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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의미의 좌선(坐禪)과 선정(禪定)이란?

장백산-1 2018. 10. 14. 18:39

선어록과 마음공부(법상스님 국방부 원광사아카데미-18.6.22)-1 녹취 by 하이얀마음


올바른 의미의 좌선(坐禪)과 선정(禪定)이란?


오늘은 140쪽이고요. 올바른 좌선과 선정부분입니다.


“무엇을 일러 좌선(坐禪)이라고 하는가? 장애도 없고 막힘도 없으니, 바깥 모든 분별인 좋고 나쁜 경계를 접하더라도 생각(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러 좌(坐)라고 하고, 안으로 자기 본성(근본성품)을 봐서 마음(생각)이 부동(不動)함을 일러 선(禪)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러 선정(禪定)이라고 하는가? 바깥에 보이는 분별된 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 하고, 안으로는 마음(생각)이 산란하지 않은 것을 정(定)이라 한다.


근본성품(본성)은 언제나 스스로 깨끗하고 안정되어 있으나 단지 바깥 대상(경계)를 보고 경계를 생각하면서부터 마음이 일어나서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이다. 만약 바깥 온갖 경계(대상)를 보고서도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참된 정(定)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40,141)


이제 지금부터 조금 더 육조 혜능스님께서 그 당시 불교계에서 보편적으로 쓰고 있던 좌선 선정 같은 그 단어들 용어들 또 불교적인 어떤 고정관념들 뭐 이런 방편(方便)에 치우치는 것을 타파하고 참된 본질(本質)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좌선 선정 같은 방편(方便)을 거둬들이고 타파해서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좌선(坐禪)이나 선정(禪定)에 대해서 혜능스님 전에는 좌선하면 모든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을 좌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혜능스님의 육조단경을 보면서 제가 서문에서 ‘오래된 미래다’, 라고 했던 것이 한국불교가 가야 할 어떤 미래, 그리고 또 한국불교에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들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텍스트가 육조단경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근원의 텍스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육조단경 금강경 반야심경 화엄경 법화경 뭐 이런 거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거기 없는 것들 새로 만들어진 것들, 원천 텍스트에 없는 것들이 지금 거의 우리가 불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들이지요. 반야심경 금강경 육조단경에 ‘수행해라’ ‘절해라’ ‘염불해라’ ‘다라니 외워라’  ‘좌선해라’ 이런 거 없습니다. ‘뭘 해라’ 이런 것들이 전혀 없지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절수행, 염불수행, 다라니암송수행, 좌선수행 그거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그거 안 하면 부처님한테 자꾸 죄짓는 거 같고 죄의식도 느껴지고 ‘야 내가 이거 게으른 수행자가 아닌가?’ 하는 한스러움도 묻어나고 또 그렇게 수행위주 좌선위주 이런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유위(有爲)의 수행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수행을 잘하고 못하는 사람의 차별이 생깁니다. 


오조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 좌선하는 문화 내지는 그런 유위적인 공부 그것을 좌선단신이라고 부르는데 앉아서 좌선하면서 마음을 관찰하거나 묵묵히마음을  비추어보거나 이런 수행들이 많았었던 거지요. 보편적으로 이제 더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이 육조 스님께서 그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뒤에 마조와 뭐 회양의 일화에서도 나오지만 ‘좌선해가지고 부처가 되느냐’ 라는 이야기들은 선어록에 아주 무수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방편(方便)으로서의 좌선, 선정 그것을 아주 굳건히 믿고 있는 것이지요. 


육조단경 ‘여기서도 무엇을 일러 좌선이라고 하느냐?’ ‘진짜 좌선은 뭐냐?’ 앉아있는 게 좌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법문에는 장애도 막힘도 없다. 아주 툭 트여 온전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밖으로 모든 좋고 나쁜 분별 경계를 당하더라도 생각(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러 좌(坐)라고 하고, 즉 이 육근(六根) 바깥에 육경(六境)이라는 여섯 가지 분별인 대상 경계(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현상)이 있는데 바깥에 있는 수많은 대상 경계가 내 의식 속으로 들어올 때 사람들은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상(分別相)을 가지고 바깥 대상 경계를 해석 하지요. 


