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발보리심(發菩提心)은 어떻게 내야 합니까?

장백산-1 2019. 1. 11. 17:26

“발보리심(發菩提心)은 어떻게 내야 합니까?”


황벽이 답했다.


“보리(깨달음, 부처, 마음)는 얻을 바가 없으니, 그대는 다만 보리는 얻을 바가 없는 것이다 라는 마음을 내기만 하라. 결단코 한 법(法)도 얻을 것이 없다는 이치가 밝아지면 그것이 곧 보리심이다. 보리는 머물 곳이 없고, 그러므로 얻는 

자도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2)


보리의 마음, 보리가 깨달음이거든요. 깨달음을 얻겠다,라는 마음을 내는 것이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발보리심’을 내는 것이냐’ 깨달음은 얻을 바가 없으니, 다만 깨달음은 얻을 바가 없는 것이다라는 마음을 내기만 해라. ‘한 법(法)도 얻을 것이 없다는 이치가 밝아지면 그것이 곧 보리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거지요. 이제까지 사람들은 깨달음, 보리, 부처, 마음을 얻어야 되겠다 라고 마음을 내는 것을 보리심이라고 알았는데, 깨달음을 얻겠다 라는 그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보리심이다. ‘깨달음을 얻겠다’라는 보리심을 낼 때, 발심을 할 때, 그때 그 발심에는 무엇이 있느냐면 방편(方便)으로 일단 그같은 발심은 하지만 그 방편에는 뭐가 있냐면, ‘나는 깨달음을 얻을 거야’라는 마음, ‘나는 지금 부처가 아니야’,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어’, 나는 지금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는 전제, 즉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는 분별(分別)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사람이니까 ‘깨달아야지’ 하는 발심을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부처는 깨달음, 보리를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 이미 부처로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 지금 이미 부처라는 사실을 안다면 확인한다면 ‘부처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거나, 뭐 ‘깨달음을 얻겠다’라는 마음을 낼 필요가 없겠지요. 본래 이미 보리, 깨달음, 부처가 완전하게 ‘얻어져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거니까. 그렇게 되면 ‘깨달음을 얻겠다’라는 마음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중생심은 깨달음을 얻겠다’ 혹은 ‘내 참마음을 확인하겠다’ 혹은 ‘모든 괴로움을 없애겠다’고 하는 이 마음이 바로 중생심(衆生心), 즉 분별심(分別心)입니다.


왜냐면 마음이 필연적으로 마음을 일으키는 것 그 자체가 어리석은 중생이라는 반증이니까. 그래서 더 이상 추구할 바가 없을 때, 더 이상 원하는 것도 없고 추구하는 것도 없이 그냥 푹 쉬게 됐을 때, 그것이 진정한 마음공부이고, 진정한 깨달음이고, 그것이 진정한 ‘발보리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뭘 어쩌라는 거지’ ‘발보리심’을 내라고 했다가 ‘발보리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진정한 ‘발보리심’이라고 하니까.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얘기야’ 하고 우왕좌왕 합니다. 뭔가 정답을 이렇게 족집게 과외처럼 뭔가 ‘이렇게 해라’하고 딱 집어줘야 되는데. 여기서도 계속해서 ‘발보리심, 보리심을 일으켜라’라고 해놓고, ‘보리심을 일으키는 자는 벌써 중생이다’,  ‘한 법이라도 얻겠다’라는 마음이 없는 마음,  ‘아무것도 얻을 바가 없다’라는 마음, 그 마음이 보리심이다.


즉 다시 말해서 보리심을 내도 안 되고, 내지 않아도 안 된다는 얘기고요. 수행을 해도 안 되고, 하지 않아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수행을 하거나 하지 않음 어느 한쪽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거예요. 마음, 의식이 이거 아니면 저거를 딱 취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취사간택을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어느 것도 취하지 못해야 이 분별심(分別心)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도 가도 못하는, 꽉 막히는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분별심(分別心)에게 밥을 준다 그래요. 분별심에게 밥을 주고 양분을 주고 분별심이 원하는 거를 자꾸 주는 버릇을 끊는 게 마음공부입니다.


그런데 이 분별심(分別心)은 취사간택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이거 아니면 저거를 선택하기를 원해요. 그래서 분별심은 뭐든지 명확하게 해주길 원합니다. 분별심은 체계화시켜서 이러 이러 이러한 게 불교니 너는 이러 이러한 원리에 따라서 이렇게만 하면 결국에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게 하면 그 방법을 취할 것이고 그 결과를 취할 것이고 그러면 분별심은 되게 쉬운 것이지요, 그렇게만 하면. 모든 것을 분별을 하는 마음속에선 끊임없이 그렇게 뭔가 정해지길 원하고 뭔가 딱 떨어지는 결론을 원합니다.


