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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되려고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이미 부처다.”

장백산-1 2019. 2. 2. 16:48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이미 부처다.”



“제가 부처가 되려고 애쓸 때는 어떻습니까?”


“엄청 고생을 하게 되겠지.”


(선어록과 마음공부 p265)



애쓰면서 부처가 되려는 것은 유위법으로 애를 쓰는 거니까 고생을 할 수밖에 없지. 


그러면 “부처가 되려고 애쓰고 노력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선어록과 마음공부 p265)



부처가 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면 “야 그거는 고생할 일이야.” 말하니까 “그럼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어떻습니까?”하고 물은 거예요.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이미 부처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65)


제가 말씀드렸지요. 부처가 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분별 추구가 끝나면 이미 그냥 부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난 부터가 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분별 추구가 끝나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데도 나는 부처 같지 않은데’ 이렇게 생각을 해요. 왜 그러느냐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부처라는 ‘상(相)’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는 그냥 아무 문제 없는 게 부처(도, 깨달음, 진리)이다. 아무 문제 없으면 이미 그냥 부처입니다. 부처는 특정한 상황, 특정한 뜻, 특정한 모습, 특정한 이미지, 특정한 상태가 부처(도, 진리, 깨달음)이 아닙니다.


내가 막 놀랍게 가볍고 뭐든지 환하게 마음이 열리고 무한히 평화롭고 막 깊이 고요하고 이런 특정한 상태가 부처가 아닙니다. 그냥 평상심(平常心)을 부처(도, 진리, 깨달음)이라고 해요. 평상심(平常心)은 뭐냐 하면 문제가 있다가 문제가 사라진 마음 상태입니다. 괴로운 문제만 없으면 그냥 부처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무 괴로운 문제가 없는 상태 거기다가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 거예요. 그래서 이름은 가명(假名)이라고 필요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道, 열반, 해탈, 부처, 법,진리, 깨달음, 주인공, 본래면목, 무위진인, 본래의 나 등등의 이름 이게 다 사람들을 속이는 말입니다. 다 방편의 말입니다.


가명(假名), 속이는 말, 방편(方便)의 말은 다 버려야 될 것들이에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도 죽여야 된다는 말이 부처라는 방편의 말, 상(相)을 버리라는 그 말입니다. 道, 부처, 해탈, 열반, 法, 진리, 깨달음, 본래면목, 주인공, 본래의 나, 깨달음, 자성, 본성, 불성 등의 방편의 말은 전부 다 쓸데없는 가명(假名)입니다. 도, 부처, 깨달음, 진리는 그냥 괴로운 문제가 없어지는 게 도, 부처, 깨달음, 法, 진리입니다. 괴로움이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잖아요.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 아무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가짜 이름(假名), 속이는 말, 방편의 말로 道, 부처, 진리, 깨달음, 禪, 法, 해탈, 열반,주인공, 본래면목, 진면목, 본래의 나 등의 이름을 지어붙인 겁니다. 분별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냥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엔 아무 문제도 괴로움도 없어요. 추구나 생각, 바램, 기대, 이런 게 없으면 그냥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맹숭맹숭하게 그냥 있는 거예요. 괴로움이 없는 마음 상태를 그런 이름들을 지어붙여 부르는 겁니다. 


도(道)는 탁 마시면 맛있고 달콤하고 짜릿한 콜라 같은 것이 아니고 그냥 맹물 같은 거란 말이지요. 그래서 道는 있으나 없으나, 道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르겠는 그냥 맹숭맹숭한 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道라는 가명(假名), 방편이의 말이 가리키는 것이 맹숭맹숭한 맹물 같은 거,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공기 같은 거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못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거 말고 뭔가 또 다른 게 있을 거야’라고 끊임없이 道를 추구하고 道를 추구하는 그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도리어 道를 확인하지 못하고 道를 놓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 잘못된 분별하는 생각 이것만 쉬면 道가 저절로 드러난다고 말하는 겁니다.. 


