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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게 안주할 곳을 찾지 말라

장백산-1 2019. 2. 7. 17:52

편안하게 안주할 곳을 찾지 말라



금강경에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응무소주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고 말합니다. 


마음은 대상(경계)를 만나야지만 찰나지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데 마음은 일어났던 마음을 대상


으로 또 새로운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마음의 상속(相續)이라 하는데 사람들은 이런 상속되는


마음에 끌리어 끊임없이 머물러 안주할 대상이나 곳을 찾습니다. 반대로 대상(경계)가 없으면


마음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돈을 많이 벌거나, 넒은 평수의 근사한 집을 사거나, 남여가 사랑을 나누거나, 생각으로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견고히 하고, '그런 것들에' 머물고 의지해서 살면 안심할 수 있는 어떤 '사상', 


'철학', '종교', '물질적 대상' 같은 것을 찾고 구해서 '거기에'  편안하게 머물고자(安住)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이나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본래 한 법(法, 존재, 것)도 없기(本來無一物) 때문입니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도 어느 대상이나 곳에 


머물고 싶어하는 마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나서게 만드는 겁니다. 머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머물 수 있고, 안주할 수 있는, 든든한 나의 고향이 될 만한 의지처를 찾아


나서게 충동질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추구심(追求心)은 곧장 사람들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게 하지 못하게 방해해서, 


끊임없이 의지처를 찾아 나서게 만들 뿐입니다. 그렇게 무엇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안심(安心)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같은 추구심, 안주하려는 마음, 머물 곳을 찾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사람들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곳, 안주할 수 있는 곳은, 


단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뿐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당신 자체야말로, 온전한 진실, 온전한 진리, 온전한 도(道), 온전한 깨달음 입니다.



그렇다고 진리를 깨달아야 겠다는 발심(發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발심을 하되 발심을 하지 않아야 하고, 발심을 하지 않되 발심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이 말은 머리로는 분별하는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마시고, 


'도대체 나 더러 어쩌란 말이야?' 하는 답답하고 모르겠다는 그 마음으로 마음공부하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곧 머물지 않고 안주하지 않는 공부 아닌 공부입니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