그런데 온갖 바깥 대상 경계를 접하더라도 육조단경 여기는 생각(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생각(마음)이 일어나기는 하는데 생각(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그냥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걸 좌(坐)라고 한다면 그냥 죽은 사람은 다 좌선을 잘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깥 분별인 대상(경계)을 접할 때 생각(마음)은 그대로 다 일어나지만 생각(마음)은 그냥 인연 따라 저절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거지요. 바람이 부는 것처럼 바람이 왔다가 가고 왔다가 가듯이 생각(마음)은 그냥 마구잡이로 끊임없이 왔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생각)을 진짜로 여기고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생각(마음)이 나라고 여겼습니다. 바깥 분별인 대상(경계)를 접했을 때 일어나는 생각(마음)이 나라고 동일시(同一視)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마음) 속에서 생각(마음)으로 부정적인 생각(마음)을 일으키면 ‘나는 나쁜 사람이야.’ 밝은 생각(마음)을 일으키면 ‘나는 좋은 사람이야.’ 이렇게 분별하는 생각(마음)을 믿고 생각(마음)을 신뢰해서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를 좋게 생각할 때는 약간 걱정스럽습니다. 두려워떨어요. 왜 그러냐면 나는 나를 잘 알거든요.


내가 살아오면서 내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늘 마음에서 온갖 나쁜 생각도 일어난다는 걸 알거든요 남들은 몰라도. 바깥으로 표출은 안 해도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닌 데 남들이 나를 너무 괜찮은 사람으로 막 얘기할 때 되게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나를 아는데.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아니야.’ 이런 얘기를 이렇게 많이 하게 된다는 거지요.


과거에 일어났던 안 좋은 생각(마음)들을 나라고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뭐 나를, 나는 좋은 사람이야 라고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나쁜 사람이야 라고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마음)을 믿어서 그 생각(마음)이 나라고 동일시해서 내가 좋으니 나쁘니 하고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바깥 분별세계인 대상(경계)을 접했을 때 일어나는 생각(마음)은 그냥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손님과 같은 것이라서 생각(마음)은 결코 내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덩치가 커가면서 새옷을 계속 바꿔 입고 또 안 맞으면 버리고 또 사 입고 또 구멍 나면 또 버리잖아요, 옷은 필요할 때 잠깐 쓰다가 버리는 것이 듯이 이 생각(마음)이라는 것도 내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냥 잠깐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 어떤 생각(마음)도 내 것이 아닌 거지요.


이처럼 생각(마음)의 실체(實體)를 바로 보게 되면 ‘아 생각(마음)이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이구나.’ ‘생각(마음)은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이구나.’ 그래서 ‘이 생각(마음)이라는 것을 생멸법(生滅法)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 생멸법(生滅法)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 이 세상에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모든 것은 참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는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生滅法)을 내 거라고 여겼고 진짜 나라고 여겼습니다.


생각 감정 느낌, 남들이 나한테 한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받고 또 내 감정이 외롭고 우울하면 나는 되게 외로운 사람이고 우울한 사람이구나 하고 이렇게 절망에 빠지거나 합니다. 그런데 고독감 우울감 상실감 그런 것들은 그냥 왔다가 가는 겁니다. 그것들은 내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감정들이 깊은 어떤 좌절이나 뭐 이런 감정들이 올 때 그 감정들을 나라고 동일시(同一視)해서 그것들이

