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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심과 본래면목

장백산-1 2018. 9. 26. 17:36

선어록과 마음공부 법문(국방부 원광사 불교아카데미-18.6.08)-3 녹취 by 하이얀마음


“부탁드리오니 혜능 행자님, 저를 위해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19)


이 구절이 그 장면이지요. 혜능 행자를 육조로 삼은 다음에 혜능이 남쪽으로 피해갈 때 도명상좌가 쫓아온 겁니다. 쫓아왔는데 가사와 발우를 뺏지 않고 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하는 것이지요.


“그대가 정말 법을 위해 나 뒤를 좆아왔다면, 이제는 모든 인연은 다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대를 위하여 법을 설하겠습니다.” 잠시 침묵한 뒤에 도명에게 말했습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 무엇이 도명 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 


(선어록과 마음공부 p120)


헤능의 이 말을 들었을 때 이때 도명상좌가 깨달았어요. 도명의 깨달음이 되게 간단한 얘기인 거 같지만 이 구조를 가만히 보면 아마도 혜능의 이 얘기를 듣고 바로 깨달았다면 아마 도명상좌는 그때까지 아주 깨달음에 대한 간절하고 깊은 발심이 있었을 것이고, 오조 홍인스님 문하에서 여전히 간절한 발심은 있었으나 도저히 깨닫지 못했었겠지요. 아주 간절하게 터질 거 같은 그 간절함이 있었을 것이고 그 간절함을 품고 있다가 이렇게 혜능을 쫓아왔을 때는 혜능의 이 말 한마디로 그냥 바로 언하대오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혜능의 이 법문을 보면 도명상좌 그대가 정말 법을 위해 나를 쫒아왔다면 이제 모든 인연을 다 쉬어버리고 인연 따라 이리저리로 끄달리는 마음을 잠시 쉬고 내려놓고 분별하는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생각을 따라가고 생각에 끌려가지 말라는 말이지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 무엇이 당신의 본래면목입니까?


혜능의 이같은 법문은 분별하지 말라는 얘기지요. 사람들은 지금까지 분별하는 생각 마음을 나라고 여기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그런 분별을 하지 않을 때 ‘네가 누구냐?’ ‘네 본래면목이 무엇이냐?’ ‘이 몸이 나고 바깥에 있는 건 다른 사람 다른 세상이야’ 라고 분별하면서 ‘이 몸 이게 나야’, 라고 분별하고 있을 때나 또 이 생각은 옳고 저 생각은 틀렸고 이건 내 생각이고 저건 저 사람 생각이고 이런 식으로 나와 너, 선과 악, 옳고 그름, 맞고 틀림, 뭐 크고 작음, 객관과 주관, 길고 짧음, 탄생과 죽음, 가고 옴, 시작과 끝, 건강과 병,이런 둘로 나누는 수많은 생각 마음, 둘로 쪼개는 분별하는 수많은 생각 마음을 탁 쉬어보라는 것이지요. ‘그런식으로 분별하지 않을 때 그때 당신의 본래면목은 무었이냐? 


