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생불별법(不生不滅法)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게 수행이 아닙니다. 생각은 없앨 수가 없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해서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이 없다면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생각은 누구나 다 일어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생각을 100%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 것이지요. 생각은 그냥 인연(因緣)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 하면 사라져버리는 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생각은 전부 생겨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것, 즉 생사법(生死法), 생멸법(生滅法)이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전부 다 생사법 혹은 생멸법이라는 말을 써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전부 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들, 생멸법, 생사법입니다. 법(法)은 어떤 존재(것, 현상, 경계, 대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주삼라만상만물을 일컬어서 법(法), 만법(萬法)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전부 다 생멸법(生滅法)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생멸법은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이 세상에 생멸법이 아닌 게 있을까요? 어떤 ‘것(존재, 대상, 경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생멸법, 생겨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것들입니다.
나라고 여기는 존재도 생겨나면 반드시 사라지는 거지요. 내가 갖고 있는 나의 명예, 지위, 권력, 돈, 재산, 가족, 친구, 학벌, 사회적 영향력, 등의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생겨났다가 반드시 사라져버리는 것들, 생멸법(生滅法)입니다. 한번 생겨나면 반드시 사라지는 것들이지요. 내 생각, 내가 옳다고 고집하고 있는 내 생각, 그 생각도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 생멸법 이지요. 이 세상 모든 게 전부 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생멸법 입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 생멸법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 가버립니다. 생멸법 그건 내 뜻대로 왔다가 내 뜻 따라 가는 게 아니라, 인연, 즉 자기의 법칙에 따라서 자기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버리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멸법이 인연 따라 언제 올지를 명확히 아는 사람을 도인(道人)이라고 잘못알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 죽을까, 그걸 맞히는 사람을 도인(道人)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내가 언제쯤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할까, 그걸 알아맞히는 사람을 도인(道人)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지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모든 것들, 생멸법(生滅法)은 그냥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들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도인(道人)이라고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그려놨던 그림 모든 허상(虛想)은 인과법(因果法), 인연법(因緣法), 즉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정확하게 언제쯤 그런 것들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 그래서 생멸법, 인과법, 연기법 그것들을 잘 피해 가면 일어날 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바꾸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도인(道人)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그런 도인(道人)인척 하는 직업으로 지금까지도 돈벌이를 잘 해 먹고 있지요. 점쟁이를 찾아가는 이유가 그거 아니겠어요? “나에게 언제쯤 뭔가 문제가 생길지 알아맞혀서 그 문제를 피해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점쟁이한테 묻지요. 심지어 어떤 점쟁이는 별 이상한 짓을 다 시켜요. 그냥 차라리 굿을 해라. 이러면 그냥 속 편하게 굿 하나 하면 될텐데.
뭐 제가 이런저런 상담을 해본 결과 뭐 이상야릇한 것을 시키는 점쟁이도 있고. 요상한 것을 시켜서 그렇게 하면 재앙을 없앨 수 있다고 확신을 주는 것이지요. 삼재팔난이 나에게 안 온다. 안 오는 방법, 비법을 알려준다고 거짓말 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특정한 무언가를 정해놓고 그거를 좇아가는 삶. 그래서 거기 휘둘리고 구속되는 삶, 그런 삶은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다,라는 사실에 눈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처럼 단순한 사실이 현실에서 너무나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내 생각을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겁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에 대한 집착, 내 마음에 대한 집착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걸 다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그걸 가지고 있고, 그걸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기는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생멸법, 인연법, 인과법이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요. 본인 스스로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 ‘될지 안 될지 몰라’ ‘그러고 안 되는 것이 나를 위해 더 좋을 수도 있어’ ‘난 알 수 없어’ ‘내가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 부처님도 모르는 미래를 내가 나의 미래를 어떻게 알아’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야 더 좋은지를 내가 알 수 있을까’ ‘난 몰라’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의 미래를 아는 건 뭘까요? 오직 진리만이 나의 미래를 압니다. ‘안다’ ‘모른다’ 표현을 하면 안 되지만..그러니까 나라고 여기는 것, 생멸법에 의지해 봐야 나라는 건 생겨나고 사라지는 허망한 겁니다. 진실일 수가 없어요. 100%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생겨났다 사라지는 거가 아닌 것. 생멸법이 아닌 것. 불생불멸법. 그런 뭔가가 있다면 거기에 의지해야 되겠지요.
