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수행법, 참된 수행이란? 법상스님('2019.2.24 일요법회)
연기(緣起), 무아(無我), 자비(慈悲), 중도(中道), 무분별(無分別), 팔정도(八正道), 사념처(四念處),
위빠사나, 무위법(無爲法)을 터득하는 것이 참된 수행이다.
어떤 특정한 사상, 특정한 철학, 특정한 관점, 특정한 논리, 특정한 진리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
중도(中道)다. 세속에서 말하는 진리나 실천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해 놓고 오직
'옳은 것만'을 진리라고 여겨서 '옳은 것만'을 실천하고 닦아가는 것이고, 출세간(出世間)에서
말하는 진리나 실천은 옳은 것 옳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그같은 구분 분별에서 벗어남,
즉 취사간택(取捨揀擇 : 좋아하는 것은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는 분별, 의식, 망상)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중도(中道)이다.
어떤 분별이나 차별도 없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곧 중도[中道 (팔정도
八正道의 정견正見, 사념처四念處)]이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임, 수용, 이것이 곧 중도(中道)요 자비(慈悲)이다.
중도(中道)를 구현하는 방법이 팔정도(八正道 – 바른 견해를 갖고, 바른 말하고, 바른 생각하고, 바른
행동을 하고, 바른 삶을 사는 것)가 곧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억지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유위조작(有爲造作)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 아니다.
훈습하는 공부 – 정법훈습, 염법훈습
무위법 - 하되 함이 없이 하라
선수행 – 좌선하지 말라는 선사 스님들의 말씀들
선지식(善知識)을 찾는 것이 마음공부의 전부이다. 전법여행, 구법여행, 승가구성...
[달마]
외도(外道)는 부처의 참뜻을 알지 못하기에 힘써 부처를 찾는 공부하는 것을 최고로 삼으나, 그런 공부는
성인의 뜻과는 어긋난다. 외도(外道)와 같이 본성(本性)을 보지 못한 사람은 경을 읽고, 염불하고, 늘 배우
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하루 종일 도를 행하고, 늘 배우면서 앉아서 눕지 않고, 두루 배우고 많이 듣는 것
을 불법(佛法)인 줄 잘못 알고 그러한 일을 불법(佛法)으로 삼는다. 이러한 중생들은 모두가 불법(佛法)을
비방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제 이 땅에 와서 오직 돈교(頓敎) 대승(大乘)의 즉심시불(卽心是佛)만을 전
할 뿐, 지계(持戒)나 보시(布施), 정진(精進), 고행(苦行) 같은 수행은 말하지 않는다.
“만약 본성(本性)을 보지 못하더라도, 염불(念佛)하고, 독경(讀經)하고,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정진
하고, 널리 이로운 일을 한다면 성불(成佛 :부처를 이룸, 깨달음)할 수 있습니까?” “성불할 수 없다.”
“어찌하여 성불할 수 없습니까?” “만약 얻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법(法), 어떤 것 한 가지라도 있다면,
그 법(法, 존재, 것, 현상, 대상, 경계)은 유위법(有爲法)이고 인과법(因果法)으로써 과보(果報)를 받는
법(法, 존재, 것, 현상, 대상, 경계)이니 그러한 것(法)은 곧 윤회(輪回)하는 법(것)이다. 생(生)과 사(死)
라는 환상(幻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서 어느 때 불도(佛道,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겠는가?”
[지공화상 대승찬]
*대도불유행득(大道不由行得) : 무한한 道는 수행을 함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法)이 아닌데
설행권위범우(說行權爲凡愚) : 수행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를 위해서 말하는 방편(方便)이다.
[혜능 육조단경]
* 몸은 깨달음의 나무이며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가 붙지 않게 하라.
- 신수(神秀)의 게송
*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거울도 거울의 받침대가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붙을 수 있겠는가. - 혜능의 게송
* “무엇을 일러 좌선(坐禪)이라고 하는가? 이 법문에는 장애도 막힘도 없으니, 밖으로 좋고 나쁜 모든
분별 경계를 당하더라도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러 좌(坐)라고 하고, 안으로 자기 본성(本性)을
보아 마음이 부동한 것을 일러 선(禪)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러 선정(禪定)이라고 하는가? 밖으로
보이는 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 하고, 안으로 마음이 산란하지 않은 것이 정(定)이다.
[영가현각 증도가]
* 학인 불요용수행 진성인적장위자 (學人 不了用修行 眞成認賊將爲子)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 하나니 이는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다. 예전엔 비틀거리며 헛된 수행하였음을 깨달으니
여러 해를 잘못 풍진객(風塵客) 노릇 하였구나.
[마조어록(馬祖語錄)]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이 법기(法器)임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대덕(마조도일)은 무엇 때문에 좌선(坐禪)을 하는 것이오?” 도일이 말했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남악회양은 기왓장 하나를 가져와 그의 옆에서 돌에 기왓장을 갈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도일이
물었다.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하오.”
“기왓장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기왓장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그대가 좌선을
한다고 해서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이에 도일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처가 됩니까?”
“소가 끄는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아니면 소를 때려야 하는가?”도일이 대답이
없자, 회양이 말했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려고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려고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려 한다면,
선(禪)은 앉는 것도 아니고 눕는 것도 아니다.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양새가 없다.
머무르지 않는 법(法)에서는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해서는 부처를 알지 못한다. 그대가 좌불을 흉내
내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짓이다. 만약 앉아있는 좌불(坐佛)의 모습에 집착한다면, 부처
라는 깊은 이치에는 통하지 못할 것이다.”
道는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道가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닦아서 이루어지는 道는
다시 무너질 道이니 이는 곧 성문(聲聞)과 같다. 그렇다고 닦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곧 범부와 같다.
본래부터 있던 道가 지금도 그대로 있을 뿐이니(本有今有), 수도(修道)나 좌선(坐禪)은 필요치 않다.
수도나 좌선에 의지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다. 道는 닦아사 이루어지는
것(法)이 아니니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분별하는 더러움에 물들지만 말라.(道不用修 但莫汚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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