선(禪)은 사람들이 그 동안에 살아오면서의 이렇게 분별을 하는 습관, 분별해서 끊임없이 내 마음속에서 선과 악, 옳고 그름 처럼 상대적인 개념을 만들어놓고 그 이분법인 상대적인 개념에 빠져서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내 의식이 구축해놓은 세계 그 의식이 구축해놓고 만들어놓은 다음에 그 세계에 빠져 들어가서 그게 진짜라고 여기면서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면서 사는 거짓된 세계, 내가 만들어놓은 가상현실(假想現實, virtual reality)의 세계, 그 세계는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방편상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 분별의 가상세계 너머를 살아본 적이 없지요. 모든 것을 분별하면서만 살아봤기 때문에. 무엇을 판단하든 무엇을 보든 다 분별을 가지고만 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분별너머의 진실된 세계를 보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즉 선악이라는 분별하는 마음을 탁 내려놓도록 이끈 다음에 그냥 분별하지 않을 때 ‘당신은 누구냐?’ 이 같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 분별을 하는 생각 마음으로 듣게 되면 그것은 죽비소리일 것이고 이 소리는 듣기 좋은 소리이거나 듣기 싫은 소리일 수도 있는데요. 또 손가락을 이렇게 들고 왔다 갔다 할 때 이 상황을 두고  ‘저게 뭐하는 거지?’  ‘손가락을 왜 저렇게 흔들고 있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분별을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소리를 들으면 (죽비를 치며) ‘이 소리는 무엇인가?’ 보이는 것을 따라가지 않고, 보이는 대상을 따라가지 않고, 보이는 대상을 따라가서 해석하지 않고, ‘아 손가락을 흔드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해석하지 않고 ‘이것이 무엇이냐?’ 들리는 소리를 개념 따라가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이해를 따라가지 않았을 때 (죽비를 치며) ‘이 소리는 무엇이냐?’ 라는 이 소리가 (죽비를 치며) 그대의 본래면목이라는 얘기지요. 제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바로 그 성품이 본래면목이고 저를 보고 있는 여러분 자신이 바로 본래성품이다.라는 말입니다.


본래성품이 아니면 할 수가 없지요. 눈이 대상을 본다고 하지만 눈은 대상을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있는 겁니다.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건 아니잖아요. 눈이라는 기능이 있어서 내가 대상을 보는 게 아닙니다. 내게 대상을 보는 성품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보는 것입니다. 마네킹에 눈을 멋있게 만들어놓던지 아니면 마네킹에 사람 눈을 쑥 뽑아가지고 갖다가 끼워놓으면 마네킹이 사물을 볼 수 있을까요?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육신이 죽으면 볼 수 없고, 듣는 것도 마찬가지, 보는 것도 마찬가지, 생각하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뚱이가 어떻게 느낄 수가 있어요? 몸뚱이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 몸뚱이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어요. 몸뚱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게 가능할까요? 몸뚱이를 움직이게 하는 놈이 있으니까 움직이는 겁니다. 이 몸뚱이를 어떻게 움직여요 몸뚱이를?. 그럼 얘도 움직여야지. 뭔가 몸이 있으면 다 움직여야 되잖아요? 몸뚱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귀가 듣는 것이 아니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하는 6가지 의식들. 객관과 주관. 그런 것이 뭔가 실체가 있어서 6근, 6경 6식 그것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은 바깥에 색경이라는 인연에 마주쳐서 접촉하면서 저절로 안식(眼識)이 일어납니다. 보자마자 해석하는 마음 인식 그걸 안식이라고 하거든요. 보자마자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의식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 의식은 실체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의식을 실체라고 여겨서 그 의식이 만들어낸 세계, 안식이 만들고 이식이 만들고 나아가 의식이 만드는 세계를을 내가 진짜로 보고 있는 세계라고 착각한다는 거지요. 여긴 내가 있고 바깥에 세상이 있어서 내가 바깥 세계를 보고 이렇게 의식하는 것이라고 환상에 사로잡혀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도 실체가 아니고 색성향미촉법도 실체가 아니고 그에 따르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도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이지요, 본래무일물이라고 텅~비어서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고 분별해서 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느냐?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기 이전에 첫 번째 자리에서 보고 해석 이전에 첫 번째 자리에서 들을 때 그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면목이다 라는 말이지요. 이런 법문을 듣고 꼭 이런 법문을 들어서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냥 길거리를 가다가 찻길에서 ‘빵’ 하는 소리를 듣고도 아니면 애기가 ‘응애’ 하고 우는 소리를 듣고도 바로 거기서 본래성품, 근본성품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 장을 보면 육조단경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나오는데, 인종이 혜능에게 물었습니다.

‘황매산의 오조(五祖) 홍인대사께서는 무엇을 가르쳐 주셨습니까? 라고.