나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내가 아닙니다. 감정은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바뀌면 느낌 감정은 계속해서 바뀔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 라고 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가르침을 이야기 하는데. 이처럼 느낌 감정, 생각 이미지, 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분별심 인식 또한 그냥 왔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기에 ‘아 왔다가 가는 실체가 없는 허망(虛妄)한 것이고 공(空)한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에 끌려가지 않고 구속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에 묶여 구속당하지 않고, 생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필요할 때 생각을 적절히 쓸 수 있는 거예요. 때로는 이 생각을 없애야 된다 하는 무념처(無念處) 무념법(無念法) 이런 얘기를 하니까 명상을 통해서 생각을 없애야 된다, 라는 데 과도하게 사로잡혀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이 생각을 버리려고 막 기를 쓰는 사람이 있어요 실제로. 제대로 된 명상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랬던 사람이 그 명상을 통해서 깊은 삼매를 증득하기도 하고 뭐 그러다가 자신은 이제 명상을 통해서 이 생각을 끊었다, 라고 여기고 생각을 끊는데 많은 시간 성공을 한다, 라고 여기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현실에서 봤을 때 아주 뭐랄까 부적응자. 현실 부적응자처럼 주변 사람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그런  사람을 보고서는


“스님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저런 사람의 저 모습이라면 사실 저는 지금 불교 명상을 하기가 너무 두렵고 겁납니다.” 저 사람은 너무 이해력도 지금 떨어지고 스스로 그러는 건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너무 혼자만의 어떤 세계 속에 빠져들어서 너무 고요함 속에 빠져들어서 그 어떤 사람과의 소통이라든지 이런 것들 하지도 못하고 거의 병자같이 느껴지는데.


만약 내가 공부해서 얻는 어떤 결과가 저런 것이라면 저는 불교 공부를 못하겠는데요. 내가 스님이 된다면 모를까. 사회생활도 해야 되는데 직장생활도 해야 되는데 어떻게 저거를 하겠습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지요. 또 실제 어떤 분은 명상에 성공적으로 그 명상을 잘 하는 분. 그래서 명상단체에서 아주 최고봉에 이르렀다, 라고 다 추앙받는 그런 분들이 계셨는데.


사람들한테 그∼ 분은 도대체 어느 정도 명상을 했길래 그렇습니까? 물어 보면 아 그거는 한 번 명상에 들어가면 일주일 동안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그냥 앉아서 좌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그렇게 하면 생활이 안 되니까 가끔 하고 한 번 들어가면 하루 이틀정도만 그냥 할 뿐이지. 마음먹고 딱 앉으면 일주일도 너끈히 앉아서 명상을 한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상당히 대단하고 위대한 어떤 명상가인 것처럼 얘기하더라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명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우리 육조 스님 오기, 중국으로 불교가 넘어오기 이전에 인도에서 뭐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법을 전하고 또 그다음 조사 그다음 조사해서 이렇게 조사의 맥이 이어지는데 그 몇 번째 조사였던지 그 조사는 누가 보더라도 아주 훌륭한 명상가였습니다.


좌선을 너무나도 잘 했지요. 그래서 하루 종일 거의 좌선을 하다시피 했고 계율도 철저하게 지키고 누가 보더라도 아주 영적인 스승이었습니다. 아주 최고의 모범적이고 성실하고 기도 수행을 열심히 하는 어떤 헌신적인 수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스승이 옆에 와서 보니까 너무나도 훌륭한 스승인데 깨달음이 없는 거지요. 그 스승은 오로지 ‘그 명상을 해야 한다,’ 라는 그 겉모습 앉아있는 좌선에 집착하는 모습 그리고 계율을 지키는 훌륭한 도덕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라는 그 억압. 이런 것은 있을지언정 진정한 자유로움이 없던 반쪽짜리 스승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스승이 반쪽짜리 이분에게 아주 좀 혼을 내기도 하고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 스승을 막 뭐라고 반발을 하는 거지요. 당신이 도대체 뭐 길래 당신은 늦잠도 자고 뭐 제대로 계율도 지키지 않는 거 같고 먹는 것도 그냥 뭐∼ 먹고 싶을 때 막 먹고 좌선도 제대로 안하고 그냥 막 사는 거 같은데. 당신 같이 이렇게 대충대충 사는 그런 중이 말이야 오히려 이렇게 큰 스님 이런 훌륭한 우리 스승님을 욕보여선 안 된다. 하면서 막 혼을 내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정작 이 반쪽짜리 스승은 그분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을 안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그분에게 법을 듣는 어떤 그런 장면들이 나오고 그래서 결국 깨달음을 얻는 뭐 이래서 법을 전해 받는 이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린 계율이든지 뭐 좌선이든지 겉에 드러나는 모습들. 겉에 드러난 모습이 위대하고 훌륭해 보인다? 그것이 진정한 스승인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좌선(坐禪)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게(五戒) 중에 불음주(不飮酒)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 나는 남편하고 저녁 때 맥주 한 잔하고 이러는데 나는 정말 절에 갈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고. 가장 기본적인 계율도 지키지 못해가지고 어떻게 깨달음을 얻겠느냐?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혹시나 있을 수 있는데 전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뭐 막행막식 하라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고요. 최대한 계율을 지키도록 노력을 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계율을 지킨다, 라는 개념이 술을 입에 한 방울도 안 댄다, 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술이 나를 휘두를 정도가 되어서 술에 막 휘둘릴 정도가 되어서 그렇게 먹는다면 그것은 계율을 어긴 것이겠지만 남편이 힘들게 어디 출장 가서 고생하고 집에 들어와서 맥주 한 잔 먹고 싶어 하는데


