가 하나를 괴롭힙니까? 내가 나를 괴롭힙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지. 사랑하면서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해요. 내가 배고프면 이 몸뚱이가 배고프면 음식을 주는데 내 몸한테 내가 ‘야 내가 너 밥 줬다. 밥값 하라.’ 이런 얘기를 안 하잖아요. 배고프면 그냥 음식을 몸한테 주면서도 줬다는 상도 안 갖잖아요. 우주가 그와 같은 것이지요. 이 우주법계는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를 이 하나인 우리를 괴롭힐 하등의 의지가 없습니다. 우리를 두려움에 빠뜨릴 아무런 의지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할 뿐. 왜? 하나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진정한 자비는 자비가 아닙니다. 자비라고 말로 표현되는 자비가 아니라 하나라는 게 진정한 자비에요.


하나면 내가 나한테 이렇게 물을 주고도 물을 줬다고 상을 내지 않듯이. 하나인 우주법계는 모든 존재에게 두루두루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을 주고 있는 것이지요. 두려움이라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 만들어낸 환상(幻想)입니다. 지옥이라는 환상을 만든 창조주는 신,부처, 염라대왕이 아니고 사람의 의식(意識), 생각, 마음입니다. 자기 생각이 지옥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놓고 자기 생각이 그렇게 지옥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지요.


죽음 이후가 어떤지 겪어본 사람이 없으면서도 죽음 이후를 두렵다, 라고 만들어놓고 두려움을 조장시킨 다음에, 위기설을 조장해야 사람들이 말을 잘 듣잖아요. 내부적으로 단합도 되고. 자신의 삶이 위기라는 걸 심어주는 것이지요. 아주 잘못된 방식입니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래 부처, 본래 진리, 본래 깨달음이기 때문에 죽는다, 라는 것이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지요. 


석가모니부처님이 살아있을 때 이룬 열반, 깨달음을 열반이라고 하고 돌아가신 것을 반열반(般涅槃)이라 합니다 완전한 열반. 즉 살아있을 때 깨달아봐야 살아있을 때는 몸이 죽지 않아서 그냥 열반밖에 안 되는데, 죽는 게 진짜 열반이다. 그 말은 뭔 말이겠어요? 살아계실 때보다 돌아가셨을 때 더 진짜배기 열반으로 간다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이거보다 죽는 게 더 좋다, 라는 거 아니겠어요? 굳이 표현을 한다면. 


그런데 사람들은 죽는 건 무조건 나쁜 거야 괴로운 거야라고 생각했잖아요. 그거 생각 아닙니까. 죽는 건 괴롭다, 라는 건 하나의 생각 아닙니까. 생각입니다. 본래 우리는 불생불멸하는 이 바다의 자리에서 불생불멸입니다. 물결이 아무리 쳐봐야 이게 살았다 죽는 게 아니라 그냥 인연 따라 물결의 흔적을 했다가 다시 물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어젯밤 꿈과도 같이 꿈 깨는 게 괴로움이고 두려움입니까? 꿈꾸는 사람 입장에서는 꿈 속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꿈 깨면 꿈속에서 꿈이 사라져버리니까. 우리가 죽고 나면 이 세상이 사라져버리지요. 이 세상에서 다른 데로 간다고 느끼니까 이게 무너지는 거 같으니까 괴로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꿈속에 있는 사람 얘기지요. 꿈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꿈꾸는 사람들의 꿈속 세상을 본다면 꿈은 허망한 것이고 꿈에서 깨는 게 깨어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깨어난다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그러니 생로병사로 대변되는 이 괴로움이 진짜 괴로움이냐. 전혀 괴로움이 아닙니다. 그리고 생노병사라는 그 괴로움이라는 구조를 띄는 거처럼 보이는 것조차 그것을 통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다, 라는 발심을 함으로써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벗어나려면 괴로움의 원인이 뭔지를 알아야 되잖아요? 그 원인을 자각해서 그 원인이 분별심(分別心)이구나, 라는 걸 알고 분별심을 놓아버리도록 해주기 위한 그래서 본래가 본래 부처였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주기 위한 구조, 그러니까 깨달음에 있어서 가장 최적화된 구조? 커리큘럼? 그게 바로 이 지구별이라는 인간세계의 어떤 구조이지요. 삶의 방식이 다 그런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계로 딱 들어오고 나면 그 본래 목적을 상실해버리는 거지요. 그게 진짜인 줄 알고, 괴로움이 진짜인 줄 알고, 거기서 벗어나라는 메시지인데. 이 괴로움에 빠져가지고 막 아파하는 것이 그거밖에 내가 할 수 없는 것인 거처럼. 그것을 통해 깨어나라고 하는 소리인데. 부처님이 계속해서 말로 해서 안 들으니까 괴로움을 딱 줘서 실질적으로 체험을 해보고 깨달아라, 하는 것인데. 그거를 우리는 오해하고 곡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삼세무불 무심부불(三世無物 無心無佛) 온 세상에 한 물건도 없어,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3)


온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이거 뭐 진리, 법, 마음을 뭐 한 물건,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물건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없다는 거지요. 하나도 하나라고 할 만한 뭔가가 없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깨닫는 것. 부처를 증득하는 거라고 하지만 본래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진리도 없다. 이런 말이 다 방편인 하나의 말로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이지요. 언어로 방편으로 부처, 진리, 법, 깨달음, 마음, 한 물건을 세워놓고 나서 그 세운 것을 다시 깨부숴버리는 겁니다.



