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심(平常心)이 바로 道다.”
이제 조주어록(趙州語綠)입니다. 264쪽이고요.
조주가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5)에게 물었다.
“무엇이 道입니까?”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道다.”
“평상심, 도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까?” “분별하면 곧 어긋난다.”
“분별하지 않고 어찌 道를 알 수 있습니까?”
“道는 알고 모르는 것에 있지 않다. 道를 안다는 것은 허망한 착각이고, 道를 모른다는 것은 무기(無記)이다. 만약 참으로 분별이 없는 道에 도달하면 道는 마침내 큰 허공과 같아 말끔하게 공(空)하거늘 공(空)을 두고 어찌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있겠느냐?”
(선어록과 마음공부 p264,265)
평상심이 道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평상심, 道,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까?” 道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道를 향해 나아간다는 말은 道는 지금 여기가 아닌 저 어딘가에 있고, 나아갈 만한 장소가 어딘가에 있고, 나는 여기 있어서 내가 그 道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느냐, 이 소리잖아요. 道(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디에 따로 두고 내가 그 道을 향해 나아간다는 얘기니까 이것은 둘로 나누는 이분법입니다. 그래서 분별법(分別法), 즉 분별해서 있는 道입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분별하면 곧 어긋난다. 그거는 벌써 분별한 道이다. 이렇게 얘기한 거죠. 그랬더니 “분별하지 않으면 어찌 道를 알 수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안다’ ‘모른다’ 그게 ‘분별(分別)’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道는 알고 모르는 분별에 있지 않다. 道를 편의상 그냥 道를 ‘아느냐’ ‘모르느냐’ 이렇게 분별해서 표현을 할 수가 있겠지만, 道를 ‘안다’ ‘모른다’라는 그 자체가 분별이거든요. 道를 ‘안다, 모른다’라는 것은 의식이 분별해서 알고 모르는 겁니다. 생각(의식)이 분별해서 아는 거지요.
그런데 ‘道를 깨친다’ 해서 道를 ‘깨닫는다’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아는 것이란 내가 수학공식을 안다. 내가 뭐를 안다. 국어를 알고 영어를 안다. 이렇게 알 대상이 있고 알 내가 있어야지 안다는 말을 쓸 수가 있는 겁니다.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있어야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둘로 분별되어 나누어져 있어야 알 수 있게 됩니다. 道는 분별되고 나눠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道를 안다 道를 모른다는 분별하는 말 대신에 道 를 깨친다, 道를 깨닫는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도(道)는 자기가 자기를 아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고, 도(道)가 도(道)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본래 도(道, 깨달음)이였다는 사실을 그저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道를 ‘안다’ ‘모른다’라는 분별하는 표현을 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道를 안다는 말은 그냥 ‘안다’ ‘모른다’ 하는 하나의 착각일 뿐이고 또 道를 ‘모른다’고 하면 그건 또 그냥 무기(無記)일 뿐이다.
참으로 분별(分別)없는 道에 도달하면 마침내 道는 큰 허공(虛空)과 같아서 말끔하게 텅~비고 공(空)해서 허공(虛空) 처럼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지요. 道는 텅~비어서 말끔하게 공(空)해서 그 어떤 것도 道에는 내세울 수가 없는데 道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안다 모른다, 하는 그 어떤 분별을 내세울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법상 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마음
'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0) | 2019.02.02 |
---|---|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이미 부처다.” (0) | 2019.02.02 |
그저 아무 일이 없어지는 것일 뿐 (0) | 2019.01.31 |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0) | 2019.01.29 |
일상생활이 진정한 신통이다 (0) | 2019.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