당신은 “불음주도 모르냐?” “당신 혼자 먹어라.” 그리고 “당신 혼자 나쁜 놈이 돼라.” “나는 철저한 청정한 계율을 지키겠노라.” 라는 듯이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게 계율의 어떤 진짜 모습도 아니고 술을 먹으면 깨달음을 못 얻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깨달음을 못 얻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출가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못 얻느냐? 전혀, 전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잘 알려져있듯이 앙굴리마라 라고 하는 살인자는 99명을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님께서 99명을 죽였는데 본인이 와서 “부처님 제가 참회하오니 저를 구제 해주십시오.” 이런 것도 아니에요. 99명을 죽인 살인마인데 100명 째 누굴 죽일까 고심하다가 심지어 우리 엄마를 죽여야지. 그래서 100명을 채워야지. 이런 나쁜 생각을 하고 있던 앙굴리마라에게 석가모니부처님이 직접 찾아갑니다.


그래서 그것도 부처님을 죽이려고 막 칼을 들고 쫓아오는 사람을 멈춰 세워서 구제를 해준 다음에 출가자로 바로 받거든요. 본인이 먼저 참회하고 온 것도 아닌데 부처님이 먼저 찾아가서 그를 참회시키고 공부를 하도록 만들어서 머지않아 아라한과를 증득하거든요. 이 착한 것은 도(道)가 아니다. 뭐 이런 표현도 있는데. 도(道)를 얘기하는 데 있어서 착한 것을 얘기하면 그건 이법(二法), 분별법(分別法)입니다.


착하고 착하지 않은 선하고 악한 것을 나눠놓고 그 중에 선을 선택하는 게 불교가 아닙니다. 분별 개념인 선과 악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의식에 따라서 뭐 상황에 따라서 동일한 행동이 어디에선 선이 되기도 하고 어디에선 악이 되기도 하거든요. 선과 악이라는 분별법에 사로잡혀 있으면 선과 악이라는 분별법을 넘어서는 불이법(不二法)이라는 참된 진리에 가까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 안에서는 이렇게 뭐 계율을 어겼으니까 나는 부처님, 깨달음과는 멀다. 나는 과거에 이런 나쁜 행동을 했으니까 부처님,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거야 라고 전혀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런 생각 자체가 전부다 그 생각을 진짜라고 여기는 허망한 착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각을 나라고 여기니까 내가 나쁜 생각을 하고 나서 ‘내가 죄인이야.’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실체가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나쁜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내가 죄인이 아닌지요? 그 나쁜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졌는데. 왔다가 갔는데. 죄를 지은 과거의 그 놈이 지금의 나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거든요. 옛날에 10년 전에 걔가 죄를 지은거지 지금 얘가 죄를 지은 건가요? 10년 전에 걔가 지금 얘라는 것도 뭔가 연결된 그때부터 나로 지속되는 어떤 자아가 있을 것이라는 그런 어떤 허깨비 같은 아상(我相) , 에고, 자아의식이 만들어낸 착각, 환상입니다.