그런데 아까도 부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라고 했는데. 지금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 지금 이미 부처라는 사실을 안다면 확인한다면 ‘부처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거나, 뭐 ‘깨달음을 얻겠다’라는 마음을 낼 필요가 없겠지요. 이미 ‘얻어져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거니까. 그렇게 되면 ‘얻겠다’라는 마음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중생심은 깨달음을 얻겠다’ 혹은 ‘내 참마음을 확인하겠다’ 혹은 ‘모든 괴로움을 없애겠다’ 이 마음이 바로 중생심입니다.


왜냐면 그 마음이 필연적으로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중생이라는 반증이니까. 그래서 더 이상 추구할 바가 없을 때, 더 이상 원하는 것도 없고 추구하는 것도 없이 그냥 푹 쉬게 됐을 때, 그것이 진정한 공부이고, 진정한 깨달음이고, 그것이 진정한 ‘발보리심’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다고 해서 이제 이런 말 자체가, ‘그러면 어쩌라는 거지’ ‘발보리심’을 하라고 했다가 ‘발보리심’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발보리심’이라고 하니까.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얘기야’ 하고 뭔가 이렇게 족집게 과외처럼 뭔가 ‘이렇게 해라’하고 딱 집어줘야 되는데. 여기도 계속해서 ‘발보리심을 보리심을 일으켜라’라고 해놓고 ‘보리심을 일으키는 자는 벌써 중생이다’ ‘보리심을 한 법도 얻겠다’라는 마음이 없는 것. ‘얻을 바가 없다’라는 마음, 그것이 보리심이다. 이렇게 얘기한다는 거지요. 즉 다시 말해서 보리심을 내도 안 되고, 내지 않아도 안 된다는 얘기고요.


수행을 해도 안 되고, 하지 않아도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수행을 하거나 하지 않는 어느 한쪽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거예요. 의식이 이거 아니면 저거를 딱 취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취사간택을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어느 것도 취하지 못해야 이 분별심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도 가도 못하는, 꽉 막히는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분별심에게 밥을 준다, 그래요. 밥을 주고 양분을 주고 분별심이 원하는 거를 자꾸 주는 버릇을 이제 끊는 게 공부입니다.


뭐 이런 식으로 어디 한쪽에 딱 머물지 못하게. ‘무주법’ 머물지 못하게 하고, 취사간택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진정한 ‘발보리심은 얻을 바가 없구나’ ‘지금 이미 내가 부처구나’ 그런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되게 공부를 하는 사람은 뭔가 제대로 공부가 됐다면 딱히 뭐 얻거나 이럴 것이 없겠지요. 지금 이미 우리가 이대로 부처이기 때문에.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삶 전체를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이 절에 와서 이 법문을 듣는 것을 통해서 내가 내 삶 속에 깊이 개입되어 살다가 잠시 여행을 떠나는 걸 우리가 막막하게 막연하게 좋아하고 동경하는 이유가 여행을 떠나있게 되면 내 삶이 삶속에 빠져가지고 하나하나가 전부다 실체가 있는 것 같아서 그 무게감에 막 빠져 살다가. 잠시 여행을 떠나와 있을 때 그거를 객관적으로 볼 수가 있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여행을 좋아하는 거예요. 여유 있게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가 있으니까. 이렇게 떨어져서 보게 되면 심각함이 덜해져요. 그런데 이 마음공부가 그거거든요. 삶 속에 있으면서 삶에서 떨어져 나오는 겁니다. 삶 속에 이렇게 있다가 법문 들으러 한 번씩 절에 와 있는 동안에 ‘내가 그동안 삶과 얼마나 동일시를 하며 살았는가’ ‘삶 속에 얼마나 깊이 개입되어서 그 삶이 진짜인 걸로 착각하고 진짜인 걸로 집착하고,


내가 삶 속에서 원하던 것들에 얼마나 과도하게 집착하며 살았든가’ 그걸 이렇게 법문을 들으면서 한 번씩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 내가 그렇게까지 깊이 개입될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까지 깊이 동일시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걸 왜 내 인생과 동일시하고 살았을까’ 여러분 아까 말한 것처럼 삶과 강과 대지와 해와 달과 별 삼천대천세계가 전부 ‘나’지.


이 일을 하고 있는 이게 ‘내’가 아닙니다. 이 돈을 벌고 있는 직장 속에서의 ‘나’, 그게 내가 아닙니다. 나의 본질은 나의 본성은 그런 제한된 존재가 아닌 것이지요. 온 우주 전체가 바로 내 마음인데. 내가 그 안에 들어가서 개입되기 시작하면 그 마음속에 구속돼서 이게 ‘나’인 걸로 착각하는 거지요. 뭔가 이렇게 그냥 게임 같은 걸 하나 해도 그 게임에 내기를 한다든가 해서 그 게임을 시키면 그 게임 속에 갑자기 사람들이 동일시 돼가지고 거기서 막 하잖아요.