‘귀의(歸依)한다’는 표현을 쓰잖아요. 돌아가 의지한다. 나의 본성, 나의 본질, 나의 본바탕에 돌아가 의지한다. 그 본바탕이 뭐예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나의 본바탕, 나의 본질, 나의 본성입니다. 내가 본래 부처고. 내가 본래 진리(法)이고. 내가 본래 청정한 승이라는 그리로 돌아가는 그곳이 진짜 내가 의지해야 될 바인데, 그 의지해야 될 바인 佛 法 僧 三寶는 정해져 있는 뭔가가 아니에요. 그래서 무위법(無爲法)이라는 표현도 씁니다. 어디에도 의지할 바가 없다. 고정된 실체적인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방편(方便)으로 하는 말이 무위법(無爲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실재(實在)라고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나도 실재고 내 바깥에 있는 세상 모든 것도 실재라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나도 이 세상 모든 것들도 실재라고 생각하니까 나와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지요. 허망한 몸과 마음, 이세상 모든 것들이 이게 진짜가 아니라 허망한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이라는 진실을 알면 나라는 것과 이 세상 모든 것들에게 집착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지나간 어젯밤 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시 그 꿈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그때 꿈 속에서 그 돈을 벌어야지’이런 생각을 하지 않지요. 꿈이라는 사실을 아니까. 오늘 밤 또 꿈을 꿉니다. 그런데 꿈을 깨고 나면 꿈에서 깨어난 동시에 꿈속에 서 벌어졌던 모든 것들은 그냥 물거품 처럼 사라져버려요. 잠 잘 때 꾼 꿈에는 결코 집착하지 않습니다. 꿈 속에서 꾼 꿈은 나를 구속하지 못합니다. 이것 꿈처럼 사람들의 삶 자체가 생멸법(生滅法)으로서 꿈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 삶 자체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허망한 생멸법이고 꿈과 같기 때문에 실재(實在)가 하나도 없어요. 진실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가 다 그냥 왔다가 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은 왔다가 가도록 내버려 둬야 되는데, 왔다가 가는 것 중에 유독 내 눈에 띄는 것,내 맘에 드는 것 몇몇 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눈에 띄는 것을 집착하고, 가지려고 애쓰고, 내 생각대로 바꾸려고 애쓴단 말이지요. 그러고 싫은 것들은 거부하려고 애쓰고, 밀쳐내려고 애쓰고, 내 인생에 왜 이런 것이 등장해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느냐 하고 싸우고 욕하고 막 밀쳐내려고 애쓴단 말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은 취사간택을 합니다. 좋은 건 취하려고 애쓰고. 싫은 건 버리려고 애쓰고. 좋은 건 갖지 못해서 괴롭고. 싫은 건 버리지 못해서 괴롭고. 이 양극단이 사람들을 언제나 괴로움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런 삶이 바로 중도적(中道的)이지 못한 극단에 치우친 삶입니다. 집착하는 삶. 극단에 치우친 삶. 그게 바로 취사간택하는 삶이다.