과거의 걔와 지근의 얘가 뭐가 연결된 어떤 실체성 그런 것들은 없습니다. 그런것들은 내 의식에서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참회를 하지 말아야 된다, 라는 얘기가 아니라 참회를 하고 나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다고 해서 그렇다고 내 마음 안에서 참회하고 내가 저 사람한테 잘못했는데 난 내 마음 안에서 참회했으니까 끝. 이래선 안 되고 상대방에게 가서 할 수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참회를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해야지요.


왜냐하면 세간법(世間法, 분별법인 이 세상 현상세계)에서는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분명하게 있으니까. 세간법에서의 인과응보에서 벗어나려면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가서 상대방 마음이 풀어질 만큼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녹여줘야지만 인과응보의 과보(果報)를 받지 않는 것이지요. 엄청난 살인마 앙굴리마라도 깨달음은 얻었지만 옛날에 죽였던 사람들의 부모 자식 형제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이 앙굴리마라가 가사장삼을 여법하게 입고 동네로 탁발을 나가면 나갈 때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부터 돌이 날아와서 맞고 피가 터지고 매일같이 얻어터지느라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도 못했을 정도로 한동안은 그 과보를 받았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상 현상세계에서의 인과응보는 분명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세간상에서의 인과응보가 아닌 출세간상(出世間相)에서의 법에서는 우리는 법에서는 한 치도 오염될 수가 없습니다.


바깥에 드러난 이 껍데기 왔다가 가는 이 껍데기 몸뚱어리도 왔다가 가고 마음 느낌 감정 생각 욕망 욕구 충동 의식 의지 인식 분별심 전부 다 왔다가 가는 껍데기들입니다. 이 껍데기는 왔다가 가는 거기 때문에 진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껍데기가 했던 것에 껍데기는 오염도 될 수 있고 다시 깨끗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 있는 참된 자성(自性), 참된 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결코 오염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외부의 좋고 나쁜 분별인 대상 경계를 접했을 때 내 안에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는 것, 생각을 믿지 않는 것, 그랬을 때 그것이 바로 좌(坐)라고 합니다. 앉아있는 것이 좌(坐)가 아니라 앉아서 몸을 이렇게 딱 붙잡아놓고 어디 한 공간에 앉아가지고 여기에 딱 앉아있는 이것이 좌(坐)가 아니라 바깥 수많은 분별인 대상 경계를 접(接)했을 때


그 경계에서 좋다 나쁘다 하는 생각을 일으켜서 좋은 건 집착하고 싫은 건 거부하고 미워하면서 좋으면 집착해서 내 걸로 만들지 못해 괴로워하고 싫은 거는 밀쳐내고 싶은데 버리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좋은 거는 막 사랑하고 애착하면서 싫은 거는 막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면서 밀쳐내려고 애쓰는 그런 생각을 쫓아가지 않는 것 그 마음이 진정한 좌(坐)다. 앉아있는 것이 좌(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안으로 자기 본성(本性)을 보아서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부동한 것을 일러 선(禪)이라고 한다.  이렇게 왔다가 가는 생멸하는 것들(生滅法)이 아니라 왔다가 가지 않는 자기의 본래성품, 생멸하지 않는 불생불멸하는 참된 자기의 본성(不生不滅法) 그 본성을 보아서 마음이 부동한 것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것은 하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거지요


분별을 하는 생각 마음이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 파도가 수없이 많이 치면 파도입장에서는 요란하게 파도가 칠 때도 있고 잔잔할 때도 있고 막 폭풍우가 몰아치면 거칠게 파도가 칠 때도 있거든요. 파도입장에서는 거친 게 있고 잔잔한 게 있지만 바다입장에서는 언제나 바닷물로 똑같습니다. 얘네는 아무리 쳐봐야 쳤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올 거거든요. 바다의 심연은 언제나 고요한 것처럼 그러나 겉에 드러난 파도는 마구 인연 따라 휘둘리는 것처럼. 그러나 바다 밑은 언제나 이렇게 고요하듯이. 진정한 부동이라는 것은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그 깊은 곳은 움직이지 않는 그 부동심(不動心)을 유지하는 것을 일러 선(禪)이라고 합니다. 