지난 번에 제가 그 말씀을 드렸나요. 행복도 마찬가지라고 그랬죠.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는데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불행하지 않았을 때 그냥 불행하지 않으면 그냥 그 순간 그 자리가 행복인데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무언가가 있어야 될 거라고 생각을 하니까 스스로의 생각으로 행복이라는 무언가를 그림 그려놓고 그 행복이라는 그림에 걸 맞는 뭔가를 자꾸 찾아 나서니까 행복하지가 않은 겁니다. 사실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행복한 건데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은 그냥 평범하게 이렇게 앉아서 법문 듣는 걸 너무너무 행복하게 느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아이 그거야 아픈 사람 얘기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보세요. ‘우리가 깨달음을 얻으면 뭔가 놀라운 지복(至福:더없는 행복)감이나 행복감이 있어야 될 거 같다’라고 느끼는 데 놀라운 지복감이나 행복감 그것은 깨달음, 도, 부처, 진리가 아닙니다. 지복가감 행복감 그거는 일시적으로 왔다 가는 생사법이에요. 생멸법. 왔다가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픈 사람이 갑자기 병이 딱 낫고 나면 멀쩡해지니까 되게 기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기쁨은 잠깐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냥 그렇게 건강하게 살 뿐이지. 매일매일 기뻐하면서 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사람이 딱 출소하는 그날은 엄청 기쁠 거 아니에요. 기쁘겠지만 또 그때부터 진짜 괴로운 삶이 시작되지요.


취직한 사람,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엄청 기쁘잖아요. 그런데 그 기쁨은 잠깐이지, 출근하는 날부터 긴장되고 일과 문제와 부딪치면서 괴롭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것처럼 우리가 뭔가를 자꾸 추구하는 이런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있는 행복을 갖다 쓰지 못하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이렇게 귀가 있으니까 지금  ‘나는 귀먹지 않았으니 이렇게 들을 수 있다’라는 놀라운 환희심을 환희심이라고 생각을 안 하고 ‘들리는 거야 당연한 거지’라고 고마워하지 않고, 감사해 하지 않고, 이 행복 이걸 누리지 못합니다. 


눈으로 이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이 놀라운 감사한 행복감, 지복감을 누리지 못한 채 ‘이거야 당연히 있는 거지’ 이렇게 하고 지나간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내 머릿속의 상상의 세계 머릿속에서 더 돈을 벌어야 되고, 더 뭐를 해야 되고, 이런 분별하는 생각에 갇혀 있으니까 그 분별하는 생각 때문에 본래부터 이렇게 이미 숨어있지 않고 전부가 드러나 있는 자연(自然),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 아름다운 자연에 감동하면서 행복감 지복감을 느낄 수 있는데 분별하는 생각 때문에 그 지복감을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 지복감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그러는 순간들을 보면 그렇게 감동스러울 수가 없잖아요, 사실.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자식이 대학에 붙었을 때나 이럴 때도 좋지만, 가만히 삶을 돌아보면 옛날에 뭔가 어딘가로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서 장엄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멍하니 그냥 가만히 앉아서 편안하게 앉아서, 아니면 차를 한 잔 하면서 편안하게 아무런 분별하는 생각 없이 앉아 있을 때, 장엄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더 진한 감동으로 남을 수 있거든요. 


실제로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면 죽기 직전에 뭔가 내가 성취했고 이랬을 때 보다도 그런 잔잔하고 고요했던 일상의 순간순간들, 평범했지만 사실 깊은 어떤 그런 순간들이 더 와 닿더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고 그래요. 그런 것처럼 사람들은 본래부터 이미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행복을 누릴줄 모르고, 모르니까 또 다른 행복을 규정하고 만들어놓은 다음에 그 행복을 향해 죽을둥 말둥 달려가기만 하는 것을 할 줄 아는 거예요 일평생 동안 말입니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이미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행복을 누려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행복의 정의를 몰라요. 뭔가를 얻어야 행복하고 뭔가를 갖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행복에 대한 그런 정의(定義)를 갖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행복을 누려보지 못한 채 앞만 보고 쫓아가는 것을 죽을 때까지 하다가 죽기 직전에 조금 깨달아서 ‘야 진작 내가 이렇게 편하게 살 걸’ 하는 말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음공부도 뒤에도 나오는데요. 부처가 되려고 애쓰고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부처가 될 수가 없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부처가 되려고, 도, 진리, 깨달음을 터득하려고 분별하고 추구하는 마음 그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이 평범함 이 밍밍한 맹물맛 같은 이런 ‘맛이 없다’ 는 말입니다. 이 순간 이 자리는 맛이 없다. 맛없는 이 평범한 그냥 여기 이 순간에 이 평범하고 아무 느낌 없고 아무 맛없는 맛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뭔가 장엄하고 놀라운 아름다움이나 경쾌함이나 가벼움이나 뭐 쑥 내려가는 것 같은 그런 경험을 기대하지 말고. 그건 왔다가 가는 거, 새명멸법, 생사법이니까 진짜가 아니에요. 그래서 자기 성품을 확인한 사람들이 자기 성품을 확인했는데 뭐 몇 주가 되고 어떨 땐 몇 달이 되고 긴 사람은 한 일 년 가까이 그 놀라운 기쁨이 지속되기도 해요. 그 놀라운 기쁨이 오래 지속되는 게 좋거거나 짧게 끝난다고 나쁜거거나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진짜가 아닙니다.