계교괴상 구진배정(計校乖常 求眞背正)

생각으로 따지면 이치와 어긋나고, 진리를 구하면 진리를 등진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3)


생각으로 비교하고 따지면 참된 이치와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생각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라도 그 생각은 훌륭한 생각과 훌륭하지 않은 생각 둘 중에 하나잖아요. 생각은 전부 세간상입니다. 세간 속에서의 얘기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도. 이 마음공부는 생각을 넘어서는 공부이기 때문에 생각으로 따지면 이치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진리를 구하면 진리를 등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마음자체가 추구하는 마음이잖아요. 없는 것을 구하겠다. 추구하겠다. 얻겠다. 나는 지금 얻지 못했다, 라는 얘기를 전제로 깔고 있는 거잖아요. 진리를 구한다, 라는 말 자체가. 나는 지금 진리가 아니니까 진리를 구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진리를 구하려는 마음자체가 분별(分別)이기 때문에 진리를 구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키는 거거든요.


서울에 있는 사람이 나 서울로 가겠다, 가겠다, 가겠다는 이 생각 때문에 한 10년을 서울에 가야 되는데 하고 서울에 있는 사람이 서울에서 서울 가야한다는 생각에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서울에 가야지 하고 스트레스만 받지 않으면 그냥 언제나 서울에 있는데. 언제나 서울에 있는지를 몰랐으니까 서울로 가야 돼 하고 혼자서 계속 스트레스 받았던 것일 뿐이지요. 그런데 자기가 있는 여기가 서울인지 알았으면, 이제 더 이상 스트레스 없이 그냥 서울에서 살면 되는 것이지요.


제가 강원도 양구에 있을 때 우리 군종병이 막 시내 구경 좀 시켜달라고 몇 번 그래서 몇 번 시내 구경을 시켜줬어요. 그런데 얘가 시내 구경을 자꾸 시켜줬는데도 또 자꾸 시내 구경을 시켜달라고 그래서 나중에는 ‘야 너는 얼마 전에 시내 구경을 갔다 왔는데 또 가고 싶냐?’ 그랬더니 ‘아니 그런데 자꾸 저기 읍내만 보여주시고 시내는 한 번도 안 데려다주시지 않았습니까?’


‘야 너 지금까지 그러면 거기를 시내라고 생각을 안 했던 거야?’ 그랬더니 ‘아니 시내를 안 가셨잖아요.’ 그래서 ‘야, 우리 맨 날 갔다 왔다 하던 거기가 양구 최대의 다운타운(downtown;도심)이야.(웃음) 양구 최대의 도시야.’ ‘거기 롯데리아 봤지?’ 봤데요. ‘롯데리아가 있는 곳은 하나밖에 없어.’ ‘너 화천에 있는 7사단 병사들 하고 21사단 양구 얘들 하고 어디가 더 도시냐? 어디가 더 시내냐? 싸우다가 나중에 화천에 양구인가 화천인가 롯데리아가 딱 들어오고 나서 다른 도시가 깨갱했다.’(웃음)


‘그 최대 도시를 맨 날 갔다 와가지고 안 갔다고 하느냐.’ 본인은 안 갔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데려다달라고, 데려다달라고. 그 얘기를 해주고 나서 그다음부터는 그 말을 일체 한 번도 안 하지요.(웃음) 거기가 군(郡)인 줄 알았으니까 이제 그 생각을 낼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것과 똑같다.