좌선(坐禪)을 해서 선정(禪定)을 닦는다고 하잖아요. 무엇을 일러 선정(禪定)이라고 하는가.


바깥에 보이는 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바깥에 보이는 모습, 상(相), 분별상(分別相)에 얽매여서 내 머릿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딱 둘로 나눠놓습니다. 두 개의 상(相)을 분별해놓았지요. 그래서 좋아하는 상(相)이 오면 집착하고 싫어하는 상(相)이 오면 미워서 버리려고 애쓰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相)에 얽매이고 상(相)에 집착합니다. 바깥에 보이는 모습 상(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고 한다.


선(禪)을 닦는 것은 상(相)에 끌려가지 않는 겁니다. 상(相)에 얽매이지 않고 상(相)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 항상 선(禪)은 바깥에 보이는 모습 상(相)을 따라가지 않는 것. 이 공부가 선(禪)의 공부입니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다.” ‘어 마른 똥막대기가 선(禪)이구나.’ 그래서 마른 똥막대기를 말라비틀어진 막대기에 똥이 묻은 막대기를 자꾸 생각하면서 ‘이 똥막대기가 왜 법(法)일까?’ 왜 도(道)일까?, 왜 부처일까?, 왜 깨달음일까?,  ‘왜 진리일까?’ 이걸 선을 닦아야 되는데 하고 마른 똥막대기를 생각하면 그것은 바깥에 모양을 따라가는 거지요. 마른 똥막대기라는 말이 지니는 개념(槪念)을 따라가는 거지요.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른 똥막대기라고 하든 마 삼근이라고 하든 컵이라고 하든 마이크라고 하든 선풍기라고 하든 카메라라고 하든 하늘이라고 하던 바다라고 하든 예수라고 하던 하느님이라고 하던 말의 뜻을 따라가고 말의 개념을 따라가고 모양 상(相)을 따라가는 것.


모든 말은 말이 의미하는 지칭하는 대상이 있지요. 마른 똥막대기라는 말은 마른 똥막대기라는 어떤 모양 상(相)을 그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마른 똥막대기라는 이 말을 얘기하면서 마른 똥막대기 이것이 법(法), 도(道), 부처(佛), 깨달음, 진리, 하나님, 선(禪)이다, 라고 할 때 마른 똥막대기라는 이 모양 상(相)을 따라가지 말라는 겁니다. 모양 상(相)을 따라가기 이전에 마른 똥막대기라는 그 소리가 나오는 첫번째 자리, 분별하는 개념에 끌려가지 않는 텅~빈 본래자리가 법(法)의 자리, 도(道)의 자리, 진리의 자리, 깨달음의 자리, 하느님의 자리, 부처님의 자리, 선(禪)의 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입니다. 


분별하는 개념에 끌려가지 않게 되면 부처 하는 소리나, 컵 하는 소리나, 예수 하는 소리나, 진리 하는 소리나, 마른 똥막대기 하는 소리나, 도(道) 하는 소리나, 법(法) 하는 소리나, 할 하는 소리나, 하느님 하는 소리나, 깨달음 하는 소리나, 부처 하는 소리나, 똥오줌 하는 소리나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이지요. 이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가는데 분별을 하는 개념을 따라가지 않으면 말이 지칭하는 바 모양 상(相)을 따라가지 않으면 어떤 말 무슨 소리가 나오던지 간에 그 말이나 소리는 전부 다 '똑같은 하나'를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어떤 말, 어떤 소리가 나던 그것들이 나오는 첫번째 자리는 똑같은 겁니다. 무슨 말을 하던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선(禪)은 바깥에 보이는 모습, 상(相), 분별상(分別相)에 얽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 합니다. (31분 37초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