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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장백산-1 2019. 1. 29. 15:31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그대는 온갖 곳에서 마음을 찾아 헤매는 마음을 쉬지 못한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하기를, ‘애달프다, 대장부여!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구나’ 라고 했던 것이다. 그대가 한마디 말을 듣고 곧장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비춰 보아 결코 따로 마음을 구하지 않고, 그대의 몸과 마음이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그 즉시 일이 없다면 비로소 법(부처, 진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9)


이 구절 이게 제일 중요한 말입니다. 온갖 곳에서 찾아 헤매는 마음을 쉬지 못하는 마음 이게 우리의 고질병입니다. 세속적으로뭔가 ‘이뤄야지, 이뤄야지’ 하고 찾아 헤매지요. 출세간적으로도 ‘이렇게 하지 저렇게 하지’ 하고 찾아 헤맵니다. 찾아 헤매는 마음이 멈추는 마음이 바로 부처(진리, 法, 깨달음, 본래의 나)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해서 부처가 되고 싶잖아요. 어떻게 하면 되느냐 찾아 헤매는 그 마음만 내려놓으면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있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순간 그냥 이렇게 있는 게 공부예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있는 게 참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있느냐? 그냥 있는 게 참선입니다. 뭔가 하고 있는 거는 분별 번뇌 망상을 부리는 중생심을 연습하는 거 분별심을 연습하는 거잖아요. ‘이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이거 해서 무언가 성취해야 돼’ ‘저거 해서 무언가 성취해야 돼’ ‘수행을 통해 부처가 돼야 돼’ 이게 전부다 조작이고 유위법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부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지요. 분별하지 않는 것이 불교 공부의 핵심이잖아요. 그런데 ‘추구한다’라는 마음은 뭐예요? ‘찾아 헤맨다’라는 마음은 ‘나는 지금 갖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노력을 다하면 나중에 이걸 가질 수 있을 거야’ ‘부처를 얻을 수 있을거야’ ‘삶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야’라고 둘로 분별해서 나눠놓는 마음, 분별심 입니다.


찾아 헤매는 마음 자체가 벌써 분별심 중생심이에요. 분별심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뭐만 하면 되느냐면  ‘불이법’ ‘불이중도’ 불이중도가 불교의 핵심이잖아요. 불이중도를 실천하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내가 이거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야지’ ‘찾아야지’ ‘구해야지’ 하는 분별하고 추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냥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게 됩니다.


미래를 향해 추구하는 바가 없으니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존재하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누리고, 만끽하고, 감동하면서, 감사해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지금 여기에 내가 느끼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게 됩니다. 포용해주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다 허락해주는 거예요. 분별하지 않고.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니까 이건 더 하고 저건 덜 해야지’ 하는 생각이 없이 ‘나에게 오는 모든 것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住 立處皆眞)이구나’ ‘다 참된 진실이구나’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믿음이에요. ‘나에게 온 이것이 나를 위한 최선의 진리야’라고 온전히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굳은 믿음을 가지고 내 안에 턱 맡겨버리는 거예요. 내 안의 진실에. 그냥 지금 이대로가 진실이니까 지금 여기 이대로의 진실에 내 온 존재를 턱 내맡겨버리는 겁니다.


지금 여기 이대로의 진실에 내 온 존재를 내맡겨버리면 할 일이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 이대로의 진실에 내 온 존재를 내맡겼으니까 힘 뺀 채 하고 싶은 거 그냥 다 하고 사는 거예요. 남들한테 크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힘을 빼고 내가 하고 싶은 거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겁니다. 뭔가 추구하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걸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지요. 그래서 비로소 무언가를 미래를 향해 추구하지 않고 그냥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게 됩니다. 


뭐 기도를 시작하면 마음속에서 ‘언제쯤 기도 끝나나’ 한 시간, 한 시간 반이면 기도 끝난다. 그러면 ‘야 이거 빨리해가지고 막 열심히 해서’ 이제 기도 끝날 때를 기다리잖아요. 여러분 집에서 나올 때는 빨리 법당에 도착하기를 기다려요. ‘그래서 빨리 법문 들어야지’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법문 듣다 보면 ‘아 지금 쉴 때가 됐는데 안 쉬지’기다리고.(웃음)


수업 들을 땐 ‘아 이제 끝날 때가 됐는데’ 하고 끝날 때를 기다려요. 또 끝나고 나면 ‘빨리 집에 도착해야 되는데’ 하고 집에 도착하길 기다리고. 또 ‘야 내일 주말이 빨리 와야 되는데’ 하는 걸 기다리고. 다음 주에 있을 뭔가 좋은 건수를 기다리고. 한 달 뒤에 있을 무슨 휴가를 기다리고.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기다리느라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이 심심하고 이 아무 일 없는 이 평범한 그냥 맹숭맹숭한 이것을 그냥 있어 줘보는 겁니다. 


기도를 한다. 신묘장구 대다라니 막 독송을 한다. 하면 ‘야 이거 빨리 끝내야지. 이번에 3독 했구나. 아직 4독이 남았구나’ 이렇게 생각하기보다.(웃음) 그냥 신묘장구 그냥 그거 자체로 ‘오케이’ 여기서 그냥 있겠다. 절을 할 땐 절을 하는 그 자체로 그냥 한 배 한 배에 존재하겠다. 그냥 이거 자체가 전부다.


