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죽은 자 · 산 자 집착 푸는 것
수승한 법문없다면 제사에 그쳐
필자가 설립한 단체에서 무려 십년이 넘도록 교리공부를 하던 불자가 모친상을 당했다. 대부분의 불자들이 그러하듯 그 불자도 자신의 어머님을 위해 사십구재를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불자는 필자가 속한 단체는 그만두고라도 평소 발걸음도 하지 않던 먼 사찰에 가서 사십구재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궁금하게 여긴 필자가 물었다.
“왜 가까운 절이나 우리법당에서 조촐하게 천도재를 올리지 구태여 그 먼 절을 택해 재를 올리십니까?”
그러자 그 불자가 대답했다.
“사십구재나 천도재는 도력이 높은 큰스님한테 가서 해야 효과가 있다네요.”
그 불자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혜안이 열린 큰스님들은 영가가 어디로 태어나는지 보실 수도 있고, 만약 영가들이 금생 업으로 나쁜 곳에 태어나려고 하면 도력으로 이를 막아 인간이나 천상으로 인도하신답니다.”
그 말을 듣고 필자는 어이없기도 하고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 어머님 천도재 잘 모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오시라고 인사만 했다.
이 일 역시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요즘도 불자들을 접하다 보면 많은 이들이 이 같은 소견에 빠져 있다. 진정한 사십구재나 천도재의 취지와는 동떨어진 왜곡된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죽은 자를 위한 재는 죽은 자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다. 재는 죽은 자와 산 자들을 동시에 천도시키는 일이라고 해야 옳다. 때문에 천도의 대상은 죽은 자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을 향한다.
천도재를 통해 죽은 자는 생전에 맺은 모든 인연과 업의 속박을 벗어나고 산 자는 죽은 자에 대한 집착을 떨쳐 서로가 해방이 된다. 천도재를 계기로 죽은 자는 산 자들로부터 벗어나고 산 자들은 죽은 자로부터 벗어난다. 그렇기에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죽은 자와 산자들을 위한 법문이다. 죽은 자와 산자들이 집착이라는 병을 푸는 데는 법문 외에 약이 없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문으로 된 의식문과 요령소리 그리고 독경만으로는 천도재의 완성을 기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천도재에 걸맞은 법문이다.
때문에 큰스님 작은 스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출가자 재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큰 사찰 작은 사찰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법문의 주체가 누구건 어느 도량에서 했건 법문의 내용이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북을 치고 징을 울리고 나팔을 불고 반야용선에 띄우는 거창한 재를 올렸다 할지라도 모두가 납득할만한 지혜로운 법문이 없었다면 그 재는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 지극히 큰스님이라 할지라도 법문을 못하고 앉아만 있는 큰스님은 법의 상징이지 법문이 아니므로 별반 공덕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앞의 불자처럼 큰스님의 도량에서 천도재를 하는 것이 법문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무당 같은 능력의 소유자로 큰스님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큰스님이 혜안이 열렸다는 것은 법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열렸다는 뜻이지 초능력으로 귀신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다. 주변에 어떤 큰스님이건 보통 스님이건 영가를 보는 능력을 가졌다는 스님이 있으면 그는 거짓말쟁이 아니면 정신적 장애를 지닌 사람이다. 돌아가신 분의 영정 앞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큰스님이 영가를 혜안으로 보고 있다는 착각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여기에 더하여 지옥이나 축생에 떨어질 영가가 큰스님의 도력으로 인간이나 극락에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혹 위에 난 사마귀처럼 미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천도재에는 큰스님 작은 스님 큰 도량 작은 도량을 구분할 것이 아니다. 계율을 잘 지키고 법문을 잘하는 스님이 계시다면 그 도량이 곧 최상의 도량이다. 그런 도량을 택해 재를 올린다면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에게 공이 이익이 있으리라.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455호 / 2018년 9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