만상상진 삼라일상(萬象常眞 森羅一相) 만 가지 형상이 항상 진실하고, 삼라만상이 한 모양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3)


만 가지 형상이 항상 진실하다.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옆에 있는 사람의 삶, 만 가지 좋고 나쁘다, 라고 느꼈던 모든 사람들의 모든 삶의 모양, 삶의 모습이 다 진실합니다. 다 진실하다. 나의 좋은 모습, 안 좋은 모습,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습 전부다 진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다가 있는데 파도가 어떨 땐 멋있는 파도가 칠 때도 있지요. 어떨 땐 파도가 좀 별로 안 예쁜 파도가 칠 수도 있겠지요.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바다가 아닙니까? 멋있는 파도 멋없는 파도 다 같은 바다거든요. 우리 삶에서도 조금 실수한 과거, 지금까지 계속 부여안고 살면서 그때 내가 잘못했는데 이거 내가 언제쯤 과보를 받게 될까? 내가 잘못 했으니까 나는 지옥에 가고 말거야. 그 생각이 지옥을 끌어당기고 있는 겁니다. 원래 실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내 안에서 완전히 내려놔버리면, 완전 내려놔버리면 되거든요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라고 해서 죄라는 건 자성에서 내 생각이 스스로 만든 환상이기 때문에 본래 죄라는 게 없어요. 난 내가 누군가를, 상대방에게 상대방을 괴롭혔다면 그 사람에게 가능하다면 직접 가서 용서를 구하고 이렇게 하면 가장 좋겠지요. 서로간의 인연법이기 때문에 나 혼자만 내 마음 안에서 놔버린다고 되는 것은 아니니까 될 수 있으면 상대방과의 인연을 풀어주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뭐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 마음 안에서 죄의식을 내려놔도 좋습니다. 왜? 죄의식이라는 건 과거에 만들어진 환상이잖아요. 과거가 허망한 환상이기 때문에. 과거는 없습니다. 과거의 나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10년 전의 여러분과 지금의 여러분이 같은 여러분일까요? 옛날에 과학에서도 뭐 그랬어요. 7년에 한 번, 모든 세포가 전부다 바뀌는데 7년이 걸린다.


그런데 그분은 원자 뭐 세포의 차원이고. 그것보다 더 깊은 미립자의 차원에 가면 10의 마이너스 23초에 한 번씩 우리 온 몸에 있는 미립자가 완전히 바뀐다는 겁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수백 번 우리는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거예요 미립자의 차원에서는. 1초 전후가 전혀 다른 몸이거든요.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요?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10년 전의 그 사람이 잘못한 걸 지금 내가 왜 걱정합니까?(웃음) 전생에 내가 뭐 죄를 짓고 어쩌고저쩌고 다음 생과 전생이 있다고 쳐보자는 말이지요. 전생에 아프리카의 원주민이었고 지금은 여러분이고 다음 생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서 태어났다. 그러면 그 아프리카 원주민과 지금의 여러분과 다음 생에 미국에 태어난, 그 세 사람이 같은 사람일까요?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얘는 얘고 얘는 얘고 얘는 얜데. 나중에 가서 얘가 뭘 하면 어쩌나?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순환(循環)하고 있는 것일 뿐이거든요 세상의 모든 인연법은. 


물을 먹으면 이 물은 갑자기 지금의 내 몸으로 윤회했잖아요 좀 전엔 컵에 있던 물이었는데. 좀 전에는 정수기의 물이었다가 컵으로 왔다가 제 몸으로 윤회를 했어요. 머지않아 또 오줌이나 땀이나 체액이나 똥으로 뭐로 나가도 몸 바깥으로 나갈 겁니다. 나갔다가 또 물로 돌아가고, 변기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뭐 어딘가로 또 갈 겁니다. 그러면 내가 이 물을 먹으면서 물의 미래까지 걱정해야 됩니까?(웃음) 이 물 얘가 시궁창에 빠지면 어쩌지? 얘가 냄새나는 오줌이 되면 어쩌지? 하고 막 그걸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인연 따라 변하는 거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연결된 무언가에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래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뭔가 나라는 실체가 있다. 그런 실체? 없습니다. 아트만이라는 걸 규정해서 이게 이렇게 연결되었다고 하지만 나라는 실체, 아트만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이렇게 온 우주법계, 하나의 법, 하나의 진리, 하나의 깨달음, 하나의 부처(일불승 一佛乘)가 이렇게 삼라만상인 것처럼 드러나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순환(循環)합니다 돌고 돕니다. 보살님 몸에서 나온 똥오줌이 사과나무 밑으로 갔다가 사과가 되어서 보살님이 또 먹을 수도 있고 이사람 저사람 몸으로 막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는 거지요. 그렇게 윤회해가는 겁니다. 하나입니다, 하나. 하나로서 그냥 그렇게 인연 따라 여기저기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본래자리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처럼 만 가지 형상이 항상 진실하고 항상 하나일 뿐이고요. 삼라만상이 한 모양, 일상(一相), 하나의 실상일 뿐이라는 겁니다. 삼라만상이 근원에서는 하나의 실상이다, 제법실상. 오로지 하나의 실상일 뿐이다. 둘로 셋으로 넷으로 쪼개지는 것은 없다. 너 따로 나 따로 이렇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부존 본래즉금(本來不存 本來卽今) 본래가 따로 없으니, 본래가 바로 지금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3)


본래, 본래자리, 본래면목, 본래성품, 이러니까 아 본래성품이 뭔가 따로 있겠지, 라고. 이렇게 따로 정해놓고 그것을 얻어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본래가 바로 지금 여기이다. 그 본래 자리라고 하는 본래라고 하는, 야 본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뭐 이런 말도 하고 본래는 어때? 하지만 지금 여기만이 본래다. 지금 여기 있는 것만이 언제나 있습니다. 지금 여기 이대로일 뿐. 그래서 따로 다른 곳에서 본래를 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것만이 그냥 계속 있는 겁니다.