길을 걸을 때는 집에 갈 때는 도착하고 나면 안심. 이게 아니고 그냥 한 발 한 발 걷는 그 자체가 내 인생에 최선의 참선이다. 지하철 타고 가만 앉아있는 이것이 최선의 참선이에요. 지금 가고 있는 이 자리가. 모든 순간순간에 다음 순간을 추구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그 순간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냥 이렇게 바라보는 거지요. 바라보는 걸 그냥 바라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그걸 또 일삼아 해요. 위빠사나.(웃음)


그냥 그 자리에 있어주는 거예요. 문득문득 잠시 여기저기 막 쫓아다니는 생각들을 이 자리로 돌이켜 놓아서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구경꾼’이 되는 겁니다. 내 삶을 구경하는 구경꾼. 이 구경하는 자는 내가 아니에요. 누가 구경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구경하는 자는 누굴까요. 그 구경하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뇌 속에 있나요? 눈 속에 있나요? 어디 있어요? 알 수 없지요. 과학에서도 발견 못했지요. 그게 뇌에서 일어나는 건지 뇌우반구에서 일어나는 우반구가 주로 한다는 어떤 뇌의 작용이 있다 그래요. 뇌 과학에서. 그런데 이 우반구가 마비가 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반구가 마비된 사람이 얘가 해야 되는 기능이라 얘는 못할 줄 알았는데,


이 기능을 얘가 이어받아서 하더랍니다. 뇌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서 일어나야 될 일인데 이게 완전 마비가 됐을 때도 그 일이 일어나고 있더라는 거예요. 어딘가에서 일어나는지 모르는 일이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경우 그러잖아요. 간을 이식했는데 심장을 이식했는데 그전에 이식한 사람, 그 사람의 성격적인 특성이 자꾸 나한테 나타나는 이런 일들도 있다 라는 건 그 사람의 성격적 특징이 그 심장을 통해 나에게로 어느 정도 왔다,라고 얘기할 수도 있어요. 그럼 그 성격이 심장 속에 들어가 있나? 간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까? 특정한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특정한 내 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이 생각을 일으키거나 뭔가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굳이 말을 하면  ‘허공성(虛空性)’이 하는 거예요, 이 육근으로 이루어진 이 몸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몸이 보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목전(目前)’이라고  ‘눈앞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여기 앞에 있는 탑을 한번 그림으로 그려보세요. 그림이 그려지지요. 요 앞에 있는 탑이 그림으로 그려지지요, 거지요. 어디다가 그리셨어요? 뇌 속에 그렸나요? 간에다가 그렸나요? 눈에다가 그렸나요? 어디에 그렸나요? 그게 그 생각 그 탑이라는 이미지가 그려진 그 자리가 있잖아요 그 자리는 뇌도 아니고 어디도 아니에요. 그 자리 그게 바로 요 앞에 있는 건지도 몰라요. 여기 있는 건지도 모르고. 그냥 편만하게 있는 걸 수도 있고. 


그러면 보살님도 탑을 어딘가에서 목전에서 그렸어요. 보살님도 탑을 어딘가에서 그렸어요. 그 중간쯤 어딘가에서 그렸다 치면 이 분이 그린 그 탑과 이 분이 그린 그 탑이 일으켰던 그 작용, 그 작용이 다르다,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탑이라는 이미지가 올라온 그 자리가 내가 탑이라는 이미지를 그려낸 그 자리, 그 자리와 옆에 사람이 이미지를 그려낸 그 자리가 같은지 다른지 알 수 있습니까? (죽비를 치며) 이 소리를 들었는데 이 소리를 난 귀가 들었다,라고 확신을 하고 있지만 진짜 귀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어떤 듣는 작용, 듣는 놈은 여기 어딘가에서 들을 수도 있거든요. 옛날 이런 표현도 씁니다. 큰스님들이 공부를 하고 하실 때 보면은 그런 사례도 많이 나와요. 여러분들도 아마 그럴 겁니다.


가끔 기도하고 하다 보면 예를 들어 이 시계 초점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릴 때가 있어요. 또 이게 저기서 안 들리고 여기서 들릴 때가 있어요. 바깥에서 울리는 어떤 소리들이 그냥 되게 가까이 느껴질 때도 있고, 또는 공간 감각을 잊을 때도 있고, 저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걸까요? 내 귀가 듣는 걸까요? 아니면 그 새가 듣는 걸까요? 그 사이에 있는 허공이 듣는 걸까요?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듣는 자리를.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성’이니, ‘허공성’이니, 뭐 ‘듣는 자리’니, ‘본래면목’이니, 이런 표현을 쓰는데. 그야말로 ‘일불성’ 하나의 부처, 하나의 부처 자리, 하나의 텅~빈 이 허공성이 그 모든 것을 하고 있는 겁니다. 셰어하우스(share house: 침실만 제외한 거실, 화장실, 욕실 등을 공유하는 생활방식) 하듯이 하나의 불성을 우리들 모두가 그냥 셰어해서 쓰는 것도 아니지요. 왜냐면 내가 바로 하나의 부처, 하나의 허공성 그것이니까. 모두가 다 그것 아닌 것이 없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것 하나를 다 같이 쓰고 있는 겁니다. 하나를. 하나의 부처를 우리가 모두 다 따로따로인 것처럼 망상하면서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망상하는 건 ‘내가 있고 네가 있어’라는 건 내 망상이고. 그 하나, 하나 쓰고 있는 그 하나는 그 하나의 부처일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 이미 부처를 가지고 또 다른 부처를 찾는 그런 허망한 망상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고,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서 있는 그게 공부입니다. 그게 참선이에요. 


다음 순간을 추구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으면 그게 바로 부처이고 그게 바로 참선이다. 그런데 어디 가서 무슨 수행을 또다시 하고, 어디 가서 무슨 공부를 따로 하고, 무슨 방법을 또 찾아야 되겠습니까? 명확한 방법을 얘기해줄 수 없는 게 이 공부입니다. 좀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법상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