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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장백산-1 2019. 2. 2. 18:04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달마가 서쪽(인도)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경계로써 사람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나는 경계로써 사람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달마가 인도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66,267)


“여러분들이 저한테 달마가 인도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라는 말이 이제 정형구에요. 달마가 서쪽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뜻은 “도(道)가 무엇입니까?”를 묻는 전형적인 어구입니다. 그냥 '道가 무엇입니까?'라는 그 말 그대로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도(道)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본 것과 똑같아요. 그랬더니 “뜰 앞의 잣나무다.” 두 스님이 뜰에서 이렇게 대화했겠지요. '뜰 앞에 잣나무다 라는 말은 예를 들어 여러분이 저한테 “도(道)가 무엇입니까?” 물으니 道가 “죽비다.” 道가 “컵이다.” 道가 “시계다.” 道가 법당이다 이렇게 얘기한 것과 똑같은 말입니다.


그랬더니 “이건 다 경계잖아요.” 눈에 보이는 경계, 색경(色境), 눈에 보이는 모양은 색경이라 그러고, 귀에 들리는 소리는 소리의 경계는 성경(聲境)이라 그러고, 냄새의 경계(香境), 맛의 경계(味境), 감촉의 경계(觸境), 생각의 경계(法境), 이걸 다 경계(六境)라 그럽니다. “경계로써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 “경계에 어떻게 도(道)가 있을 수가 있느냐.” 이렇게 대꾸를 한 거지요. 그랬더니 “나는 경계로써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답을 합니다.


“그렇다면 달마가 인도에서 온 뜻이 뭡니까?” 다시 묻습니다. 분명히 스님이 경계로써 얘기하지 않겠다고 하셨지요. 약속했습니다. “저에게 경계로써 얘기하지 마세요. 경계로써 사람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럼 '달마가 인도에소 온 뜻, 즉 도(道)가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답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다' 이 말은 경계로써 얘기한 말이 아닙니다. 스승이 말한 '뜰 앞에 잣나무다'라는 말을 경계로써 얘기했다고 제자가 생각으로 분별해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즉 굳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뜻(道가 무엇입니까?)을 물었는데 '뜰 앞에 잣나무다'고 한 답을 해설을 하면 