왜 취사간택하지 말라고 하느냐. 석가모니 부처님을 잠깐 떠올리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미지가 이렇게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천 원짜리 돈을 생각하면 돈의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동전 하나도 그림으로 그려지고, 아들, 딸, 남편, 아내, 부모님을 생각만 하면 바로바로 머리에 그 사람들의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상(相)이 이렇게 그려집니다. 상(相)이 그려지는데, 머릿속에 그려졌던 상(相), 이미지, 그림은 머릿속에 그려졌다가 바로 사라지지요. 상이 그려졌다가 바로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은 그렇게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제가 여분들에게 머릿속에 ‘사과’를 하나 그려보세요. 하면 사과의 그림이 딱 그려져요. 그러다가 또 다른 얘기를 하면 또 다른 얘기에 집중하다 보니까 ‘사과’라는 이미지는 사라져버립니다. 사과라는 이미지가 어딘가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졌어요. 생겨났다가 사라진 것들은 생멸법(生滅法), 인과법(因果法),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사과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사과의 이미지가 어디에서서 생겨났다가 어디로 사라졌지요.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 사과의 그림이 그려졌다가여러분의 생각속으로 사라졌다고 말은 했는데 그 생각 속 거기가 어딘지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뇌 속에서, 뭐 생각 속에서 뭐 뇌가 무슨 작용을 일으켜서 뭐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냥 망상이고,생각이고, 상(相)이고, 그렇다고 내가 상을 그린 거뿐이고, 실재(實在)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가 뭐냐 하면 사과의 이미지가 그려진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분명히 사과의 그림이 그려졌다가 사라졌다,라는 그 사실, 그 사실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내 생각이 사과라는 그림, 이미지를 생겨나게 했고 사라지게 했어요. 내가 생각으로 사과라는 이미지를 창조했습니다. 내 생각이 조물주가 되어서 갑자기 사과의 이미지를 창조했다가 소멸시켜 버렸습니다. 사과 이미지라는 어떤 하나의 존재, 하나의 생멸법이 생겨났다가 사라졌어요.
그런데 사과의 이미지에 여러분은 집착하지 않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인생에서 이처럼 텅~빈 아무것도 없는 데서 갑자기 사과란 이미지를 그렸다가 없애버린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친구 집에 갔다가 와서는 친구 집이 좋아 보여요. ‘야, 우리도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되겠다’ ‘우리도 집을 사야 되겠다’ 혹은 무슨 세탁기, 건조기가 좋아 보이고. 그것처럼 모든 일이, 이 세상 모든 일이 전부다 내가 만든 생각 때문에 만든 괴로움이라는 것이지요. 본래 실질적인 괴로움은 없습니다. 여러분을 정말 괴롭게 만드는 뭔가는 없습니다. 내가 특정한 한 생각에 고집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일 뿐이지요.
죽음이 괴로움일까요? 죽음이 무조건 괴로움이 아닙니다.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사람이 뭐 처음에는 막 난리, 난리 치고 막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내고 짜증스러워하고 절망하고 이러다가 나중에 받아들이고 나면, 지극히 평화로워지고 고요해지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면 아주 순한 양처럼 된다고 하는 이유가 죽음도 받아들이고 나면 죽음이 괴로움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모든 괴로움은 내 스스로 생사법 내 목전에서 내 눈앞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들 중에 특정한 것을 쥐고 집착하고 ‘이렇게 돼야 돼’라고 고집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그것이 나의 발목을 잡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짜는 뭔가? 실재(實在)는 뭘까요? 너무나도 단순한 겁니다 너무나도... 뭐랄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꿈꾸는 것처럼 진실은, 실재는, 진리는그렇게 놀랍고 신비로운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眞理), 실재(實在), 진실(眞實)은 바로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어려운 말 쓸 필요도 없이 삶에서 진짜, 진짜는 뭐예요?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 이렇게 드러나 있는 이거밖에 없잖아요. 생각은 전부 다 허상(虛想), 실체가 없는 허망한 망상, 환상입니다. 집에 뭐가 있을 거야. 집에 가면 내가 어제 만들어놓은 뭐가 있고. 저녁 때 뭘 해야 되겠고. 남편은 어떻게 하고 있을 거고. 자식은 어떨 것이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건 그냥 생각일 뿐이지요. 지금 갑자기 지구가 멸망해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내 생각으로는 모르니다. 과거나 미래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생각은 전부가 다 과거 아니면 미래와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일으킨 생각은 100% 전부가 다 가짜입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만이 진실, 진리, 실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눈앞에 있는 '지금 이대로'. 내 눈에 보이는 '이것'. 해석하기 이전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것'에는 관심조차 없을 뿐 아니라, 항상 머릿속에 있는 상의 세계만 나를 충족시켜줍니다. 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 그래서 내가 추구하던 상의 세계가 현실로 되는 것. 그것만을 그 허상만을 좇는 버릇 때문에 이 아무 맛도 없고 냄새도 없고 밍밍한 그냥 말 그대로 평상심(平常心)이라고 하는, 이 아무것도 아닌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지금 하는 말을 여러분이 듣고 있다고 생각을 하시고. 또 여러분 인생을 여러분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숨 쉬는 거 여러분이 숨 쉬시나요? 여러분이 숨쉬기 위해서 애써야지 숨이 쉬어집니까? 내가 애쓸 필요가 전혀 없는데 숨이 제가 알아서 쉬고 있지요. 여러분이 숨 쉰 건가요? 숨이 제가 알아서 쉬고 있지요. 거기 내가 개입될 필요가 있습니까? ‘내가 했다’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냥 숨이 쉬어지고 있어요. 내가 애쓰지 않아도졸리면 희한하게 졸리면 자게 돼요. 그러니까 ‘내가 자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진짜 내가 자는 게 맞을까요? 졸리면 그냥 알아서 눈이 감겨집니다.