혜능이 답했습니다. ‘특별히 가르쳐 주신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 선정(禪定)이나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인종이 물었습니다.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혜능이 답했습니다. ‘선정이나 해탈 그것은 둘로 나눠진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입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22)


도명상좌를 구제한 다음에 혜능이 산속에 들어가서 사냥꾼들 무리속으로 숨어들어서 사냥꾼들에게 묻혀서 그냥 같이 사냥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랫동안 사냥꾼 속에 숨어있었던 것이지요. 그 기간이 바로 보림(保林)의 기간입니다, 즉 자신의 성품이 분별을 딱 멎는 경험 체험을 한 번 해본 다음에 그런 다음에도 여전히 그 분별을 따라가는 습관, 여태까지 살아왔던 분별의 습관이 계속해서 발동을 하다 보니까 자기가 자기 성품을 확인은 했지만 여전히 분별의 습관 때문에, 이 분별의 습관을 조복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게 보림의 기간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성품을 확인했다고 해서 원만하게 보림이 다 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 이런 사람이 있다고 그래요. 큰스님들 법문을 본인이 너무 갈구했다든지 너무 괴로운 게 있다든지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자신의 인연 따라 그냥 불교에 그렇게 큰 관심도 없었는데 그냥 친구 따라서 이렇게 절에 왔다가 스님 법문을 한 몇 번 들었는데 몇 번 듣고 바로 자기 성품을 확인한 사람도 있다고 그래요. 그런 사람은 힘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심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자기 성품을 확인했을 때는 본인 스스로도 이게 뭔지도 모르겠고 혹은 안다고 할지라도 난 이제 다 됐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특히나 자기 성품을 확인하는 그 순간에는 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떤 가볍고 막혔던 무엇이 쑥 내려가는 이런 환희심을 느끼다 보니까 뭐 그것이 몇 주 몇 달 뭐 이렇게도 오래 지속되다 보니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품을 확인하고 나서 몇 달을 지나고 나면 다시 옛날과 똑같아지거든요. 똑같이 막 분별도 하고 이렇게 휩쓸리고 하다 보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계속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마음속에 발심을 가지고 있거나 선지식의 법문을 듣거나 꾸준히 공부를 하지 않으면 거기서 퇴보하는 것이 아주 쉽습니다. 그래서 견성을 했다고 자신의 근본성품을 확인했다고 해서 공부가 다 됐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이지요, 견성한 것을 이 공부에서는 이제 공부할 준비가 되었다 이렇게 이제 봅니다. 그런데 그 보림은 뭔가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제일 좋은 보림은 선지식의 법문을 그냥 이렇게 듣는 것 이게 이제 가장 좋은 보림인데.


혜능처럼 사냥꾼 무리 속에 들어가서 보림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이 혜능스님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삶 자체가 파격입니다. 우선 스님이 아닌데 5조로부터 법(법)을 전수받은 것도 파격이지만. 남들은 보림을 할 때 어떤 스승 밑에서 오래오래 갈고 닦는 것이 보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냥꾼들 속에서도 보림이 된다는 것이지요. 


보임을 할 때는 그냥 평생 공부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주로 씁니다. 계속해서 평생 공부하는 것이보림이다. 옛날 그 많은 스승들은 그렇게 얘기했어요. 죽을 때까지 계속 공부하는 것이 보림이고 이게 10년, 20년, 30년 보림을 하는데 점점 더 깊어지니 끝을 알 수가 없구나. 뭐 이제 이런 식의 표현을 쓴 것이지요. 주로 선사스님들은 그렇게 얘기를 하시고.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 딱 안착이 된다. 뭐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짧게는 10년에서 뭐 20, 30년 보통 한 30년 걸린다, 보임하는데. 이런 식의 표현을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이 스님이 사냥꾼 무리 속에 들어가서 한 16년 정도를 이렇게 있다가 어느 순간 ‘아 스스로 이제 이 보림이 많이 익었다’, 라는 어떤 느낌이 오신 거지요.