道는 '뜰 앞의 잣나무다'라는 말을 하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뜰 앞의 잣나무를 보거나 상상하잖아요. 사람들은 뜰 앞의 잣나무를 보거나 생각하자마자 ‘아 뜰 앞에 있는 잣나무구나’ ‘소나무도 아니고, 참나무도 아니고, 잣나무야. 잘 생긴 잣나무야’ 이렇게 분별하는 생각으로 '뜰 앞의 잣나무다'를 해석을 합니다. ‘이건 시계야’ ‘시계가 노란색 시계고’ ‘어떤 시계고’ ‘이건 컵이고’ 이건 이어폰이고’ 이런 식으로 분별하는 생각으로 해석을 하면서 본단 말이에요. 말을 듣자마자 사물을 보자마자 분별하는 생각으로 해석합니다. 사람을 보자마자 분별하는 생각으로 해석해서 ‘ 이 사람은 남자고’ ‘이 사람은 여자고’ ‘이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이 사람은 공부를 안 한 사람이고’ 등으로 분별하는 생각으로 사람을 해석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다' 라고 말 했을 때 ‘아 뜰 앞에 있는 저 잣나무 저게 잣나무구나’ ‘뜰 앞에 있는 잣나무이구나’ ‘뒤 뜰에 있는 잣나무가 아니라 앞 뜰에 있는 잣나무이구나’ 이런 식으로 분별하는 생각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분별되고 나누어진 경계(境界, 대상, 현상)로 받아들인 거지요. '뜰 앞의 잣나무'를 제자는 분별되고 나누어진 경계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데 스승님이 뜰 앞의 잣나무다, 라고 한 말은 뜰 앞에 있는 잣나무를 예로 들어서 방편(方便) 삼아서 道(진리, 깨달음, 부처)를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온 우주법계(宇宙法界, 이 세상 모든 것, 삼라만상만물)이 도, 진리, 깨달음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도, 진리, 깨달음, 부처는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환하게 드러나 있다고 말했잖아요. 보이면 보이는 모양이 전부 다 부처고. 들리면 들리는 소리가 전부 다 부처고,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전부 다 부처이기 때문에 이 소리도(스마트폰 벨소리가 남) 부처란 말이지요. 남 눈치 볼 필요 없이 당당하게 스마트폰을 꺼내서 부처의 소리를 딱 끄시면 됩니다.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이렇게 들리는 소리가 그대로 부처의 소리인데 만약에 어떤 분들은 ‘아 강의하는데 스마트폰을 끄지도 않고서 이러고 있었어’ 라고 화를 낼 수도 있잖아요 그죠. 이런 분은 부처의 소리, 즉 스마트폰 벨소리를 분별하는 생각으로 경계(境界)로 받아들인 겁니다. 스마트폰 벨소리 그 소리를 분별하는 생각으로 해석해서 들은 거지요. 그 소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새소리가 들리는 거는 시비 걸지 않고, 저 스마트폰 소리가 들리면 뭐라 그럽니까? 제가 하는 말도 똑같은 소리잖아요. 제가 하는 말 소리가 더 시끄러워요? 아니면 저 스마트폰 벨소리가 더 시끄러워요? 제가 하는 말 소리가 더 크고 시끄럽지 저 스마트폰 벨소리가 더 시끄럽다 라는 해석 그게 분별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보세요. 저 스마트폰 벨소리는 그냥 소리일 뿐입니다. 그 소리는 그냥 도, 부처, 깨달음, 진리를 드러내고 있어요. 스마트폰 벨소리가 곧 道, 부처진리,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스마트폰 소리를 분별하는 생각으로 해석해서 인상을 찡그리는 분별심 중생심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저 소리는 싫다고 분별하는 생각으로 해석해서 취사간택하는 겁니다. ‘저런 소리는 듣기 싫어’ ‘법문하는 소리만 듣고 싶어’ 뭐 이런 식의 분별하는 생각으로 그 소리를 해석해서 듣는 것은 취사간택을 하는 중생심 분별심입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뜨이 무엇입니까?' 즉 “도(道)가 무엇입니까?” 저렇게 소리가 울립니다. 이 말 소리는 도(道), 부처, 깨달음, 진리를 그즉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 소리를 분별하는 생각으로 해석해서 취사간택하는데 익숙하다 보니까 이 말 소리를 경계로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저렇게 소리가 울립니다, 그 소리는 곧장 道를 드러내주는 겁니다 라는 이 말 뜻은 뭐지 하고 분별하는 생각으로 이 말을 해석을 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만 도(道)가 아니라, 컵만 도(道)가 아니라, 들리는 소리가 전부 다 도(道)를 드러내보이고 있고, 보이는 모양이 전부 다 도(道)를 드러내보이고 있고, 코로 맡아지는 냄새가 전부 다 道를 드러내보이고 있고, 혀로 알아지는 맛이 전부 다 道를 드러내보이고 있고,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감촉이 전부 다 道를 드러내보이고 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전부 다 道를 드러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들은 제가 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다들 갑자기 심각해지면서 눈에 힘을 주면서 ‘죽비가 왜 부처고’ ‘스마트폰 벨소리가 왜 부처지’ ‘꽃이 왜 부처지’, 뜰 앞의 잣나무가 왜 부처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하고 분별하는 생각으로 해석을 합니다.


보는 자가 부처라는 소리는 보는 눈은 이렇게 바깥을 보면서 ‘보는 자가 누구지’하고 자꾸 내 눈을 보려고 애쓰고. ‘소리를 듣는 자가 누구지’ 자꾸 내 귀를 보려고 합니다. 돌이켜 ‘아 이거 회심을 해야 되나’ 그러고, 이걸 탁 돌이켜서 한다고 하니까 아 이거 회심이라는 말 말고도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이 있어요. 듣는 자를 돌이켜 들어야 되고, 보는 자를 돌이켜 보라는 말이 ‘회광반조’라는 말이에요. 볼 때 보는 마음이 대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보는 마음을 돌이켜 봐라 이런 식으로 ‘회광반조’라는 말을 써요. 