그래서 내가 잔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내가 자나요? 그냥 자집니다 저절로. 밥을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하나하나 계산해서 숟갈을 여기 끝까지 가는 것을 정확히 계산해서 먹지 않거든요. 딴 생각 하고 딴 얘기 하고 전화하고 TV를 보면서도 저절로 입안에 착착 아주 착륙을 제대로 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내가 조작하지 않아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신기하게도 알아서 찾아오고 있어요. 들숨 날숨도 알아서 쉬어지고. 밥도 알아서 먹고. 화장실 가고 싶을 때 알아서 가고. 모든 것이 저절로, 저절로 무위법(無爲法)으로서 하게 됩니다. 무위법 거기 내가 개입될 뭔가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눈앞 텅~빈 이 자리에 그냥 왔다가 가거든요. 여러분 아들딸? 아들, 딸이 실제 있습니까? 실제 있는 건 뭐만 있어요? 지금, '지금 여기 이것'만 있어요. 지금 아들, 딸이 있어요? 없어요? 아들, 딸은 내가 아들, 딸에 대해서 생각할 때 아들, 딸의 이미지가 딱 떠오르죠. 그죠. 내가 생각할 때만 떠오르는 이미지, 상으로 아들, 딸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그 아들, 딸은 실제 있는 게 아니라 상으로 있어요. 내 머릿속에 내 아들이라는 상을 그림 그린, 그러니까 20살인 아들이 20년 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을 떠올리는 그 순간 아들이 태어납니다. 왜? 언제나 눈앞, 목전만이 진실한 당처(當處)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있는 거, 다른 시간에 있는 거, 그거 진실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만 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괴로움은 항상 언제 있는 거예요? 과거나 미래와 연동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근심. ‘자식이 이렇게 되면 어쩌지’ ‘남편이 이렇게 되면 어쩌지’ ‘내가 나중에 아프면 어쩌지’ 하는 오만가지 걱정이 전부 다 생각이 만든 허망한 상, 허상(虛想)이지요. 그 허상을 믿을 필요가 없고. 그 허상을 좇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허상을 따라가면서 울고 웃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진실(眞實)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이것'밖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이것'밖에 없거든요. 제가 '이것'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은 경험하곤 있지만 이 경험을 내 생각으로 해석해서 경험하는 것 말고 해석하기 이전에 날것으로 경험. 맨 느낌으로서의 느낌. 그 어떤 해석과 판단에 들어가기 이전에 그저 이 생생한 경험. 이건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좋거나 나쁜 느낌도 없고. 아무런 맛이 없어요.