그래서혜능이  ‘이제는 내가 법을 펴야 될 때가 왔구나.’ 이제 이런 생각이 드신 겁니다. 그리고 실제 오조스님도 육조스님에게서 법을 깨달았지만 성급히 법을 펴려고 하지 말고 좀 피해서 어디 숨어 있도록 이렇게 얘기 하셨거든요. 그래서 이제 십몇 년 있다가 이제 산 속 밖으로 내려온 겁니다. 하산했는데 인종(印宗)스님이 열반경인가를 강의를 하고 있을 때 거기 많은 스님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인종스님의 뭐 유명한 비유지요. 깃발이 펄럭이느냐?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니까 바람이 펄럭이는 거냐? 막 논쟁이 붙었을 때 혜능이 “당신들 마음이 펄럭인다.” 라는 얘기를 듣고서는 인종스님이 ‘아 이거 범상치 않구나.’ “우리가 옛날에 들었는데 법이 이 남쪽으로 내려왔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혹시 당신이 그 행자 아니십니까?” 그랬더니 “송구스럽지만 제가 그 행자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발우와 가사를 보여 달라고 해요. 그래서 그걸 보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고서 인종이 정식으로 내가 당신을 스승으로 삼겠습니다 하고서 아직 까지는 행자잖아요. 그러니까 행자를 인종스님의 제자로서 출가를 시켜줍니다.


출가를 시켜주고 나서 다시 거꾸로 스승으로 모십니다. 그래서 육조 혜능스님은 그때서야 정식으로 스님이 된 거지요. 그러고서 인종스님이 이 육조 혜능스님에게 처음으로 묻는 겁니다. 황매산에 있던 오조 홍인스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쳐주셨느냐? 가르침의 핵심을 알려달라는 거겠지요. 특별히 가르쳐주신 것은 없습니다. 특별히 가르쳐주는 방법? 뭐∼ 법이 이런 거다 하는 어떤 내세울만한 뭔가가 없다. 다만 견성이라는 법을 말할 뿐, 선정과 해탈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 성품을 확인하는 것 내가 본래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자기 성품, 본래면목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할 뿐이지, 선정과 해탈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혜능 스님의 이런 얘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되게 헷갈려 합니다. 불교는 선정을 닦아 해탈 열반하는 종교인데 육조 혜능 스님은 좀 사이비 아니야. 실제로요. 제가 그렇게 말하는걸 본 적이 있어요.  도올 김용옥 선생을 까고 이러던 사람이 있는데 여러 사람들이 뭐 둘 중 이 사람이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논쟁을 하다가 유명해진 분이라고 그러는데 그 분이 아마 교학(敎學)쪽으로 불교학을 혼자서 공부를 많이 했나보죠. 그런데 그분이 그랬다는 거예요. 이 공부를 학(學)쪽으로 공부를 해보니까 육조 혜능스님이 펼치는 법은 전법이 아니다. 이거는 사이비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이런 거지요, 대표적으로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선정과 해탈인데 육조스님은 선정과 해탈을 부정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불자가 될 수 있냐? 그런 사람을 어떻게 스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방편(方便)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냥 학문으로 불교공부를 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불교에 있는 모든 가르침은 전부다 방편(方便)입니다. 부처 중생 깨달음 견성 성불 선정 열반 해탈 전부 다 방편입니다. 말로 표현된 모든 것은 전부 다 방편입니다. 즉 방편은 내세울 데가 있어야지만 내세워서 그 효용가치가 끝나면 방편 그걸 반드시 다시 깨부숴버려야만 됩니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으면 내세웠던 방편인 뗏목 그걸 깨부숴버려야지만 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엔 내세울 것이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혜능 스님은 인종 스님에게 본래무일물을 방편으로 견성이라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그저 성품을 본다. 사람들은 계속 중생세간을 보고 있다가 문득 근본성품을 보면 된다. 그렇게 견성이라는 말을 그나마 견성이라는 말도 내세우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가르쳐야 되니까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본래무일물 그걸 견성이라고 이름을 하나 붙여놨지만 선정과 해탈은 말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얘기를 했느냐면, 선정을 먼저 얘기를 한다면 선정은 방편으로는 좋은 가르침이지요. 분별 번뇌 망상을 마구 일으키는 거보다는 마음을 고요히 해서 선정을 지키는 것이 공부에 훨씬 큰 도움이 되지요. 분별 번뇌 망상에 집착해있는 거보다는 마음을 고요히 해서 선정삼매를 오래 이렇게 닦으면 당연히 마음이 안정이 되고 좋겠지요. 그런데 선정(禪定)은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 있고 선정에서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도 선정에 들어가고 선정에서 나오는  그것 때문에 이분법적인 성정은 진짜가 아니라고 느끼신 거지요. 선정에 들어갈 때는 한없이 평화로운데 선정에서 딱 나오고 나면 일상생활에서는 또다시 그냥 분별하는 일상이 이루어지고 이것만 반복이니까. 분별하는 이분법적인 선정이 어떻게 진짜라고 할 수 있느냐? 길을 걸으면서도 선정, 움직이면서도 선정, 이렇게 돼야지만 진짜 선정이지. 어떻게 앉아있을 때만 선정이고 선정에서 나와서는 선정이 깨진다면 그게 어떻게 진정한 선정일 수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해서 선정주의를 버리신 거거든요. 선정은 하나의 작은 어떤 방편 내지는 공부하는데 공부 길에 가는 어떤 재미난 일들 에피소드 정도는 될 수 있겠으나 선정 자체를 도(道)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선정은 이법(二法), 분별법(分別法)이지 불이법(不二法)이 아닙니다. 