그 이후에 평범하게 사는 그 삶이 남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평범하게 사는 삶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뭔가 그때 내가 느꼈던 짜릿함, 그걸 다시 얻어야 된다. 그래서 깨달음을 놓쳤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괴로운 문제가 사라진 ‘평상심(平常心)으로 사는 이 평범한 삶이 道, 부처, 진리, 法, 깨달음일 리가 없어’ ‘이 평상심으로 사는 삶이 진실일 리가 없어’하고 자꾸 뭔가를 또 찾는 의식의 습관 때문에 ‘보임(保任)’이라는 공부의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그것처럼.


이렇게 법문을 듣다가 공부를 하다가 저절로 자기가 깨달은 경우도 아주 가끔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금방 놓쳐버립니다. 그러니까 귀한 줄을 몰라요. 귀한 줄을 모르고 ‘이게 어떻게 깨달음이야’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고. 그래가지고 그 이후는 공부를 안 해버리는 거지요. 그런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 도, 부처, 진리 이게 뭐 강렬하게 오느냐 이런 거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 도, 부처, 진리를 자꾸 체험하려고 하는 분별하는 마음, 그것도 욕심이거든요. 부처를 도를 깨달음을 진리를 체험하려고 하는 그런 분별하는 마음, 그 분별하는 마음도 사실은 내려놔야 돼요. 내려놨지만 완전히 버리는 건 아니에요. 잡지만 내려놔야 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해야 되는 거지요.


발심은 하지만 그 발심이 또 과도하게 치우쳐서도 안 되고. 그러니까 이제 이 마음공부를 하잖아요. 마음공부, 명상, 수행, 이런 뭔가 방법을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얘기하신단 말이에요. 그나마 방법 아닌 그래도 가장 근사치에 있는 방법을 오늘 하나 팁을 드린다면, 그냥 늘 ‘내가 애써서 뭘 분별하고 추구하고 있지’ 그 애써 분별하고 추구하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이 자리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해보는 거예요. 이 심심하고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그냥 존재해 보는 겁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명상할 때 막 신비체험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명상하거든요, 보통. 삼매체험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면서 막 힘을 주면서 ‘왜 나한테 이런 삼매체험이 안 일어나나’ 하고 명상을 해요. 그러면 명상을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명상을 그렇게 하게 되면 반드시 삼매체험이 일어납니다. 왜? 내가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마음이 만들어낸 조작의 삼매, 허망한 삼매가 일어나요. 그래놓고 마음이 조작한 허망한 삼매체험 그것이 도(道)인양 본인 스스로 또 거기 도취돼가지고 그걸 또다시 체험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같은 삼매체험은 분별 망상 위에 또 다른 분별 망상을 얹어버리는 그런 거니까 이것처럼 뭔가 결과를 기대하고 하는 건 진짜 명상이 아니에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아무 맛도 없는 이 심심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자리에 존재하는 겁니다. 사람에 따라 그냥 걷는 게 나은 사람도 있고. 그냥 뭐 산책하는 게 더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청소하는 이게 일석이조잖아요. 청소도 하고 명상도 하고. 집안 대청소도 하고 명상도 하고.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텅~빈 바탕을 이렇게 지켜보는 구경꾼처럼 지금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것이 마음공부입니다. 산에 가는 것도 공부고 삶 자체가 다 공부에요. 그렇게 됐을 때, 내가 무언가를 자꾸 분별하고 기다리고 추구하고 있는 지를 늘 지켜보고.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심심함 그것과 잠시 같이 있는 것. 이렇게 심심한 게 제일 좋은 거예요. 뭔가 자극적인 게 좋은 게 아닙니다.


-법상 스님-  법문 녹취 by하이얀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