내가 듣고 ‘설법을 내가 듣지’ ‘내 인생을 내가 살지’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살아야지’ 그러니까 나라는 아상(我相)이 생기고 아상이 생기면 열심히 살아야 할 내가 생기고, 열심히 해야 될 뭔가가 생기고, 열심히 해야 될 추구해야 될 뭔가가 생겨서 삶이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진실(眞實)은 나라는 자아, 아상(我相)도 실체가 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이 몸뚱아리 이것도 하나의 경계, 하나의 대상이에요.「반야심경」에도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개내지’ ‘무의식계’ 오온개공이라는 말이 ’이 존재는 실제 공(空)하다’라는 말입니다. 차차 이제 공부를 하겠지만. 실제 공(空)한 것을 진짜라고 착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인생은 그 허망한 허상을 쥐고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면서 그것과 싸우면서 ‘인생은 괴로워’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장 10분 후에 괴로울 거라고 할지라도 그 10분 후에 괴로울 예정이니까, 지금 괴로운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은 아무런 일이 없어요. 이 설법을 들을 때 ‘이 듣는 게 나다’ ‘내가 듣고 있다’ 그렇게 하면 내 맘대로 들을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얘기하는 것을 지금부터는 듣지 말아 보세요. 5 분 동안 제가 하는 얘기를 절대 들으면 안 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절대 들으시면 안 되고 귀를 막아보란 말이지요. 그런다고 해서 막아지지가 않습니다. 들려요. ‘내가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듣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가 듣는다’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내가 듣는 게 아닙니다. ‘눈이 본다’라고 여기잖아요. 눈이 보는 걸까요? 눈이 보면 눈앞에 보이는 건 다 봐야 되잖아요. 다 봅니까? 학교 운동장에 가면 그 아이들 몇 백 명이 뛰어노는데 그 몇 백 명이 눈에 다 보입니까? 내 자식만 눈에 확 들어오지요. 내가 의식을 가지고 붙잡은 대상만 내 눈에 딱 띄는 겁니다.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 그 하나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는 대상으로 둘로 나누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눈이 눈을 볼 수 있습니까? 눈이 눈을 볼 수 없어요. 그런데 눈이 바깥에 많은 대상을 봄으로써 ‘아, 이게 눈이 작용하고 있구나’ ‘여기 눈이 있구나’라는 걸 그냥 확인할 수는 있지요. 눈이 있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눈이 눈은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 소리를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내가 듣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귀가 듣는 게 아닙니다. 무안이비설신의라 했잖아요. 이 귀가 듣는 게 아니고 의식이 듣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리를 듣고 있어요. 뭔지 보이진 않지만 알 순 없지만 소리를 듣고 있는 무언가가 확실하게 있습니다. 이건 확실해요.
아까 생각으로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아버지’ 하면 아버지 그림이 딱 그려졌다가 딱 사라졌어요. 어디서 생겨나고 어디서 사라진지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그 아버지 그림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진 모르겠는데, 아버지의 그림을 그리던 사과의 그림을 그리던 다보탑의 그림을 그리던, 그림의 내용물은 상관이 없고 뭔가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그 작용이 일어났어요. 그것은 확실하지요. 이 소리를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듣는다 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지 분별해서 이걸 알 필요가 없단 말이지요. 소리를 듣는다,라는 그 자체가 듣고 있는 뭔가가 있다,라는 걸 확인시켜주고 있는 거지요. 지금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 자체가 내가 지금 보고 있다, 라는 그 사실. 보는 대상을 쫓아가서 바깥을 쳐다보면 이게 죽비가 보이잖아요. 이 보고 있는 바깥 대상의 죽비를 보지 말고 제가 이렇게 죽비를 들든, 이렇게 컵을 들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깥 대상은 우린 관심 밖이니까.