선정에 드는 거(入定)와 선정에서 나오는 것이 있지요. 그래서 법회 때 입정이라고 해서 선정에 들어간다, 이러잖아요. 들어오고 나가는 게 있으면 그거는 바른 선정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래서 선정도 둘로 나누는 분별법이기 때문에 분별법은 참된 법이 아닙니다. 그건 방편일 뿐이지요. 해탈도 사실은 선정과 마찬가지로 방편일 뿐입니다. 해탈이라는 방편을 썼는데 이게 말이 가지는 한계에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언어라는 것을 세속제(世俗諦)라고 해서 세속적인 말로 어쩔 수 없이 진리를 설명해야 되니까 말로 설명하는 진리, 도, 깨달음, 본래면목, 부처, 근본성품 등은 진짜는 아니지만 가짜로 어쩔 수 없이 말로 표현을 하는 것을 부득이하게 세속제라고 표현을 하고 또는 그 뭐죠. 문자반야(文字槃若)라고 표현을 해요. 반야는 반야인데 반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문자를 사용해야 되는데


문자로 반야를 설명하면 문자로 말로 설명하는 반야 그건 반야가 아니다. 그렇다고 문자를 쓰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문자라는 허물 있는 방편을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큰스님들이 법문하실 땐 다들 뭐라고 그랬냐면 법문을 하는 사람은 전부 다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쓰는 것과 똑같다. 스스로 똥물을 끼얹을 각오를 하고 하는 것이 법문이다. 왜냐면 스스로 다 허물을 짓는 거라는 말이지요. 방편(方便)은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문자반야라는 거는 진짜 반야가 아닌 거예요. 실상반야(實相槃若), 제법공상(諸法空相, 제법실상(諸法實相)이 참된 반야입니다. 문자반야는 어쩔 수 없어 문자를 사용하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이나 문자는 전부 다 허물이 있다는 겁니다.


혜능이 인종 스님에게 법문을 하는 여기서는 방편인 해탈의 순기능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해탈이라는 방편의 말이 갖는 그 허망한 문자가 지니는 허망한 역기능 그것을 이제 설명함으로써 해탈에 사로잡혀 있는 환상을 깨뜨리는 거지요. 해탈이라는 방편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은 해탈에 구속되는 것입니다. 방편인 해탈이라는 말 자체가 이법(二法), 이분법(二分法)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요. 모든 말 언어는 이법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분 22초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