이것처럼 동일한 일인데 그 당시는 생멸법이라고 느껴서 너무 심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까 아무것도 아닌, 즉 이것처럼 요. 우리 삶에서 등장하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그 중차대한 괴로움. 내 아들이 대학교를 좋은 데 못 간다든지. 뭐 이런 중차대한 괴로움이라고 느끼는 것들이 나중에 또 10년, 20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내 의식이 거기 사로잡혀있는 동안 그동안에는 그게 진짜라고 느껴지는 거예요. 실체라고 느껴지고 생멸법으로 느껴집니다. 생겨나면 좋고 사라지면 괴롭고, 이렇게 느끼는 거지요. 그러데 내가 집착을 거두기 시작하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중에 그것을 돌아봤을 때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것처럼. 사실은 지금 느끼고 있는 모든 괴로움들이 실상은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입니다. 그렇게 큰 심대하고 중차대한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거기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그게 너무나도 크고 중요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그러니까 실상은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으로 아무 일이 없어요. 일어났지만 일어난 바가 없습니다. 그냥 가볍게 지나가는 거지요. ‘여여하게’ 거기 크게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그냥 여여한 일들, 그것들이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심각하고 중차대한 일이었던 것이지요. 즉 동일한 일이 어떤 의식에서는 되게 중요하게 느껴지고 어떤 의식에서는 되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요, 똑같은 사람이 한 생각 딱 돌이키고 나면.


‘이것도 또 지나가리’라는 말이 되게 중요하다고 여기는데, 모든 게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경전에 보면은 ‘자식들은 나의 상속자가 아니라. 자기 업의 상속자다’ 이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자기 업 따라가는 거지. 내 의지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고민 고민을 해도 갈 길은 가고, 안 했어도 갈 길을 갈 건데. 내가 스스로 마음고생만 많이 한 거지요. 그래서 과도하게 우리 삶에서 물론 많음 마음을 내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얘기하는 마음을 내는 건 뭐냐면 항상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하잖아요. 집착하지 말라는 겁니다. 머물지 말라는 건 집착하지 말라는 거예요. 집착 없이 마음을 날 때는무슨 마음을 내도 좋아요. 성공에 대한 마음, 서울대 박사되는 마음, 뭐 어떤 마음도 다 내라는 거지요. 그런데 거기는 반드시 집착할 바가 없어야 한다. 집착할 바가 없어야 합니다. 삶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미지의 뭔가입니다.


삶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확실성’ 이런 것이 없어요. 어떻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게 있겠습니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밖에 없어요. 오직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밖에 없는데. 어떻게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람들이 마음 하나 가지고 만들어내고 무너뜨리고 그렇게 하는 소꿉장난일 뿐이지. 그러니까 모든 괴로움은 마음이 만든 괴로움, 환상(幻想)입니다. 그래서 진정 지혜로운 마음을 내는 방법은 집착 없는 마음을 내는 것. 집착 없이 마음을 내면 자식과 싸울 일이 적어집니다. 인연 따라가는 것이지요, 인연 따라가는 것.


그러니니까 내가 내 마음을 내서 그 인연을 내 마음 내는 대로 인연을 바꾸기도 하고. 왜냐면 이 현실세계가 꿈이라는 건 꿈의 스토리를 바꿀 수 있으니까, 꿈의 스토리를 바꾸는 법칙은 인과법(因果법이니까 내가 어떻게 마음을 내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지요. 그런데 과도한 집착심을 내면 그 인과법이 작용을 안 하는 것이지요. 과도하게 집착하면 오히려 거꾸로 작용을 한다, 했잖아요. 과도한 집착은 오히려 일을 망치는 방향으로 인과법을 잘못 몰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집착 없이 마음을 내야만 그 일을 이룰 수도 있고, 삶을 바꿀 수도 있고, 뭔가 변화시킬 수도 있는데.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과도한 집착심 때문에 그게 안 된 줄 모르고, 부처님을 원망하고 뭐 세상을 원망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되면 마음은 내지만 집착이 없으니까 즐거워져요, 뭐든지. 마음은 마음껏 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으니까,


삶을 하나의 놀이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거지요. 애를 공부시키는 걸 하나 놀이처럼 시키면 돼요. 재밌게 즐겁게. 그런데 사로잡히고 집착하기 시작하면 그게 안 되는 거지요. 뭐 학원 한 번 두 번 빠지면 큰일 날 것 같이 느끼고, 학교를 이 주일 빠지면 큰일 날 것처럼 느끼지만, 일주일 빠져가지고 애가 큰일 날 것 같으면 사실 큰일 나겠습니까? 큰일 안 나잖아요. 그래서 일주일 빠져가지고 뭐 같이 배낭여행을 가도 좋고 뭘 해도 괜찮은데.


거기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뭐 이 핑계 저 핑계가 핑계 댈 건 많아져요. 그러면 또 아이가 놀고, 친구들 하고 어디 놀고, 이런 거에 대해서 또 막 예민해지고. 그러니까 상황 안으로 파고 들어가면 상황 안에 내가 개입되게 되면 이제 삶이 심각해지고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상황에서 이렇게 떨어져 나와서 한 발자국 바깥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관조해서 보게 되면 그냥 바라보게 되면 그게 위빠사나에요.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