여러분들의 관심은 이 컵에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이걸 보고 바깥을 향해 좇아간다. 이런 표현을 써요. 바깥을 향해 부처를 좇아가선 안 되고. 회광반조(廻光返照) 하라는 말이 뭐냐면. 이게 보일 때 이게 죽비냐 아니냐 뭐냐 이걸 보라는 것이 아니라 이걸 보는 놈이 지금 있으니까 보고 있어요. 보고 있는 작용이 나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라는 그 사실은 확실한 사실이거든요. 그 사실을 자각하라는 것이거든요. 바깥을 좇아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이것을 보는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이걸' 뭐 이 자리라고 말하든, 보는 놈이라고 말하든, 뭐라고 말해도 되고 뭐라고 얘기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 뭔가가 있습니다. 뭔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렇다고 '이걸' “크다. 작다,”라고 얘기할 수가 없어요. “네 거다. 내 거다,”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노란색인지 파란색인지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 생멸법, 인연법, 인과법, 연기법은 전부 다 허상(虛像)입니다. 허상. 그래서 그 허상을 좇아갈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허상을 좇아갑니다.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소리를 듣는 ‘여러분이 회광반조해서 듣고 있다’라는 그 자각 자체 그것이 진정한 여러분이거든요. 왜? 이 소리는 왔다 가는 거니까. 생멸법이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소리를 듣는 그 자리는 왔다가 갑니까? 여러분이 집중해야지만 들을 수 있어요? 집중 안 해도 들려요. 애써야지 들리나요? 아닙니다. 무위법입니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소리가 들려요. 아무런 힘쓸 필요도 없고, 애쓸 필요도 없고. 저절로 소리가 들려요. 힘쓰고 인생을 고리타분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저절로 살게 돼요.
여러분 인생에 등장하는 그 모든 것들에 그 모든 생멸법에 시비를 걸 필요가 없어요. 그냥 그것은 전부가 다 등장했다 퇴장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들일 뿐이죠. 관심 가져야 될 유일한 것은 왔다가 가는 것 생멸법(生滅法)이 아니라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입니다. 불생불멸법 이걸 주인공 자리라고 표현을 합니다. 나의 본래 자리, 본성 자리라고 말합니다. 나의 본래 자리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나의 본래 자리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드러났다 사라지도록 텅~빈 공간(空間)으로만 그냥 이렇게 있어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여러분 눈앞에서 소리가 등장하고 사라졌잖아요. 눈앞에서 목전에서 삶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삶에다가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이라고’ 해석하는 건 분별하는 생각이 하는 거지요. 생각을 그렇게 좇아가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에서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봐줄 뿐. 알아차릴 뿐. 해석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 무엇도 좇아가서 거기에 울고 웃고 할 뭔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관심 가질 유일한 것은 내 바깥에 있는 수없이 많은 대상 경계를 좇아갈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확인하는 눈앞, 지금 여기 이 자리, 본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와서, 자기에게로 돌아와서, 소리가 등장하고 퇴장하고, 냄새가 드러났다가 사라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에 있는 겁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건 아무 상관 없습니다. 생각을 없애야 되는 게 수행이 아닙니다. ‘생각이 등장하고 사라지는구나’ ‘이 허망한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구나’ 어디서 이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그 바탕, 본래 자리, 세상 모든 것들이 등장했다 퇴장하는 그 자리. 그 본처, 당처로 돌아가는 것이 반본환원(返本還源)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등장하면 퇴장하는 곳이 있고. 등장하려면 어딘가에 등장한 곳이 있어야 되잖아요. 어딘가가 있어야 되잖아요. 생각이 일어나려면 어딘가에서 생각이 일어나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어딘가가 ‘생각이야’ ‘뇌야’ ‘뇌하수체야 뭐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하면 그건 망상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하는, 여러분을 숨 쉬게 하는, 들숨 날숨이 저절로 일어나게 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이렇게 순환하고 움직이게 하는, 수많은 차가 왔다 갔다 하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 모든 걸 움직이게 하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는, 이 모든 생멸법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도록 허용해주는 '그것'이 진실, 실재, 진리이지, 그것만이 진짜지 생겨나고 사라지는 내용물은 진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실, 실재, 진리 위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내용물, 생멸법에 속아서 내용물, 생멸법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고 울고 웃고 하는 일이 없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진실, 실재, 진리 위에 생겨났다 사라지는 내용물, 생멸법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현실에서 늘 스스로를 이렇게 관찰하면서 ‘아, 허상을 좇아가고 있다’라는 것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이렇게 자신의 공부가 익어가고 그렇게 되시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박수
<법상스님의 반야심경과 선(禪) 공부 녹취(대원정사아카데미-19.3.04)-2> by 하이얀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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