이렇게 말을 하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면 보는 게 부처고, 뜰 앞의 잣나무가 부처니까, 뜰 앞의 잣나무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분별하는 생각으로 해석한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경계(境界)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보는 자를 자꾸 보려고애를 쓰고 노력해서 회광반조하려고 애씁니다. 이건 유위법(有爲法), 애쓰는 거예요.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은 회광반조(回光返照)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회광반조라는 수행을 닦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깨닫고 보니 깨달음, 도, 부처, 진리 그걸 회광반조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네 그냥 그 소리에요. 깨닫기 전에는 깨달음, 진리, 도, 부처 그걸 회광반조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회광반조라는 말을 듣고 회광반조를 하려고 애써서는 안 됩니다. 회광반조(回光返照)의 말 뜻을 그냥 몰라야 됩니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라고 말 할 때 '道가 무엇입니까?나 '뜰 앞의 잣나무다'라는 말의 뜻을 그냥 모르면 그게 다입니다. 그냥 몰라야 돼요. “도(道)가 무엇입니까?” “이것이다,”라고 하면 ‘컵이 도(道)란 얘기인가’ ‘움직이는 이 손이 도(道)란 얘기인가’ ‘이 움직임 속에 道가 있다는 얘기인가’ ‘저 손의 움직임을 잘 보다보면 뭔가가 나오나’ 이렇게 분별하고 해석하는 생각을 하면 그거는 죽은 화두를 들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자꾸 힘주고 애쓰고 노력하려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그냥 여기서 끝. 그냥 이 소리(죽비를 치며)에서 끝. 머리를 굴리려고, 즉 분별하는 생각으로 그 말의 뜻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꽉 ~막혀있으면 됩니다. ‘오직 모를 뿐’ 모르고 답답하잖아요. 모르고 답답한 데서 그냥 그렇게 막혀있으면 그게 마음공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분별하는 생각으로 '뜰 앞의 잣나무다'라는 말의 뜻을 이렇게 해석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해석하지도 못하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뭔 말인 줄 알겠는데, 머리로 스님이 하시는 말 뜻은 대충 이해 다 했습니다.” “뭔 말인지 알겠고 제가 다 이해하니까 알았으니까, 이제는 좀 구제적으로 마음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줌과 동시에 사람들은 그 방법에 집착해서 머물게 됩니다. 그 방법을 유위법으로 추구하게 돼요. 방법은 그냥 방법 없음 속에 방법이 없어야지만 분별하는 생각으로 이렇게 해석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해석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대로 할 거 아닙니까?.그렇게 하면 어긋나는 겁니다. 방법이 없어야지만 분별하는 생각으로 이렇게 해석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해석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절수행도 해보다, 기도수행도 해보다, 염불수행도 해보다, 독경수행도 해보다, 다라니수행도 해보다, 이것도 아닌 거 같고 저것도 아닌 거 같고, 또 이거인 거 같고 저거인 거 같기도 하고. 참선도 해보다가 그게 뭐예요? 참선도 해보다가, 염불도 해보다가, 뭐 안 해보기도 하다가, 책도 보다가, 법문도 들어보다가, 막 답답해서 때로는 스님한테 가서 한 대 확 때리고 싶기도 하고. 그냥 가서 막 따지고 싶기도 하고. 저를 그냥 욕하고 싶기도 하고 이런 마음이 든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뭔가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서 다른 절에 간다고도 그러고. 괜히 화도 나고 이런단 말이지요. 바로 그렇게 괜히 화도 나고 이러는 게 마음공부란 말입니다. 


오죽하면 화가 나겠어요. 공부가 잘 되고 있는 것이 화도 나고 답답한 겁니다. 안 해도 안 되고 그러나 해도 안 되니까 이 수행도 해보다 저것 수행도 해보다 그러나 어느 하나에 과도하게 몰입은 안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또 공부 안하는 거 같으니까. 뭐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는데 뭘해도 완전히 내가 그것에 머물지는 못해요. 그게 뭐냐 하면 분별하는 생각으로 이렇게 해석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해석하지도 못하니까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겁니다. 속이 뒤집어지고 하는 그것이 마음공부라니까요. 그렇게 전혀 방법이 없어야만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게 됩니다. 뭔가 방법이 딱 정해져 있으면 그길 따라 가면 끝인데 그렇게 쉬운 게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그렇게 답답한 마음 그것이 마음공부다. 그래서 “달마가 인도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이건 경계를 얘기한 게 아닙니다. ‘뜰 앞의 잣나무다’ 했을 때 뜰 앞의 잣나무를 상상하면 삼천포로 빠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뜰 앞의 잣나무’와 ‘뜰 앞의’는 같은 거지요. ‘뜰’도 같은 거지요. 잔나무도 같은 거잖아요. ‘시계’ 도 같은 얘기입니다. ‘차 한 잔 마셔라’ 도 같은 얘기입니다. 아니면 차를 이렇게 마시는 시늉을 해도 되고 말입니다. 모든 말, 모든 경전, 모든 글은 즉, 도, 부처, 진리, 깨달음의 작용을 말로, 행동으로, 사물로 드러내보여서 도, 부처, 진리, 깨달음의 당처를 가리키는 방편일 뿐입니다.


-법상 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