 


보리본유 불수용수(菩提本有 不須用守) 깨달음은 본래 있는 것이니 일부러 지킬 필요가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3)


보리본유 불수용수, 보리(깨달음)는 본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본래 있는 겁니다 본래. 그리고 깨달음이라고 하니까 ‘야 거창한 깨달음이 나한테도 있다는 말이야?’ ‘내가 바로 부처란 말이야?’ ‘야 믿을 수 없어.’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니까 우리가 긴장을 하지만 보리(깨달음)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부처는 대단한 게 아닙니다. 하찮은 것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공(空)한 거지요, 공(空)한 거.


보리, 깨달음, 부처, 진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죽비를 친다) 이 소리를 듣기 위해서 애쓰지 않는데 누구나 저절로 듣고 있어요. 이 소리를 귀가 듣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냥 저절로 뭔가가 듣고 있어요. (죽비를 친다) 이 소리를 그냥 듣고 있습니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듣고 있다. 듣는 뭔가가 있습니다. 귀가 소리를 듣는다. 귀가 있으니까 소리를 듣지요. 귀가 듣는 건데요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분 제 강의를 듣는 동안 저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계속 듣고 계셨나요?


지금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잖아요. 지금은 들리잖아요? 그런데 제 강의를 듣는 동안은 못 들으셨잖아요? 귀가 있는데. 귀가 들으면 비 오는 소리도 들어야지요. 귀가 듣는 거면 얘는 계속 비 오는 소리를 들어야지요. 그런데 귀가 있어도 빗소리를 못 들었잖아요. 저거를 듣고 안 듣는 뭔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애써야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요. 여러분 저를 이렇게 계속 보고 있잖아요. 보는 놈이 있듯이 보는 성품이 있듯이 듣는 성품이 있다는 말입니다.


보는 성품과 듣는 성품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냄새 맡는 성품, 맛보는 성품, 감촉을 느끼는 성품, 생각하는 성품은 전부가 다 하나의 성품이다. 하나라는 말이지요. 이 자리에서 본래 자리에서 생각도 일어났다 사라지고, 느낌도 일어났다 사라지고, 의지도 일어났다 사라지고, 모든 사물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나라는 존재도 왔다가 가는 것이지요. 이 본래 자리에서 이 몸뚱이도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생각이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허망한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 어디서 일어났는지 모르지요. 생각이 내 안에서 일어났나요? 그냥 과학에서 그렇게 배워서 그렇게 느끼는 거지. 진짜 생각이 여기서 일어났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목전이라고 얘기하는 목전이라고 굳이 표현했는데 어딘지 모르지만 목전의 어딘가에서 생각이 일어나잖아요. 우리는 여기라고 하지만 진짜 막 화나는 감정이 있을 때 진짜 여기이기만 할까? 막 화가 날 때는 온통 모든 게 다 어두워 보이잖아요. 꼭 여기서만 화나는 거 같지가 않아요? 화나는 데가 어딘지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나 견문각지(見聞覺知) 한다고 그러지요.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그 성품을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갖추고 있다. 견문각지하는 능력을 본래 이미 누구나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 견문각지는 애써서 노력해야만 얻는 것이 아니지요. 볼 수 있다면 누구나 부처입니다. 들을 수 있다면 누구나 부처고. 깨달아 알 수 있다면 누구나 부처입니다.


다만 우리는 오직 봄, 첫 번째의 봄, 첫 번째 자리에서 봄, 분별없이 위빠사나, 있는 그대로 보는 정견,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보자마자 해석하고, 보자마자 분별하고, 듣자마자 생각하고, 듣자마자 해석하고, 듣자마자 그 말의 의미를 따라가고, 그러느라고 분별의 세계를 진짜라고 여겨서 그 분별의 세계로만 보고 듣기 때문에 참된 첫 번째 자리에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 불리는 그 첫 번째 자리의 진실을 보지 못했던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깨달음은 원래 있는 것이고. 우리는 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본래 언제나 구족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애써서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고, 애써서 일부러 이 깨달음을 지켜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깨달음을 뭐 하러 지켜요. 그냥 언제나 어디서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할 필요도 없고 지켜야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고 다음 시간부터는 의상(義湘)스님의 법성게(法性偈)를 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_()_                 


∼∼박수 (이어서 1시간 42초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